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210화 (210/221)

210

군락, 안.

콰드드드드드득!

"...!"

영롱한 빛의 칼과 칠흑의 갑옷을 상대해가던 칸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상외로 상대가 대단히 잘 분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끝날 것 같았던 싸움이 점차 길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다섯 번째 칼마저 부러지고 여섯 번째, 땅돼지들의 칼마저 뽑아 들어야 했고 몸에 드문드문 상처들마저 생겨나고 있었다.

'뭐지. 내가 뭘 간과한 거지?'

콰아아앙!

뭉툭한 형태의 칼을 뽑아 몰아치는 상대를 맞서가던 칸헬은 이내 자신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질문의 답을 깨달았다.

자신이 간과한 것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 상대의 몸을 둘러싼 검디검은 갑옷의 특별함.

두 번째, 손에 들린 칼과 몸을 감싼 금속 액체를 비롯한 상대의 온갖 귀물들.

세 번째, 상대의 순수한 실력.

쩌저저저정!

상대가 발을 내디딘 순간 바닥에서 그림자들이 솟구쳐 휘몰아쳐 칸헬의 육체, 구석구석을 노렸다.

카가가가강!

카강!

이를 기묘한 각도로 휘몰아쳐 막아내니 이번에는 허공에서 금속 가시들이 촤촤촤촥 터져 나오며 칸헬의 몸뚱이를 꿰뚫고 휘두르는 땅돼지의 칼을 얽매려 하였다.

이 역시 검기와 강건한 신력을 휘두른 칼로 모조리 토막을 내버렸지만 이어 상대의 참격이 날아들었다.

촤아아아아아악!

영롱한 빛의 칼, 그 위에 투명한 검기에 검은 갑옷의 괴력을 잔뜩 머금은 일격이 유려한 선을 그려내며 자신의 목을 노린다.

이에 칸헬이 빠르게 칼을 마주 들어 이를 막아낸 순간.

쩌저저저적!

"...!"

그대로 자신의 칼을 통과하고 점멸하듯 희미해졌다가 다시금 질주해 드는 칼에 크게 눈을 치뜬 칸헬이 분노를 머금은 표정으로 다급히 왼쪽, 일곱 번째 요정의 칼을 뽑아 공격을 막았다.

이어지는 굉음.

콰아아아아아앙!

쩌저저적...!

기다란 칼을 막아낸 순간, 작은 단검 크기인 요정의 칼이 금이 갈 정도로 흔들렸다.

애초에 일곱 번째 칼은 그 강도가 강하지 않았으니.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막아낸 칸헬은 그 분노를 감출 생각 없이 그대로 관통당했던 땅돼지의 칼을 휘둘러 상대의 몸에 참격을 먹였다.

이어지는 폭발.

콰자자자자자작!

하늘에서 내리 떨어진 번개를 머금어 젊어지고 강해진 육체, 거기에 핏빛 검기를 머금은 참격이 그대로 상대를 후려치며 피할 새도 없이 반경 10m를 모조리 갈아엎었다.

집중력이 빠져 세련되지 않은, 하지만 그 위력만큼은 건재하다 못해 살벌한 일격.

어지간한, 두 번째 벽에 막힌 무인이라도 방금 일격에는 가루가 되어야 마땅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하지만...

후두두두둑.

"정말 바퀴벌레 같은 녀석이로다."

가루가 된 살점들과 먼지들 속에서 걸어 나오는 상대를 보며 칸헬이 탄식에 가까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상처를 입긴 했지만, 여전히 싸우기엔 지장이 없다.

몸 주변을 감싼 검은 갑옷과 은빛의 액체들이 대부분의 충격을 흡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를 보고 있는 칸헬은 이제 대체 저게 무엇들인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귀해도 보통 귀한 물건들이 아니다.

자신의 손에 들려있다 박살 난 자신의 애병, 일곱 칼들이 평범해 보일 정도였다.

자고 일어나 세상이 변한 건 알고 있었지만, 저런 게 흔해질 정도였단 말인가?

일어나 마주친 놈이 저런 것들을 한 몸에 주렁주렁 담고 있을 정도로?

하지만 전장을 지나 다시금 걸어오는 상대를 보며 칸헬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이제껏 마주친 놈들 중 아무도 저런 것들을 쥐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일곱 칼보다 귀한 것들도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그저 저놈이 특별한 것이다.

"..."

다가오는 상대에게 주춤거리며 밀려난 칸헬이 이내 자신의 발걸음을 다잡으며 노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밀려났다고?

자신은 세상에 선택받은 존재다.

