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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앙!

거침없이 흑기사의 검은 채찍을 휘둘러 주변을 베어가던 강태석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마치 거대한 칼날의 날카로운 예기가 자신을 노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마수들만이 존재하는 공간, 커다란 칼이 자신을 노릴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흑기사를 통해 발현된 강태석의 오감과 육감은 이를 선명하게 뇌리로 예지했다.

그에 반응하듯 뒤바뀐 자세.

촤르르르르륵!

철컥!

순식간에 수백 미터 길이에서 8m까지 줄어든 칼날을 굳게 고정시킨 강태석이 그대로 칼을 들어 살기가 날아드는 방향으로 치켜세웠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지상에서 솟구쳐 사선으로 날아든 백여 미터 길이의 길쭉한 핏빛 칼날이 흑기사의 육신을 강타하여 그대로 밀어붙였다.

놀랍게도 칼날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전체가 핏물이었다.

심지어 액체가 모여 만들어진 칼날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강도와 속도, 파괴력이었다.

콰드드드드득!

거의 입구까지 튕겨낼 기세로 밀어붙이고 있는 칼날을 본 강태석은 발판의 역장과 칼을 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걸 다시 밀려난단 말인가?

키이이이이잉!

콰드드드득!

흑기사의 코어가 굉음을 토해내며 역장과 전신에 힘을 불어넣었다.

쩌저저적...

콰아아아아앙!

대지에서 솟구쳐 밀어붙이던 핏빛 칼날이 쩌적 금이 가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내리며 아름다운 핏빛 가루의 비를 뿌렸다.

그 너머로 보이는, 칼을 내뻗은 자세로 웃고 있는 미청년.

"훌륭하구나. 정통 혈족인 내 찌르기를 받아 내다니."

이를 들은 순간 강태석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마 육신의 원주인은 이곳에 살던, 제법 재능 넘치던 파벌의 정통 무인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충분한 양의 성수에 감염된 지금은 이를 기반으로 깨어난 흡혈귀 중 한 놈일 뿐이다.

그리고 아마도 현재는 여왕의 바로 아래 등급을 차지하는 귀족 계급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깨어난 지 얼마 시간이 되지 않아 저 정도지만, 충분한 시간과 먹이만 제공한다면 현시대의 귀족들과도 자웅을 겨루기에 충분한 존재가 될 것이고.

물론 여왕은 잘 자라면 그 위, 대초인들과도 투쟁을 벌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위험한 녀석이다.

하여간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 죽여 없애야 하는 놈들이다.

<잘난 척도 어지간히 하는구나. 군락 안이라서 그 정도 권능을 쓸 수 있는 거면서.>

"네 녀석도 그 품위 없는 고철 깡통에 타고 있으니 그런 것 아니냐? 자신 있으면 내려서 일대일로 겨뤄 보자꾸나."

그 말에 강태석이 후웅 칼을 휘두르며 자세를 다잡았다.

적진의 한복판에서 적의 뜻대로 해주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이대로 으깨주지.>

콰아아아아앙!

발을 구른 강태석이 허공을 부웅 떠올라 운석마냥 내리찍었다.

촤촤촤촤촤촥...

콰콰콰콰콰콰쾅!

땅에서 솟구친 수십 줄기, 거대한 피의 칼날들이 사방팔방에서 흑기사의 전신을 노리고 휘몰아쳤다.

**

동쪽.

콰콰쾅!

"..."

중앙에서 휘몰아치는 핏빛 칼날의 폭풍, 그리고 이와 뒤엉켜 싸우는 칠흑의 번개를 보며 그라함이 할 말이 없다는 듯 눈을 꿈벅였다.

나름 찬의 정복 전쟁에도 참여하고 그라함을 따라 칠국의 다른 곳에서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여러 가지 것들과 많은 강자들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그와도 또 다른 수준이었다.

'저게 진짜 같은 경지라고 볼 수 있는 것인가? 똑같은 레벨의?'

그라함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검기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하지만 높이는 비슷하더라도 다룰 수 있는 힘의 볼륨 자체가 다르다.

그렇게 압도적인 차이가 나는 볼륨을 다뤄내고 있는 저 존재들의 실력 자체가 자신들과는 또 다르다.

