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206화 (206/221)

206

<… 누군가 했더니. 이 이름의 원주인이었네.>

콰르르르릉!

순식간에 쭉쭉 뻗어나간 피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군락의 한가운데, 선홍빛 카펫을 더욱더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쿠르르르릉!

그 변화가 원체 강렬했기에 멀리 떨어진 이들 또한 이를 지켜볼 수 있었다.

거의 반쯤 죽다 살아난 탈리만과 그라함들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쿨럭... 후우. 갑자기 괴물 놈들이 빠져나간 건 다행이긴 한데... 저건 또 뭐지?"

상황을 살피기 위해 그라함에게 업혀 이동 요새, 가장 높은 곳으로 나온 탙리만이 군락 중앙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지막 기동 모드를 사용하고 군락 외벽에 처박혀 작동을 중지한 이동 요새, 그 속에 갇혀 끝없이 몰려들던 병종들과 싸우던 자신과 생존자들은 모두 얼이 빠져있었다.

하나하나 착실히 죽어가던 와중에 절망에 빠져있던 도중, 갑작스레 녀석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덕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대신 더 기묘한 것을 마주하고 말았다.

불길하면서도 흉흉한, 뭔가 대재앙의 전조와도 같아 보이는 붉은 피의 원을.

순간.

"저건... 저건... 칸헬 님의 재림이다. 칸헬 님의 재림이야!"

"저 얼간이는 아직도 안 죽었군. 안타깝게도 말이야."

따라 나와 난리를 치고 있는 적통 쪽, 유력가의 주인 중 하나를 보며 탈리만이 혀를 찼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처지였기에 풀어줬더니, 싸움이 끝나자 저런 헛소리나 하고 있다니.

애초에 바닥부터 시작하여 지금의 자리에 도달한 탈리만으로서는 과거에 집착하는 적통들이 이해가 안 갈 지경이었다.

세상이 끝없이 변화하고 있는데 도무지 수백 년 전의 존재에 집착해 무얼 한단 말인가?

하물며 세상이 망해가고 지옥으로 변해 목숨마저 간당간당한 지금에서도 저런다니.

하지만 그런 탈리만의 목소리를 들은 사내가 고개를 돌려 버럭 소리쳤다.

"멍청한 자 같으니! 과거 대제의 권능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후손들이 우매하여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지. 저게 바로 대제를 상징하는 권능이라고!"

"...?"

사내의, 살짝 광기마저 어려있는 외침과 손가락질에 탈리만의 표정이 심상찮아졌다.

보아하니 저 멀리 핏빛 대지에 대해 뭔가 아는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탈리만을 무시한 사내가 너머, 도시 중앙을 향해 숭배하듯 괴성을 질러댔다.

"칸헬이시여! 보여주십시오! 당신의 군대가 우리를 구원하는 모습을!"

그리고 그 말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쿠르르르릉...

꿀렁.

꿀러덩.

미세한 진동이 스치며 대지를 뒤덮은 핏빛 그림자가 꿀렁대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

꿀렁...

꿀러덩...

반경 수백 미터 지상을 뒤덮은 핏빛의 장막이 요동치며 무언가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바닥에서 솟구치기 시작한 것들의 형태와 크기는 그야말로 제각각이었다.

어떤 것들은 수십 센티, 어떤 것들은 수십 미터까지.

쿠르르르르릉!

“쿠아아아악!”

“그르르륵...”

그야말로 쉴새 없이 솟구쳐오른 수천, 수만 개의 덩어리들이, 우뚝 선 채 괴성을 내지르는 군락의 병종들을 이리저리 밀쳐내고 그 사이로 자리 잡았다.

이어 그렇게 자리 잡은 핏덩어리들이 다시 한번 꾸물거리며 그 모양새를 바꿔가기 시작했다.

마치 조각가가 심혈을 다해 빚어낸 조각품들인 마냥 더 세밀하게, 더 섬세하게.

그렇게 드러난 건...

타탁.

"저게 대체..."

<너희들 살아있었구나?>

어느새 달려와 합류한 두 남녀, 카르멘과 이오스를 향해 강태석이 묻자 멈춰서 지켜보던 카르멘이 퉁명스레 대답했다.

"어떻게든 살았죠. 그나저나 저게 뭐예요?"

쿠르르릉...

눈앞, 모든 변화를 지켜보던 카르멘이 물었다.

벌어지는 현상은 그야말로 기이막측.