죽음조차 거스르고 부활했으며 세상의 축복을 받아 다시 젊음마저 되찾았다.

비록 숙주가 될 육신이 연약해 예전의 힘을 모두 되찾지 못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스스로의 그릇이 거대해 다시 채우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착실히 해나간다면 금세 예전보다도 더욱 강해질 수 있다.

실제로 자신에 비해 상대가 더욱 처참한 상황이었다.

한데 밀려났다는 건 기세의 문제다.

스스로가 상대에 비해 밀린다고 생각해버린 거다.

콰득.

이에 터져라 양손의 칼을 움켜쥔 칸헬은 이내 순식간에 차가운 얼굴로 돌아갔다.

그래, 상대가 제법 하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살아온 세월과 축적해온 힘이 다르다.

즐기려 잠시 넣어두었지만, 자신이 자랑하는 권능.

"그래.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해야 하는데. 잠시 잊고 있었구나."

이윽고.

스르르르륵.

스륵.

스르르르륵!

발밑의 대지로 핏빛 그림자가 퍼지며 그 안에서 다시 한번 붉은빛의 병사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칸헬이 자랑하는 피의 권능, 그 정점인 <붉은 군대>.

자신의 손에 죽어 영원히 자신을 위해 싸우고 고통받을 운명의 이들.

잠시 후.

콰르르르르릉!

콰아아앙!

"너도 받아주마. 그 안에."

해일처럼 몰려들어 덮쳐가기 시작하는 핏빛 군대의 병사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분전하기 시작하는 상대를 보며 칸헬이 한결 여유로워진 표정으로 자기 이마의 땀을 훔쳤다.

**

까드드드득...

콰지지지직!

"그래. 밀리니 꺼내긴 하는구나."

사방에서 밀려드는 핏빛의 병사들을 향해 여의와 그림자칼을 내리찍어가며 강태석이 호흡을 다잡았다.

좋다면 좋고 나쁘다면 나쁘다.

상대에게 여유가 없어졌다는 뜻이지만 반대로 확실히 거슬리는 권능이니.

이 피의 병사들은 마력으로 운용되는 녀석들이 아니기에 지치지 않고 죽지 않는다.

이대로 가면 소모전에 남은 마력도 모조리 바닥날 것이다.

이제 자신의 마력은 대략 10% 남짓이었다.

'차라리 남은 마력을 모아 일격에 승부를 보는 게 나으려나?'

콰지지지직!

달려드는 거인 하나의 발목을 베어내 버린 강태석이 저 너머, 여유를 되찾은 듯 힘을 비축하고 있는 칸헬을 바라보았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지치고 상대는 힘을 되찾는다.

그렇게 되느니 일격에 힘을 모아 승부를 보는 것도 선택지 중 하나다.

쩌적!

기어이 코앞까지 다가온 상대를 향해 칠채영도를 박아넣은 강태석이 이를 뽑아내며 선택을 고민하던 그때.

쑤우우욱.

"?"

갑자기 칼에서 무언가 뽑혀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은 강태석이 멈칫했다.

단순히 느낌이 아니었다.

칼을 뽑아낸 순간 희끄무레하면서도 살짝 빛나는 무언가가 연기처럼 구멍 난 핏빛 병사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오듯 말이다.

이윽고 벌어진 건 강태석조차 예상치 못한 현상이었다.

끼긱...

끼기기긱...

마치 고장 난 인형처럼 몸에 구멍이 뻥 뚫렸음에도 스스로의 몸을 수복하며 싸울 여력을 정비하던 핏빛 병사가 끼그득 거리며 몸을 꺾고 비틀거렸다.

이어 몸에 뚫린 구멍, 희뿌연 연기가 파고든 곳으로부터 서서히 번져나가는 우윳빛.

그렇게 퍼져나간 우윳빛이 핏빛과 뒤섞여 연한 적백색으로 변해 전신을 장악한 순간.

콰지지지지지지지직!

"?"

순식간에 거도를 휘둘러 옆, 또 다른 핏빛 병사의 목을 날려버리는 적백색 인형을 보며 강태석이 멈칫했다.

갑자기 자신의 편이 되어 싸우기 시작한다고?

자신이 딱히 스킬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집히는 것은 하나, 자신의 손에 들린 무기인 칠채영도.

우우우우우웅...

원혼과 저주를 머금은 듯한 칠채영도가 어서 자신을 휘두르라는 듯 손안에서 기이하게 떨어 울렸다.

