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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멸망 n% 진행중-213화 (21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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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르르르르릉!

마치 폭포와 같이, 혹은 해일과도 같이.

수많은 기계 병기들이 벌레마냥 직경이 4km에 달하는 거대한 벽에 떨어지고 올라붙으며 우글거리고 있었다.

어찌 보면 장관이다.

하지만 이걸 뚫어야 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만한 재앙이 없다.

10km 밖에 있는 인간 측 진지 중 <탄트라>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탈리만이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들려오는 소리.

"담배는 해롭습니다."

"지금 안 피면 스트레스나 고혈압. 둘 중 하나로 죽을 것 같으니 줘보려무나. 그라함."

"..."

이에 그림자 속에서 침묵을 지키던 그라함이 품에 손을 넣어 담배를 건넸다.

스걱.

치이이익.

솜씨 좋게 시가전용 칼로 그 끝을 잘라낸 뒤 왼쪽 다리, 의족의 에너지연결부에 가져다 대어 열량으로 불을 붙인 탈리만이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후 내뿜으며 작게 웃었다.

"의족을 다니 이런 건 좋구먼. 왜 다들 사이보그화를 하는지 알겠어."

"좋은 시술이 아닙니다."

"알아 알아. 그래도 잘려 나가 있는 것보단 낫지."

손사래를 친 탈리만은 조금 스트레스가 가라앉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자신들을 가로막고 있는 저주받은 장벽을 바라보았다.

수도가 날아간 그 날 이후 북쪽으로 올라오고 올라온 지 3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그 이후 벌어진 사건은 자신들의 생각보다 더욱 심각했다.

갑작스럽게 가속하며 정면으로 어느새 도달한 <벽>에 들이박아 버린 콜로니.

그리고 뚫려버린 저 너머와 이 세계.

아마 대단히 운이 없었던, 예를 들어 충돌 순간 끝부분에 자리 잡고 있었던 몇몇 군벌 연합들 같은 경우는 부딪치자마자 그 어마어마한 충돌의 압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짜부라들어 육포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 뒤 좀 더 운이 없던, 거리가 있어 살아남았던 이들은 이후 무너진 장벽에서 우수수수 떨어져 내려 활개치기 시작한 기계 병기들에 의해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갔을 것이고.

어찌 보면 멀리서 적당한 시기에 도착한 자신들이 천운을 타고 난 것 같았다.

하지만 다시 위성 요새의 쉴드가 세워지며 중간 부분이 <썩둑> 잘려 나가 버리면서 대단히 곤란해지고 말았다.

이제 밑도 끝도 없이 기계의 병기들이 요동치는 저 거대한 장벽을 뚫어내야 하니까.

"그나마 안 덤벼드는 게 다행이군. 왜 저기에만 집중하고 있는 거지?"

"아마 모두가 덤벼들어 저 <벽>을 뚫으라고 명령받은 상태인 듯합니다. 방해하면 공격하는 거고요."

"그러면 우리에게도 좋은거구먼. 그냥 내버려 두면 안되나?"

카카카캉!

카캉!

치지지지지지직!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장벽으로부터 끊임없이 무언가 두들기고 갉아내고 해체하려는 소리가 들렸다.

매달려있는 기계 병기들이 자신들의 발톱, 칼날, 혹은 레이저로 끊임없이 허공에 구성되어있는 거대한 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수십 대의 위성 요새들이 합심하여 만들어낸 대장벽.

이는 기계 병기에 이어 자신들이 뚫어내야 하는 두 번째 난관이기도 하다.

한데 이걸 기계 병기 녀석들이 뚫어내어 준다면 좋은 일이었다.

그런 탈리만의 말에 그라함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뚫릴 거였다면 진즉 뚫렸을 겁니다. 쉴드의 충전 속도가 데미지를 받는 속도보다 빠릅니다. 시간이 많이 지난다면 몰라도 저희가 그때까지 버틸 수 없을 거기도 하고."

"..."

그라함의 대답에 탈리만이 눈을 지그시 감고는 연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인 뒤 이를 허공에 후우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건 그야말로 우글우글한 인간들이었다.

온갖 병기, 진지, 물자, 사람.