짐승, 인간, 전마, 거인, 요정.

오만 존재들이 핏덩이에서 변해가며 스스로의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그 갑작스런 등장에 열받은 마수들이 본능적으로 주먹과 칼날을 휘둘러댔지만 허사였다.

촤아아아악!

촤아악!

칼로 물을 베듯, 전차도 우그러트릴 만한 역도가 실려있었지만, 병종들의 공격은 모조리 핏덩어리 존재들을 관통하고 스치며 무의미하게 빗나갈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무표정하게 서서 사방을 둘러보는 핏빛 존재들의 섬뜩한 모양새에 질문한 카르멘이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이곳에 가까이 올 때부터 상황이 기묘하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다.

흡혈귀의 여왕으로 추정되는, 멀리서 보기만 해도 섬뜩한 기운을 풍겨내는 존재가 흑기사와 대치하기는커녕 한편 마냥 함께 서서 무언가를 대적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너머에 서 있던 건 검공이자 검종, 자신들의 스승이자 여왕의 수하.

한데 왜 여왕이 한낱 수하에게 긴장하며, 그것도 칸헬과 대치하며 서 있단 말인가?

<용량이... 모자라군. 너희는 살려두도록 하지. 운이 좋구나.>

그 한마디와 함께 자신들을 살려두고 떠났던 검공을 다시 마주한 카르멘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그때 강태석이 저 너머, 핏빛 군대 한가운데 오롯하게 선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구냐에 대한 카르멘의 질문에 대한 답을.

"너희가 그토록 기다리던 존재지. 너희 초대 왕."

"...?"

"네 피가 저 녀석을 깨운 모양이야."

카르멘과 이오스의 반대편에 선 소녀를 향해 강태석이 말했다.

**

쿠르르르르릉!

"오오. 다들 오랜만이구나. 그래. 너도 오랜만이고. 네 녀석도."

“크아아아아악!”

“그르르르륵...”

마치 섀도복싱을 하듯 쉴 새 없이 괴성을 내지르며 주먹을 휘둘러대는 군락의 병종들 사이, 무심하게 우뚝 선 핏빛 군세의 하나하나를 살피며 검공, 검종, 아니 그마저도 아닌 내면의 존재가 자신의 이름을 떠올리며 흡족하게 웃었다.

칸헬 드미트리.

"네 녀석도 참으로 오랜만이야. 세상도 오랜만이고."

스르르륵.

자신의 옆에 솟아난, 핏빛 여인의 조각상의 뺨을 한번 스륵 매만진 드미트리가 크게 숨을 들이 마쉬며 웃었다.

상쾌한 공기는 아니다.

오히려 지독히도 끈적하고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눈을 뜬 이후 온 사방이 처음부터 이랬다.

피, 저주, 원념, 광기.

하지만 그랬기에 드미트리는 눈을 뜬 순간부터 웃을 수 있었다.

세상이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독히도 자신이 활동하던 그 시절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피와 광기, 전쟁이 흘러넘치던 그때와 말이다.

콰득.

주먹을 쥐었다 핀 드미트리가 숨을 후 내쉬었다.

인간으로서의 죽음.

그리고 흡혈귀라는 종으로서의 재탄생.

아마도 가장 순도 높은 피를 통해 전승되어오던 자신의 기억과 능력이 흡혈귀라는 녀석들의 피에 의해 자극받아 깨어났을 것이다.

깨어난 순간 몸 내부, 흡혈귀의 피를 통해 태어난 귀족이니 뭐니 하는 놈이 당황하며 자신을 집어삼키려고 했지만 검공이라는 후손의 피를 통해 깨어난 자신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후 이루어진 건 즉각적인 포식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육체와 종, 그리고 식사에 대한 만족스러움이 가시기도 전 흥미진진한 것들이 연속적으로 밀려 들어왔다.

살아남은 자신들의 후손이라는 존재들, 수도를 통해 태어나려는 여왕과 흡혈귀들.

그리고 그 둘의 격돌.

사실 드미트리 입장에서는 둘 다 <맛있어>보였지만 안타깝게도 용량이 그득 차 모두 삼키기 힘든 상태였고.

그렇기에 드미트리는 결정했다.

음식이 좀 더 맛있게 익기를.

서로가 싸우고 싸운 끝에 남은, 가장 강하고 맛깔스러운 것들만을 먹어 치우기를.

그리고 지금이 그 결과물이다.

