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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구구구구...!
"... 와. 진짜 저 미친 것들."
쿠르르릉...!
이동 요새와 군대를 이끌고 거대한 다리를 건너가던 제프리가 저 멀리, 태양처럼 점점 더 번져가며 주변을 집어삼키는 화구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군대를 이끌며 온갖 화염과 에너지가 난무하는 전장을 봐왔지만 저 정도의 위력은 처음 본다.
대체 얼마나 오랜 기간 에너지를 끌어모아 축적해뒀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정도였다.
원래부터 녀석들의 정체성이 대이능존재를 상대하는 것이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준비해뒀을 줄이야.
뭣도 모르고 따라 들어갔다가는 형체도 찾지 못하고 녹아 사라질뻔했다.
꿀꺽.
'정말 죽은 거 아냐?'
쿠구구구구...
침을 삼킨 제프리가 사방 바다를 모조리 증발시켜버리면서도 기세가 줄어들지 않고 불타오르며 점점 더 커져가는 구체를 불안하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지간하면 죽을 거 같지 않은 작자긴 했지만, 저 정도면 또 이야기가 다르다.
마치 작은 태양이 지상에 강림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실제로 불이 꺼져 어둑해진 콜로니 전체가 마치 해가 떠오른 것처럼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여명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말이다.
평범한 이라면 그 변화에 살짝 표정이 밝아지기라도 하겠지만 제프리 입장에선 정반대의 이야기였다.
이대로 죽어버리면 자신은 갈길 잃은 신세가 된다.
"씁. 이거 들고 그대로 저놈들한테 붙어? 저놈들이랑도 사이가 썩 좋은 건 아닌데..."
어느새 멀어지고 있는 테크니컬스들의 과학선을 보며 제프리가 입술을 잘끈 깨물던 그때.
고오오오오오...
"?"
갑작스레 생겨난 변화에 제프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점점 더 커져가고 있던 화구.
그 매끈하고 찬연한 표면이 갑자기 후욱 일렁이더니 대류가 일어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그 완전한 순환을 헤집으며 안쪽에서 솟구치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후우우우욱!
쿠르르르릉!
"... 으아."
안쪽에서 솟구친 거대한 손아귀를 보며 제프리가 작은 신음을 토했다.
이미 익숙한, 크기가 백수십 미터에 달하는 팔.
저것만 보았으면 그다지 놀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아... 무사히 살아나왔구나 하고 넘기면 될 일이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팔만 빠져나온 게 아니었다.
손아귀, 팔.
그 뒤로 쭈욱 따라 바깥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어깨와 거대한 상반신.
이윽고.
쿠우우우웅!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후우우우우우욱!
모든 여력을 토해내고 서서히 바다에 둘러싸여 줄어들기 시작하는 화구, 그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온 상앗빛의 압도적인 금속 거인의 자태에 제프리가 저도 모르게 한발 주춤 물러섰다.
**
촤아아아아악!
쿠우웅...
밀려드는 바다, 그 한가운데 우뚝 선 강태석이 자신의 몸을 완전히 둘러싼 거체를 바라보았다.
압도적으로 밀려들던 열기와 녹아내리던 바닥, 그 아래서 접촉한 3m 크기의 구체.
그리고 손을 마주 댄 순간 꿈틀거리며 움직인 구체가 자신의 몸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금속 생명과 마주한 순간, 구체는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자신의 육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수많은 생명들을 집어삼키고도 두 팔만을 복구할 수 있었던 외계 존재의 나머지 부분을 메운 결과물이었다.
쿠웅...
촤아아아악...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고 점점 더 줄어드는 화구, 그 사방을 둘러싼 바닷속에서 강태석이 한발 내딛자 주변이 거세게 출렁이며 해일이라도 친 것마냥 넘실거렸다.
높이만 해도 640m.
해수면에 잠긴 상태로도 녹아내려 사라진 철상아탑의 절반가량까지 도달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이다.
'평상시엔 이 정도면 오히려 불편하겠는데?'
강태석이 생각을 마친 순간 급속도로 불어났던 금속의 육체가 되려 쑥쑥 줄어들며 그림자와 주변 공간, 어딘가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640m, 500m, 300m, 100m.
이어 흑기사처럼 몸을 감쌌다가 마지막엔 갑옷처럼, 이어서는 완전히 사라지고 맨몸만 남았다.
토옹.
거체가 사라졌음에도 화신체로서의 온갖 권능은 그대로 남은 상황이다.
그대로 출렁이는 바다 위에 마치 육지마냥 내려선 강태석을 향해 내부, 외계 생명의 의사소통이 전해져왔다.
그 언어와 표현방식은 비록 인간의 것이 아니었지만 내부에 담긴 뜻만은 정신으로 연결되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게 너희 유아기 모습이라고? 원래 이 행성에 도착했을 때는 더 자란 상태였고?"
<... .... ....>
"그럼 성체는 이것보다 더 큰 거 아냐? 그럼 불편한데."
물 위를 통통 걸어가던 강태석이 내면의 존재와 대화했다.
덩치와 중량이 크면 유리하기도 하지만 불리한 것도 크다.