살아남기 위해 벽 앞으로 모여든 수많은 이들이 지금도 한정된 물과 식량을 맹렬하게 동내고 있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도 쉽사리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눈치를 본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모인 건 다들 오랜만이군. <그날> 이후로 말이야."

11층 공략.

<플래그>가 멸망한 그 날을 떠올리며 모여든 다른 11군세들을 돌아보는 탈리만의 말에 그라함 역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침묵을 지켰다.

***

저벅.

"그러니까 뇌종 출신이라 이거죠?"

"그렇지요. 잠깐 몸담았던 거지만."

"거기엔 왜 갇혀있었데요?"

쌍둥이라 생긴 건 비슷했지만 말하는 투로 알 수 있었다.

존대는 기리스.

반말은 사뮤엘.

기리스의 질문에 강태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거라 해두지요."

"... 뭔 소리야."

철컥.

옆에서 레일건을 붙잡고 걷던 사뮤엘이 투덜거렸다.

궁금했는데 저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뭔지 알아들을 수가 없잖은가.

하여간 하나는 알겠다.

일단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다.

'뇌종 쪽에 이런 유명한 사람이 있었다고는 못 들어본 것 같은데.'

반대쪽에 걷던 기리스가 흘긋 스스로를 카트란이라 소개한 남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말은 안 했지만 궁금한 건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뇌종, 그것도 젊은 사람들 중에 유명한 건 이오스나 그라함 정도다.

다른 강한 녀석들도 많지만 다른 세력에까지, 그것도 6층의 바다를 건너 그 명성이 전해질 정도는 정말 몇 되지 않는다.

예전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던 시절도 아니고 말이다.

잠시 의문을 접어둔 기리스는 걷다 허리를 한번 쭈욱 편 뒤 카트란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예요? 북쪽으로 갈 거면 같이 가고."

"뭐?"

"가만히 있어 봐!"

미리 의논되지 않은 말에 사뮤엘이 옆에서 버럭 성을 냈지만 기리스는 나름 진지했다.

물론 세상이 미쳐 돌아가기에 정체불명의 수상한 상대를 일행으로 받아들이는 게 정신 나간 짓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세상이 위험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당장 북쪽까지 목숨을 걸어도 도달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기에 이럴 때라면 도박을 해봐야 한다.

'그리고... 굳이 악의가 있었다면 속일 필요도 없었겠지.'

아까 전, 허공을 쪼개고 나오는 광경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런 기리스의 제안에 강태석이 무덤덤하게 천장을 바라보았다.

뭔가 먹어 치운 게 많아서인지, 혹은 벽에 가까워지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이 떨어지고 무던해진다.

인간을 벗어나 초월적인 무언가로 다가가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럴 때 조심해야 한다.

수많은 초월적 존재들이 스스로의 특별함에 취해 벽을 넘은 더 강한 존재들, 혹은 인간의 악의를 이기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즉 아무리 타고난 게 좋아도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강해진 이들을 무시하면 큰코다친다는 뜻이다.

'육신. 그리고 성장.'

스스로 되찾아야 할 목표를 다시 한번 되새긴 강태석이 목을 풀었다.

이곳 어딘가에 있을 운석 육신을 찾아 스스로를 완성하고 벽을 넘는다.

완전한 화신체로서의 각성, 그리고 운석 육신이 잠들어있는 곳은 바로 이 6층이다.

하지만 떠나기 전에 가지고 가야 할 것이 있다.

"같이 가려면 가도 좋습니다. 어차피 자리가 좀 남을 테니."

"네?"

‘내버려 두고 가자고. 이상한 놈이라니까.’

반문하는 기리스와 그 옆에서 속삭이는 사뮤엘을 뒤로한 강태석은 폐허 어딘가에 도착한 뒤 그대로 발을 퉁퉁 굴렀다.

다른 곳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진동이 있다.

예전이었다면 지하 훨씬 더 깊은 곳에 묻혀있었겠지만, 군락의 파괴와 시공 감옥의 여파로 거대한 구덩이가 생기고 그곳으로 고철 덩어리들이 우르르 무너진 탓에 훨씬 더 지표면에 가까워졌다.

그렇게 강태석이 발을 한번 살짝 구른 순간.

콰아아아아!

쿠르르르르릉...

