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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르르릉.

수백 척의 커다란 배들이 바다를 가르고 수평선을 지나 다가오는 것은 제법 장관이었다.

에너지 문제로 인해 수도 부근에 배가 몇 척 없었던 뇌종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대체 어느 쪽 세력이..."

말문을 삼키는 카르멘의 옆, 의기양양해진 여인이 자신의 구속구를 턱으로 툭툭 찍으며 말했다.

"내 동료들이 지금쯤 바닷가에 다 모여있을 거야. 한번 다들 가보는 건 어때?"

"..."

"아 그리고 이제 이것도 좀 풀어주는 거 어때?"

능글맞게 웃는 여인의 옆, 침묵을 지키던 그라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면 다들 한번 가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 말에 베르트를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불명의 상황에 바다를 건너온 수백 척의 배.

평소 같았으면 바로 경계해야 마땅했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또 의미가 달랐다.

저들의 말대로 도와주러 왔다면 더더욱.

잠시 후.

스륵.

강태석을 비롯한 채비를 갖춘 이들이 하나둘 씩 호위병들을 대동한 채 난민 지대를 가로질러 해안가를 향하기 시작했다.

**

“배다! 배!”

“으아아아아! 살았어!”

바닷가에 도달한 이들은 온 사방의 광경을 보며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로블롭의 재앙을 피해 바닷가로 우르르 몰려든 이들로 인해 사방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 정도면 예전, 난민들이 수도를 찾아 몰려들었을 때보다 한층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거기에 저 멀리서 배까지 다가오고 있으니 사람들은 무슨 바다에 뿌린 먹이를 쫓아 몰려드는 멸치떼마냥 우르르, 바다에 밀려 빠질 것처럼 몰려들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 어쩌다 이런 꼴까지 되었는지."

지켜보던 베르트마저 길게 한탄을 내뱉을 정도였다.

득실과 이해를 넘어 그래도 자신이 몸담고 있던 집단이 이 정도까지 내몰렸다는 게 기분 좋을 리가 없다.

그때.

저벅.

"상황이 상황이니 그럴 수도 있지요."

"네놈들..."

인파를 가르고 나타난 수십 명의 남녀를 본 카르멘이 저도 모르게 칼을 반사적으로 뽑아 들었다.

몇몇 낯익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체포 작전에서 자신 휘하, 수십 명의 특전대들을 베어 넘기고 도망간 꼬리 녀석들이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한없이 여유롭고 당당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런 카르멘을 스윽 막아선 강태석이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희가 대화까지 담당하는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배가 더이상 다가오진 않을 겁니다. 저희가 신호를 보내기 전까지는."

앞장 서 공손히 말하는 사내의 말대로.

부우우웅...

다가오던 수백 척의 배들은 어느새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멈춰서 더이상 해안가로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마치 너희들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지켜보겠다는 듯.

그런 배들을 보며 콧김을 흥 내뿜은 강태석이 사내를 보며 물었다.

"그래. 원하는 게 뭔데. 뭐 도와주기라도 하려고?"

뒤쪽, 꿈틀거리며 숨 쉬듯 박동하는 거대한 군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강태석의 말에 사내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런 쓸데없는 싸움을 하고 싶진 않습니다. 저희가 온건 오히려 그 반대 이유 때문이지요."

"반대?"

"그렇습니다. 반대. 저희는 당신들을 태워 가려고 온 겁니다. 저희 H 구역으로."

사내가 말을 내뱉은 순간 그제서야 유력가들 몇몇은 저 배들이 어디에서 건너온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상대들이 누구인지도 말이다.

H구역.

이제까지 미지의 위험한 공간으로 남아있던 대륙.

그리고 그곳에 자리를 잡은 외부의 잔존 생존자들과 범죄자 놈들.

그렇기에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새로 생긴 집단을 무시하고 있었으니까.

먹고 살기 힘든 가장 위험한 곳에, 군대도 없이 자리 잡은 신생 집단에 뒤섞인 범죄자 놈들.

한데 눈앞의 위용을 보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이 정도의 단기간에 저 정도의 거대한 수송 선단을 구축해냈다고?

"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팩토리라도 손에 넣은 거냐."

