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콰드드드득!
칸헬이 눈앞을 보니 땅에서 솟아난 대검을 통째로 베어낸 흑기사의 거대한 금빛 검기가 보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땅에서 솟아난 거인의 권능이 베어진다고 하여 자신의 대검이 부서지진 않는다.
이는 엄연히 구분된 객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의 모습을 본 순간 칸헬은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쿠르르릉...
콰쾅!
거체의 흑기사 위에 솟아난 아홉 뿔의 거대한 왕관.
그리고 그 아래, 태양처럼 피어오르는 황금빛 눈동자.
현실을 무시하는 이능을 현현케하는 그 이질적 모습을 본 칸헬이 입꼬리를 쭈욱 끌어올렸다.
"그래. 아까 전부터 궁금하긴 했지. 네가 대체 어떤 녀석인지. 후손이라기엔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였고... 그런 주제에 내 후손들보다 내가 남긴 기예를 더 잘 사용하고."
흑기사의 머리를 뒤집어쓴 황금 순록의 왕관과 눈동자 부분의 금안을 보며 칸헬이 여유로이 두 번째 칼을 뽑아 들었다.
자신의 피가 가장 짙은 녀석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예에 이를 극한으로 끌어올려야 발현되는 눈동자.
현실을 어느 정도 부정하게 해주는 기술이니만큼 보통 피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닌데 그걸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심지어 자신의 피 냄새는 한 방울도 나지 않는 놈이!
하지만...
콰르르르릉!
콰아아아아앙!
칸헬이 칼을 뽑아 든 순간 뻥 뚫린 하늘로부터 다시 한번 번개가 내리치며 머리에 삐죽한 왕관이 솟아올랐다.
그 뿔의 개수가 총 10개.
더불어 서서히 바뀌는 눈동자의 색깔.
주변의 흰자위는 금색으로, 내부 검은 눈동자는 타오르는 적색으로 변했다.
금빛과 적색이 뒤섞여 실로 고풍스러운 느낌을 내는 눈빛을 완성한 칸헬이 상대를 보며 여유로이 웃었다.
"핏줄보다 중요한 건 축복이지. 왕관은 그저 내 권능의 발현 도중 생기는 부산물 수준일 뿐이란다."
진짜는 오직 하늘의 축복을 받은 자신뿐이었다.
황금 왕관이니 일곱 칼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그 부산물에 불과하다.
칸헬이 화염 오거들의 뼈를 벼려 만든 칼을 휘두른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금안과 뒤섞인 불의 권능이 폭발하며 순식간에 사방 수백 미터를 불지옥으로 만들었다.
**
콰아아아아앙!
"우왓!"
소녀를 지키며 칼을 휘두르던 소년, 카인이 순식간에 사방을 뒤덮으며 밀려드는 넘실거리는 화염에 비명을 내질렀다.
예고도 없이 순간 눈앞에 번쩍이며 몰아치길래 신기루인가 했는데 이게 웬걸.
마력으로 보호하고 있음에도 바짝 말라 드는 머리칼, 뜨거워지는 폐와 익어가려는 피부.
이건 진짜다.
그것도 어딘가 용광로에서 끌어온 수준으로 어마어마하게 뜨겁다!
"조심..."
"저리 비켜요."
타악.
자신의 몸을 본능적으로 감싸 안는 카인의 행동에 멈칫한 소녀가 이내 성을 내면서 눈썹을 이리저리 꺾으며 소년을 밀어 치우고는 자신과 소년의 전신을 핏방울로 감쌌다.
남은 열두 개 중 이제 남은 건 열 개뿐.
화아아아악!
콰르르르릉!
밀려드는 화염을 완전히 틀어막은 소녀는 온 사방, 불타오르는 대지를 보며 작은 신음을 토했다.
그르르르륵...
꾸어어어어억!
콰아아아아아아앙!
병종, 숙주, 살점, 외벽.
피와 살로 이루어진 흡혈종의 모든 것들이 사방을 휘몰아치는 광대한 화염 폭풍에 의해 모조리 불타올라 쪼그라들고 말라붙고 있었다.
어지간한 화염과 포격 따위는 몸으로 버텨낼 유기 조직체들이거늘 하나도 남김없이, 불길에 의해 타오르는 볏집마냥 타올랐다!
끄어어억...
그르르륵...
그 와중에도 병종들이 여왕을 지키겠다고 내달려 들어 몸으로 벽을 쌓고는 있지만 무의미했다.
몸에 있는 수분이 모조리 쪼그라들어 덧없이 불타올라 사라져가는 수천 마리의 병종들을 본 여왕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이대로는 지원은커녕 이 자리에서 모조리 타죽게 생겼다!