쌓여있던 고철들이 균형을 잃고 우르르르 무너지며 그 위로 문명의 잔재, 미니팩토리의 상층부가 삐죽이 모습을 드러냈다.

**

띠링!

<4급 이동 요새 : 마몽드를 입수하였습니다.>

<현재 완성도 : 87%... 제작 중. 콜로니 전체의 전원이 나가 완성되지 못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기능은 무리 없이 사용 가능합니다. 권한을 이양받으시겠습니까?>

“으아아아아...”

뒤에서 어버버거리는 둘을 내버려 둔 강태석이 눈앞, 시야를 그득 메운 높은 철벽의 이동 요새 앞 창을 향해 수락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쿠르르르르릉!

높이 30m.

길이 70m, 폭 35m.

어지간한 빌딩 하나를 눕혀놓은 것처럼 커다란 강철의 성이 부르릉 진동음을 내며 강태석의 부름에 응했다.

4급 이동 요새, 마몽드.

탈리만들이 가지고 간 2급 이동 요새보다는 격이 떨어지지만, 북쪽까지 맘 편하게 이동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녀석이다.

가장 좋은 건...

<현재 출력/물자 충전량 100%>

<45일가량의 기동 주행이 가능합니다.>

<전투 모드로는 충전 없이 87시간 기동이 가능합니다.>

'좋아. 꽉 차 있네.'

쿠르르르륵...

쿠륵...

주변의 고철 덩어리들을 밀어내며 알아서 지상으로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녀석을 보며 강태석이 웃었다.

처음 미니팩토리를 발견했을 때 제작 명령을 입력시켜 놓았다.

4급까지는 미니팩토리에서도 자동 조립생산이 가능하기에 혹시 언제 써먹을지 몰라 팩토리를 떠나기 전 명령만 입력시켜두고 전투에 돌입했다.

시간이 적어도 한 달은 걸릴 일이라 자신이 쓸 일은 없어도 누군가 써먹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자신이 쓰게 될 줄이야.

하여간 이 녀석은 콜로니의 인프라가 멀쩡하던 시절 제작되던 녀석이라 안에 물자와 에너지가 그득 충전되어있다.

전투 기능을 쓰면 4일도 못가 멈춰서긴 하지만 그전에 자신이 나서면 될 것이다.

'미니팩토리는 이제 못쓰겠지만... 그래도 하나는 건졌네.'

쿠르르르릉!

서서히 그 거체를 끌어올리며 준비를 마치는 마몽드를 강태석이 바라보았다.

이제 이걸 타고 북쪽으로 가면 된다.

정확히 말하면 가는 길의 중간, 자신의 목적지인 F 구역으로.

별일 없다면 이틀 안에 도착할 것이다.

쿠르르릉...

터어어어엉!

온전히 지상으로 올라선 뒤 후위 출입문을 열어 환영하듯 입을 벌린 이동 요새, 마몽드의 위에 올라선 강태석이 뒤따라 주춤하며 올라온 둘을 향해 말했다.

"안 탈 겁니까?"

어차피 인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줬으니 같이 가는 것 정도는 전혀 무리 없다.

그런 강태석의 말에.

"..."

"......."

서로를 돌아보던 두 쌍둥이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거대한 성채의 위로 발을 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쿠르르르릉...

쿠쿠쿵!

:키에에에에에에엑!:

끈질기게 살아남은 살점의 카펫들, 그리고 혈향이 피어오르는 곰팡이와 숙주들.

갈 길을 가로막으려는 그 모든 것들을 거대한 무한궤도로 짓이겨버린 강철 요새가 무심히 북쪽을 향해 거침없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

11층.

끼릭...

"으음."

불 꺼진 거대한 시설 안쪽에서 삐걱거리며 열린 캡슐에서 눈을 뜬 한 여인이 주변을 둘러보며 신음을 토했다.

오랜만에 깨어서 그런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곳이 어디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자신은 누구지?

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그중 하나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었다.

자신의 이름.

머릿속에 휘몰아치며 점점 자리를 잡아가는 기억 속, 떠오른 한 단어는...

"찬. 그래. 찬."

촤아아악.

작동이 멈추고 고여버려 썩은 영양액 속에서 촤악 일어난 여인이 강철과도 같은 근육으로 무장된 자신의 육신을 주변에 비추며 스스로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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