자신이 활약할 장소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이에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주변을 향해 몇 번 더 칠채영도를 휘둘러본 강태석의 표정이 이내 확신으로 바뀌었다.

콰득!

콰드드드득!

칠채영도에 베이고 찔린 핏빛 병사들이 방금 전처럼 순식간에 적백색으로 물들며 이내 주변, 자신의 편이던 핏빛 병사들을 미친 듯이 공격하기 시작했기에때문이다.

수천 중 변한 것은 열 남짓이지만, 격렬하던 전투에 혼선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심지어 바뀐 녀석들마저도 불멸성을 지닌 채 무한히 싸운다!

그리고 가장 좋은 건 이제 시작이라는 것이다.

"후우. 죽으란 법이 없네."

콰아아아아앙!

"무슨... 무슨 짓을 한 거냐 네놈!"

커다랗게 칼을 휘둘러 순식간에 사방, 핏빛 병사들을 우수수 적백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하는 강태석을 보며 저 멀리 서 있던 칸헬이 당황하며 외쳤다.

**

콰아아아앙!

육신과 마력을 회복하던 중 다급하게 다시 전장으로 뛰어든 칸헬이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판을 보며 당혹했다.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직 자신을 위해 싸워야 할 노예들이 색이 변한 채 서로를 향해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감염이라도 된 것처럼!

콰드드드득!

콰직!

콰드드드득!

핏빛 군대 사이에 마치 녀석의 수족이라도 된것마냥 분전하는 적백색의 병사들이 눈에 띄고 있었다.

심지어 그 수는 현재 진행형으로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키이이이...

키이이이잉!

저 멀리, 녀석의 손에 들린 영롱한 빛의 칼이 미친 듯이 휘둘러질 때마다 베여나간 녀석들의 색이 변하며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콰드드드득!

그중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적백색 병사 하나를 잡아채 머리를 맨손으로 터트려버린 칸헬이 그 안쪽, 우윳빛과 핏빛이 뒤섞여 일렁이는 내부를 살피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오직 자신이 집어삼킨 영혼으로 구성되어있어야 할 인형에 다른 <영혼>들이 뒤섞여있었다.

더욱 원독에 어리고 지독한 것들이, 그것도 수십이 뒤섞인 채로 말이다.

지금 병사들이 통제에서 벗어나 날뛰고 있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이런 망할...!"

콰아아아앙!

자신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하는 병사들을 본 칸헬이 분통 섞인 괴성을 내질렀다.

무한과 무한이 싸워봤자 승부가 나지 않는 법.

아직은 소수이긴 하지만 끊임없이 재생되는 적백색 병사들은 사방을 개판으로 만들며 훌륭히 제 자리를 버텨내고 있었다.

더 열받는 건 이게 자신의 권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최악은... 서서히 이 숫자가 불어날 것이라는 앞으로의 상황이었다.

"비켜라!"

콰아아아앙!

달려드는 적백색 병사들을 걷어차 버린 칸헬이 황급히 상대를 쫓으려고 했지만, 상대는 이미 저 멀찍이 달아난 지 오래였다.

콰드드드득!

콰득!

쉴 새 없이 스스로의 칼을 휘두르며 사방팔방을 계속해서 우윳빛으로 감염시키고 있었다.

저 조그마한 칼 안에 대체 얼마만큼의 영혼들이 들어있는 것인지 보고도 질릴 지경이다.

이에 칸헬의 표정이 한층 더 다급해졌다.

이대로라면 주변에 있는 녀석들이 모조리 적백색으로 물들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토록 자신이 자랑하던 권능이 이제는 양날의 검이 되어 자신을 찌르려고 사방팔방에서 몰려들게 될 것이다.

가장 문제는 지금 권능을 해제한다고 하여 통제 불가 상태가 된 놈들이 사라질 것인지 확신이 없다.

재수 없으면 자신의 병사들만 사라지고 상대에게 넘어간 녀석들은 고스란히 남아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대로 상황을 방치하면 자신의 종들은 사라지고 녀석의 병사들만 계속해서 늘어갈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콰아아아아앙!

"우악... 우아아아아악!"

난전 속에서 거칠게 땅돼지의 칼을 휘두른 칸헬이 괴성을 내질렀다.

이토록 분통 터지는 적이 실로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그전에 죽여주마. 어디냐. 이 쥐새끼야.'

밀려드는 병사 속, 샛노래진 동공을 샐쭉하게 뜬 칸헬이 살기 어린 눈으로 전장을 훑던 그때.

콰르르르르르릉!

갑자기 군락 전체를 휘감는 외부의 진동에 칸헬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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