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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쿵쿵쿵쿵!
강태석이 거침없이 드넓게 펼쳐진 지옥, 그 한가운데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군락의 정중앙에 있는 산실이다.
가장 영양분이 풍부하면서도 안전한 장소로, 그곳에 분명 여왕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곳을 부숴버리면 우리의 승리다.
비록 동생을 찾겠다고 버둥거리던 소년의 모습이 걸리긴 했지만...
'카르멘에게 맡겼으니 알아서 잘해주겠지.'
강태석이 냉엄한 눈으로 부웅 뛰어 붉은 살점의 카펫이 깔린 바닥으로 착지하며 중얼거렸다.
소년이 제법 강해지긴 했지만, 흑기사 급의 전투에는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쪽에 두면 오히려 제 몫을 하며 성장하고 강해질 것이다.
“갸르르륵...”
“구어어어억!”
콰아아아아아아앙!
비척거리며 달려들려는, 감염된 일반 숙주들을 통째로 짓밟아버린 강태석이 그 반발력을 이용하여 앞으로 튀어 나가려던 그때.
슈루루루룩!
콰아아아앙!
쾅!
쾅쾅!
아래쪽, 붉은 살점이 터지듯 비산하며 그 안쪽에서 길쭉하게 생긴 검붉은 촉수들이 튀어나와 흑기사의 다리와 본체를 공격했다.
굵기만 해도 4-5m.
어찌나 긴지 뻗어 나오는데 한도 끝도 없어 보였고, 꿈틀거리는 동체 전체가 터질 것 같은 근육으로 그득 차 있었다.
이빨도 뼈도 없었지만, 살점에서 스며 나오는 부식액과 육중한 덩어리에서 나오는 파괴력은 그 자체로 위력적이었다.
후우우우웅!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앙!
기다란 수십 가닥의 촉수들이 하늘로 솟구쳐 채찍마냥 땅을 휘갈겨 패고 얽어매려 달려들 때마다 지상, 그나마 살점 카펫 아래서 형체를 유지하던 도시의 건물들이 박살이 나고 높은 빌딩들이 휘감겨 으스러졌다.
그리고 강태석은 그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질주 중이었다.
터어어엉!
터어엉!
적재적소에 만들어지는 역장들이 무너져내려 더 이상 발판으로써 의미를 하지 못하는 지상을 대신했다.
때로는 공중에, 때로는 한 점의 먼지자락들 위로.
정 피할 수 없을 때는 손에 들린 칼을 휘둘러 거대한 기둥 같은 근육의 촉수들을 갈라내며 나아갔다.
쩌어어어억!
촉수 또한 두텁고 강력했지만 크기 8m가 넘어가는 칼이 시퍼런 번개의 칼을 휘감고 질주하니 당해낼 수가 없다.
애시당초 거의 모든 구조물들이 생체 조직으로 이루어지는 흡혈귀들의 군락은 강태석이 든 뇌전의 검과 완벽히 상성 관계였다.
그르르르르륵!
터어어어엉!
번개의 칼에 베인 순간 그 기다란 근육 촉수들 전체가 감전된 것마냥 부르르 떨며 쾅쾅 주변을 내리찍고 휘두르는 등 발광을 해댔다.
그 속에 달려들던 수많은 흡혈귀의 병종들이 휩쓸려 죽어 나가는 것은 덤이다.
콰드드드드득!
그 사이를 피해 달려드는 잔챙이 하나를 짓밟아 치운 강태석이 흑기사 안에서 숨을 골랐다.
해치우며 나아가고는 있지만, 갈 길이 멀다.
쿠득!
쿠드드드득!
자신이 베어낸 것 이상으로 지상에서 튀어나오고 있는 촉수들이 수백, 수천 개였다.
그리고 벌집을 쑤신 것마냥 각 집들에서, 건물들에서 살점의 자락을 들추고 기어 나오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병종들이 보였다.
각 개체의 크기도, 숫자도, 이 군락 안뿐만 아니라 지상의 주변부를 모조리 쓸어버리기에 충분할 정도의 규모였다.
쿵쿵쿵쿵!
“그어어어!”
콰아아아아앙!
키가 5m에 달하는, 다리 넷에 거대한 상체를 가진 마수의 돌진을 온몸으로 막아낸 뒤 주먹을 들어 녀석의 머리통을 콰앙 후려친 강태석은 그 뒤로 끝도 없이 달려드는 마수들을 보며 혀를 찼다.
<발이 묶이게 생겼네.>
반대로 말하면 자신이 발을 묶어두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동안 흩어진 다른 녀석들이 잘해줘야 한다.
이윽고.
