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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멸망 n% 진행중-196화 (196/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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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락, 내부.

쩌적...

“아아아아악...”

온통 붉게 변해버린 세상 속, 도시 속을 걷던 소녀 에멜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점막과 살점으로 뒤덮인 대지와 하늘을 뒤덮은 붉은 살덩어리 때문에 온통 시뻘게진 내부의 광경, 피어오르는 달콤한 피의 향들과 떨어져 내리는 소화액들까지.

안쪽이 통째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녹여 내리는 위장이자 기이한 생명을 피워내는 자궁으로 변해있었다.

맨정신인 이들은 차마 바라보기 힘든 광경들이었다.

하지만 에멜은 그 모든 것들을 너무나 편안히 받아들이며 천천히, 계속해서 가장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도달한 곳은 수도 로블롭의 가장 깊숙했던 장소에 자리 잡은 대저택.

끼이이이익...

에멜이 한 발 내딛자 살점으로 휘감긴 대저택의 문이 열리며 온통 붉게 변해버린 내부의 광경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중 나온 이는 한 노인.

저벅.

"오셨습니까?"

허리춤에 기다란 칼 일곱 자루를 찬 노인이 작은 소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런 노인을 향해 걸어온 에멜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가 제가 새로 부활할 장소인가요?"

"그렇습니다. 말을 편하게 하시지요."

"아니에요. 아직 저는 약하니까. 당신이 저를 존중해주고 있기에 제가 살아있는 거지요."

소녀, 에멜이 노인을 보며 말했다.

노인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모두 흡혈귀다.

하지만 노인은 현재 나약한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다만 자신이 종의 미래로서 선택받았기에 존중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흡혈귀들을 지배하는 힘의 논리 아래, 이 노인이 자신을 죽이고 먹어 치운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노인은 이를 양보하고 자신을 섬기는 길을 택했다.

모든 것은 새로운 흡혈귀들의 미래를 위해서다.

쫘르르르르륵.

에멜이 한발 안으로 디딘 순간, 살점들이 주루룩 열리고 녹아내리며 지하로 향하는 깊숙한 계단을 만들어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쩌적.

그 위로 한발 내디딘 순간 발과 대지의 혈관들이 연결되며 놀랍도록 정순한 영양분들이 공급되기 시작하는 걸 느끼고 웃은 소녀가 노인을 향해 뒤돌아보며 말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에요. 뒤를 부탁하지요."

"나오실 때는 말을 편하게 하시길 기대하겠습니다."

"그럴 거에요."

에멜이 노인을 보며 웃었다.

힘의 논리에 의해 그때는 자신이 노인을 발 깔개로 하대하는 수준으로 대하리라.

다시 나왔을 때는 그 정도의 힘의 격차가 있을 테니.

"그런데 뭐라 부르면 되지요? 당신을?"

"그냥 검종이라 불러주십시오."

바깥에서는 검의 대공이었지만, 이곳에서는 검을 들고 봉사하는 시종이다.

온전히 붉은 빛으로 변해버린 눈동자를 내비치며 노인이 고개를 조용히 숙였다.

그런 노인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소녀가 이내 살포시 넝마 자락을 치마처럼 들어 올려 인사한 뒤 지하로 내려갔다.

이윽고.

꾸르르르릉...

꿀렁...

대저택, 시뻘겋게 변해버린 살점 같던 바닥이 계단을 타고 내려간 소녀를 완전히 집어삼키며 벽과 근육으로 변해버렸다.

그 모든 걸 지켜보던 노인이 조용히 저택의 문 앞에 섰다.

이제 이 저택은 새로운 산실이 된다.

이 주변 모든 영양분을 빨아들인 군락을 통해 위대한 주인을 만들어낼 산실이.

그리고 자신이 할 건...

"아직 살아있는 반동분자들이 많구나."

드넓은 기감을 통해 온 도시를 살피며 노인이 중얼거렸다.

군락 안, 그리고 군락 밖.

군데군데서 반항을 위해 모여드는 생명들이 느껴진다.

끊임없이 병력을 생산해내고 있는 군락에 대항하여 도망치고 저항하는 이들이.

자신의 임무는 여왕께서 나오시기 전 새로운 궁전이 될 이곳을 깔끔히 정리하는 것이다.

잠시 후.

키리리링.

키링.

키리리리링.

일곱 개 중 세 자루의 검을 뽑아 든 노인이 피로 물든 도시 속을 거침없이 향했다.

**

성문.

쿵...

쿠웅.

이제는 살덩어리로 완전히 뒤덮여버린 성문 쪽, 흑기사를 타고 걸어온 강태석이 스스로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현재 몸 상황이 나쁘지는 않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탓에 출력과 마력, 모두 100%.

