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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르릉...!
강태석이 완성된 채 기괴한 소리를 토해내는 군락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흡혈귀왕이 살아있는 것보단 못하겠지만, 완성된 군락 또한 어지간한 세력으로는 공략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하다.
바깥쪽으로는 기괴한 향을 흩뿌리며 온갖 종류의 기계병기들을 마비시키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수많은 디버프에 걸린 채 사방에서 끊임없이 들이치는 흡혈귀의 병력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괜히 칠국 중 부르탄이 이를 공략하다가 망해버린 게 아닌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보기에 뇌종을 비롯한 열한 개 군세들은 바깥, 칠국연합들에 비하면 아무래도 한 수 아래이다.
이런 상황에서 흩어진 패잔병 신세의 이들을 끌고 군락 공략에 나선다?
아무리 봐도 타산에 맞지 않는 일이다.
'어차피 흡혈귀왕도 죽었다니까... 군락이 더 확장하거나 그럴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내버려 두면 될 거 같은데 적당히 기회 봐서 떠나자고 해야겠군.'
강태석이 눈앞, 쉴새 없이 서로의 주장을 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을 터전으로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지금 눈앞의 것과 싸우기에는 너무 큰 도박이다.
무엇보다 저 군락이라는 게 지금 당장은 위험해 보이지만, 아마 가만히 놔두면 스스로 붕괴할 것이다.
본능에 의해 자라났지만 이를 영도할 왕과 같은 존재가 없다면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빨아들이다가 이내 괴멸할 테니.
지나친 흉포함만을 갖춘 종의 최후란 으레 그런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떠올린 강태석의 마음속에 뭔가 찝찝한 감정이 생겨났다.
자신이 무언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느낌이었다.
'뭐지. 뭐였지.'
순간.
우당탕!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바깥, 잠깐의 소란과 함께 천막 문이 촤악 열리더니 온몸에 스파크를 휘감은 소년이 안으로 헐떡이며 들어왔다.
"허억... 허억... 큰일 났어요."
"?"
"제 동생이... 동생이 사라졌어요! 어디론가 가버렸다고요!"
카인이 등장한 순간.
"아..."
드디어 한 조각 퍼즐이 맞춰진 강태석이 그대로 이마를 짚었다.
**
난민 지대.
자박.
"...?"
주변을 헤집으며 다니던 난민 사내 중 하나가 저 멀리, 자신 쪽을 향해 다가오는 작은 체구의 누구가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내가 넝마를 걸친 상대를 빤히 바라본 이유는 하나.
모두가 성벽 쪽에서 도망치고 있는 지금, 상대는 자신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야 뭐 주워 먹을 게 없나 하여 주변을 뒤적거리고 있는 상황이지만, 상대의 모습을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순간.
후우우우웅!
스르르륵...
"엇..."
갑작스레 강하게 분 바람에 의해 넝마가 벗겨진 상대의 얼굴을 본 사내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토했다.
너저분한 천 쪼가리 아래 감춰져 있던 상대의 얼굴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아직은 어린, 그 미모가 미처 피어나지 못한 앳된 소녀.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설레고 기대된다.
갓 피어나는 중인데도 저 정도로 아름답다면, 다 자라서는 저 소녀는 대체 어느 정도의 미모를 가지게 될 것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것이 사내의 마음 한구석에 불을 질렀다.
불끈.
"후우... 그래. 이 맛에 이렇게 헤집고 다니는 거지."
허리춤, 호신용으로 차고 있던 칼의 손잡이를 매만진 사내가 자신은 무시하고 성벽을 향해 나풀나풀 걸어가고 있는 소녀를 쫓았다.
자신은 자신의 주제를 안다.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평생 가야 저런 소녀와 손끝의 인연조차 닿을 일이 없으리라.
비록 소녀는 연약하고 가냘파 보였지만, 그 미모만으로 능히 나라를 떨어 울릴 수 있을 것 같은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상대를 자신이 깔아뭉갤 수 있다?
그 쾌감을 어디다 비하겠는가?
훗날 소녀가 더욱더 높은 곳에 올라가게 된다면 그 당시의 쾌감은 몇 배가 되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지금 저 높은 곳에서 태양처럼 빛나고 있는 여인이 언젠가 예전, 자신의 배 아래 깔려 있었다는 저열한 기억과 더불어.
스윽.
생각을 마친 사내가 빠르게 소녀에게 접근해 뒤를 향했다.