"빨리! 빨리 빠져나갈 곳을 찾아봐요! 당신들 나를 지키라고 남았잖아!"
"아니 말을 그렇게 해도...!"
열기를 피해 마찬가지로 소녀의 곁으로 모여든 이오스와 카르멘이 이를 악물며 당혹스런 눈길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자신들이라고 하여 오래 이 불길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탈출하겠다고 얼마나 펼쳐져 있을지 모르는 불지옥을 향해 뛰어든다는 건 스스로의 명줄을 깎아 먹는 행위였다.
그나마 빈틈이 어디 없을까 찾아보았지만, 주변을 감싼 화염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병사들마냥 스스로 자라나며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걸려드는 온갖 생명체들을 땔감 삼아!
이에 소녀를 비롯한 넷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지던 그때.
쿠르르르릉...
콰콰콰콰쾅!
불길 너머에서 뭔가 익숙하면서도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물체가 대지를 짓이기고 벽을 으깨며 내달리는 소음!
이에 넷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한 그때.
콰콰콰콰쾅!
쿠르르릉...
끼이이익...
"내가 제때 온 건지 몰랐었는데 표정 보니까 제때 왔나 보군."
거칠게 불길과 핏빛 병사, 병종들을 짓밟고 등장한 이동 요새.
그 강철의 앞부분 해치를 열고 등장한 그라함과 탈리만공이 아래 넷의 환해지는 얼굴을 보며 웃었다.
**
부우우웅...
콰콰콰쾅!
넷을 강철 해치 안에 태운 탈리만과 그라함이 간신히 기동 기능만이 제때 돌아온 이동 요새를 몰아 거침없이 불길을 갈랐다.
이미 이동 요새 안은 꽤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 속에서 탈리만이 넷을 보며 으쓱했다.
"서쪽에 생존자들이 제법 남아있더군. 그쪽 들렀다 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지."
"..."
"아까부터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 꼬마는 누구지?"
탈리만의 말에 멈칫한 이오스가 이내 탈리만 공의 귓가로 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어 탈리만 공은 소녀를 향해 묘한 눈초리를 보냈다.
"그렇게 위험하게는 안 보이는데."
"이런 건방진..."
소녀가 빠득 이를 갈며 손날에 핏빛 검기를 두르고 한 발 앞으로 걸어가려던 순간 동시에 움직인 이들이 있었다.
그라함, 카르멘, 이오스.
그들이 소녀의 목으로 겨눈 세 개의 칼날.
그리고...
채앵!
"동생한테 그러지 마요!"
"적통..."
칼날을 들어 자신들과 소녀 사이를 막아서는 소년, 카인을 카르멘이 안타깝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와서 다 망해버린 상황에, 아니 되려 그 시조라는 작자가 나타나 모든 걸 집어삼키고 불태워버리겠다고 날뛰는 와중에 적통 대역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거의 본능적으로 입에서 나온 소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여유롭게 지켜보던 탈리만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모두들 싸우지 마시게. 반가워서 한 소리이니. 그쪽 소녀도 그렇고 소년도 말이야. 앞으로 우리는 한배를 타고 함께 많은 걸 해나가야 할 텐데 벌써 싸우면 안 되지."
"?"
"자자. 그라함. 칼을 거둬라. 이오스 경이랑 카르멘 경 그대들도."
쿠르르릉...
탈리만의 말에 주변, 대치하던 이들이 눈매를 좁히며 바라보았다.
앞으로 함께 할 일이 많다고?
그 말에 탈리만이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한 소리를. 이제 우리 뇌종의 생존자들이 힘을 합쳐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나. 이 성을 타고."
쿠르르릉!
질주하는 성을 보며 탈리만이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그라함에게 들으니 베르트, 그 너구리 같은 녀석이 모든 군대를 끌고 바다 건너로 도망쳐버렸다지만 지금은 전혀 아쉽지 않았다.
적통 파벌 녀석들이 몰래 만들어 숨겨두고 있던 이 물건을 얻었으니!
이동 요새, 탄트라.
이 강대한 화염조차 버텨낼 높은 방어력에 출중한 기동력, 강대한 화력에 수많은 생존자가 살아갈 수 있는 독립 내장 플랜트에 자가 수복기능까지.
움직이는 성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
군주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마땅히 바라마지않을 물건이다.
그 안에 소수이지만 일천에 가까운 생존자들과 여왕이라는 소녀, 적통의 핏줄을 이은 소년이 있다.
그리고 특전대와 암무대라는 두 개의 칼까지.