"솔직히 나는 너희들이 약해빠진 내 후손들 정도는 모두 먹어 치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오만한 것 치고는 그닥이었구나."

스윽.

드미트리가 자신의 옆에 솟아난, 방금 전 먹어 치웠던 소녀를 쓰다듬으며 흉악하게 웃었다.

흡혈귀들 또한 먹어보니 맛이 있더라.

아마 여왕이란 존재를 집어삼키면 또 다른 색별한 맛과 권능을 자신에게 선사하리라.

그리고는 세상으로 나아가 전생을 다시 한번 반복할 것이다.

정복하고 집어삼키고 짓밟고, 그 다음에는...

"... 아직 너희가 세상에 있는지는 모르겠구나. 하여간 고마웠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날 죽여줘서."

드미트리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그래, 고맙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그렇게 개죽음당할지 몰랐으니까.

그것도 있는지도 몰랐던, 어둠 속의 수상한 놈들에게!

어림잡아도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녀석들이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순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다시 만나면 이번에는 자신이 녀석들에게 지옥을 보여줄 거란 것을.

그러니 그 전에....

"일단 여기부터 식사를 마치고."

그 말과 동시에.

퍼거거거거걱!

퍼걱!

콰드드드드득!

“그아아아아아아아악!‘”

가만히 서 있던 핏빛 군세들이 무심하게 자신을 공격하던 군락의 병종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

콰드드드득!

콰득!

"망할 놈들이!"

콰아아아아앙!

자신을 향해 달려들려는 핏빛 요정과 수인, 기사 등 각양각색 병사들을 향해 적광의 포격을 내뿜은 소녀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하지만 소녀의 고함과 다르게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았다.

콰드드드득!

콰득!

꿀렁!

박살 났던 핏빛 병사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물처럼, 혹은 그림자처럼 뭉치며 제 형체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녀석들이 두려움을 모른다는 듯 소녀와 소녀를 지키려는 사방의 병종들을 향해 내달려 들었다.

심지어 생전의 스킬과 기예까지 지닌 채!

캬아아아아아악!

파아아아아아아악!

"윽..."

작은 핏빛 요정의 입에서 터져 나온 흉악한 포효, 이에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충격을 최소화한 이오스가 옆을 보며 외쳤다.

"칸헬! 어떻게 합니까!"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앙!

반토막 난 칼을 휘둘러 달려들던 핏빛 병사 열둘을 으깨버린 강태석이 저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긴. 원흉을 제거해야지. 이대로는 끝도 없어.>

”캬아아아아!“

그럭...

콰드드득!

수만의 병종과 핏빛 병사들이 뒤섞여 싸우는 전쟁터 너머, 흐뭇하게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을 강태석이 바라보았다.

이 핏빛 병사들은 모두 실체가 없는 드미트리의 권능이었다.

과연 피와 번개의 주인이라는 이명이 왜 생겼는지 알법했다.

그야말로 전장의 주인.

자신이 죽이고 집어삼켰던 모든 존재가 고스란히 자신의 종으로 부활해 자신을 위해 싸우는 군대가 된다.

문제는 끊임없이 영양분을 필요로 했던 소녀의 군대와는 다르게 이는 세상이 내려준 이능이자 권능, 혹은 권한이라 마력 소모가 지극히 적었다.

이 피의 군대는 노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으켜 세우는 게 아니다.

단지 세상이 허락한 권능을 제멋대로 발휘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또한 화신된 존재로서의 특권이었다.

하여간 이대로 가면 승부는 뻔하다.

유한한 소녀의 군대와 무한한 노인의 군대.

소녀 또한 끝까지 각성했다면 모를까, 이대로는 소모 당하다 패배한다.

그렇기에 그 전에...

'처리해야지.'

키이이잉!

"엇... 엇..."

콕핏을 열고 기절해있던 소년, 카인을 바닥에 떨군 강태석이 다시 콕핏을 닫으며 바닥에 선 이오스와 카르멘과 카인을 향해 말했다.

<여왕을 지키면서 버텨라. 내가 처리하고 오는 동안.>

손 하나가 모자란 상황.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소년, 카인을 향해 당부한 강태석이 몸을 빙글 돌려 전장의 한복판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쿠우웅...

콰아아아아앙!

허공에 생겨난 역장을 짓밟으며 거칠게 뛰어오른 흑기사가 수십 미터를 부웅 주파하여 단번에 중앙으로 내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