하지만 아쉬운 것은 군대였다.

<조촐한 감이 없잖아 있네.>

주변, 남은 엑소슈트나 화력 병기들로 무장한 채 몰려온 이천 가량의 병력들을 둘러보며 강태석이 흑기사 안에서 중얼거렸다.

병력의 질은 나쁘지 않다.

하나하나가 유력가들의 정예, 혹은 파벌들의 잘 훈련 받은 군부대였으며 도망치는 것조차 포기하고 싸우는 걸 각오할 정도로 열의가 넘치는 이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정식 군대의 화력과 전투력에는 비할 수 없다.

하긴 그걸 알고 있으니 군락도 숙주들을 부려 병기들을 부식 시켜 버린 것이겠지만.

그런 강태석을 향해 옆에 선 그라함이 덤덤히 말했다.

"적통께 도움이 되면 되었지 폐가 되진 않을 겁니다."

<큰 도움도 되지 않는 게 문제지. 솔직히 말해서 인간 미끼 수준이라.>

강태석이 암무대를 이끄는 그라함을 보며 말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수도를 복구하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목적으로 모인 건 아니었다.

다만 주군, 가족, 동료, 혹은 소중한 누군가.

안쪽에 갇힌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스스로의 무기를 꼬나들고 안으로 뛰어들기를 결정했을 뿐이다.

당연히 한군데 모여있지만, 각자의 목적 또한 달랐다.

아마 들어가게 되면 스스로들의 구출 작전을 위해 흩어질 것이었다.

그런 강태석의 말에 그라함이 웃었다.

"혹시 압니까? 저희가 또 구석에서 한 건 해낼지."

<...>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태석이 허리춤에서 거대한 칼을 뽑아 들었다.

NO. 111이 변해서 만들어진, 이빨이 듬성듬성 돋아난 흉악한 칼.

예전 금속섬을 공격할 때처럼 포격을 퍼붓는다면 그것도 좋겠지만, 그걸로는 군락의 단단한 외벽 정도만 파괴할 수 있을 뿐이다.

그걸 사용하면 흑기사에 과부하가 걸려 전투력이 낮아지니 지금은 오히려 칼로 뚫는 게 좋은 선택이었다.

생각을 마친 강태석이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하자 천둥소리가 터져 나오며 커다란 칼에 굵은 뱀과 같은 번개 줄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번개의 굵은 칼날을 손에 치켜든 강태석이 눈앞, 살점을 내리찍은 순간.

콰콰콰콰콰콰쾅!

쩌저저저저저적!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살점의 벽이 불타오르고 시커멓게 그슬리고 꿈틀거리며 생명체가 내뱉는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기괴한 괴성을 토해냈다.

**

군락, 내부.

쿵쿵쿵쿵쿵!

“쿠아아아아아아악!”

"다들 피해라!"

도심 속, 건물 하나를 바리케이트삼아 농성전을 펼치던 이오스가 미친 듯이 달려오는 거대한 마수를 보며 버럭 소리쳤다.

키가 5m.

켄타우로스를 닮은 형상에 두꺼운 네 다리, 기괴하게 뒤틀린 상반신과 터질 것 같은 근육과 비틀린 살점들.

창밖, 마치 돌격 전차마냥 내달리는 마수를 보고 소리친 이오스가 손끝에 한점의 검기를 피어 올렸다.

처음에는 선, 그다음에는 면, 이어 구.

이오스의 몸을 감싸듯 순식간에 번지며 피어 올린 하나의 구체가 어느 순간 폭축하며 한점으로 압축되었다.

나타난 건 아주 작은, 콩알만 한 금색의 구슬.

그렇게 칼끝에 피어오른 구슬을 본 이오스가 창밖으로 구슬을 내던진 순간 피어난 구슬이 쫘아아악 허공을 내가르며 달려드는 마수의 가슴 한복판으로 향했다.

이윽고 파고드는 구슬.

포옥.

크기에 어울리게 너무나도 작고 부드럽게 파고든 구슬이 조그마한 구멍만을 남긴 채 마수의 피부에서 사라졌다.

거슬리는 건 모두 박살 내며 달려드는 녀석을 막기에는 너무나도 형편없는 흔적이었다.

하지만 이윽고.

키이잉...

콰아아아아아앙!

안쪽에서 터져 나온 거대한 폭발이 하나의 구체를 만들어내며 반경 5m, 스스로의 범위 내에 자리 잡은 건 모조리 갈아버리며 터져 나갔다.

마수도, 그 주변에서 우르르 몰려들던 구울의 형상을 한 병사들도, 끈적이는 점막과 살점으로 둘러싸인 도시들도 모조리 갈아버렸다.

"허억... 허억."

