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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멸망 n% 진행중-205화 (205/221)

205

콰드드드드득!

놀랍게도 인간의 몸으로 거신의 칼을 받아낸 이는 노인이었다.

이윽고.

콰아아아아앙!

부드럽게 칼을 놀려 강철의 거도를 튕겨내 땅에 처박은 노인을 내려다보던 흑기사 안의 강태석이 혀를 찼다.

"이놈이 진짜였구나."

동시에.

쫘좌좌좌좌좍!

이제까지 소녀의 진력이 담긴 공격에도 물러선 적이 없던 강태석이 자신을 향해 사정없이 그어지는 참격들을 피해 뒤로 몸을 날렸다.

**

콰가가가가가각!

쩌어어억!

휘둘러지는 칼과 조각나는 대지와 하늘, 그리고 뒤에서 이 모든 걸 지켜보던 소녀가 눈을 끔벅였다.

아직 여왕으로서 보다는 소녀로서의 기억이 더 강렬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인지 모든 것들이 낯설고 놀랍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다.

'분명 내 종이거늘... 어떻게 나보다 더 강하지?'

쿠르르릉...

소녀가 자신의 앞에 등을 보이며 선 노인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수많은 기억과 정보는 아직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의문이 생기면 마치 검색을 하듯 신중히 떠올려봐야 알 수 있었다.

완전한 각성을 마치고 나왔다면 모를까, 아직 소녀는 1차 페이즈 진행 중이었다.

여전히 60시간가량의 추가적인 작업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게 떠올리고 떠올려봐도 눈앞의 존재에 대해서는 의문뿐이었다.

어련히 자신에게 복종하는, 부활한 흡혈귀들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자신의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이런 종류의 흡혈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

"하여간 다들 실망이다 실망. 너도 그렇고. 둥지를 지키는 녀석도 그렇고."

"... 무슨 말이죠?"

이에 뒤를 돌아본 노인이 쫘악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으며 말했다.

무엇을 집어삼켰는지, 온통 시뻘겋게 물든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뭐긴. 새로 현세에 태어나 구경이나 좀 해볼까 했는데... 너희 정도라면 역시 그냥 내가 삼키는 게 낫겠다 이거다."

"뭔..."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

터업.

"익... 이이이익!"

주름진 손을 뻗은 노인이 그대로 소녀의 머리통을 뻗어 강하게 움켜쥐고는 웃는 표정 그대로 소녀를 들어 자신의 앞으로 가져왔다.

콰아아아앙!

콰앙!

소녀가 남은 힘을 쥐어짜 적광을 퍼붓고 장막을 펼치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대체 몸뚱이가 무슨 재질로 이루어진 건지 깡마른 근육의 육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어력과 강도를 자랑하며 퍼부어지는 모든 공격을 무시했다.

물론 소녀가 흑기사와의 격투로 인해 대부분의 힘을 소진한 것도 컸지만 말이다.

하지만 소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멀쩡했다 한들... 자신의 시종을 자처하는 척하던 이 정체불명의 노인에게선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쩌어어억...

"아아... 아아아..."

시뻘게진 이를 자랑하는 쩍 벌어진 입이 그대로 다가와 소녀의 머리통을 베어 물려던 그 순간.

쾅쾅쾅쾅...

콰아아아앙!

거침없이 내달려온 흑기사가 그대로 바닥에 선 노인을 향해 싸커킥을 후려갈겼다.

**

콕핏 안.

콰아아아아아아앙!

"... 망할. 진짜 어느 정도 <화신>화가 진행된 놈이잖아."

콰드드드득...

한 손에는 소녀를 여전히 움켜쥔 채, 다른 한 손으로 흑기사의 거대한 출력을 버텨내고 있는 노인을 본 강태석이 혀를 찼다.

수백 톤 대 수십 킬로그램.

깡마른 노친네가 그 가느다란 팔뚝으로 이 거대한 병기의 출력을 온전히 감당해내고 있다.

육체도, 기예도, 마력도.

그 모든 것이 상식선을 넘어서 현실을 무시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영웅, 초인, 대제.

옛사람들은 그러한 모든 존재들에게 감탄과 경외, 존경의 의미를 담아 각양각색의 의미로 불렀지만 강태석은 이를 좀 더 다르게 불렀다.

<화신>.

