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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르르릉...!
강철의 통제실 안, 사방에서 들려오는 거친 기동음을 듣던 탈리만이 자신의 잘려 나간 양다리를 보며 입술을 살짝 적셨다.
간신히 목숨은 부지해 어찌어찌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평생 자신의 두 다리로 걷는 일은 없겠다 싶었다.
하지만 뭐든지 상대적인 법이다.
지금 다리 신경 쓰다가는 숨 쉴 일이 없게 되는 수가 있다.
"자네들은 적통이면서 어찌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철통처럼 우뚝 버티고 선 외팔의 그라함의 앞, 주동자 몇의 목이 날아간 채 무릎 꿇고 있는 유력가들을 보며 혀를 찬 탈리만은 숨을 후우 내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자들의 태도와 별개로 가진바 수하들의 실력과 무장은 제법이었기에 녀석들은 커다란 피해 없이 숨겨져 있던 이 이동형 지상 요새, <탄트라>의 통제실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자신과 그라함 역시 이를 뒤에서 조용히 따라붙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이를 손에 넣었다.
중요한 건 이다음이었다.
덜덜...
"탈... 탈리만 공. 그러지 말고 자네도 생각을 바로 하게. 누가 봐도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맞지 않나. 응?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당장 여길 빠져나가자고."
무릎 꿇은 채 떨면서 말하는 유력가 중 하나의 음성이 진동만이 가득하던 통제실을 울렸다.
어찌나 진심이 담겼는지 굉음과 함께 요동치는 통제실 안에서도 똑똑히 들릴 정도였다.
그리고 이를 들으며 탈리만이 눈을 감았다.
'그래. 저게 맞지. 상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다시 뜬 탈리만이 중얼거렸다.
그라함과 합류하기 전, 자신은 좀 더 오래 있었기에 이 안에서 한층 더 강렬하고 자세히 지옥을 엿보았다.
이곳은 말 그대로 폭발 직전의 상황이다.
지금의 상황은 애교에 불과하며 그라함에게 상황을 보고받으니 이는 더욱 명확해졌다.
현재 세 군데 중 한 군데라도 제대로 임무 수행을 해내지 못하면, 설령 해낸다 해도 중앙을 담당한 칸헬이 여왕을 처치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때까지 이곳에 남아있던 생명체들은 모조리 곤죽이 되어 한 줌 영양소로 변해버린 뒤, 그대로 이 거대한 둥지의 영양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지."
탈리만이 눈을 떴다.
본능적으로 느낌이 왔다.
앞으로 세상은 좀 더 흉악하게 변해갈 것이라고.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가야 할 곳 모든 곳이 보보마다 지옥이 될 거라면, 지금부터 지옥을 헤쳐나가는 연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잠시 후.
"남쪽은 우리가 맡지요. 칸헬이시여. 잘 부탁드립니다."
치직...
짧은 한마디를 통신 너머로 남긴 탈리만이 그라함과 주변을 향해 외쳤다.
"출력과 화력을 최대로 끌어올려라!"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목표는 남쪽 인프라.
이 근방에서 가장 경계가 삼엄한 장소였다.
이에 고개를 꾸벅 숙인 그라함이 통제실의 패널을 몇 번 두드렸다.
키이이이이...
쿠르르르르르르르릉!
거친 굉음과 진동이 터져 나오며 지상 요새가 강렬하게 살점의 카펫이 깔린 도시 구조물들을 으깨며 인프라 방향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
서쪽 방향.
콰아아앙..
콰앙..
“끄아아아아아악!”
"하?"
촉수와 병종들, 그리고 침입한 벌레들이 뒤엉켜 만들어지고 있던 지옥도를 즐겁게 바라보던 소녀가 갑자기 혀를 차며 남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예상외의 변수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들 보게나요오오오. 그냥 귀엽게 굴길래 내버려뒀는데에에에."
둥지의 감각이 곧 자신의 감각.
희번득.
정신을 집중해 남쪽, 움직이기 시작한 거대한 쇳덩어리를 시야에 담은 소녀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중얼거렸다.
본디 자신이 맡은 방향은 서쪽과 남쪽이다.
아무리 자신에게 둥지를 통제할 권한이 있다고 한들 방어의 핵심이 되는 병종과 촉수의 숫자는 정해져 있다.
그중 병종은 지금 저 가운데 정신 나간 것처럼 날뛰고 있는 흑색의 기체를 막는 것도 바쁘니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촉수들이다.
