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어둠, 어둠, 어둠.
촤아아악...
영양액 속에서 일어난 여인은 무심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어둠뿐.
희미하게 보이는 기계 인프라들과 회색빛 광경들, 그리고 그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격전의 흔적이 보였다.
촤아아악...
이를 살피던 여인, 찬은 완전히 고여 썩은 영양액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온 뒤 목을 풀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던 거 해야겠지? 다들 어디 있으려나."
여인이 주변의 넝마를 하나 꺼내 걸친 채 흥얼거리며 걸었다.
기억은 없어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어디에 사람이 많은지.
자신의 사이오닉 네트워크는 본질적으로 인간을 감지하니까.
방향은 북쪽이었다.
"다들 오랜만에 보면 반가워하겠지?"
여인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북쪽을 향해 걸었다.
**
중앙.
콰르르르릉...
"진짜 북쪽 갈 수 있겠는데 이러다."
이동 요새, 마몽드의 어느 휴게실 안에 쌍둥이 언니와 앉아있던 사뮤엘이 홀로그램으로 비치는 밖의 광경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폐허, 폐허, 폐허.
가는 온갖 길들이 이제는 어딘가로 사라진 기계 병기들과 대피하던 사람들에 휩쓸려 무인의 대지로 변해있었다.
한때는 사람들이 살던 흔적이 명확했지만 그건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에너지도 없는데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가진 모든 것들을 끌어모은 채 희망을 담아 북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자신들과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모여있기를, 그렇게 모이게 되면 뭔가 뚜렷한 수가 생기기를 바라며.
하지만 진짜로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살다 보며 별일 다 있나 봐. 그렇지?"
"이상한 소리 할 시간에 빨리 배나 채워. 가방에도 좀 챙겨놓고."
표정이 밝아진 사뮤엘을 보며 철제공간 안에 앉아있던 기리스가 덤덤히 말했다.
이미 그녀의 배낭 안에는 온갖 비상식량들이 가득 들어찬 지 오래다.
이 거대한 성 안에는 이제 이 시기에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물자와 에너지가 그득 들어차 있었다.
혹시 성이 어떻게 될지, 혹은 주인장의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르는 노릇이니 미리미리 준비해놔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기리스를 보며 사뮤엘이 혀를 찼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을 거 같은데. 그 사람도 뭐 외로우니까 말벗하려고 태워준 거 아니겠어? 솔직히 이렇게 넘치는데 혼자 먹으나 우리 셋이 먹으나 티가 날 리도 없고. 그리고 힘으로 어떻게 할 거였으면 진작 했겠지."
사뮤엘이 별걱정 다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 강자를 알아보는 건 생존의 기본적인 능력이다.
그리고 카트란이라는 자는 굳이 눈치가 필요 없을 정도로 확연히 티가 나는 <진짜>였다.
아마 그 작자는 그냥 가던 길에 애완견 둘 주운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만약 여자가 필요한 거였으면 진작에 이 넓은 성, 본인의 곁으로 둘 중 하나는 불렀을 것이다.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자신들 둘은 제법 미모가 되는 편이었으니.
한데 지금까지 이렇게 방치하고 있는 거면 그냥 별 관심 없다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실제로 그 작자의 말도 그랬고.
<중간에 어딜 들렀다 북쪽으로 갈 겁니다. 안의 시설과 물자는 편한 대로 마음대로 써요. 나는 지금부터 들어가서 좀 자볼 테니.>
이 정도면 신경 쓰지 말라는 축객령에 가깝다.
물론 아직 카트란이 불편했던 둘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덕분에 둘은 이 넓은 성을 제 안방마냥 누비며 샅샅이 살피고 있는 중이다.
"진짜 잘됐어. 이대로라면 정말 북쪽 끝까지 갈 수 있겠는걸."
사뮤엘이 흥얼거리던 그때.
콰아아아아아앙!
"...!"
갑작스레 성을 후려치는 요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어 떠오르는 홀로그램 창 경고.
<북서쪽, 1450m 방향 적의 공격이 감지됩니다.>
<내부 시민 여러분들은 모두 충격에 대비해주십시오.>
이어 확대되는 스크린.
치직.
치지직.
치직.
순식간에 고철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적들의 모습을 확대해 비추는 홀로그램을 본 기리스와 사뮤엘들의 표정이 굳었다.
낡은 전차, 그 위에 붙은 마크를 통해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벌연합... 돌아버린 자식들. 아직 북쪽을 안 가고 이 근방을 헤매고 있다고?"
11개 세력 중 하나의 이름을 말한 기리스가 이를 악물었다.
**
콰아아아아아아앙!
"그래그래. 더 쏴 갈겨! 어차피 요즘에 마땅히 쓸만한 적도 없었는데."
