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202화 (202/221)

202

두 번째 작은 칼을 잡고 조용히 서 있던 노인이 주변을 바라보았다.

"커헉..."

"포기하려무나. 계획은 착실히 완성되고 있으니."

이미 사방은 시산혈해.

팔, 다리, 몸통, 머리.

달려들었던 특전대 모두가 흔적도 없이 잘려 나가고 베어져 토막 난 채 북쪽, 인프라 시설 사방을 수놓고 있었다.

남아있는 이들도 대부분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으며, 그나마 싸울 수 있는 건 실력이 뛰어난 이오스와 카르멘, 단 둘뿐이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마저도 노인이 손속에 자비를 두었기에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이오스는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의 이성이 남아있다면 대체 왜!

"스승님.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 당신의 손으로 지켜낸 나라가 통째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오스의 외침에 노인이 멈칫했다.

상대의 피를 토하는 목소리가 고막을 여지없이 울려 두드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나는 더 이상 네가 생각하던 검공이란 노인이 아니란다. 아예 다른 존재지. 너희를 봐주고 있는 건 그자의 의식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내 성격일 뿐이란다."

저벅 걸어 자세를 다잡은 노인이 사방을 적막하게 둘러보았다.

중앙, 서쪽, 남쪽.

가리지 않고 온 사방에서 괴물과 인간이 부딪치며 생명의 격동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인은 그런 발버둥을 지켜보는 걸 좋아했다.

얼마나 좋아하냐면... 여왕을 지켜야 하는 임무가 주어져 있음에도 느긋하게 페이스 조절을 하며 이 격동을 놓아둘 정도였다.

사실 진즉 끝내 버리려고 했다면 이곳 북쪽을 차례대로 시작하여 서쪽, 남쪽 모조리 가리지 않고 홀로 단신으로 끝내 놓았을 것이다.

중앙은 비록 단신으로 해낼 수 있을지 애매하긴 했지만...

'다른 녀석들과 병력으로 몰아붙이면 이미 이겼겠지.'

스윽.

두 번째 칼을 들어 올리며 한 발 앞으로 내디딘 노인이 이오스와 카르멘을 보며 물었다.

"시간을 끄는 것도 너희에겐 나쁘지 않은 전략이겠지. 하지만 정말 괜찮겠느냐 그걸로?"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 사방으로 퍼져 인프라로 달려갈 모양새를 취하는 녀석들을 보며 노인이 웃었다.

녀석들은 여기서 시간이라도 끌면 어떻게든 다른 방향에서 해내 줄 것이라고 여기는 듯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쭈루루루루루룩...

갑자기 그들의 뒤쪽에 자리 잡은, 인프라를 휘감아 삼킨 살점 더미에서 실로 기괴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주둥이를 가진 생명이 무언가를 거칠게, 한층 더 격렬하게 빨아 마시는 듯한 소음이었다.

이윽고.

파사사삭...

파삭...

"!"

갑자기 말라붙으며 쭈그러들고 허공으로 바스스 흩어지는 살점 카펫과 구조물들을 본 주변 이들이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은 아직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는데, 갑작스런 변화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을 향한 검공, 아니 이제는 검종을 자처한 노인의 웃음소리.

"시간이 필요한 건 너희들만이 아니지. 여왕께서 이미 1단계를 마치신 모양이구나!"

가장 가깝고 저장량이 풍부했던 북부 영양액 저장소의 모든 것들을 빨아먹은 것도 모자라 그 용도를 끝마친 살점과 관들의 영양소마저 모조리 빨아들여 버렸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와 동시에.

꿀렁!

쿠드드드드득!

쿠드드드득!

저 멀리, 도시의 중심부로부터 거대한 진동이 터져 나오며 한층 더 짙고 검붉은 액체들이 혈관을 타고 군락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콰드드드드득...

콰드득...

"어헛!"

타타탁...

요리조리 숙주들을 피하고 베어가며 내달리던 소년, 카인이 갑작스레 군락 전체를 휘감은 변화에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한 자세를 다잡았다.

그사이 그렇게 소년의 앞부터 뻗어 나온 변화는 소년을 스치고 지나가 바닥과 주변의 구조물, 전체를 뒤덮었다.

일단 가장 명백한 변화는 색감이었다.

꿀렁...

검붉은 액체를 머금었던 살점과 기괴한 점막들의 색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이전이 선홍색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몸속 가장 깊은 곳의 피를 뽑아낸 듯한 진득한 느낌이다.

거기에 변화는 색깔만이 아니었다.