똑같은 강철이라도 바늘과 쇠몽둥이를 다루는 방법이 어찌 같겠는가?

재능에 대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본 적은 별로 없었는데, 눈앞의 광경을 보니 박탈감을 넘어 허탈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그와 별개로 임무는 착실히 완수 단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철컥.

철커덕.

띠띠띠띠띠띠...

"대장. 폭탄 설치가 끝났습니다. 이후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다가온 암무대원의 말에 저 멀리 격전을 바라보던 그라함이 현실로 돌아왔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핏빛 구조물, 인프라 구석구석에 폭탄을 설치하고 돌아온 암무대원들 팔십 명이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들의 임무가 잠입, 암살, 폭발, 파괴.

이런 것들이야말로 자신의 전문 분야다.

정면돌파를 시도하고 있을 다른 세 팀들과 달리, 자신들은 어둠과 살점 사이를 틈타 별다른 피해와 충돌 없이 영양액 핵심 시설에 숨어들었다.

이제 설치한 폭탄의 버튼을 누르고 빠져나가기만 하면 일단 자신들의 임무는 끝이 난다.

이후 다른 팀을 지원할지, 혹은 이곳에 어쩌면 살아 계실지도 모르는 탈리만 공의 일행을 찾아볼지에 대해서는 자신들 선택이었다.

'... 살아계실런지.'

꿈틀.

끊임없이 요동치는 지옥의 마굴 같은 사방을 보며, 자신이 곁에서 보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인 채 그라함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감상은 잠시, 이내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온 그라함이 암무대원들을 향해 말했다.

"빠르게 터트리고 밖으로 나간다. 바로 작동시켜라."

자신들의 몸놀림이라면 지금 터트려도 폭발에 휘말릴 일이 없다.

그라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암무대원들이 몸의 긴장을 한껏 끌어올린 채 손의 기폭 장치를 꾸욱 눌렀다.

폭발이 터져 나오는 순간 살점 덩어리 벽 밖으로 몸을 내던질 준비를 했다.

하지만...

구르르르륵...

그륵...

"...?"

"!!"

폭발은커녕. 여전히 기괴한 그륵거림만 토해내는 감염된 시설 전체의 내벽들을 보며 암무대원들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분명 설치한 48개의 폭발물들이 동시에 폭발하며 이 거대한 인프라 시설을 재기 불가능 수준으로 파괴해야 하는데 이런 침묵이라니?

설령 한두 개 정도가 살점에 파묻혀 부식되었다고 하더라도 모든 폭발물이 터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에 암무대 전원을 비롯한 그라함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스르르륵.

"남의... 집에.. 이런... 장난감은... 곤란하지..."

꽈드드득...

우걱.

꽈드드드드득.

갑자기 벽면을 타고 스르륵 나타난 인형, 그 전신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소음에 고개 돌린 그라함과 암무대원들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나타난 중년 사내.

그 평범해 보이는 두툼한 몸에 존재하는 수십 개의 기괴한 입들이 동시에 우걱거리며 자신들이 설치한 폭탄을 집어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구구궁...

쿠궁!

몇 개는 삼키는 도중 뇌관을 잘못 건드렸는지 웅혼한 소리를 내며 터지고는 했지만, 그마저도 꾹 닫힌 기괴한 이빨의 입들에 가로막혀 폭발 째 사내의 몸속으로 삼켜져 버릴 뿐이었다.

건물을 날려버릴 정도의 폭발과 폭탄을, 그것도 수십 개를 동시에 삼켜버리는 몸뚱이와 입이라니.

이윽고.

꿀렁.

꿀꺽.

모든 폭탄과 폭발, 그리고 그걸 삼켜버린 입마저 몸속으로 삼킨 중년 사내가 손에 들린 냅킨으로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입 닦듯이 닦으며 나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들... 내버려 두면... 또... 폭탄 설치할 거지?"

"..."

"그러면 안 돼... 그 노인네한테... 혼나..."

게으르게 중얼거리는 중년 사내가 냅킨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순간 그라함은 섬뜩함을 느꼈다.

마치 사자가 자신들을 향해 코앞에서 주둥이를 쩌억 벌리는 기분이 들었다.

"흩어져라! 당장!"