"야 임마! 아래 궤도를 노리란 말이야! 덩치 좀 봐라. 위에 공격이 제대로 먹히겠어?"
메탈스파이더를 개조해 거치와 이동이 가능하게 만든 포대 수십 대 근처에서 험상궂은 인상의 일당들이 술병을 들고 요란하게 소리쳐댔다.
목표는 오랜만에 나타난 커다란 덩치.
콰아아아앙!
"와. 이것도 그냥 무시하고 달리네. 저런 게 어디서 나타난 거래?"
군벌연합.
그중 극동, 37번의 번호를 부여받은 군벌. <제프리>.
이를 이끌던 사내, 제프리가 쏟아지는 포격에도 무심이 북쪽으로 향하는 거대한 성채를 질린다는 듯 바라보았다.
어지간한 빌딩도 한방에 무너트릴 포격들이 연달아 내리꽂히고 있음에도 그냥 외부 장갑으로 무시하며 내달린다.
혹여 약점이 있을까 안테나나 취약점을 노려 포격해보려고 해도 대체 어떻게 설계된 건지 그런 건 전부 내장형으로 숨어있었다.
그나마 약점이 될 구동부와 무한궤도도 장갑 안에 감춰져 있는 형태라 포격이 쉽지가 않다.
말하자면 커다란 상자 전체를 뒤덮은 채 내달리는 거북이 같은 녀석이랄까.
하지만 언제나 방법은 있는 법이다.
"야야! 쓸데없이 바퀴 맞추려고 하지 말고 앞쪽 조준해."
"앞쪽이요?"
"그래. 바닥을 무너트려 버리라고. 앞길에. 그럼 멈출 거 아냐."
제프리가 멍청하게 대답하는 녀석의 머리통을 따악 후려치며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이 구역 전체가 고철 더미가 쌓여 만들어진 터라 대지가 부실하기 그지없다.
말하자면 구멍 뻥뻥 뚫린 스티로폼 같은 구조라는 것이다.
물론 그 재료가 고철이라도 금속이기에 일상생활 하면서 느껴질 정도는 아니지만, 포격을 냅다 때려 박아보면 그 차이가 느껴진다.
우르르 무너져버리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녀석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앞으로 갈 수 있을까?
기대 어린 표정으로 제프리가 멀리 내달리는 성을 바라본 그때.
“앞으로 쏘랍신다!”
콰아아아아아앙!
콰콰콰쾅!
대충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은 포격수들에 의해 연달아 쏘아진 수십 발의 포화가 그대로 성이 내달리려던 일직선, 그 앞 300m의 대지에 굉음을 내며 착탄 했다.
이어 비산하는 고철 덩어리 파편과 먼지들, 그리고 드러난 결과는...
"그렇지!"
콰르르르릉!
콰르르릉!
산사태가 나듯 통째로 허물어지며 아래로 광범위하게 내려앉는 대지 일부를 보며 제프리가 손을 따악 튕겼다.
그럼 그렇지.
그간 뇌종 놈들이 지키고 있어 쏴보고 싶었던걸 못 쏴봐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저렇게 후련하게 내려앉는 걸 보니 묵은 체중이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물론 뭐 최근에는 묵을 만큼 먹은 것도 없지만.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야야! 다들 시동 걸어라! 이번엔 큰 놈이다! 이제 저런 잔잔바리들 말고 배 터질 정도로 좀 털어보자고!"
“으하하하!”
부아아아아아앙!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저 멀리, 멈춰선 성채를 향해 고기동 부유 바이크들의 시동을 거는 수하 녀석들을 보며 제프리가 흉악하게 웃었다.
중갑보병, 사이보그, 감기 사용자, 상위범죄자 등등.
사회가 멀쩡하던 당시에는 존재만으로도 경원시 될 놈들이었지만, 세상이 세상이다 보니 수하로서는 이리 쓸만할 수가 없다.
'그래. 저런 난민 놈들 말고 제대로 된 것들 좀 털어야지.'
고철 더미 사이, 대충 처박혀있는 인질과 시체 놈들을 바라본 제프리가 스스로도 무기를 챙기고 시동을 걸었다.
물론 솔선수범을 보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수하 놈들만 보내면 맛난 건 제 놈들끼리 다 먹어 치울 게 뻔했기 때문이다.
가장 귀하고 가장 값진 건 무조건 자신의 차지여야 한다.
보물, 음식, 미인.
모두 말이다.
이윽고.
쭈아아아아아아악!
마개조 된 바이크가 강렬한 굉음을 토해내며 앞장서 내달리는 바이크들을 모조리 제치며 질주했다.
**
성채 안.
콰르르릉!
"언니. 저거 어떻게 하지. 답 있어?"
"... 없지."