“그어어어억...”

“카아아아아앙!”

"...!"

점막으로 뒤덮인 구조물 사이에서 기어 나온 숙주 하나를 향해 본능적으로 칼을 휘두른 소년, 카인이 그 끝에서 느껴지는 반발력과 손아귀의 통증에 기겁을 하며 몸을 피했다.

그런 소년이 있던 자리를 내리찍는 두 주먹.

콰아아아앙!

“그어어억!”

'말도 안 돼. 훨씬 강해. 아까 전보다!'

쩌저저저적!

훨씬 더 빠르게 쫓아오는 숙주를 피해 몸을 날린 뒤 다시 한번 검을 휘날려 상대를 간신히 토막 낸 카인이 이를 악물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저런 최하급 변이 숙주는 종잇조각 마냥 베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사방에서 본격적으로 기어 나오기 시작하는 녀석들은 아까 전과는 양도, 질도 전혀 달라진 상태였다.

마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주인을 모시게 된 병사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가... 내가 구해내야 해."

자신의 동생을, 그리고 모두를.

까득.

사방에서 강렬하게 밀려드는 숙주들을 보고 이를 악문 소년이 한층 더 온몸의 뇌기를 끌어올리며 앞으로 한발을 내디뎠다.

위험해졌다고 피할 수 없다.

동생을 만나야 한다.

변해버렸다고 한들 본질은 자신의 가족이다.

마주하고 이야기를 해본다면, 분명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동생을, 더 나아가 이 군락 안에 있는 모두를 구할 수 있다.

잠시 후.

"비... 켜!"

콰드드드드득!

거칠게 칼을 휘두르며 주변의 숙주들을 조각낸 소년이 괴성을 내지르며 밀려드는 파도로 몸을 내던졌다.

**

중앙.

콰아아아아아앙!

<여왕의 변이 진행 중 - 페이즈 1 완료.>

<군락 내부 전체의 유기 조직들에 한층 더 강화된 유전 정보가 입력됩니다.>

<군락 내부 전체의 흡혈귀들은 권능이 강해집니다.>

<군락 내부 전체의 구조물은 체력과 방어력, 근력이 강해집니다. 이는 촉수와 점막 등의 방어 시설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군락 내부 전체의 병종들은 티어가 0.5단계 상승합니다. 기본적으로 체력과 흉폭함, 강도가 증가하며 개체에 따라 일부 특이 능력이 발현됩니다.>

<군락 내부 전체의 생산력이 증가합니다. 재료가 충분하다면 동일 시간 내에 더 많은 병종이 생산되며, 추가적인 특수 병종들이 생산됩니다.>

<여왕의 레벨이 30에 도달합니다. 아직 미성숙한 존재이나 지금부터는 태반에 연결된 상태로 산실 내부에서 걸어 나와 일부 활동이 가능해집니다.>

"끝내주는군."

콰아아아앙!

콰드드드드드득!

아까 전과는 비교도 안 될 기세로 몰아붙이기 시작하는 마수들, 그리고 눈앞에 좌르륵 떠오른 상태창을 보며 강태석이 혀를 찼다.

이래서 종의 특수성이라는 게 사기라는 거다.

아무리 이 군락이라는 거대한 구조물로부터 영양분을 모조리 빨아 먹었다고 해도, 세 시간도 안 되는 기간 내에 레벨 30을 달성하다니.

거기에 종의 알파라는 특성상 진화와 동시에 자신의 종속에 해당하는 모든 개체들의 업그레이드까지 완료시켜버린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자신을 몰아붙이는 거대한 병종들이 그 증거다.

콰아아아아앙!

크기 25m.

19m보다 훌쩍 더 커지고 힘과 체력은 그보다 더 늘어난 살점 거인의 공격을 피해낸 강태석이 숨을 고른 뒤 번개의 강기를 칼에 휘감아 허공에 길쭉하게 선을 그렸다.

허공에 그려진 금빛의 선, 이어 번지는 반투명한 구체.

이전에 강태석이 그려냈던 변화와 같다.

다른 게 있다면 훨씬 더 크고 강렬하다는 것이다.

파지지지지지직...

직경 15m, 흑기사 전체를 휘감은 구체가 굉음을 토하며 번쩍이다가 그 빛이 한계치에 달한 순간.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앙!

쩌저저저저저저저적!

번개의 구체를 구성하던 가닥, 수천수만 개의 실들이 모조리 풀려나가며 사방을 맹렬하게 할퀴고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조각내 버렸다.

