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군락, 외부.
"후우. 진짜. 하여간 일이라는 게 계속 일이 생긴다니까."
가슴팍의 길쭉한 상처가 난 사내가 저 멀리, 처박혀 기절한 이오스를 보며 혀를 찼다.
멀쩡하다면 몰라도 만신창이가 되어 달려들어서야 자신의 상대가 될 리가 없다.
사실 죽일 생각으로 상대했다면 가슴팍의 상처를 입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리스크를 감수하고 사납게 날뛰는 고양이 같은 녀석을 제압했는데,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하여간 이런 놈들 싫지는 않단 말이지."
기절한 녀석을 스윽 훑어본 사내가 이내 몸을 우득 풀었다.
하여간 적당히 끝내긴 했지만, 봐주는 것은 여기까지다.
자신도 이제부터는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
우우우웅...
쿠구구구!
뒤돌아보니 싸우던 와중에도 서서히 진동을 키워가던 크기 2m의 기계장치가 이제는 웅혼한 소리와 청색 빛을 토해내고 있다.
사방에 군락을 둘러싼 열여덟 개의 장치들이 공명하며 서로와 서로를 엮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과 진동이 정점에 달한 순간.
키이이이이잉!
키잉!
열여덟 개의 장치를 통해 거대한 원형의 구체가 그려지며 군락 전체를 통째로 뒤덮었다.
**
콰르르릉!
"!"
갑작스레 군락 전체를 감싸는 시커먼 장막에 칸헬의 표정이 굳었다.
바깥과 안을 완전히 격리시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전, 여왕의 군락 성벽이 안과 밖을 나누는 것과도 다르다.
전자가 물리적으로 안팎을 나누는 것이었다면, 지금 이 변화는 아예 개념적으로 나눠버리는 것, 즉 차원 분할이었다.
'어떤 놈이 이런 개짓거리를!'
콰아아아앙!
달려드는 적백색 병사를 후려쳐버린 칸헬이 다급히 자신의 권능을 취소하려고 했다.
하지만 잠시 후.
"취소가... 안되는구나."
“쿠아아아!”
“캬아아아아아악!”
수천수만이 뒤섞여 서로 끝없이 찔러대고 죽이는 광경을 보며 칸헬이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자신의 권능은 세상의 인정을 통해 발현되는 것인데, 외부와 격리되자마자 통제권이 사라지고 녀석들이 스스로 날뛰게 된 것이다.
아니, 단순히 날뛰는 것을 넘어 이제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콰드드드득!
콰직!
“구어어어어어어어!”
어느 상황에서도 침묵을 유지하며 무심이 주변의 적들을 베어나가던 핏빛 병사들이 이제는 거침없이 주변, 널브러져 있던 군락의 살점 파편과 바닥의 고철들을 집어삼켜 가며 기괴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강철과 살점, 피육과 핏물이 뒤섞여 실로 괴상하고 거대하게 변해갔다.
이전까지는 잘 정련된 병사들로 보였다면 변화하기 시작한 녀석들은 마물이나 괴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그어어억!”
"...!"
이제는 자신에게조차 달려들기 시작하는 핏빛 병사들, 이를 후려친 저릿해진 손끝을 느끼며 다급해진 칸헬이 저 너머 어딘가를 향해 버럭 외쳤다.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다! 휴전하자! 휴전!"
신이 조각한 영웅의 것처럼 아름다운 청년의 외침은 실로 안타까웠지만,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새로 태어나고 변이를 일으키는 괴물들이 서로 베어내고 치고받으며 펼쳐내는 지옥도만 존재했다.
그 강렬함 속에 인간 하나의 존재감은 너무나 작아 파묻힐 뿐이었다.
잠시 후.
"으으... 크아아아아악! 말도 안 돼! 이딴 식으로 끝날 게 아니란 말이다!"
쿠구구구구...!
군락과 지옥도, 모든 것을 삼키며 천천히 줄어들기 시작하는 검은 장막을 보며 칸헬이 처절한 괴성을 내질렀다.
**
쿠구구구구...!
"성능 확실하구먼 저거."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는 거대한 검은 구체를 보며 바깥의 사내가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연방, 차원 연구 프로젝트의 부산물 중 하나라고 했던가?
부르탄은 패배하면서 온갖 유산들을 가져왔고, 그 안에는 정말로 귀한 것들 또한 포함되어있었다.