철컥.
장애물을 감지하자마자 기동을 멈추고 방향 전환을 준비하는 성채, 그 입구 쪽에서 내달려오는 바이크들을 지켜보던 기리스가 레일건을 장전하며 중얼거렸다.
재수가 없으려고 해도 이렇게 없을 수가!
군벌연합.
찬이 죽고 플래그가 전쟁에서 패배하며 내부에 존재하던 군조직도가 모조리 붕괴되며 생겨난 놈들이다.
뇌종이나 스피어 같은, 한 끗 발하던 이들은 군대 내에서도 쓸만한 지휘관 녀석들을 모조리 꼬드겨 병기와 함께 탈출 당시 흩어졌지만 모든 지휘관들이 선택받은 건 아니었다.
충성심이 부족하거나, 배신할 기미가 다분하거나, 영 거슬리는 요소가 있다거나, 혹은 누군가의 아래 있을 만한 성미가 아니거나.
하여간 사회와 어울리기 영 부족한 녀석들은 붕괴 당시 다른 세력들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그대로 자신들만의 살길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뿔뿔이 흩어질뻔한 수백 개의 군조직들이 각자 군벌들을 자처하며 하나의 이름으로 연계한 게 군벌연합이다.
그 숫자가 어찌나 많았던지 11개 세력 중 하나로 인정받았을 정도다.
하지만 다른 군세들과의 가장 큰 차이는 생산력이다.
일반 시민과 행정인력들도 무난히 받아들인 조직들과 다르게 이들 세력은 오직 병사와 군대들로만 구성되어있다.
그러니 이들이 각자를 위해 선택한 가장 무난한 방법이 약탈과 협박이었다.
다른 열 개 세력들 사이의 영역,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채 지나가는 이들을 약탈하고 때로는 다른 세력에 붙어버리겠다고 협박하며 이것저것 뜯어가던 이들은 10개 세력들에게조차 나름 골칫거리였다.
그리고 자신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골칫거리로 끝날 수준이 아니었다.
탕탕.
"뭐 자기 방위 시설 같은 거 없어?"
<전투 기동 모드는 현재 에너지의 소모를 막기 위해 제한되어있습니다.>
"... 환장하겠네. 이거 진짜 빛 좋은 개살구잖아!"
콰아앙!
벽면을 내리친 사뮤엘이 이번에는 다급한 표정으로 옆의 기리스를 향해 물었다.
"언니, 진짜 도망가는 게 최선이야?"
"... 어쩔 수 없잖아."
키리리리리릭...
거칠게 방향을 돌리고 있는 전차 안, 바리바리 싸맨 배낭을 메고 뛰어내릴 준비를 하던 기리스가 사뮤엘의 말에 대답했다.
그렇다.
자신들이 이곳에 나온 이유는 맞서 싸우기 위해서가 아닌, 도망치기 위함이었다.
애초에 맞서 싸울 생각이었으면 내부구조를 이용해 싸우는 게 훨씬 효과적인데 이 입구까지 나올 이유가 없다.
그런 기리스를 향한 사뮤엘의 떨떠름한 한마디를 던졌다.
"... 그래도 그 주인장이랑 잘 싸우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강해 보였잖아."
"군대를 상대로? 혼자?"
"..."
"그 작자가 젊어진 검공이라고 해도 불가능해. 애초에 인간이 어떻게 군대를 상대한다고. 게다가 군벌장들은 기본으로 만렙인거 잊었어?"
만렙.
속칭 벽에 막힌 이들을 이르는 단어.
벽을 넘어선 세계에서야 더 강한 이들이 수두룩하겠지만, 이 세계에서 그런 이들을 볼 일은 없으니 두 번째 벽에 막힌 이들을 보통 만렙이라고 불렀다.
강함의 상징이다 점검기를 다루는 것도 모자라 이를 점점이 칼날에 이어 흩뿌릴 정도로 강해진 이들이다.
그리고 군벌연합의 각 군벌장들은 그런 <만렙>이 기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휘하, 주리고 통제 안 되는 수하 녀석들을 억누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거기에 그런 군벌장들마저 홀로 기갑화군대를 상대할 수는 없다.
피육으로 이루어진 생명이 강철과 화염에 대적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는 지난 역사가 말해주었으니.
애초에 그게 되었으면 각 나라의 장들도 귀찮게 군대를 꾸리지 않고 혈혈단신으로 다녔겠지.
"헛소리하지 말고 준비해. 달리기 시작하면 뛰어내리기도 힘들어."
"..."
사뮤엘이 못내 떨떠름하다는 듯 기리스의 말에 뛰어내릴 준비를 하던 그때.
저벅.
"가려구요?"
"...!"
복도 너머, 저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카트란의 등장에 둘이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