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192화 (19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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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채영창.

정신과 영혼을 물들이는 저주의 집합체.

가루가 되어 혈관을 파고들면 그 자체로 사람이 망가지고 줄줄이 불게 된다.

물론 정확한 내용이 정연하게 흘러나오지 않고 파편마냥 부스러져 나오는 것이기에 명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앞뒤 상황을 판단하는 데는 그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제 입으로 말해주는 게 베스트지만 안되면 이거라도 쓰면 그만이다.

키잉...

손끝의 구슬을 이리저리 돌리는 강태석의 모습에 묶인 채 목만 내밀고 있던 여인의 표정이 싹 굳었다.

무언가 감이 잡혔기 때문이다.

이윽고.

"너구나. 금속섬을 박살 냈다는 게."

"유명해졌나 보네."

"우리들 사이에선 유명하지. 네가 그 소주와 8인방들에게서 도망쳤다는 것도."

여인이 이죽거리며 대답했다.

초반에 자신들이 이곳에 임무를 위해 급파되었던 때라면 모를까, 이제는 자신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쫘악 퍼졌다.

소주에게 도망친 녀석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자신들을 사냥하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대계에는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여 머릿속에 넣어 두고만 있었는데, 이런 곳에서 마주치다니.

"대체 어디 있다 지금 나타난 거야? 우리는 네가 당연히 수도 안에 있을 줄 알고 암살해버리려고 양 파벌 측 유력가를 싹 뒤졌구만."

덕분에 애먼 목숨만 몇 날아갔다.

그런 여인의 말에 강태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놈들이 어디서 허튼짓 하리란 건 알았지만, 그런 것까지 시도했을 줄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은 말 돌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헛소리하지 말고 본론만 말해. 저 빨간 액체가 뭔지. 붙잡힌 악당의 도리를 다하란 말이지."

나불나불 떠들어대라는 뜻이었다.

그런 강태석의 말이 기가 막혔는지 빤히 바라보던 여인이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정확히 말하면 꽁꽁 묶여 있었기에 으쓱하려는 시도를 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말하지. 이건 성수다."

"성수?"

"그래. 흡혈귀 일족들의 성수."

"...?"

강태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난데없는 흡혈귀.

누가 말하면 놀리냐고 했겠지만, 강태석은 여인의 말이 무엇인지 알아들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흡혈귀 일족이 등장할 키워드는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알파, 베타, 감마, 델타.

네 명의 이벤트 보스 중 하나인 흡혈귀왕.

한데 지금쯤 열심히 칠국연합들의 영역을 휩쓸고 있을 녀석의 이름이 갑자기 여기서?

무엇보다...

"너희가 무슨 재주로 그걸 구해?"

강태석이 여인을 보며 턱을 매만졌다.

성수라고 하지만 저건 흡혈귀 일족들의 체액이자 부산물이다.

더불어 녀석들 종족을 다른 아인종들 사이에서 유지시켜 주는 핵심 요소들 중 하나다.

한데 그걸 무슨 재주로 안에 갇혀있는 녀석들이, 그것도 저런 상당량을 구했단 말인가?

이에 여인이 씨익 웃었다.

"일단 이걸 풀어주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주지."

"..."

키이잉...

"... 알았어. 그냥 이야기한다고."

손끝의 흉악한 광채를 뿜어내는 유리구슬을 들이대는 상대의 모습에 여인이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자신들이 어둠 쪽 자락에 얹혀 있어 그런지 더욱 자세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 맑고 투명해 보이는 유릿가루 안에 갇힌 섬뜩한 귀기와 저주의 기운을.

정체가 뭔진 모르겠지만 들이마시는 순간 아마 끝장일 것이다.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고 정신이 으깨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들을 줄줄이 토해내게 될 것 같았다.

꿀꺽.

잠시 침을 삼킨 여인이 입술을 적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간단해. 흡혈귀왕이 죽었거든."

"..."

"죽인 쪽도 거의 박살이 났지만... 어찌 되었건 죽이긴 죽였지. 그리고 그 생존자들이 우리에게 도망쳐왔고."

여인이 웃었다.

그래, 흡혈귀왕이라는 존재가 죽었다.

저 멀리, 은빛의 바다 건너 어딘가에서 칠국 중 하나인 부르탄과의 전력을 다한 대격돌 끝에.

그 결과 부르탄도 거의 멸망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어떻게든 생존하여 이곳, 콜로니에 도착했고 자신들과 연이 닿았다.

