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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생존 전선의 중앙회의실.
“전력을 집중해서 뚫읍시다. 이후 이동 요새들이...”
“헛소리. 가장 앞이 피해가 막심할 텐데. 그 뒤는 누가 뚫을 거요?”
“이동 요새가 없이 병기들만 있는 이들은 손해만 보라고?”
"답이 없구나."
투덕거리며 치고받는 이들을 보며 탈리만이 길게 콧김을 내쉬었다.
예상한 꼴이지만 너무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는 걸 보니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콜로니는 언제 붕괴될지 모르고 죽음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상황에서 물자와 에너지는 바닥나고 내부의 갈등은 커져가고 있다.
빨리 힘을 합쳐 한 줄기 희망을 열어도 모자랄 판에 서로 손해 안 보겠다고 투덕거리고 있으니 이야기가 진행될 리가 있나.
거기에 각자의 강점과 역할들이 다르니 더욱 그랬다.
누군가는 자신들 조직의 역량을 발휘하면 위험한 포지션을 맡아야 했고, 누군가는 안전한 자리에 설 수 있었으니.
덕분에 여기 모인지가 거진 한 달 가까이 되어가는데 상황은 지지부진하다.
혹시 모를 공격, 혹은 때가 되면 이루어질 돌파를 위해 정면을 바라보고 서 있던 병기들의 포신들은 이제 슬슬 방향을 돌려 옆 세력들을 한 번씩 겨누고 있다.
서로의 커져가는 언성들 때문이었다.
"... 차라리 하나로 뭉쳐있을 때가 그립구먼. 이런 때면."
순간.
"정말 그때가 좋았어? 탈리만?"
낭랑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아본 탈리만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양팔이 날아간 채 기계화로 대체된 시원한 미모의 여인인 <고아드>였다.
11권세, 그중 방랑하는 달을 자처하는 <낭월>의 리더.
얼핏 보면 성격 좋아 보이는 호인으로 보이지만 무시무시한 실력의 소유자이다.
예전, 플래그의 군대를 이루던 이들이 빠져나가 만든 게 군벌연합이라면 그 시절 내부의 특수부대를 모두 통솔하던 자가 눈앞의 여인이었으니.
최전방, 최후방 가리지 않고 가장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던 최정예요원들의 구심점이 바로 그녀였다.
뇌종 내부, 이오스의 특전대나 그라함의 암무대가 비슷한 역할을 하지만 그 실력은 아득히 상위호환이다.
붕괴 당시 살아남은 소수의 실력자들로도 온전히 한 개의 세력으로 인정받을 정도였으니까.
대부분이 속칭 만렙에 가까운, 벽에 막힌 이들이며 고아드는 그중에서도 가장 특출났다.
물론 그 실력만큼이나 항상 선봉에 섰기에 플래그가 붕괴되던 날 더욱 큰 피해를 입긴 했지만 말이다.
"..."
자신의 말에 침묵을 지키는 탈리만을 향해 고아드가 후우 담배를 피우며 옆에 섰다.
회의실 내에서는 금연이 원칙이긴 하지만 그 누구도 고아드에게 뭐라 한마디 말하지 못했다.
그저 등 뒤의 그녀를 못 본 체하며 앞만을 바라본 채 서로 하던 회의에 집중하며 목소리를 높이는척하기 바쁠 뿐이었다.
그런 녀석들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고아드가 탈리만을 보며 히죽 웃었다.
"드디어 우리가 비슷한 꼴이 됐네! 반갑다고 해야 하나? 절대 위험한 곳으로 안 기어들어 가던 늙은 너구리가 웬일로 그런 부상을 입은거야?"
잘려 나간 두 팔을 대체한 기계 의수로 탈리만의 기계 의족을 가리키는 고아드의 말에 탈리만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목숨을 건져나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소. 그런 종류의 것들에 얽힌 일이었으니."
"... 설마?"
되물은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탈리만을 본 고아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 너구리가 웬일로 다리가 잘려 나갈 정도의 부상을 입었나했는데 <그런 것들>과 얽힌 것이라면 단번에 이해가 갔으니.
이레귤러, 혹은 신화적인 존재.
인세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버젓이 세상을 걸어 다니며 생기는 사건들.
사실상 플래그가 생겨난 것도, 무너진 것도 어떻게 보면 모두 위의 녀석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는 희망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려던 불꽃 같았던 여인 찬.
후우.
더욱 길게 연기를 뽑아낸 고아드가 탈리만을 보며 말했다.