촤르르르륵!
콰아아아아아아앙!
불타오르는 검기를 휘감은 흑기사의 칼이 채찍처럼 늘어나며 붉은 해일처럼 밀려드는 병종들을 사정없이 쪼가르기 시작했다.
**
콰아아아앙!
콰아앙!
"..."
쉴새 없이 몰려드는 숙주들을 피해 도시를 질주하던 이들, 그 중 소년 카인이 저 멀리서 벌어지는 전투를 보고는 발걸음을 떼지를 못했다.
그야말로 붉은 지옥의 한자락, 그 하늘이 찢어지고 땅이 무너지며 온 생명이 갈려 나가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선 것은 붉은 핏빛의 질주를 홀로 막아내는 칠흑빛의 검은 동체.
핏빛과 어둠.
더할 나위 없이 지옥에 어울리는 두 빛들이 중앙 방향에서 부딪치며 이 마경의 풍경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그런 카인을 향한 덤덤한 한마디.
"당신이 따라가려던 곳이 저곳입니다. 얼마나 무모한 행동인지 아셨겠지요."
쩌저저적!
달려드는 숙주를 베어내며 말하는 여인, 카르멘의 말에 카인이 이를 꾸욱 악물고 본인도 칼을 휘두르며 전투에 임했다.
그들 역시 여전히 격전 중이었다.
쫘아아아악!
하지만 칼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소년의 눈은 저 멀리 흑기사로부터 떨어지질 못했다.
처음에는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했다.
스승은 동생이 아마 이곳의 새로운 여왕으로 발탁 받았을 것이라 말했고, 그렇다면 이를 구하러 가는 것이 동생을 지키지 못한 오빠로서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신도 있었다.
비록 스승이 자신보다 훨씬 강하겠지만 그 역시 인간이며, 오랜 시간 가문의 기예를 수련했고 이제는 가능성마저 개화한 자신이라면 충분히 도움이 될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이게 웬걸?
자신의 스승은 인간 같지도 않은 존재였다.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인간이 아니었다.
강철의 화신과도 같은 거체를 전장에 소환하고 그 위에 하늘에서나 내리칠 법한 번개를 휘두르며 지옥의 한복판을 단신으로 주파한다.
누가 감히 저 안을 따라 질주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곁에 있는 카르멘도, 그라함도 감히 보일 수 없는 신기였다.
덕분에 이 거대한 마굴이 온통 진동하며 살아있는 기이한 생명이란 생명들이 모조리 일어나 저곳 중앙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들은 한결 수월하게 이런 잔챙이들만 상대하며 지나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마냥 낙관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콰득!
"스승께서 얼마나 버티실 수 있을까요?"
붉은 해일마냥 몰려드는 적들을 검은 블랙홀마냥 집어삼키며 갈아버리고 있는 흑기사를 보며 카인이 묻자 칼을 휘두르던 카르멘이 덤덤히 말했다.
"한계가 있으실 겁니다. 제가 알기로 저 흑기사는 기동 시간이 존재하니까."
말 그대로였다.
흑기사가 존재하는 한 칸헬께서 무너질 일은 없어 보였다.
온몸을 휘두른 칠흑의 갑주와 칼은 그 자체로 신격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이를 운용하는 칸헬께서는 엄연한 인간이다.
육신의 제한이 있고 마력의 한계가 있다.
저렇게 싸우다가는 목표인 산실까지 가기도 전에 끊임없이 생산되는 병력들에 파묻혀 지쳐 쓰러질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임무 또한 중요하다.
쩌적.
달리던 건물 옆의 살점을 덜어내어 그 아래 파묻혀 있던 도로명을 확인한 카르멘이 숨을 후 내쉬었다.
현재 자신들의 목표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생존자들의 확보.
두 번째, 어찌 보면 이보다 더 중요한, 칸헬께서 부탁한 것.
도시의 사방에 존재하는, 영양액 인프라의 파괴가 그것이었다.
<사람이나 동식물 따위를 재료로 써서 단기간에 이런 군락과 저 병종들을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지. 저건 분명 이 도시 아래의 영양액 인프라를 집어삼킨 거다.>
영양액 인프라.
찬의 시절 만들어진 웨일-엔진을 기반으로 하여 콜로니 인프라를 타고 혈관마냥 구석구석으로 영양액을 공급해주던, 이 난리통에도 수십만에 가까운 이들이 먹고살 걱정 없게 해주었던 수도 로블롭의 핵심시설이다.
아무리 괴물이고 흡혈귀더라도 질량 보존의 법칙이란 게 있다.
사람 몇 녹여서 이런 압도적인 크기의 군락과 물량을 만들어낼 순 없는 법이다.
