191
로블롭 내부, 성벽 부근.
스으윽...
"너 그렇게 날뛰더니. 괜찮아진 거야?"
"어어 괜찮아. 조금 멍한 거 빼고는. 중앙에서 보내준 치료제들 먹으니 괜찮네."
멍하니 수도, 로블롭과 바깥을 구분하는 거대한 성벽 부근에 서 있던 사내 하나가 주변의 동료 말에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런 상대를 보며 동료가 끌끌 혀를 찼다.
그렇게 사방을 박살 낼 것처럼, 술 취한 것마냥 날뛰던 건 언제고.
중앙에서 높으신 양반들이 시찰 겸 나오자마자 그새 얌전해졌다.
요즘 저런 놈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때를 떠올린 동료가 슬쩍 식은땀을 흘렸다.
"난리도 아니었지. 뭐 그리 강했는지."
옆, 부서진 구조물의 잔해를 보며 동료가 그날, 날뛰던 녀석들을 떠올렸다.
흉폭함, 괴력, 넘치는 체력이 어우러져 사방팔방을 묵사발 내던 놈들을.
심지어 한낱 평범한 세무관에 불과하던 녀석을 제압하는데, 나름 방위대 역할을 하던 자신도 엄두가 안 날 지경이었다.
그런 놈들이 수천, 수만 이었다.
저벅.
'하여간 높으신 양반들이 대단하긴 대단해. 그런 것들도 단번에 제압하고. 그치들도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멍하니 벽만 쳐다보고 있는 사내에게서 눈을 뗀 동료가 그날,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던 고위층 기사들을 떠올리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할 일을 하러 도시 다른 방향을 향했다.
**
도시 외곽, 고철 지대.
"칸헬. 요청드립니다. 이제 제 역할을 해주십시오."
"엉?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그리고 이 정도면 엄청 잘하고 있지 않나?"
"..."
천막 안, 의자에 앉아 하품을 하는 강태석의 말에 찾아온 카르멘이 작게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잘하고 있다면 잘하고는 있다.
강태석이 데려온 두 명의 소년 소녀를 보았을 때 자신조차 놀랐으니까!
두터운 혈체 위에 강대한 뇌종의 씨앗을 피워낸 소년.
그리고 기절했지만, 그보다 더 재능이 넘쳐 보이는 소녀.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주친 건 운이지만 알아보고 개화시킨 건 실력이었다.
둘이 자신들, 적통 파벌 측으로 합류하게 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는 한층 더 이들을 내세워야 한다는 무게감이 실렸다.
하나일 땐 픽 죽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이로써 스페어에 가까운 패가 생겼으니 말이다.
유력 세가들 입장에선 여차할 경우 칸헬과 카인, 둘을 경쟁시킬 수도 있으니 권력이 너무 커지는 걸 막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카르멘이 불만이 있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칸헬, 이자는 분명 지금보다 더욱 잘할 수 있으면서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스윽.
주변을 둘러보니 천막 안에는 자신과 칸헬, 단 둘뿐이었다.
아까 전 마주친 그라함마저 바쁜지 어딘가로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카르멘이 고개 숙여 칸헬의 귓가에 속삭였다.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당신은 복수하고 싶지도 않아요? 당신을 쫓아낸 녀석들이 저 바다 너머에서 당신의 왕좌를 꿰차고 무시무시하게 세력을 키우고 있을 텐데? 이곳 뇌종은 당신의 발판이 되어줄 수도 있는 장소란 말입니다."
카르멘이 맨 처음, 칸헬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쳤다.
자신들이 무슨 산속에 박혀 수련만 하던 적통 후계 은거 기인을 데려온 것이 아니다.
칸헬은 명백히 배신을 당해 쫓겨난 자였다.
그렇다면 마음속에 복수심, 혹은 자신을 추적할지 모르는 이들에 대한 경계심이라도 있을 법하다.
그리고 그 동기가 지금 자신들이 바라는, 칸헬이 좀 더 열심히 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칸헬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고 이곳의 세력을 규합한다면 자신들 적통 파벌 입장에서도 좋지만, 무엇보다 칸헬 본인에게 가장 좋다.