눈앞에 있는 장치 또한 그중 하나다.
차원을 뒤틀어 목표 대상을 포획하고 완전히 압축시켜 으깨버리고 봉인한다.
그리고 그 작업은 착실하게 진행 중이었다.
쿠구구구궁...
키이이이이이이이잉!
열여덟 개의 장치가 굉음을 토해내며 압축을 가하자 거대한 흑색의 구체는 반발 없이 줄어들고 줄어들어 점차 그 존재감을 줄여갔다.
2km, 500m, 100m, 10m.
그리고 1m, 30cm, 10cm.
그마저도 넘어 작은 구슬만 한 크기로.
이윽고.
파지지직!
키이잉...
"좋아."
좌표 고정이 끝났다는 듯 구슬마저 사라지고 주변 장치들이 굉음을 내며 파사삭 박살 나는 것을 본 사내가 몸을 뿌득 풀며 긴 숨을 내쉬었다.
어찌 될지 몰랐는데 일단 잘 해결된 셈이다.
저 정도 물건들이 일회용이라는 게 아쉬웠지만 생각해보니 그건 소주의 몫이지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자신이 고민할 문제는 아닐 것 같았다.
자신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는 조금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뒤쪽에서 살벌하게 뻗쳐오는 흉흉한 기세라던가.
휘익.
"넌... 카르멘이라고 했던가? 너무 그런 식으로 노려보지 말라고. 일 다 끝났고 네 상사는 저기 잘 기절해있으니까. 데려가."
"돌려놔라."
차앙.
기절에서 깨어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카르멘의 한마디에 사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못해 못해. 저거 안 보여? 일단 봉인 한번 하면 끝이라니까."
푸쉬쉭...
김이 새어 나오는 기계들을 사내가 가리켰다.
저 기계들은 무슨 <전자식 자물쇠> 같은 게 아니었다.
에너지가 공급받는 동안 봉인이 유지되고 끊기거나 고장 나면 해제되는, 그런 구조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오히려 <일회용 시멘트>에 가깝다.
그냥 목표 타겟에 콸콸 부어져 봉인이 끝나면 제 쓸모를 다해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저게 망가짐으로써 바깥에서는 사라진 차원봉인의 좌표조차 찾을 수 없기에 외부의 인물들은 무슨 수를 써도 그 봉인을 해제할 수 없다.
안에서 찢어발기고 나온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럴 리는 없지.'
저 봉인에 들어간 에너지의 단위를 떠올린 사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건 일개인이 찢어발기고 나올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레벨 30이건 뭐간 마찬가지다.
저 안에서 나올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인간을 넘어서거나 포기한 무언가 일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사내가 여인, 카르멘을 향해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말했다.
"헛생각하지 말고 네 상사나 데리고 돌아가. 나도 슬슬 돌아가야 하니까. 아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게 기특해서 한가지는 말해주지."
"...?"
"무조건 계속 올라가라. 북쪽으로. 살고 싶으면."
북쪽, 관의 끝을 향해.
그 말에 서 있던 카르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이동 요새, 탄트라.
키이이잉...
"결국... 그렇게 됐군."
"그렇게 될지 아셨습니까?"
돌아온 카르멘의 말에 앉아있던 탈리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 정도는. 들어보니 건너편의 소주라는 자는 정말 보통이 아닌 것으로 보였으니까. 거슬리는 걸 불확실성에 내버려 두고 그냥 떠날 것 같지가 않았거든."
'나보다 낫군.'
탈리만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결국 이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자는 그 소주라는 어린 주인이었다.
듣자 하니 바다 건너, 귀족의 후계자라는 자.
뇌종은 통째로 무너졌고 그 과정에서 쓸려 나온 모든 군대와 부산물, 인재와 귀한 것들은 모조리 소주 그녀가 가져갔다.
베르트 그 얼간이는 그곳에서 자신이 한자리해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건너간 것 같지만 그게 될까?
아마 깝죽거리는 순간 빠른 시일 내에 암살당하고 그 휘하 지휘관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고스란히 상대의 세력 안으로 흡수되게 될 것이다.
거기에 자신들이라는 경쟁 세력을 제거하고 칸헬, 아니 이제는 카트란이라는 실명을 알게 된 주요 대적의 제거까지.
