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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에 우뚝 선 강태석이 온몸에 묻은 살점파편들을 쿠웅 흔들어 떨어낸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콰아아아앙!

<후우. 제시간엔 어떻게든 도착했네.>

서쪽은 실패했다.

북쪽 역시 영양분의 흡수를 끝내버렸다.

하지만 남쪽과 동쪽, 두 군데는 성공했다.

덕분에 밀려들던 군대와 촉수들의 공세가 주춤해져 제때 모두 베어내고 이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녀석들 역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둬버렸지만 말이다.

지금 눈앞에 선 소녀가 그 증거였다.

"오랜만에 다시 뵙는군요. 덕분에 제가 이곳에 서 있는 것일 수도."

쿠웅...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체를 이끌고 선 흑기사를 200m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마주하면서도 소녀는 한점의 불안함 없이 웃고 있었다.

그런 소녀를 보며 피칠갑을 한 흑기사 속, 강태석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내 덕분이라고?>

"그럼요. 덕분이지요. 수많은 우연이 모여 제가 이 자리에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당신을 만난 것이고."

소녀의 육신을 빌어 다시 태어난 존재가 웃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자신은 죽었었다.

자신의 권좌에 어울리는 거대한 천공의 성을 군락의 기반으로 삼으려다가.

한없이 무시하던 인간 놈들의 발버둥에 휩쓸려 군락이 무너지고 육체가 해체되었고 그 과정에서 일국을 몰살시키다시피 했지만,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진 않았다.

자신이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유전 정보를 계승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재능 넘치는 특별한 숙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군락의 체액이 그런 녀석들에게 바다 건너, 살아있는 이들에게로 운 좋게 퍼져 나간다?

신은 자신 같은 생명을 증오하는 편이었으며 자신은 그리 운이 좋지 않았기에 전생의 왕은 기대조차 하지 않고 인간 우두머리 놈들의 공격 속에서, 군락이 모조리 무너진 가운데 전신이 분쇄되어 죽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

자신은 살아났다.

만약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녀가 우연히 사내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사내가 번개의 씨앗을 소년이 아닌 소녀에게 먼저 주었다면, 앰풀을 마시는 순간 몸 내부에서 정화되어 버렸을 것이다.

설령 온 대지에 피의 씨앗들이 뿌려져 있었다 한들 소녀의 몸에 깃들지 않았다면 자신은 부활할 수 없었을 거라 이 말이다.

군락이 다시 서고 수많은 흡혈귀들이 부활할 수 있었을지언정 말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왕으로 태어난 소녀는 눈앞, 강철의 갑주를 입고 선 사내에게 감사했다.

"어떤 기분이신가요? 당신의 쓸데없는 온정 덕분에 이 지옥이 완성된 건? 여기까지 온건 어떻게 보면 당신들이라는 퍼즐이 맞춰져서 가능했던 것이지요."

소녀가 웃으며 흑기사와 그 옆, 한때 이 육신의 혈육이었던 작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결국 자신이라는 존재의 완성은 저 둘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피어날 세상의 지옥들 역시, 말하자면 저들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런 소녀의 말에 소년은 움찔했지만...

키잉...

철커덕.

<뭔 헛소리야. 다 니 잘못이지. 내가 뭘 어쨌다고.>

"..."

<하여간 정신 나간 놈들은 이게 문제야. 죄다 남 탓이라니까? 어릴 때 덜 맞고 자라서 그런지.>

"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싸울 준비를 하는 상대를 보며 소녀가 으쓱했다.

보아하니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옆의 소년을 이용해 둘이 상쟁하는 꼴이나 죄책감에 빠지는 꼴이라도 보고 싶었는데, 그런 게 먹힐 상대는 아니어 보였다.

당장 상대의 행동이 이를 증명했으니.

퍼억!

“커헉!”

<이눔 시키는 안전한 데 박혀 있으라니까 왜 여기까지 온 거야.>

묵직한 쇳빛의 강철 주먹을 가볍게 쥐어 안 그래도 기절 직전의 소년을 가볍게 쥐어박은 상대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소년을 살포시 쥐어 흑색의 기체, 가슴팍으로 가져갔다.

이어 꿀렁이는 가슴 표면으로 소년을 집어삼켰다.

"방해될까 미리 손을 써버리네요. 과감해요. 그나저나... 다른데 대피시키는 게 낫지 않겠어요?"