이 정도라면 앞으로의 야망을 불태워보기에는 나름 흡족한 수준이다.
'아주 좋군.'
잘린 두 다리 대신 질주해주는 거대한 성을 보며 작게 웃은 탈리만이 손뼉을 짝 쳤다.
"자자. 이대로 벗어나자고. 북쪽으로."
"잠깐. 벗어나자고요? 빠져나간다는 겁니까? 탈리만 공?"
어느새 칼을 거둔 카르멘이 저 멀리, 스쳐 지나가는 중앙에서의 폭음을 들으며 반박했다.
아직 칸헬과 시조, 두 존재가 여전히 가운데서 격전 중이다.
한데 여기서 빠져나가자니?
그런 카르멘의 말에 탈리만이 싱긋 웃었다.
"물론 나도 도와주고 싶다네. 하지만 무슨 수로?"
"..."
"혹시 자네들이 도망치는 것도 버거워하던 저 불바다 안으로 다시 뛰어들자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주포가 다 망가진 이 전차를 끌고 육탄돌격이라도 하자는 건가? 여기 있는 생존자들을 모조리 태운 채?"
"..."
탈리만의 말에 카르멘이 할 말을 잃었다.
의기는 앞섰지만, 막상 실행하자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엔 지금 지옥 한복판에서 싸우고 있는 두 존재의 격이 너무 높았다.
뛰어들기에 자신들은 너무나 지치고 망가졌으며 죽고 다친 상태였다.
이 이동 요새의 화력이라도 멀쩡했으면 모르겠지만 듣자 하니 남쪽을 공략하는 와중 그마저도 오버클록 된 상황인 것 같았다.
그런 카르멘을 향해 그라함에게 업혀있던 탈리만이 다가가 어깨를 툭툭 쳤다.
"우리가 설마 싸움에 불성실하기라도 했나? 우리도 목숨을 걸었었다네. 실제로 남은 이들은 절반도 되지 않고. 할 수 없는 것에 남은 이들의 목숨을 모조리 갈아 넣는 것이 의기일까?"
"..."
"우리는 하는 데까지 한 것이지.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야 하는 것이고."
탈리만이 강철의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자신들은 하는 데까진 했다.
이제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다.
도망친다고 하여 자신들에게 마냥 행복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시조란 작자가 이기고 그자가 자신들을 쫓기로 한다면 자신들 또한 위태로웠다.
또한 칸헬, 적통 후계가 이겨도 도망친 자신들에게 원한을 품는다면 그 또한 곤란했으니 그저 자신은 배팅을 할 뿐이다.
둘이 치고받는 동안 자신들이 충분한 거리를 도망갈 수 있기를.
혹은 둘이 양패구상해버리거나 크게 다쳐 자신들을 쫓을 여력이 없기를.
여기까지 생각한 순간.
"하늘에 기도할 게 아니라 적통 후계. 그 작자에게 기도해야겠구먼. 자자. 다들 기도하자고."
쿠르르릉!
콰르르르릉...!
영양이 끊기고 불타올라 서서히 무너지는 군락들.
그 너머 구멍이 뻥 뚫린 외벽으로 질주하는 이동 요새 속에서 탈리만이 주변을 보며 부러 유쾌하게 말했다.
**
콰아아아아아앙!
"이런. 아끼는 물건들이었거늘."
거인의 칼, 화염 오거의 칼, 숲 아인의 칼, 인어의 칼.
네 번째의 칼마저 부러진 칸헬 드미트리가 아쉽다는 듯 손잡이만 남은 칼을 버린 뒤 다섯 번째, 기사들의 칼을 뽑아 들었다.
자신에게 반항하던 적국 수많은 기사들을 녀석들의 칼과 갑옷과 통째로 용광로에 넣어 녹인 뒤 그 원념으로 완성한 칼이다.
불순물이 섞인 칼은 약하다지만 칼 안에는 그 이상의 귀기와 원념이 서려 있다.
콰아아아앙!
“크어어어억...”
“카아아아아아아아악!”
뽑아 드는 순간 사방에 저주 서린 귀성이 터져 나왔다.
그 패배자들의 외침을 만족스럽다는 듯 듣던 칸헬이 이제는 마찬가지로 너덜너덜해져 형체마저 유지하기 힘든 흑기사를 향해 다시 한번 칼을 휘둘렀다.
이윽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스르르르르륵!
"드디어 그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벗었구만. 자 이제 소감이 어떤가. 직접 지옥에 발을 디딘 느낌이."
흑기사가 벗겨지고 땅에 맨몸으로 내려앉은 상대를 보며 칸헬이 다시 한번 함박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