뭉쳐진 뇌종이 섣불리 칸헬의 복수심을 위한 전쟁의 도구로서 일해 주진 않겠지만, 적어도 자신들의 새로운 왕이자 주인을 보호하기라도 할 것 아닌가?
한데 뭐가 그리 여유로운지 칸헬은 그저 유유자적이다.
가끔 자신이 할 일만 하며 구석, 쓸데없이 범죄자 조직이나 박살 내고 있을 뿐이다.
물론 금속섬을 되돌려놓은 공로야 인정하지만 말이다.
스윽.
"칸헬.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은 저희나 그라함같은 자가 해도 되는 일입니다. 군주나 우두머리가 할 일이 아니라고요."
그 말에 의자에 반쯤 누워 휴식을 취하던 강태석이 스륵 몸을 일으켰다.
뭔가를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복수에 별로 관심 없는데.'
강태석이 뭔가 대답을 기대하듯 눈을 똑바로 뜬 카르멘을 바라보았다.
뇌종의 통일, 혹은 저 너머 아너스빌에 대한 복수.
사실 둘 모두 커다란 관심이 없다.
콜로니의 대통합에는 조금 관심이 가긴 했지만 그뿐이다.
사실 금속섬에서의 전투 이후로 강태석은 서서히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3번, 4번, 5번.
구원, 방랑, 화신.
투쟁과 괴력의 길.
이 대지의 모든 것들과 모든 생명은 그 과정에 주어지는 발판과 작은 만족에 불과하다.
지금 자신은 그 작은 만족에 취해 살짝 누워있는 중이고, 굳이 이곳에서 건국을 하느니 정치싸움을 하느니에 별로 관심 없다는 뜻이다.
사실 그렇게 놀기에 이곳은 너무 작다.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강태석이 카르멘을 보고 웃으며 되물었다.
"너희가 해도 되는 일이라고 하는데 제대로 하고 있지는 않잖아. 그 녀석들 잡았어? 꼬리?"
"..."
칸헬의 말에 카르멘이 인상을 찌푸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꼬리는 무슨.
"이번 사태는 그냥 흘러들어온 바깥 녀석들이 자신들이 보유한 미약을 팔아넘기려는 것 정도입니다. 소수의 공급자 녀석들이 블랙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세력을 확보하려고 한. 이번에 저희들이 그걸 모두 분쇄했고요."
카르멘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분주히 움직이는 천막 바깥의 인원들을 바라보았다.
붉은 앰풀이 뿌려진 후 잠시 홍역이 지나간 로블롭.
미약에 미쳐 날뛰는 수도 내외의 난민들도 있었고 체포 과정에서 확보한 물량을 나눠달라고 노골적으로 압력을 넣는 유력가의 누군가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태는 진화되었고 유력가도 이내 스스로 자정 작용을 마쳤으며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 사태를 안정화시켰다.
이미 이런 일은 수십 번, 수백 번 넘게 겪어온 이들이다.
미약 사건 정도로 난리 칠 필요 없다는 뜻이다.
칸헬이 말하는 주동자, 꼬리 녀석들은 아직 잡지는 못했지만 잡는 건 시간문제일뿐더러 사실 그렇게까지 열심히 쫓을 이유조차 없다.
상층부에서도 적당히 안정시키고 블랙네트워크의 물자를 모조리 압수했으면 이쯤에서 인력 낭비하지 말고 마무리 지으라는 느낌이었다.
사실상 원래 목적인, 빼돌려지려던 물자를 모조리 압수했으니 말이다.
'... 그냥 그릇이 이 정도인 건가. 실망이네.'
스윽.
숙였던 고개를 핀 카르멘이 무덤덤한 눈으로 칸헬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렇게 되면 칸헬보다 오히려 쓸만한 건 카인과 에멜이라는 소년소녀이다.
카인은 아직 어리기에 컨트롤하기도 쉽고 꿈과 야망도 적당히 있으며 무엇보다 에멜이라는, 놓칠 수 없는 약점이 있다.
중심축으로 필요한 게 적통 후계라는 타이틀이라면, 칸헬보다는 카인, 그 소년이 훨씬 낫다는 의미다.
실제로 카인은 지금도 맹렬히 스스로의 수련에 집중하며 실력을 늘리려 하고있고 말이다.
그 속도가 가히 일취월장이다.
반면 눈앞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상대는...