꿀렁.

자신의 손끝으로 핏방울을 만들어 내던 소녀가 상대를 보며 말했다.

기체 안으로 대피시킨 건 얼핏 보면 좋은 선택 같지만, 결정적인 폐해가 있다.

사내가 자신에게 지면 소년도 함께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야 안전한 곳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사내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소년을 설득해서라도 이곳에서 도망치게 하는 게 나았다.

비록 온 사방이 지옥이라 도망칠 곳이 마땅치 않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런 소녀의 말에.

<응? 무슨 소리 하는 거냐?>

"...?"

<설마 내가 너한테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이길 거란 건가요?"

<당연하지.>

"..."

상대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소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자신을 뭘로 보고?

자신은 이들의 왕이자 여왕, 종의 혁명이자 지주다.

비록 지금은 조금 나약하지만, 일개 단신으로 거대한 국가와 왕을 자처하는 수많은 이들을 갈아 마신 존재란 말이다.

한낱 저런 깡통 조각에 패배하실 몸이 아니다!

"뭐 좋아요. 그 인형째로 박살 난다면 존경심이 조금 생길 수도."

이후 그대로 군락 밖에 박제해 걸어 두리라.

자신을 향해 칼을 휘두른 죄에 대한 최후로.

이윽고.

키이잉...

콰아아아아아아앙!

소녀의 손끝에 맺혀있던 핏방울이 폭발하며 강렬한 적색의 섬광이 마치 광선의 포격처럼 전방을 통째로 휩쓸었다.

**

콰콰콰콰쾅...!

"하아... 하아... 흐하하하. 다 죽으라지. 이제."

중앙에서 뻗어 나오는 핏빛 섬광과 굉음, 이를 바라보던 소녀가 상반신만 남은 채 꾸물거리며 바닥을 기었다.

사방이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다.

군락 벽면에 처박힌 강철의 요새는 기적과도 같은 일격을 끝마친 채 연기를 내뿜으며 작동을 정지했다.

그 안으로 살아남은 병종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어떻게든 안에 있는 녀석들을 집어삼키고 으깨려 하고 있었지만, 소녀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재수 없는 검사 놈도 죽었다.

더러운 입 덩어리도 죽었다.

짜증 나는 노친네는 어디서 어떻게 된 건지 행방조차 모르겠으며, 새로 태어난 여왕이란 년은 자신에게 관심조차 없다.

하긴 자신이라도 그럴 테지.

설령 군락이 무너지고 자신 같은 귀족들이 몽땅 죽어도 그년만 건재하다면 이 흡혈귀라는 종족은 다시금 재건해 융성해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자신도 더이상 그 재수 없는 계집과 이 거대한 둥지의 안위를 신경 써 줄 이유가 없다.

"벗어날 거야. 이곳을 벗어나서... 나만의 새로운 둥지를 세워야지."

쿠궁...

쿠구궁...

함락되듯 병종들 사이에서 항전하는 강철의 성과 중앙의 격전을 뒤로한 소녀가 아득바득 상체로 기며 방금 전 충돌의 여파로 구멍이 뚫린 군락의 외벽, 그 바깥을 향했다.

굳이 이곳이 아니더라도 바깥세상에는 아직 먹을 존재들이 많다.

그곳으로 가서 온갖 존재들을 먹어 치워 회복하고 강해져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리라.

그렇게 한참을 기어간 소녀가 어느덧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경계까지 도달한 순간.

처억.

"!!!!"

자신의 상반신을 후욱 들어 올리는 손아귀에 소녀가 저도 모르게 홀로 버둥거렸다.

고개를 들어 뒤를 보고 싶었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들어 올린 손아귀가 움켜쥐고 있는 것이 자신의 머리통이었으니.

버둥거려 봤자 그 아래 몸통만이 뒤흔들릴 뿐이었다.

그런 소녀를 향해 들려온 한탄과도 같은 목소리.

"결국 너희들도 별거 없었구나.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별것 없었어."

"...!"

"그냥 죽어라."

이게 소녀가 들은 마지막 한마디였다.

소녀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

꽈아아아아악.

콰드드드드드드득!

강하게 움켜쥔 늙수그레한 손아귀가 그대로 소녀의 머리통을 박살 내 버렸다.

**

콰아아아앙!