그 반경 살상 범위가 자그마치 150m.

“크거어어억..”

“끄르르르르륵...”

터어엉!

터어어어엉!

순식간에 해일처럼 몰려들던 숙주 군단의 한 가운데 뻥 뚫린 빈 공간이 생겨났다.

안 그래도 살점으로 만들어진 녀석들이 수천 개의 칼날에 갈아진 결과 그 빈 공간을 그득 메운 건 흥건한 피의 호수였다.

촤아아아아악!

그 속에서 온통 피와 살점을 뒤집어쓰고 일어난 강태석이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동쪽은 성공, 서쪽은 실패, 남쪽은 진행 중.

그리고 북쪽은 상황을 보아하니 이미 종료된 것으로 보였다.

남은 출력은 40%인데 상대해야 하는 적은 이제 전투가 가능해질 정도로 자라난 여왕이었다.

그리고...

끄드드드득...

끄득...

촤아아아악.

강태석이 일어선 피의 호수 주변에서 기성을 토해내며 무언가 촤아아악 피를 뒤집어쓰고 일어섰다.

온몸에 번개의 검기에 의해 생겨난 생채기가 그득함에도 여전히 전투가 가능해 보이는 크기 8m, 이족 보행에 여섯 개의 근육질 팔과 눈 없는 얼굴을 한 괴물들이었다.

크기는 작지만, 전투력은 이전 마수들보다 훨씬 흉악했다.

구검기에 맞고 모조리 갈려 나가던 와중에 그 형상을 유지하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모습들이 이를 증명한다.

“그르르르륵...”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분노와 적의, 광기와 무지성을 담아 흉포하게 소리치며 나가오는 군락의 특수 병종들을 바라보던 강태석의 한마디 내뱉었다.

"환장하겠네 진짜."

이윽고.

콰아아아아앙!

피범벅 호수 한가운데, 우뚝 선 강태석이 달려드는 병종들과 거칠게 충돌하며 사방으로 피보라를 흩뿌렸다.

**

남쪽.

"으아아아아! 탈리만! 이 개자식아! 그러게 빠져나가자니까! 아까였으면 빠져나갈 수 있었는데도!"

"그라함."

"네."

퍼어억!

"꺼흑..."

뒤쪽, 묶인 상태로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다 그라함의 손날에 단번에 기절한 유력가 사내를 보며 콧김을 흥 내뿜은 탈리만이 통제실의 강철 의자에 앉은 채 바깥 상황을 살폈다.

상황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절망적이다.

방금 전, 돼지 마냥 추잡스럽게 떠들다가 기절한 녀석이 절망에 빠져 날뛸 만도 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콰아앙!

<좌측 주포가 전파되었습니다!>

<현재 하부 장갑 손상률이 37%입니다!>

<기동률이 69%까지 저하되었습니다!>

굳이 센서를 통해 듣지 않아도 여실히 전해 들어져 오는 육중한 진동과 충격들.

카메라 너머, 사방을 둘러싼 채 몽둥이로 두들겨 패듯 위아래에서 사정없이 내리 찍히는, 아까 전보다 훨씬 더 굵어지고 강해진 촉수들이 보였다.

그렇게 멈춘 구멍 사이를 통해 쉴새 없이 밀려들기 위해 발버둥 치는 온갖 종류의 괴물들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바닥, 천장, 내벽까지 사방의 모든 것들이 자신들을 적대시하며 공격하고 있다.

그나마 아까 전까지는 버틸 만했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공격이 거듭 거세어져 이 모양 이 꼴이다.

"안타깝군. 목적지까지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포격으로 처리하는 건 무리겠지?"

"그러기엔 촉수가 너무 잽싸군요."

콰콰콰쾅...

콰쾅...!

꾸불텅거리며 마치 뱀처럼 인프라를 둘러싼 채 나뭇등걸 마냥 포격을 버텨내고 있는 촉수들을 카메라로 보며 그라함이 대답했다.

온 군락이 살아있는 것처럼 목표물을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 저 방어 체계를 어느 정도 뚫어내지 않는다면, 목표에 대한 타격은 요원해 보였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도시 중앙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흉하면서도 고고한 위압감은 한층 더 강해진 상황이다.

무력이 없는 탈리만이라고 해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저쪽에서 새로운 우두머리가 태어났고,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상황을 한층 더 악화시켰다는 것을.

잠시 후.

"... 역시 최후의 수단을 써야겠지?"

탈리만의 말에 묵묵히 패널을 조종하던 그라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