누군가 발견하기 전 기절 시켜 깊숙한 곳으로 숨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내가 손에 들린 칼의 옆면으로 소녀의 뒤통수를 후려치려던 순간.
퍼어어억!
"끄으으윽..."
"잘됐네요. 마침 배고팠는데."
사내가 자신의 가슴팍을 뚫고 들어온 가냘픈 손과 상대의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번갈아 바라보았다.
벌레 하나도 못 죽일 것 같은 얼굴로 지독히도 잔혹하게 웃고 있었다.
심지어 그 움직임이 보이지조차 않았다.
이에 사내가 억울하다는 듯 뭐라 항변하려고 했지만 거기까지가 의식의 끝이었다.
퍼어어어억!
"끄륵..."
심장이 뽑혀 나간 사내는 그대로 쓰러졌다.
오물.
오물오물.
그렇게 뽑아낸 심장을 어울리지 않게 귀엽게 야금야금 한입씩 베어 문 소녀, 에멜이 자신의 머릿속에 휘도는 모든 기억들을 정리하듯 눈을 감았다.
소녀, 에멜의 기억.
동시에 저 멀리서 살해당한 흡혈귀왕이라는 존재의 기억.
붉은 액체가 자신의 몸으로 파고든 순간 알 수 있었다.
이 액체들은 죽어버린 왕 대신 새로이 종족을 계승할 적합한 존재를 찾고 있었다.
그 옛날, 전설적인 존재의 피를 짙게 이은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그에 부합하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일반 숙주들과는 달랐고, 귀족으로 태어난 이들과도 달랐다.
말하자면 자신은 그들보다도 한 차원 위의 존재였다.
그렇기에 소녀, 에멜은 이 흡혈귀라는 종족을 새로이 이끌 여왕의 씨앗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 완성을 위해 지금 눈앞, 만들어져 있는 거대한 둥지이자 알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직은 연약한 이 몸이 완전히 개화하려면... 튼실한 둥지와 수많은 재료들이 필요했으니까.
지금 이따위, 손에 들린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양이 말이다.
퉷.
"아우. 역시 맛은 없네요. 하등품이라 그런지."
몇 입 베어 물던 심장을 퉤 뱉어 버린 소녀, 에멜은 몸을 우득 푼 뒤 넝마를 훌렁 벗어 던져버리고 핏빛으로 변해버린 성벽과 그 위쪽, 드높게 뻗은 둥지의 핏빛 표면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제 들어갈 시간.
그리고 나올 때쯤... 세상은 완전히 변해버린 자신을 마주해야 하리라.
그렇게 뻗은 에멜의 손이 완전히 핏빛 표면에 닿은 순간.
쩌어어어어억!
살점과 근육, 기괴한 뼛조각들로 이루어진 군락의 외벽이 쩌억 갈라지며 소녀를 위한 입구를 만들어냈다.
꾸르르르르륵...
쿠우우우웅!
그렇게 소녀를 집어삼킨 핏빛 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굳건히 아로닫히며 원형의 형상을 유지하며 꿀럭대기 시작했다.
**
강태석 쪽, 임시 천막.
"그러니까... 지금 제 동생이 저 안으로 사라졌을 거라고요? 새로운 왕으로 발탁 받아?"
"아마도."
"무슨... 말도 안 되요. 무슨..."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소년 카인의 주변, 설명을 전해들은 베르트를 비롯한 모두가 더욱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강태석을 바라보았다.
흡혈귀들의 둥지란 것도 믿기 힘든데 여왕이라니?
저 너머, 그 강대한 칠국 중 하나를 멸망시킨 존재가 있는데 그와 비견되는 존재가 다시 이 안에서 태어난다고?
하지만 그 모든 말을 마친 강태석은 이제는 추측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왜냐하면, 그 지긋지긋한 상태창이 또다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상태였으니.
띠링!
<현재 여왕의 씨앗이 군락 안으로 진입하였습니다.>
<여왕의 1차 각성까지 남은 시간 : 71시간 58분 49초...>
<여왕은 빠른 시간 내에 30레벨까지 강해지며, 1차 각성이 완료되는 순간 군락 주변의 모든 흡혈귀 병종들이 세 단계 이상 강해집니다.>
<1차 각성이 완료되는 순간 군락에서는 특수한 병종들이 추가 생산되며, 내부의 영양액 통로들을 통해 체액과 성수들의 확장을 통한 콜로니 전체의 군락화가 진행됩니다.>
<콜로니 전체가 집어 삼켜지면 내부의 생명체는 온전히 군락에 녹아 흡수되며, 여왕의 2차 각성을 위한 재료로 사용됩니다.>
"..."