소주는 사람을 보내 격전지를 살피고 흔적을 수습한 뒤, 돌아와 간단하게 자신들에게 말했다.

<바다 건너가서 이걸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뿌려라.>

라고.

"뭘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야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

히죽거리는 여인의 말에 강태석의 표정이 굳었다.

**

은빛 바다 건너, 어딘가.

콰르르르릉...

바다에 반쯤 추락한 거대한 강철의 도시가 있었다.

원래대로였다면 공중에 부웅 떠서 유구한 위상을 자랑했을 위대한 건축물인 방위 요새, <센트라>.

하지만 군데군데 형편없이 파손되어 있는 강철 도시의 문제점은 그뿐만이 아니어 보였다.

온 도시를 뒤덮은 정체불명의 점막들, 그리고 격전 끝에 박살 난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근육과 살점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둥지 모양의 원형 구조물들.

후우우웅...

이 모든 것을 멀리, 부르탄의 자랑인 <고철선>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너스빌을 향해 옆의 사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흡혈귀왕이라는 놈이 우리 목표였던 <공중요새>를 점령해 스스로의 둥지로 삼으려고 했지. 막긴 했지만, 우리도 거의 망해버렸고."

부르탄의 아홉 주인 중 하나였던 사내, 오른이 눈앞의 작은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노 기계화를 마쳐 키가 3m에 달하는 자신에 비하면 너무나 작고 가냘픈 체구였다.

하지만 이 여인이 자신들의 새로운 동맹자다.

그리고 그런 오른의 말을 듣던 아너스빌이 갸름하게 눈을 뜨고 추락한 문명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비록 패퇴하긴 했지만 부르탄이라는 작자들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고철 덩어리 배들이나 타고 다니며 범죄자 녀석들이 주인이니 왕이니 역할 놀이나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설마 방위 요새를 다시 되살려 장벽을 넘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쿠구구구...

저 너머, 끝도 없이 펼쳐진 은빛 바다의 북쪽 수평선 끝으로 아스라이 보이는 높은 은빛 해일의 장벽을 바라보던 아너스빌이 다시 방위 요새를 바라보았다.

부르탄과 흡혈귀왕이 충돌한 이유는 간단했다.

부르탄은 자신들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저 방위 요새를 고치고 있었고, 흡혈귀왕은 그런 방위 요새를 손에 넣기 위해 자신이 키운 전 병력을 이끌고 침식을 시작한 것이다.

고쳐지던 방위 요새의 절반이 녀석들에게 <침식>당할 만큼 전쟁은 격렬했지만, 어찌 되었건 부르탄은 이겼다.

흡혈귀왕은 죽이긴 했지만 아홉 중 일곱 주인이 죽어버린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바다 건너 콜로니의 아너스빌에게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른 칠국들에게 가면 고스란히 먹혀버리거나 살해당할 테니 말이다.

'... 씁쓸하군. 그렇게 발버둥 쳤건만. 죽 쒀서 개 준 꼴이라니.'

키이잉...

망가진 기계 다리를 삐걱거리며 선 사내, 오른이 지금도 열심히 움직이며 방위 요새 전체를 헤집고 있는 아너스빌의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이 합류하고 소식을 듣자마자 바다를 건너온 수천 명의 조사단들.

녀석들은 지금 열심히 방위 요새의 남은 흡혈귀들을 정화하며 방위 요새의 모든 것들을 쓸어 담는 중이었다.

자신들이 투자한 자원도, 병기도, 그리고 저 안에 잠들어있던 온갖 정보와 비밀들도 말이다.

이제는 아너스빌이라는 여인의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쉬움도 잠시.

'뭐. 이제부터 잘하면 되니까. 빈틈 보이면 치고 내가 통째로 먹어도 되고.'

눈앞, 등 돌린 자그마한 여인을 음흉한 눈으로 바라보던 오른이 철컹 한발 걸어가 옆으로 서며 물었다.

"그런데 저 체액들은 왜 저리 퍼다 나르는 거야? 저거 엄청 골치 아픈 물건인데 퍼지면."

키이잉...

키킹.

개조된 사내의 눈에 수 킬로미터 너머, 위성 요새의 모든 전경이 선명하게 보였다.

박살 난 거대한 둥지들 안쪽.