마치 인세에 신의 파편 자락이 강림한 듯, 동레벨 대비 정말 말도 안 되는 권능과 권세와 강함을 구현할 수 있는 사기적인 존재.

말하자면 마땅히 세상과 전설의 주인공이 될법한 이들.

어느 정도냐면... 이들은 벽을 넘은 한 단계 위의 상위 존재도 어느 정도 대적 가능하고, 홀로 감당 불가의 마수와 병기조차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이다.

지금처럼 말이다.

후우욱...

콰아아아아아앙!

아래에서 위로 내질러진 참격에 후려 맞은 순간, 흑기사를 둘러싸고 있던 쉴드가 일격에 와장창 박살 나고 가로막은 왼 팔뚝 전체에 깊숙한 자상이 생겨났다.

금속섬의 포격도, 끝없는 마수병단들의 공격도, 거대한 군락의 방위도 모두 버텨내던 쉴드가 일격에 말이다.

비록 출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위력이다.

하지만 강태석 역시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앙!

왼손으로 상대의 공격을 가로막은 강태석이 그대로 오른손의 칼을 휘둘러 지상, 한없이 낮은 곳에 있는 노인을 내리찍었다.

정확히 말하면 목표는 노인의 오른손,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소녀인 여왕을 쥐고 있는 팔뚝을 노렸다.

후우우우웅!

왼팔을 포기하면서까지 내리 찍힌 공격이 강렬한 파공음을 토해내며 작렬한 순간.

콰아아아앙!

혀를 찬 노인이 그대로 소녀를 땅바닥에 내던진 채 오른손으로 허리춤, 또 다른 칼을 뽑아 들어 그대로 아래에서 위로 올려 그었다.

이어 허공에 한 줄기 핏빛의 선이 아로새겨졌다.

쩌저저적...

쿠우우우우우웅!

"쯧."

완전히 잘려 나간 왼팔, 그리고 토막 나 잘려 나간 칼끝을 보며 물러선 강태석이 혀를 찼다.

공격이 어찌나 강렬했는지 희생 없이 일격을 먹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상대할 때마다 완전히 사기군.'

강태석이 눈앞의 노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화신이란 존재들은 약해서 레벨이 30에 머무르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너무 강하고 거대해서, 채워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상당한 시간을 레벨 30에서 머무르는 것이다.

예전, 자신이 전마강갑을 채우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레벨 10을 넘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벽을 넘기 전에도, 벽을 넘고 나서도 여타 다른 30레벨의 존재들과는 하늘과 땅 차이의 무력과 특별함을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격이 다른 존재로서 말이다.

하여간 그런 놈을 상대하느라 벌써부터 피곤할 지경이었지만,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아아... 아아... 으아아... 안돼..."

쿠릉.

오른손.

강철의 거대한 장갑을 쭈욱 핀 강태석이 잡아채 구해온, 끊긴 탯줄을 보며 안절부절하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

"아아... 아아아..."

띠링!

<군락과 여왕을 연결하는 탯줄이 끊겼습니다.>

<훌륭합니다! 당신은 여왕의 완전 각성을 저지했습니다.>

<탯줄이 끊긴 이상 어마어마한 양의 영양분을 필요로 하는 여왕의 각성 과정은 일개 섭취 등의 방법으로 완수될 수 없습니다.>

<여왕의 상태가 페이즈 1에 머무릅니다.>

<미완성 상태로 각성이 끝났기에 기존 숙주의 인격과 성향이 상당 부분 영향력을 차지합니다.>

눈앞에 쉴새 없이 떠오르는 창들, 그리고 절망하듯 당황하며 울먹이는 소녀를 보며 강태석이 코웃음을 쳤다.

여왕이란 소녀가 이뻐서 구해준 것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강한 <화신체>에게 먹을 것을 더 허용해 주면 정말로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화신이란 탐욕과 허기, 갈망의 존재와도 같다.

너무나 거대한 내부를 채우기 위해 끝없이 삼키고 게걸스레 처넣으며 강해진다.

거기에 흡혈귀의 알파같이 거대한 먹잇감을 내어줄 수는 없다.

'혹시 내가 먹으면 몰라도.'

그 속내를 살짝쿵 감춘 강태석은 손바닥의 소녀를 향해 퉁명스레 외쳤다.