눈앞의 상태창을 본 강태석은 그냥 아예 눈을 감은 상태였다.
이래서는 도망간다는 선택지조차 없어진 상황이었으니.
여왕이 없을 때는 그냥 내버려 두면 저들끼리 서로 싸우고 집어삼키고 소화시키다 자멸할 살덩어리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여왕이란 중심축이 생긴 순간, 저 거대한 종의 포식자들은 오직 그 존재만을 위해 주변을 집어삼키며 끊임없이 확장한다.
내버려 두면 그냥 눈앞의 군락이 커지는 걸 넘어 체액이 콜로니 인프라를 따라 퍼지고 감염되어 콜로니 전체가 저 끈적이는 살덩어리로 뒤덮인다는 이야기다.
그때쯤 되면 콜로니 안의 생명체들은 모두 위장 안에 있는 소화될 먹잇감일 뿐이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
"싸워야 한다. 아직 저쪽도 병종들의 생산이 덜 됐을 거야. 내부의 생존자들도 저항하고 있을 것이고. 그러니 지금 쳐들어 가야 한다."
"저... 안으로 들어가자는 말이지?"
강태석의 말에 베르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고, 그건 그 주변에 서 있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 충성스런 카르멘과 그라함마저도!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드러난 기괴한 덩어리는 인세의 지옥을 포장한 것, 그 자체였다.
풍기는 분위기부터 위압감까지.
아무리 봐도 저 기괴한 껍질조차 안쪽의 내용물에 비하면 잘 갈무리된 포장지 수준에 불과했다.
저걸 열고 들어가는 순간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 초인인 그들에게도 여실히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한데 저걸 열어제끼고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고?
온갖 피와 체액, 사악함들이 형체를 이뤄 덮쳐올 곳으로?
목숨 귀한 줄 알고 공포를 아는 생명체라면, 누구라도 저 안으로 들어가는걸 꺼리는 게 정상이다.
그렇기에 천막 안에 있는 이들이 모두 강태석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껄끄러워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향해 강태석이 덤덤히 말했다.
"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잖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가봤자 기계병기들이 득시글거리는데. 이 C구역은 섬이나 다름없고. 저거 완성되고 안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 어차피 끝이야. 그 전에 해치워야 한다고."
"으음... 그건... 그건 그렇지만..."
베르트를 비롯한 혼란스러운 와중 살아남은 유력가의 우두머리들이 강태석의 말에 침을 삼켰다.
저 말이 사실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으니.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최대한 빨리 들이닥치는 게 유리하다.
하지만 그때.
"아하하하... 아하하! 도망칠 곳이 없긴 왜 없어."
"? 너 이놈. 감히 어느 안전에서 주둥아리를."
갑자기 웃어대기 시작하는, 사로잡았던 꼬리 중 하나였던 여인의 모습에 그라함이 눈썹을 치켜 떠올렸다.
이놈들이 체액을 뿌려 댔기에 혹시 아는 게 있을까 하여 구속한 채 참석 시켜 놓았는데, 이제까지는 입꾹 다물고 있더니 갑자기 웃어제끼다니.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여인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라함을 보며 웃었다.
"이상하지 않아? 왜 내가 사로잡혔는데도 이렇게 여유 있었는지?"
"..."
"다 이유가 있지. 바닷가 쪽으로 가봐.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을 거니까."
여인의 말에 그라함을 비롯한 모두가 천막 밖을 바라보았다.
뭐가 도착할 거란 말인가?
보이는 건 여전히 청명하게 뻗은, 길쭉한 수평선뿐인데?
그때.
부우우우우우웅!
"... 온다. 뭔가가."
수평선 너머에서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하는 희끄무레한 무언가들을 발견한 카르멘이 중얼거렸다.
웅혼한 소리를 토해내며 점점 커져가는 수십, 수백의 무언가들.
이윽고.
"배다."
"... 수송선이다. 누가 보낸 거지?"
서서히 해안가를 향해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수백 척의 거대한 배들을 보며 모여있던 이들이 믿기 힘들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체 누가 이렇게 타이밍에 맞춰 저런 대규모의 선박들을?
그런 사람들을 향해.
"우리의 소주께서 보내시는 거다."
여인이 강태석을 보며 시리도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