"어째서... 어째서! 나는 지금 벽에 도달할 정도로 강해졌는데!"

사정없이 강철의 칼에 두들겨 맞으며 소녀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몸 주변을 둘러싼 핏빛 장막이 아직까진 굳건히 버텨주고 있었지만 그뿐이다.

콰아아아아앙!

"이익...!"

뻗어 내뿜은 광선이 상대를 후려쳤지만, 온몸을 감싼 정체불명의 쉴드에 그대로 감싸 흩어지고 말았다.

반면 자신의 것과 비교하면 무식하기 짝이 없는 몽둥이질과 같은 공격은 사정없이, 그리고 착실하게 자신의 장막과 육신을 갉아 먹어온다.

지금은 버텨내고 있지만 이마저도 곧 한계가 올 것이다.

쩌저저적...

쩌적!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는 장벽을 본 소녀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자신이 군락을 통해 장막을 회복하는 속도보다 박살 나는 속도가 더 빨랐다.

두 개의 줄은 끊겼고, 한 개는 조금 빠른 각성을 위해 무리해서 집어삼켰다.

이제 영양을 공급하고 있는 관은 서쪽의 하나뿐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겼건만 안타깝게도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분명 내가 벽에 먼저 도달했는데... 대체 왜!"

그런 소녀를 향해 다시 한번 칼이 날아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앙!

흑기사 속, 묵묵히 상대를 후려쳐가던 강태석이 소녀를 보며 혀를 찼다.

보아하니 변화 중 나와서 그런지 녀석은 아직 소녀의 기억이 메인이고, 흡혈귀왕의 기억이 주가 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만약 흡혈귀왕의 상태가 메인이었다면 녀석은 결단코 자신과 맞서 싸우지 않고 군락의 모든 것을 퍼부어서라도 소모전을 펼쳤을 테니까.

"안타까운 상태지. 스스로에 대해 잘 알지를 못하니."

강태석이 묵묵히, 이제는 도망칠 길조차도 없는 상대를 후려치며 중얼거렸다.

물론 레벨 30, 벽의 끝자락이 일반적인 생명체 기준에서 강함의 상징이기는 하다.

이 벽을 중심으로 또다시 존재의 변화가 생겨나는 것도 맞다.

이 벽에 도달했다는 것만으로도 도달하지 못한 이들과는 상당한 격차가 생겨나니까.

거기에 이 대지와 자궁의 지원을 받고 있는 상대로서는 스스로가 무적이라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존재>들끼리의 싸움을 상정한 것이다.

자신과 녀석 같은, <화신>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존재들은 결코 그런 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평범한 생명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그릇은, 똑같은 물을 채워 넣어야 한다고 해도 종지와 호수만큼 용량이 다르다.

녀석은 안타깝게도 그 그릇을 모두 채워 넣기 전 자신에게 정면으로 맞부딪쳐 왔다.

아무리 레벨이 높아도 볼륨에서 밀리면 답이 없는 법이다.

잘 정련된 강철로 만들어진 검이라도 커다란 바윗덩어리와 부딪치면 찌그러지듯 말이다.

무엇보다...

"나도 이제 거의 레벨 30 다 되어가고."

콰아아아앙!

띠링!

<현재 레벨 : 27>

“안돼애애애애!”

흑기사 속,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강태석은 비명을 내지르는 소녀를 바라보다 흘긋 콕핏 옆에 기절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사실 소녀야 안타깝지만 봐주며 싸울 수는 없다.

아니, 일단 무조건 한번 죽여야 한다.

소녀가 다시 소녀로 운 좋게 깨어날지, 흡혈귀왕으로서 죽을지는 그다음의 문제다.

콰아아아앙!

차가운 눈초리로 소녀를 바라본 강태석이 마저 칼을 휘둘러갔다.

완전히 끝장내버리기 위함이었다.

쩌어엉!

깨진 장막, 그 아래 절망한 소녀를 향해 압도적이라고 할 만큼 커다란 칼이 내리꽂혔다.

그렇게 내리 찍힌 칼이 소녀를 으깨버리기 직전의 순간.

콰아아아아앙!

"... 이제 등장했구나."

한낮 노인의 몸뚱이에 평범한 칼, 그것만으로 자신의 일격을 막아내고 소녀 앞에 선 상대를 보며 강태석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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