베르트가 믿기 힘들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다른 11권세 중 한 곳인 줄 알았지, H구역의 범죄자 놈들일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런 베르트를 향해 빙긋 웃은 사내가 그 뒤쪽, 웅성거리는 이들을 보며 말했다.

"저희 소주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적당한 <때>가 오면 구원 선단을 보낼 테니, 타고 오실 의향이 있는 분들은 모두 태우라고. 당신들이 가진 것들도 모두."

"... 너희들이 원하는 건 군대겠지."

"굳이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저희는 인재와 사람들도 대환영이니까요. 앞으로 사람은 많을수록 좋다고 하셨거든요."

그 말에 그라함과 카르멘을 비롯한 이들은 그제서야 이들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들의 야망은 그냥 범죄자 수준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뇌종의 <모든 것>을 꿀꺽 삼키려고 한 것이다.

쓸데없이 싸우고 대립할 적통 파벌과 신흥 파벌의 우두머리들은 수도와 함께 통째로 지워버리고, 실질적으로 필요한 수도 밖에 놓여진 군대와 국가는 모조리 노릴 계획이었다.

심지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모두 알 수 있었다.

이제 자신들에게 거부권은 없다는 것을.

남은 선택지는 둘 중 하나뿐이다.

이곳에 남아 옥쇄를 각오하고 수도로 돌격하여 수복하던가.

아니면 가진 것들을 모조리 챙겨 배를 타고 바다 건너, 안전한 곳으로 넘어가 재기를 노리던가.

당연히 옳은 답은 후자다.

하지만 모두가 이 막다른 상황을 반가워하는 건 아니었다.

"망할 놈들... 너희가 우리 수도를 이 꼴로 만들어 두고 손을 내밀겠다 이거냐?"

많은 가족과 가솔들을 잃은 한 유력가의 이를 가는 말에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뭐?"

"제가 알기로 이곳 사태는 당신들 아래 블랙네트워크가 뭔가 이상한 걸 뿌리다가 터진 것 아닙니까. 저희는 그저 우연히 지나가다가 <도와주러> 왔을 뿐이고."

"... 그딴 말도 안 되는 말장난을."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자 오히려 그 자리의 모두가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분명 이 모든 짓거리는 상대가 벌였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격차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그런 사실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선택해야 할 뿐이다.

받아들이고 떠날 것인지, 아니면 남을 것인지.

“이 더러운 배신자들이! 어딜 떠난다는 거야! 당연히 남아야지!”

“개죽음당하란 거냐? 미친 자식아!”

대부분의 의견이 갈리며 싸우고 있었지만, 무게추는 기울고 있었다.

피해를 많이 본 이들조차, 떠나는 쪽으로.

그도 그럴 것이 남은 것이라고 소중하지 않은 게 아니었으니.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카르멘이 칸헬, 강태석을 향해 물었다.

"떠나실 겁니까?"

이에 먼저 대답한 건 강태석이 아닌, 웃고 있는 사내였다.

"타셔도 됩니다. 특별히 받아주겠다고 하시더군요."

주어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너스빌일 터.

이에 강태석이 마주 웃었다.

자신에게는 딱히 선택지가 없다.

저기 냉큼 탔다가는 앞날이 아주 피곤해질 것이다.

그리고 뒤쪽에 꿈틀거리는 저걸 내버려 두고 떠나면, 두고두고 잠자리가 사나워질 테니까.

콜로니가 모조리 먹혀버리면 그걸로 끝장이다.

하여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눈앞에 나타난 놈들이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도망갈 길이 없어서 모조리 목숨 걸고 싸우면 좀 더 편했을 텐데.'

강태석이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이렇게 빠져나갈 구멍이 생겼으니 그렇게 될 리가 없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강태석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떠날 녀석은 떠나고 남을 녀석은 남으면 그것 나름 좋지 않은가?

열심히 싸울 녀석은 걸러지고 살아남을 녀석들은 또 살아남을 테니 말이다.

이윽고.

"후딱 챙겨서 떠나라. 방해하지 말고."

"분부대로 하지요. 대왕."

조롱의 뜻을 담은 사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한 발 스쳐지나 사로잡힌 여인에게로 향했다.

이윽고.

철컹!

"후우. 뻐근해."

"고생했다."

단번에 구속구를 가르고 여인을 풀어준 사내가 주변을 향해 크게 외쳤다.