"탈리만. 나는 그래도 지금 이 상황이 훨씬 낫다고 본다. 비록 찬이 있을 때는 온 집단이 하나로 뭉치긴 했었지만... 결국 계란으로 바위를 찍어버리려 가속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었지. 그녀 때문에 말이야."
"..."
"그에 반해 지금은 얼마나 좋냐. 서로 자기 목숨이랑 이권이 걸려있으니 필사적으로 투덕거리고 있잖아. 각자의 생각을 모조리 펼치며 말이야. 그 시절엔 이런 것도 없었지. 시키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하고 앞장서면 그대로 따라가야 했으니."
"..."
"분명 답답해 보여도 이 끝에는 좋은 결론이 나올 거다. 좀 더 지켜보자고. 그렇게 똥 씹은 표정 하지 말고. 뭐하면 너도 한 대 피울래?"
"됐소이다. 침 묻은 걸 누가 핀다고."
"하하."
피던 담배를 건네자 거절하는 탈리만을 보며 고아드가 웃었다.
겉으론 나이 많아 보여도 여전히 어릴 때부터 귀여운 녀석이다 싶었기 때문이다.
약물에 절여져 나이가 멈춰버린 자신의 거울 속 모습을 보자면 자연스레 세월 따라 흘러가는 녀석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비록 그 차이가 너무 벌어져 이제는 한껏 역전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투덕거리는 회의장 속 이들과 불만스러워 보이는 탈리만, 그들 모두를 고아드가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그때.
벌컥.
"... 여러분. 큰일 났습니다."
"이 새끼가! 너 어디 소속이야! 회의 중에 누가 멋대로 들어오래!"
안 그래도 짜증 나는 분위기였기에 누군가가 쾅 철제탁자를 치며 문을 열고 들어온 수하를 타박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수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선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호랑이를 달고 온 것 같은 사람마냥 말이다.
그런 이를 보며 회의실 안에 있는 이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던 그때.
저벅.
"다들 오랜만이구나."
"...!!!!!!!!!!!!!!!!!"
"내가 돌아왔다. 반갑지?"
"찬..."
까득.
너무나도 익숙하면서도 증오스러운, 더불어 이곳에 있을 수가 없건만 실로 자연스럽고 어울리게 등장한 그녀를 보며 고아드가 까득 이를 갈았다.
**
중앙 부근.
쿠르르르릉...
"저... 근데 혹시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
"말이라도 해주시면 저희가 모시는데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아오 개새끼.'
움직이는 이동 요새 안, 여전히 누운 채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상대의 앞에 고개 숙이고 있던 제프리가 속으로 온갖 쌍욕을 내뱉었다.
강하니 일단 고개 숙이긴 하지만 영 개놈시끼다 싶었다.
무슨 벙어리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대가리 팍 숙이고 기는데 어디 가는지 한 마디 정도는 해줄 수 있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상대는 묵묵부답이다.
그저 이 이동 요새가 북쪽을 향해가는 길, 어딘가의 목적지를 향해가고 있다는 것 정도만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 성에 먼저 타고 있던 두 쌍둥이를 통해서 말이다.
<정보를 제공하면 너희는 내버려 두도록 하지. 그러니 아는 거 다 말해다오. 서로 협조하자고.>
<...>
자신의 협박 반, 협조 반의 말에 마지못해 이것저것 떠들어대던 두 쌍둥이를 떠올린 제프리는 이내 인내심을 가지고 입꼬리를 원상태로 끌어올려 웃는 표정을 유지했다.
상대의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어디를 들르건 간에 북쪽으로 향할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전까지 어떻게 해서라도 비위를 맞추어 이자를 든든한 뒷배로 만들어두는 것이 중요하다.
도착해서 고아드, 그 망할 년에게 머리가 날아가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망할 계집.'
고아드를 떠올린 제프리가 속으로 쌍욕을 퍼부었다.
자신이라고 이런 희망도 없는 대지 위를 남아있고 싶어 떠도는 줄 아는가?
생각 같아서는 자신도 진즉에 북쪽으로 합류해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보고 싶었다.
실제로 거의 도착하기도 했었다.
수십 킬로미터 밖, 북쪽을 향해 진군하는 고아드의 깃발을 본 순간 그대로 내빼버렸지만 말이다.
걸리면 그대로 죽는다.
똑같은 11군세라고 하더라도 군벌연합들 중 하나의 리더일 뿐인 자신과 망월의 총대장인 고아드는 격이 다르니까.
그렇기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이런 희망이 나타나다니.
눈앞, 누가 봐도 <찬>과 같은 이레귤러가 확실한 상대가 자신의 뒷배가 된다면 아무리 고아드가 간덩이가 커도 자신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이레귤러의 특별함은 찬을 가장 가까이서 보아왔고 그렇기에 증오하는 고아드 그 계집이 가장 잘 알 테니 말이다.