현재 충분히 감염을 확장한 군락의 뿌리가 그 영양액 인프라를 먹어 치워 게걸스럽게 안에 저장된 내용물을 빨아 삼키고 있었기에 지금 저렇게 해일같이 병력을 만들어내는 게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들이 할 일은 하나.
칸헬께서 중앙을 질주하며 시간을 끄는 동안 동서남북, 네 방향에 위치한 영양액 인프라들을 차례대로 끊어내는 것이다.
이를 그라함과 자신, 수도 탈환을 위한 유력가들과 잔존 군부대들 각기 넷이 골고루 하나씩 담당하기로 했다.
하나씩 맡아 네 방향의 인프라를 파괴하고 가는 길에 서로의 생존자들을 구출하기로.
인프라만 파괴해도 도시에 득실거리는 병력의 양과 질이 확연히 줄어들 테고, 그만큼 살아서 구출하고 돌아갈 수 있는 확률 또한 커진다.
파아앙!
파아아아앙!
"신호탄을 터트리며 가고 있으니 생존자들이 있다면 알아서 찾아올 겁니다. 우리는 일단 목적에 충실해야 해요."
하늘로 솟구치는 조명탄을 보며 말하는 카르멘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도시, 생존자들이 어디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위치가 확실한 영양액 인프라를 목표로 정한 뒤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잠시 후.
콰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악!
카르멘과 카일, 그리고 수백 명의 결사대들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다시금 지옥의 한 자락을 뚫고 길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
파아아앙...
파아아앙!
동서남북.
입구를 중심으로 펼쳐진 이들로부터 차례대로 조명탄들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생존자들에게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스스로들의 생존을 증명하는 휘광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앙!
네 방향에서 무사히, 간헐적으로 조명탄들이 쏘아져 오르는 것을 본 강태석이 한결 더 기운차게 칼을 휘둘러 주변을 쓸어갔다.
<잘해주고 있구나.>
콰드드드드득!
끄르르르륵...
크기 17m.
자신보다 훨씬 더 크고 강건한, 머리가 없는 근육과 뼈 덩어리의 거인의 발목을 베어 넘기며 가슴팍을 후려 차 으깨버린 강태석이 사방을 둘러보며 숨을 골랐다.
자신 혼자 들어왔다면 불가능하지야 않겠지만, 도박에 가까운 수를 감행 했어야 했을 터이다.
원래는 목숨을 걸어 성공과 실패, 그중 하나의 확률에 배팅해야 했다.
하지만 함께 들어온 이들이 있기에 도박에서 승부로 그 위험성이 크게 줄었다.
이대로 시간만 끌며 앞으로 나아가기만 해도 승리다.
영양액 보급을 두 군데만 끊어내도 확실하게 이 해일을 뚫고 시간 내에 여왕의 탄생을 가로막을 수 있다.
만약 네 군데를 모두 끊어낼 수 있다면, 아예 기세를 몰아 이 군락 자체를 붕괴시켜버리는 것 또한 가능하다.
여러모로 상황이 크게 호전되는 셈이다.
구어어엉...
콰아아아아아앙!
조명탄을 보고 외곽으로 향하려던 마수, 그중 하나의 발목을 채찍으로 휘감아 쓰러트려 버린 강태석이 흑기사의 거체를 부웅 뛰어 그대로 녀석의 머리통을 내리찍고 박살 내 버린 그때.
스르르륵...
스르르르르르륵!
격전지 근방, 붉은 살점과 시체들의 그림자 아래서 무언가 스르륵 솟아오르더니 이윽고 사람의 형체를 만들어냈다.
등장한 건 온통 눈이 시뻘건 채 고급스런 정장을 차려입은 청년이었다.
"정말 멋대로 날뛰어 주고 있구나. 우리들의 안방에서."
털썩.
먹던 여인의 시체를 옆으로 내던진 청년이 슥슥 입가를 닦으며 날뛰는 칠흑의 기체를 바라보았다.
새로 나타난 여왕인지 뭔지 하는 게 가장 달콤한 자리를 꿰찬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저런 것까지 기어들어 와 자신들의 영역을 짓밟다니.
딱히 그 계집을 지키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저걸 내버려 두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스르륵.
허리춤에 칼을 뽑아 든 청년이 마치 펜싱을 하는 듯 몸을 웅크리며 칼을 내뻗을 자세를 취했다.
그와 동시에.
부글부글.
꾸르르르륵!
사방에 널려 있던 구덩이에 고여있던 거대한 피 웅덩이가 청년의 움직임에 반응하듯 부글거리며 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