"타실 분들은 준비해주십시오. 저희가 모시지요. 그리고 베르트 공이라고 했습니까."

"아 음. 그래. 무슨 일이지?"

성큼 걸어온 사내를 보며 헛기침을 한 베르트를 향해 사내가 웃었다.

"아까 살짝 물으셨지요. 군대는 어떻게 가지고 가냐고."

"크흠. 흠. 그렇지."

사방에서 쏠리는 시선에 무안해진 베르트가 되려 뻔뻔하게 표정 관리를 하며 물었다.

"아무래도 양이 엄청나니 말이야. 사람 대신... 병기를 실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 말에 사내가 웃었다.

"걱정 마시죠. 다 방법이 있을 것 같으니. 함께 하실지 여부만 결정해주시면 됩니다. 함께하시겠습니까?"

"... 그러지."

그 말이 떨어진 순간.

파아아아아아아앙!

파아아앙!

사내의 손에서 쏘아진 신호탄이 하늘로 피어오르며 온 사방을 붉게 물들였다.

**

쿠구구구구...

"다들 떠나는군요."

약 3시간에 이어진 탑승 후 떠나는 거대한 선단들을 보며 해변가에 남은 카르멘이 중얼거렸다.

올 때는 배들뿐이었지만, 갈 때는 아니었다.

그 안에 그득 실린 사람과 물자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건 배들의 뒤에 끌려가고 있는 금속섬.

끼그그그그극...

끼그극...

한대당 수십 척의 배들에 강철 케이블로 연결된 금속의 섬들이 천천히, 하지만 가속도를 붙여가며 해안가를 떠나 바다 저 건너로 향해가고 있었다.

그 위에 군대와 온갖 중장비들을 잔뜩 실은 채.

그렇게 떠나는 금속섬들만 해도 일곱 개다.

1, 2, 3군단의 모든 금속섬에 해당한다.

그나마 육지에 남은 건 엑소슈트같은, 그나마 수량이 많고 가동이 가능해 남겨진 보형중병기들 뿐이었다.

"이거 가지고 될까요?"

해안가에 앉아있는 칸헬을 향해 카르멘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카르멘, 그라함.

일부 특전대와 암무대.

그리고 몇몇 유력가와 그들의 가솔, 그리고 충성스런 개인 병력들.

이외 1, 2, 3군단 중 수도에 적을 둔 것이 많아 반드시 탈환해야 한다고 남은 몇 개의 병대들, 그 숫자가 거의 이천.

많다면 많은 숫자다.

하지만 수십, 수백만이 떠나가고 저 거대한 군락을 상대해야 할 목적으로 남겨진 상황이라는 걸 고려하면 한 줌이라고 해도 모자랄 정도의 병력이기도 했다.

이에 강태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웃었다.

"뭐 좋게 생각하자고. 숫자가 많다고 도움 되는 것도 아니고. 안쪽 상황이 그렇게 너그럽지가 못하거든."

강태석이 엉덩이를 털털 털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군락은 말 그대로 피로 만들어진 인세지옥.

들어가는 순간 일반인 수준은 모조리 감염되어 녹아내려 군락이 빨아먹을 영양액 신세가 되고 싸울 수 있는 병사들도 잡혀가면 그대로 흡혈귀, 혹은 녀석들의 병종으로 다시 태어나 자신들을 공격해온다.

숫자가 많다고 하여 도움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정예 병력이 더욱 나을 수도 있다.

"용감한 우리 소년도 남았는데. 같이 힘 내보자고."

옆, 다부진 표정으로 에너지소드를 붙잡고 있는 카인을 바라본 강태석이 후 숨을 고른 뒤 주변을 바라보았다.

단기결전.

남은 시간은 65시간.

여왕의 각성이 일어나면 그 즉시 게임은 끝난다.

들어간 이들은 모두 죽거나 도망쳐야 한다.

반면 군락의 핵심 기능과 영양분들이 모두 여왕의 탄생을 위해 집중되는, 이 65시간이 유일한 기회다.

이 시간 안에...

"안으로 들어가 중심부에 도달해 여왕의 탄생을 저지한다. 그러면 우리가 이기는 거야. 간단하지?"

"..."

강태석의 말에 주변의 모두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꽈득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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