가장 바람직한 건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힘은 얼마 쓰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소수의 정예, 적합한 전략, 흡혈귀왕의 죽음이라는 기회와 부르탄의 합병의 활용까지.
결국 서로가 치고받다가 통째로 꿀꺽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자신들에게 남은 건...
"뭐 그래도 아예 없는 건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쿠르르릉...
일단 위기를 벗어났다는 생각에 속도를 줄인 뒤 자가 수복기능에 에너지를 투자하며 항행 중인 이동 요새의 내부 천장과 그 아래에 시뻘건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자신 쪽을 향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던 탈리만이 한숨을 후우 내쉬었다.
어디 가서 한가락 하지 못할 걱정은 없지만, 이걸로 아너스빌이라는 바다 건너의 새로운 주인을 상대할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당분간은 앞으로의 생존에 대해 고민해야 할 뿐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탈리만이 카르멘을 보며 물었다.
"그래. 카르멘경. 상대가 북쪽으로 가라고 했다고?"
"네."
"이 대지의 끝으로 가라 이건데..."
탈리만이 중얼거렸다.
북쪽으로 향하고 있는 길쭉한 관, 콜로니.
여기서 북쪽으로 향하라 함은 그 관의 끝으로 도달하라는 의미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기에 북쪽으로 가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고민은 짧게 끝냈다.
어차피 남쪽, 상대의 세력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 상황이었다.
쿠르르르릉...
통제실 화면, 남쪽을 비추는 화면을 보던 탈리만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묘비처럼 변해버린 자신들의 수도, 그리고 그 안에 실제로 파묻혀버린 사내를 떠올리며.
'잊지... 않도록 하지. 바빠지지 않는 동안은.'
이윽고.
콰르르르르릉...!
사람들을 태운 강철의 요새는 무심하게 기동하며 북쪽으로, 점점 더 멀어져갔다.
강태석을 비롯한, 모든 흔적이 파묻힌 뇌종의 수도를 뒤로한 채.
그리고...
3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
뇌종의 옛 수도. 로블롭 폐허.
"후우. 여기가 11개 세력 중 하나였단 말이야?"
"그래. 이젠 몇 개 남았는지도 모르겠지만. 으엑 더러."
바닥, 끈적하게 말라붙은 점액질에서 발을 뗀 여인이 자신의 쌍둥이인 사뮤엘에게 대답하며 헛구역질했다.
아무리 봐도 정이 가는 동네는 아니었다.
사방에 펼쳐진, 마치 곰팡이처럼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온갖 형태의 점액질들과 그 사이로 주인을 잃고 망자마냥 드문드문 배회하는 숙주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모든 사건의 진상마저 삼켜버린 듯 크게 뻥 뚫린 거대한 구덩이까지.
"낚시도 못하겠네. 더러워서."
거대한 구덩이 아래, 주변 바닷물들이 새어 들어와 만들어진 호수를 보며 여인 기리스가 혀를 찼다.
위험한 것들조차 모조리 말살된 탓인지 크게 탐험 난이도가 높지는 않았지만, 묘하게 사람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기분 따라 행동할 때는 아니니 할 일은 해야 했다.
"흩어져서 찾아보자. 먹을 거, 마실 거, 귀한 거. 모두다."
"... 미치겠네 진짜. 어쩌다 이 꼴이 되었는지."
퍼억.
여인, 사뮤엘이 살점 덩어리 아래 고철들을 퍽퍽 걷어차며 한탄을 토해냈다.
적어도 3개월 전까지만 해도 배가 주릴 걱정은 덜했다.
여러 세력이 치고받고는 있었지만 콜로니는 그 안의 모든 생명체를 먹여 살릴 정도의 영양액을 공급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날.
<관통> 사건 이후 콜로니가 통째로 망가지며 이 안의 세상은 변했다.
살아남은 이들에게 선택지는 하나.
어떻게든 북쪽으로 향해 <출구>에 도달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전까지 굶어 죽거나, 살해당하거나, 혹은 강도질 당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을 포함해서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
굳이 이런 폐허 도시를 들러 먹을 것이나 건질 게 없나 살펴야 할 정도로.
부스럭.
쌍둥이 기리스와 헤어진 사뮤엘이 반대 방향의 폐허로 향하려던 순간.
파지직...
"?"
호수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무언가 금이 가는듯한 기이한 소리에 사뮤엘의 고개가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