쿠우우웅!

쓰러지며 건물 벽을 둔중하게 뒤흔드는 마수의 시체를 보던 이오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점검기.

엑스퍼트 상급에 이르러서야 사용할 수 있는 검기 사용자의 필살 기예 중 하나다.

원래는 자신도 이 수준의 경지는 아니었지만 변해버린 군락 속, 살아남기 위한 필사의 발버둥 속에서 또다시 벽을 넘어서며 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닥 희망적인 건 아니었지만.

“와아아아아아!”

뒤쪽, 일단 적을 물리친 자신을 보며 환호하는 생존자들을 본 이오스가 쓴웃음을 베어 물었다.

저들은 기뻐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은 전혀 좋지 않았다.

지금 도시 전체, 대지와 건물에서 끊임없이 저런 종류의 마수들이 태어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방금 자신이 해치운 녀석보다 더욱 강한 녀석들의 기운도 느껴졌었다.

그런 녀석들이 수백, 수천, 수만.

반면 자신은 그중 하나를 해치우는데도 숨을 헐떡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안에 오래 갇혀 있어서는 희망이 없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이오스의 표정이 검게 물들려던 그때.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콰르르르르르릉!

거대한 괴성과 함께 하늘을 뒤덮은 살점덩어리와 휘막 전체가 떨어 울리는 게 느껴졌다.

군락 전체가 비명을 내지른 것이다.

동시에 외곽 어딘가, 이제는 방향 감각마저 헷갈려가는 와중에 저 멀리서 쭈욱 짓쳐 들어오는 한 줄기 태양빛.

오직 적색 휘광만이 존재하던 이 공간 속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바깥의 빛자락에 고개를 돌린 이오스의 표정이 순간 환해졌다.

입구 쪽, 뻥 뚫린 구멍 너머로 익숙한 형태의 거대한 기체가 보였던 것이다.

흑기사.

무엇보다 희망적인 건 입구가 뚫렸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그토록 공격을 퍼부어도 꿈쩍도 안 하던 거대한 짐승의 벽이었건만 지금은 비명을 내지르며 속살을 갈라 바깥을 향하는 길을 드러내고 있다.

"다들 무기를 들어라! 이곳을 빠져나간다! 입구 쪽으로 달려야 해!"

이오스가 뒤쪽을 향해 버럭 소리 질렀다.

입구가 열렸지만, 저 벽 자체가 커다란 생명체다.

벌써부터 녀석은 빨아들인 영양분을 기반으로 꿈틀거리며 벽을 수복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또다시 문이 닫혀버릴 것이다.

하지만 이오스를 비롯한 생존자들의 표정에는 희망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곳에 갇혔다지만, 자신들 나름 실력자.

혼란스런 도시를 관통해 입구 쪽까지 가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 여겼으니까.

촤아아아악!

촤악!

칼을 뽑아 든 이들이 거침없이 구울을 닮은 병종들을 베어내며 건물 밖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이를 지켜보던 이오스 역시 창밖으로 뛰어내려 포위망을 뚫어내려던 그때.

저벅.

"제자야. 어딜 가려는 거니."

"... 스승님."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누군가.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피로 흠뻑 물든 세 자루 칼을 들고 자신을 향해오는 등장에 이오스의 얼굴에 또다시 절망과 분노가 서렸다.

**

콰지지직...

키르르르르르륵...

<후우.>

철컹.

여전히 꿈틀거리는 살점의 벽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온 강태석이 온통 시뻘겋게 변해버린 정면의 광경을 보며 혀를 찼다.

생각보다 상태가 썩 좋지 않다.

어느새 영양액을 공급하는 인프라까지 혈관과 뿌리를 뻗은 군락이 그 풍부한 영양분들을 거침없이 빨아들이며 쉴새 없이 병종과 군사들을 생산해내고 있었다.

지금 이 안은 마수들 소굴의 천지였다.

이런 때일수록 필요한 건 속전속결이다.

<챙겨줄 여유 없다. 다들 괜찮지?>

"별걱정을 다 하시는군요. 가시지요."

뒤쪽, 퉁명스레 칼을 뽑아 드는 카르멘의 말에 작게 웃은 강태석이 발치에 힘을 주었다.

이윽고.

콰아아아아앙!

쾅쾅쾅!

붉은 카펫이 깔린 도시 전체를 짓밟으며 내달리는 흑기사를 본 카르멘이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다들 전투준비! 최대한 생존자들을 찾아 빠져나가는 데 집중해라!"

'대장. 살아계신 거겠지요.'

이곳에 들어온 가장 큰 목적, 이오스를 떠올리며 중얼거린 카르멘이 이내 칼을 뽑아 들며 주변에서 몰려오는 구울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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