그리고 지금 이곳을 손쉽게 으깨 놓을 수 있었던 건 간단했다.
촉수를 모두 이곳, 서쪽에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남쪽의 놈들이 애초에 인프라의 파괴에 관심이 없는 게 선명히 보였기 때문이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알아서 제 목적들이나 달성해 도망칠 게 보이는 녀석들이었다.
그렇기에 소녀는 녀석들을 가만히 내버려 둔 채 전력을 다해 목적을 달성하려고 발버둥 치는 이곳, 서쪽에 힘을 집결시켰던 것이다.
이곳부터 처리한 뒤 도망간 녀석들은 천천히 뒤쫓아 처리하면 그만이니까.
한데 갑자기 이런 식으로 잔재주를 부려?
긁적.
잠시 고민하던 소녀가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타깝게도 그다지 여력이 있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쪽의 얼간이 놈이 죽어버리고 인프라가 파괴되어 군락의 재생력도 떨어졌다.
중앙의 잘난척 하던 멍청이도 덕분에 으깨져 병종들이 묶인 탓에 돌릴 여력도 없다.
믿을 건 그 정신 나간 노친네 정도인데,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이 상황에서 남쪽, 상당히 위협적으로 보이는 쇳덩어리를 막기 위해 촉수를 분산시키면 재수 없을 경우 두 군데 모두 뚫릴 수도 있다.
하지만...
"뭐. 간단한 해결책이 있지 않겠어요?"
혼자 중얼거린 소녀가 싱긋 웃으며 눈앞, 시가전을 벌인답시고 구석구석에 숨어 발버둥 치고 있는 잔존자들을 바라보았다.
저쪽이 도망치지 않아 일이 복잡해졌다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이쪽을 일단 치우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윽고.
쿠우우우웅!
"자자. 여러분들. 주목. 주목하세요오오오."
내리찍던 촉수를 멈추는 척하며 슬그머니 남쪽으로 빼돌린 소녀가 자비를 베풀 듯 잠시의 평온이 찾아 든 지옥도를 향해 외쳤다.
**
콰아앙...
"주목. 주목하세요오오."
"..."
저 멀리, 시가지 위의 높은 둔덕에 올라선 소녀의 낭랑한 외침에 숨어서 재장전을 하던 대위, 라스탕이 주먹을 꾸득 쥐었다.
갑자기 또 무슨 짓거리를 벌이려고 이러는 것인가?
더욱 열받는 건 이 속에서 여유를 찾고 한숨 돌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후우. 쿨럭. 후아아."
한탄에 가까운 숨결을 내뱉은 라스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속으로 절망에 가까운 수치를 되뇌었다.
'50% 이상이 죽었다.'
라스탕이 골목 사이사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대원들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피투성이가 되긴 했어도 대부분 멀쩡한 모습이긴 했지만, 그게 상황이 낙관적이란 뜻은 아니었다.
부상자가 적을 뿐, 사망자의 숫자는 압도적이었으니까.
800에 가까운 이들 중 그 짧은 시간 안에 400 이상이 죽었다.
저 거대한 촉수에 통째로 으깨지고 갈려 나가며, 한 줌의 살점과 핏덩이가 되어 바닥과 촉수를 치덕치덕하게 물들인 채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 소녀의 갑작스런 변덕에 희망을 걸고 있는 자신이 한심할 정도였다.
하지만 소녀의 입에서 울려 퍼진 한마디는 그런 자신들의 희망을 단번에 부숴버렸다.
"솔직히 그렇게 재미도 없고 저도 약자들 짜부라트리는 건 관심없어서요오. 그래서 여러분들께 기회를 드릴게요. 여러분들 옆에 생존한 동료들이 있지요?"
"..."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할게요. 입장권 게임. 룰은 간단해요. 동료의 머리통 하나를 손에 넣은 사람은 여기서 빠져나가게 해줄거에요. 하늘로 높이 들어 보이면 제가 알아서 살피고 보내 줄 거랍니다. 쉽죠?"
"이 미친 괴물 같은 년이!"
소리를 듣던 라스탕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말의 요지는 간단했다.
서로 죽고 죽이라는 것이다.
분노에 가득 찬 고함을 내지른 라스탕이 주변, 웅성이는 대원들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현혹되지 마라! 우리끼리의 내분을 유도하려는 수작이다! 우리가 잘 버티고 있으니 벌이는 수작! 서로 죽이고 나면 저 계집이 우릴 살려준다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이냐!"