"... 혹시 시키실 거나 불편하신 거 있으면 불러주십시오."
끼익.
혹시 모를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문밖으로 나온 제프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뒷배가 나타났다지만 영 찝찝했다 싶었기 때문이다.
예전, 세상이 멀쩡하던 시절에도 그랬지만 저런 <이레귤러>들이 많이 나타난다는 건 자신들 같은 인간들에게는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다.
좋은 코끼리건, 나쁜 코끼리건.
그런 것들이 나타나 개미집 위에서 날뛴다면 좋은 일이 무엇 있겠는가?
그저 바라는 것은 하나, 제 놈들이 치고받건 상관없이 자신은 무사히 목숨 건져 장벽을 넘기를 바랄 뿐이다.
"에이. 거지 같은 새끼. 이거나 먹어라."
처억!
작게 속삭인 제프리가 가운뎃손가락을 처억 올린 채 닫힌 문을 향해 엿을 먹인 순간.
치이이이익.
"!!!!!!!!!!!!!!!!"
"뭐하냐."
"크흠. 크흐흠. 스트레칭 중이었습니다. 한데 웬일로 바깥에...?"
<안에 파묻혀 죽을 것처럼 누워있더니>를 생략하며 물은 제프리의 말에 문밖으로 나온 강태석이 덤덤하게 말했다.
"목적지에 거의 도달한 것 같아서."
쿠르르르릉!
서서히 작동을 멈추는 엔진.
그 이동 요새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 건너, 거대하고도 기묘한 건축물을 바라보며 강태석이 몸을 풀었다.
**
쿠르르릉...
고철로 이루어진 섬이자 대륙, 뇌종의 영역이 끝나는 장소.
철썩이는 바다 건너, 구름 사이에 쌓인 기묘한 금속의 구조물을 강태석이 빤히 바라보았다.
B구역, <철상아탑>.
독특한 에너지장이 형성되어 연구적 가치가 높았기에 수많은 기업과 학계 인물들이 모여 학문적 연구와 실험을 수행하던 장소였다.
그리고 그곳을 바라보는 강태석의 곁, 쓸개라도 빼줄 것처럼 헤헤 웃던 제프리가 한마디 곁들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기가 목적지셨군요. 저긴 아마 그 먹물쟁이들이 들어가 있을 텐데요."
"먹물쟁이?"
"네네. 그놈들. 머리 좋다고 까부는 놈들."
11군세.
그중 하나, <테크니컬스>를 가리키며 제프리가 말했다.
멸시하듯 말했지만 저기도 이 6층에서는 범접이 불가능한 대지나 마찬가지다.
온갖 초고위 병기들을 연구하던 연구진 놈들이 플래그에 잠시 몸담았다가 무너지자 잽싸게 몸을 피해버린 곳이 저곳이니까.
물량 자체는 많지는 않겠지만 자신들, 군벌연합의 메탈스파이더 같은 하위기종들은 그냥 쓰레받기로 쓸어 담듯 후려쳐버릴 수 있는 온갖 기묘한 병기들이 저 안에 잔뜩 잠든 채 사방을 향해 포신을 겨누고 있다.
침략해 들어오는 놈들은 모조리 태워버릴 기세로 말이다.
실제로 초반, 기세 좋게 테크니컬스를 흡수해 세력을 확장하려다 지워진 군벌연합 내 군벌들만 해도 십수 개였다.
사실 초반에만 해도 무시당하다가 그렇게 몇 개 세력을 지워버리며 당당히 11개 세력으로 올라선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하여간 영 정이 안 가는 녀석들이다.
"위험할 수도 있을 텐데요."
제프리가 묘한 음성을 담아 강태석에게 말했다.
이레귤러라는 것들이 워낙 기상천외하긴 하지만 애초에 저 테크니컬스라는 놈들이 하는 일이 그런 이레귤러들에게 피해를 입힐만한 병기를 연구하고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3년 전, 11층에서 벌어진 대전쟁에서 자신들 <플래그>가 상대해야 하는 적들 역시 그런 종류의 것들이었으니.
그때도 위력이 살벌했는데 지금은 자그마치 3년이나 세월이 흐른 상황이다.
안에 콕 처박힌 놈들이 무엇을 탄생시켰을지 아무도 모르는 노릇이다.
심지어 저 바다 한가운데의 성까지 접근하던 중에 요격당할 수도 있었다.
그런 제프리의 말에.
"..."
"...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태석의 표정에 불안해진 제프리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