방진복을 입은 채 고여있는 선명한 핏빛 액체들을 열심히 시험관에 담아 퍼 나르고 있는 아너스빌의 수하들을 바라보며 사내가 물었다.

자신들이 싸워봐서 안다.

제 놈들이 성수라고 부르는 저 체액들이 퍼지면 얼마나 골치 아픈지.

그런 사내, 오른의 말에.

"쓸데가 있으니까 그런 거다."

아너스빌이 작게 웃으며 바다 건너, 자신이 출발했던 거대한 원통형의 콜로니 방향을 바라보았다.

**

흡혈귀들의 성수.

이를 들은 순간 강태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녀석들의 <군락>을 만들어내는 가장 큰 영양 요소다.

적은 양이라면 모를까 흡혈귀왕을 죽이고 그 박살 난 군락들마저 점령했다면 대단히 농도 짙은 체액들 또한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여기에 뿌려대던 것이라면...

그런 강태석을 향해 들려오는 웃음소리.

"원래 알지? 다 떠들어댈 때면 이미 다 진행된 거라 상관없어서 떠들어 대는 거."

묶인 여인의 말과 동시에.

쿠르르르릉...

수도 밖, 지하 전체를 작게 떨어 울리는 진동에 강태석의 고개가 위로 휙 돌아갔다.

심상치 않은 규모다.

끼이익.

철컥.

"끝나셨습니까? 한데 갑자기 무슨..."

바깥에 서 있던, 진동에 놀란 그라함의 질문에 강태석이 한숨을 푸 쉬었다.

"끝나긴 했는데... 아마 또 시작인 거 같기도 하고."

"?"

"일단 따라와 봐."

그라함을 향해 짧게 내뱉은 강태석이 성큼성큼 복도를 지나쳐 자신이 내려왔던 지상으로 향했다.

그렇게 가려져 있던 비상 출입구를 열고 나오자 강태석의 눈앞, 지상으로 드러난 전경은...

쿠구구구구...

“어어어어?”

“꺄아아아아아아악!”

"환장하겠네."

저 멀리.

수도의 방벽을 중심으로 꾸물꾸물 돔 형태로 자라나며 수도 전체를 뒤덮고 있는 대한 근육과 살점들을 보며 강태석이 긴 숨을 내쉬었다.

**

수도, 성문 부근.

"...! 이게 또 무슨!"

콰르르르릉!

적통 후계가 성 바깥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호위들과 함께 성 밖으로 향하던 탈리만이 수도의 성벽을 중심으로 벌어진 기현상에 크게 놀랐다.

마치 뿌리가 자라듯, 아니 살점이 자라나듯.

기괴하게 생긴 촉수와 근육과 살점과 체액, 점막들이 모조리 뒤엉켜 뼈대마저 만들어내며 성벽을 중심으로 하늘 높이 자라나고 있었다.

구체의 형태로, 성의 안과 밖을 가로막으며!

그 기현상에 황급히 성벽 아래를 본 탈리만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딱딱하게 굳었다.

퍼어어어억!

퍼어어어어어어억!

감염된 것으로 보이던, 하지만 치료된 줄 알았기에 감시를 붙여놓고 일단 안정시켜 놓았던 난민과 거주민들.

녀석들이 성벽에 몸을 퍼억 퍼억 던져가며 온몸의 체액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럴수록 퍼져나가는 진한 피 냄새.

동시에 아래쪽에서 이를 집어삼키겠다는 듯 맹렬히 뿜어져 올라오는 거대한 체액과 촉수, 근육들.

저게 대체 어떻게 올라왔는지는 둘째 치고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대로 가면... 성안에 갇힌다는 것!

"달려라! 달려! 빨리!"

촉수에 의해 꾸물거리며 집어 삼켜지고 있는 성벽을 보며 탈리만이 옆의 호위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잠시 후.

터어어어어어엉!

터어어어어엉!

'제발... 제바아아아아아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안에 <갇히면> 끝장!

호위에게 업힌 채 질주하던 탈리만이 어느새 거의 집어 삼켜져 빛이 새어 들고 있는 성문 쪽을 보며 이를 꽈득 악물었다.

**

쿠구구구궁...

쿠우우우우웅!

“꿀럭...”

“구르르륵...”

“게에에에에에엑...”

"준비를... 열심히 했네."

<군락>.

눈앞, 어느새 완성되어 기괴한 소리를 토해내기 시작한 원형의 거대한 생체 구조물을 보며 강태석이 머리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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