"..."
라스탕의 말에 대원들이 정신을 차린 듯 눈을 부릅떴지만 이어 들려오는 소녀의 실행은 그들의 망설임을 산산히 부숴버렸다.
쩌어어어어어억...
200m도 떨어지지 않은 성벽 부근. 쩌억 속살을 벌리며 밖으로의 통로를 열어주는 붉은 살점의 장벽.
핏빛 내부와 너무나도 이질적인,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푸른색 하늘에서 빛이 쫘악 새어 들어왔다.
이어 들려오는 소녀의 말.
"지금 대략... 400명이네요? 이론상 200명까지 살아나갈 수 있겠지만, 제가 그걸 기다려 줄 정도로 인내심이 길진 않아서요. 100명. 딱 100명만 선착순으로 받을게요. 나머지는 다 죽는 거고."
"!!!"
소녀의 한마디에 멍하니 홀린 것처럼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대원들이 무섭게 요동치며 서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선착순이라고?
그리고 그들의 움직이기도 전.
타타타타타타탕...
저 멀리, 떨어진 시가지 어딘가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다.
이어 들려오는 소녀의 한마디.
"좋아요. 똑똑한 사람들이 제법 많네요? 자... 당신은 나가도 좋아요."
스르르르륵...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매섭게 사람들을 내리치던 굵다란 촉수가 부드럽게 지상 어딘가로 파고들었다가 누군가를 들어 올렸다.
피 묻은 머리통을 든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대원이었다.
이윽고.
처억.
"뭐해요? 안 나가고."
소녀의 말에 둥지 바깥으로 내밀어진 대원이 머뭇거렸지만 망설임은 그야말로 짧았다.
타타타타탁...
죄책감을 잊겠다는 듯, 뒤로 안 돌아보고 내달렸다.
그리고 전투가 멈추고 무섭도록 적막해진 시가지 안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듣던 이들을 향해 소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러분들은 뭐해요. 안 싸우고."
"..."
"말했어요. 이제 99명."
소녀의 짧은 말 한마디를 시작으로.
“우우우우..”
“우아아아아악!”
투타타타타타타!
콰득!
콰드드득!
"아아... 안돼! 이놈들아! 정신 차려! 정신 차려라! 상식적으로 저 계집이 여유 있다면 이런 제안을 할 이유가 없단 말이다아아아아!"
쏟아지는 탄환을 피해 머리를 숙인 라스탕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지만 허사였다.
투타타타타...
콰드드드드득!
"좋아요. 좋아. 356... 344..."
소음 속, 빠르게 줄어드는 숫자들을 세며 만족스럽게 웃은 소녀가 그제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웃었다.
사실 문을 열어주고 몽땅 도망가게 하면 좀 더 빠르게 정리되었지만 그건 기각했다.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저기 소리치는 대장녀석처럼 의심 많은 놈들은 오히려 자신의 말에 허점이 있다는 걸 파악하고 물고 늘어졌을 테니.
지금은 희망보다는 공포를 자극해주는 게 포인트다.
"좋아. 그럼 이제... 집중을 좀 해볼까?"
잠시 후.
쿠르르르릉...
살점의 카펫 아래, 몇 가닥 촉수를 제외한 모든 촉수들이 뱀처럼 꾸불텅거리며 남쪽을 향해 뻗어 나갔다.
**
콰쾅...
콰콰콰쾅...!
둥지의 동쪽은 이미 적막하며, 남쪽은 격렬해지고 서쪽은 잦아들어 갔다.
이제 남은 곳은 북쪽뿐이었다.
"용감한 이들이 실패했고 이기적인 이들이 살아남았구나. 웃기는 일이지."
쿠르르릉...
저 멀리, 내리 찍히는 촉수 속에서도 분전하며 전진하는 강철의 성을 바라보던 노인이 칼의 피를 털어냈다.
서쪽의 이들은 용감했지만 결국 덧없이 죽어 나갔다.
남쪽의 이들은 이기적이었지만 어떻게든 성공할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남은 곳은 이곳뿐이었다.
"이만 포기하렴. 둘 다. 너희까지 죽이긴 싫으니."
"허억... 커헉."
"옳다고 이기는 게 아니란다."
노인이 금이 간 단검 한 자루를 떨그렁 던져버린 뒤 허리춤에서 두 번째, 팔뚝만 한 길이의 짧은 칼을 꺼내 들며 이오스와 카르멘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