"... 쉬고 싶으신데 방해했나 보군요. 가보지요. 편한 밤 보내십시오."
그러며 천막 밖으로 나간 카르멘은 그대로 뒤도 안 돌아보고 천막 밖, 자신들의 임시 진지 쪽으로 향했다.
소녀의 치료와 소년의 수련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을 자신의 숙소 쪽으로.
그리고 남겨진 자리.
스르륵...
"미움받고 계신 모양이군요. 이참에 저희 쪽으로 아예 옮기시는 게?"
"너희도 뭐가 다르다고. 그나저나 시킨 건 잘했어?"
"성공은 했습니다. 피해가 엄청났던 게 문제지만."
피투성이가 된 채 카르멘이 사라진 천막 입구의 반대쪽에서 스륵 나타난 그라함이 얼굴의 피와 상처를 매만지며 말했다.
말 그대로 성공하기는 했다.
칸헬이 말한, 꼬리 중 한 놈의 포획에 말이다.
그 대가로 자신들 암무대의 3개 조가 전멸해버리고 말았지만.
그야말로 엄청난 피해였다.
하지만 그러던가 말던가 자리에서 일어난 강태석이 그라함을 보며 웃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빛은 좀 깎아 줄게. 너희가 내 뒤통수에 대놓고 포탄을 갈겼던 거 말이야."
"..."
그라함이 침묵을 지켰다.
금속섬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엮어 넣은 주제에 뒤통수에 포탄을 갈겼으니 할 말이 없다.
그게 지금 자신이 칸헬, 이자가 말하는 걸 들어주고 있는 이유였다.
"가시죠. 잡아 뒀으니."
이에 고개를 꾸벅 숙인 그라함이 앞장서 천막 밖, 어딘가로 스르륵 향했다.
**
지하, 그라함 휘하 암무대 외부 지부 중 하나.
끼익.
"진짜 비밀조직 같은 느낌이네."
철판으로 된 복도를 지나 삐그덕거리는 지하시설 아래로 들어온 강태석이 주변을 바라보았다.
제법 긴 복도, 작은 회색 방들.
사방에는 급조한 것처럼 보이는 조명 장치들이 벽면에 붙어 삐걱거리는 중이었다.
그런 강태석의 말에 안내하던 그라함이 덤덤히 말했다.
"원래는 조명 시설도 없었지요. 수도 근방에서는 에너지를 아예 쓸 수 없었으니. 최근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문제가 풀렸고 덕분에 인프라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지만."
그러며 그라함이 강태석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 갑작스런 변화 또한 이 작자가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뭐?"
"아닙니다. 도착했습니다."
끼익.
그라함이 문을 열자 방 안쪽에 서 있던 두 암무대원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면으로 보이는 건 철제 의자, 정체불명의 금속 봉인구에 철저하게 얽어 메인 한 여인이었다.
"어머. 왔어?"
"..."
도망치던 중 잡혀 묶인 주제에도 뭐가 그리 여유로운지 싱글거리는 여인을 본 그라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년의 손에 죽은 대원 숫자를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고문을 가해 저 미소를 없애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 두 가지다.
첫 번째, 칸헬이 부탁한 것도 있거니와.
두 번째, 왠지 고문을 가해도 저 미소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여간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대화해 보시지요. 원하시면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음. 부탁하지."
강태석이 말하자 그라함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암무대원을 데리고 철문 밖으로 나갔다.
이제 남은 건 강태석과 여인, 단 둘뿐이었다.
철컹!
거친 굉음과 함께 방의 문이 닫히는 것을 본 강태석이 손을 가볍게 흔들어 검기를 펼쳐낸 뒤 구형으로 뻗쳐냈다.
순식간에 방 안쪽을 한번 휘감는 마력의 장벽, 이를 통해 감시나 도청 또한 격리한다.
끼익.
구석에 있던 의자를 끌고 와 앉은 강태석이 숨을 후 내쉬며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목적이 뭐야?"
강태석이 손가락을 빙글거리며 여인을 바라보았다.
순순히 대답 안 해도 상관없다.
방법이야 많으니.
키리링...
그런 강태석의 손끝에 칠채영창의 유릿가루가 파편처럼 모여 작은 구슬을 이룬 채 뱅글뱅글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