버럭 소리친 그라함이 칼을 치켜세우며 뒤로 뛰쳐 오름과 동시에.

쩌어어어어억!

쩌저저저적!

콰드드드드득!

“끄아아아아악!”

복도와 벽면의 살점을 타고 솟아난 수십 개의 커다란 입들이 단번에 사방에서 그라함과 암무대원들을 덮쳐들었다.

**

쿠궁...

쿠구구구궁...

한 노인이 작은 단검 하나만을 든 채 여유로이 피로 물든 도시의 거리 한켠을 거닐었다.

지금 온 도시가 격렬한 진동과 투기에 휩싸여있다.

핏빛 칼날들이 난무하고 입들이 침입한 벌레들을 집어삼키는 게 이곳까지 느껴진다.

현재 적들이 노리는 곳은 산실을 제외하고도 네 군데.

즉 막아야 할 곳은 다섯이었다.

반면 이성을 가지고 깨어난 흡혈귀들은 자신을 포함하여 고작 넷뿐이다.

"부족하구나. 부족해. 여왕님을 보필하기에."

스스로 종을 자처한 칼을 든 노인이 혀를 찼다.

둥지가 완성된 것은 좋은데 이성을 지니고 통제할 주인이 없었기에 본능에 따라 무작위로 쓸데없이 많은 병종들과 자기방어 촉수 따위를 만들어내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들은 자신들과 같은 정통 귀족들이거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둥지가 이렇게 제멋대로 굴러가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이 성수로부터 자연스레, 운 좋게 탄생한 자신들 넷이 이를 도맡아 처리해야 한다.

비록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세 녀석 모두 충심이 부족하고 다소 못 미덥다는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미래를 위해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혀를 끌끌 찬 노인이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산실 쪽과 동쪽은 각기 한 녀석씩 갔으니 알아서 잘 해결할 것이다.

남은 곳은 서쪽과 북쪽, 남쪽.

잠시 고민하던 노인은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으로 자신이 쫓던 녀석의 흔적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겸사겸사 그 끝으로 가서 둥지의 뿌리를 노리려는 녀석들도 해치우면 될 것이다.

나머지 서쪽과 남쪽은 남은 흡혈귀 중 하나, <그 녀석>이 잘 해결할 것이고.

"제자야. 제자이면서 왜 이리 스승을 피하느냐?"

흥얼거린 노인이 단검을 든 채 핏빛자락 위, 그 위로도 선명하게 빛나는 핏자국 흔적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콰아아앙!

콰아앙!

콰아아아아앙!

"으하하하하! 포기해라! 이 대지에 발을 들인 이상 네 녀석에겐 승산이 없단 말이다!"

바닥에서 끊임없이 거대한 피의 칼날을 뽑아내며 몰아붙이던 청년이 방어에 전념하는 상대, 흑색의 기체를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마치 신이 된듯한 기분이었다.

이 거대한 둥지가 끊임없이 활력을 부여하며 권리와 자격을 지닌 자신에게 스스로의 일부를 허락한다.

이와 자신의 검예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 기예, <홍검계>.

끊임없이 영양분을 공급받는 이 모든 대지가 자신의 육체이고 손이며 자신의 칼날이고 검술이다.

반면 상대는 아무리 강건해 보여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대지로부터 끊임없이 힘을 부여받는 자신을 이길 수는 없다.

콰아아아아아앙!

"시간만 끌어서 뭐 하겠느냐? 가진바 힘을 모두 쥐어짜 보거라. 그래야 나도 다음 장을 써볼 생각을 하지."

연주하듯 칼날을 휘두르며 휘몰아치던 청년이 쉴새 없이 두들겨 맞고 있는 상대를 보며 웃었다.

현재 자신의 검술, 1장만을 쓰고 있는데도 이 정도다.

이 상태라면 열린 2장은 쓸 필요도 없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나 3장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되면 말할 것도 없다.

그때.

<너 같은 놈한테 낭비할 기운이 없으니까 그런 거란다. 이 정도로도 충분하거든.>

"허?"

콰아아아앙!

두들겨 맞는 와중에도 입만 살아 떠드는 상대의 말에 쉴새 없이 핏빛 칼날을 휘몰아치던 청년이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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