<정신 차려라. 이대로 잡아 먹히기 싫으면.>

쿠르르릉!

진동하는 군락 속, 무심하게 자신들 쪽을 바라보는 노인을 강태석이 마주 보았다.

먹을 것을 눈앞에서 놓쳤다지만 급해 보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상대의 얼굴에 서린 것은 여유와 호기심이었다.

그리고 강태석은 저런 표정이 의미하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강자들 특유의 자신감의 표현이자 발로다.

녀석은 지금 전혀 놓쳤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언제든지 쫓아와 자신 둘을 마무리 짓고 먹어 치울 수 있다고 여기기에 저리 편안하게 자신들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강태석의 말에.

"으으... 하아. 후우. 흡."

정신을 차린 소녀가 강태석이 탄 흑기사와 노인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사태를 파악한 듯 호흡을 진정시키고는 손바닥에서 뛰어내렸다.

이어 몽글거리며 피어나는 피구슬들.

후웅...

후우웅...!

소녀의 몸 주변에서 피어난 수십 개의 피구슬들이 실로 위협적인 기세를 머금은 채 빙글빙글 주변을 맴돌았다.

비록 탯줄이 끊겨 무한에 가까운 영양분의 공급은 끊어졌다 한들 소녀는 1차 각성을 마친 종의 알파에 레벨이 30이나 되었다.

전력 이상을 넘어 충분히 강자라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거기에 하나 더.

“구어어어억...”

“거어어어어어...”

“그아아아아아아아!”

쿵...

쿠우우우우!

쿠웅!

소녀와 강태석, 그리고 노인의 주변으로 도시 각지에서 몰려든 군락의 수많은 병종들이 방벽을 만들 정도로 몰려들어 사방을 에워쌌다.

도시를 공략해 들어올 때는 그토록 거슬리던 녀석들이었지만, 소녀가 일시적으로 아군이 되니 그토록 든든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눈에 차는 건 아니었다.

<더 없어?>

"네녀석들이 다 죽였잖아요. 이게 지금 내 통제력으로 불러들여 올 수 있는 전부예요."

강태석의 말에 소녀, 에멜이 톡 쏘아붙였다.

자신의 군대를 통째로 갈아버린 게 누구인데 저런 소리를?

자신이 탯줄과 연결되어 있을 때는 군락 전체를 자신의 몸처럼 다룰 수 있었지만, 탯줄이 끊긴 이상 아무리 여왕인 자신이라고 해도 통제에는 한계가 있었다.

비록 알파로서 권위는 살아있다고 해도 하나하나를 부리기에는 버겁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내 몸처럼 부리느냐, 혹은 왕으로서 인정받느냐의 차이였다.

당연히 반발도 생기고 빈틈도 생기는 두 번째에 비하면 첫 번째가 압도적으로 좋다.

물론 완전 각성을 마쳤다면 탯줄 따위 없어도 군락 전체를 자신의 몸처럼 부렸겠지만 1차 각성에서 끝나버렸으니 그것도 무리다.

모두 뒤쪽, 이 사내 때문에!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흑기사에 탄 강태석은 여전히 재미있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아까 전부터 궁금하던 한 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놈 누구지 근데?'

콕핏 안에서 강태석이 노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물론 상대의 육신 주인이 누구인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검종.

칸헬 이래 최고의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받은 뇌지국의 검사.

하지만 상대가 검종이 아니라는 건 강태석 본인이 너무 잘 알았다.

상대가 지금 눈앞의 수준으로 강했다면 적통과 신흥으로 구분되어 있을 리가 없으니까.

즉 상대는 검종의 육체를 차지한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흡혈귀라고 보기에는 그 기운이 이질적인 데다 여왕의 통제로부터 너무 벗어나 있다.

여러모로 정체불명이었다.

그때.

“이래서야... 공평하지 않구나. 조금 균형을 맞춰 줘야지. “

저 멀리 떨어진 노인의 중얼거림.

동시에.

꾸르르르르륵...

꾸르륵...

노인의 발치로부터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쭉쭉 펼쳐져 나가는 피의 물결은, 마치 물감이 번져가는 노을처럼 대지를 타고 퍼져 나가서 순식간에 반경 500m 통째로 뒤덮었다.

그리고 이를 본 순간.

<알았다.>

한 가지를 떠올린 강태석이 노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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