움직임도 둔해지고 빈틈도 많아지며 피탄 면적도 커지고 유지비용 자체가 많이 들어간다.
약한 상대와 싸울 때라면 모를까, 동급의 출력을 지닌 존재와 싸우면 그것 자체가 단점이 된다.
대초인이나 귀족들같이 일신에 세상을 때려 부술 힘을 지닌 존재들에게 있어 적수의 덩치 따위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런 강태석을 향해 들려오는 한마디.
<... .... ......>
"성체가 되면 오히려 더 작아진다고? 내가 벽을 넘으면 같이 작아질 거라고?"
<... .....>
"그거 희소식이네. 이제 벽만 넘으면 되겠다."
토옹...
저 너머, 가까워지는 F구역의 해변을 바라보며 강태석이 중의적인 말을 담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경지의 벽, 동시에 세계의 벽.
저 멀리, 이제는 아스라이 보이는 튜브의 끝으로 우글거리는 무언가들이 기어 다니는 은빛의 장벽이 보인다.
위성 요새와 기계 병기들이 합작하여 탄생시킨 대장벽.
평소 인간 수준이었다면 저걸 뚫는다는 건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온갖 군대의 화력을 집중시켜도 될지 말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괜히 아너스빌이 이 신화적인 크기의 구조물을 전력 질주시켜 충돌시킨 뒤 벽에 구멍을 낸 게 아니다.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칠국들도 부담스러워 도박을 해야 했을 정도의 장애물이다.
하지만 아마 화신체가 있다면 어떻게든 시도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크기를, 얼마만큼 뚫어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말이다.
하여간 일단 가봐야 알 수 있는 법이다.
“아이구! 고생하셨습니다!”
저 멀리, 해안가에 어느새 부리나케 도착해 손을 휘휘 젓고 있는 제프리를 본 강태석이 덤덤한 표정으로 수면을 걸어 최종대지, F구역으로 향했다.
**
과학선, 판트로넬.
"... ..."
"......"
쿠우우우우웅!
최대기동을 통해 북쪽으로 내달리는 과학선 속, 모여있던 일곱이 침묵을 지켰다.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성대한 불꽃놀이라고 생각한 빛의 태양 속에서 손을 내뻗으며 솟구쳐나온 거신을.
"쫓아오진... 않겠지요?"
판트로넬 안에 자리 잡은 이들 중 한 여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원래 과학에는 준비가 필요한 법이다.
그들이 타고 있는 이 과학선 안에는 이레귤러들조차 어떻게 해볼 수 있다고 생각되는 수많은 자신작들이 준비되어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받고 충분한 준비시간을 가진 뒤에나 사용 가능한 것들이다.
말하자면 조립이 안 된 미완품들이었다.
지금 당장 <저런 게> 쫓아오면 당해낼 방도가 없다.
그런 여인을 향한 누군가의 답변.
"아마. 지금은... 쫓아오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군. 포기한 것 같기도 하고."
쿠콰콰콰...!
전력을 다해 멀어지는 과학선 속, 잠잠한 뒤쪽 창밖의 해수면과 대지를 보며 사내가 중얼거렸다.
어느새 가로막은 F구역의 산들로 인해 너머의 광경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추정 크기만 해도 600m가 넘는, 철상아탑보다도 거대한 그런 것이 쫓아오고 있다면 티가 나도 진즉에 났을 것이다.
“후우.”
“하아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안쪽의 이들을 보던 사내가 이내 덤덤히 말했다.
"빠르게 북쪽으로 가자. 그곳에 다들 모여있을 테니. 그곳에 있는 수뇌들이라면 우리의 결과물들을 제대로 써주겠지."
지난 3년 자신들의 역작.
완성시켜놓고도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사용하기 버거운 물건들이 지금 이 과학선 안에 잠들어있다.
아마 북쪽에 살아남은 각 세력의 장, 그리고 그들의 축적된 힘이 있다면 이 또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마 한결 더 발 뻗고 편하게 잘 수 있을 것이다.
저 빌어먹을 이레귤러같은 것들조차 상대할 수 있게 될 테니.
이윽고.
쿠구구구...
그들을 비롯한 70명가량의 인원들을 태운 과학선들이 정처 없이 바다를 가로질러 북쪽, 마지막 장벽 방향을 향했다.
**
이동 요새, 마몽드 안.
"쫓아가서 안 잡으십니까?"
"뭘?"
"아까 그놈들이요. 불 지르고 도망간 먹물쟁이들."
다시 침실로 향하는 강태석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제프리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안에 서린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 채.
그도 그럴 것이 군벌연합들은 대부분의 세력들과 사이가 안 좋았다.
스스로의 생산이 불가능했으니 대부분의 핵심 물자들을 다른 세력을 겁박하거나 약탈, 혹은 기회를 봐서 가로채는 식으로 해결해야 했으니.
테크니컬스라고 뭐 다른 게 있겠는가?
자신들만 해도 철상아탑에 덤벼들지 않았다 뿐이지, 탐사니 채집이니 하는 명목으로 바깥으로 나왔던 녀석들의 조사팀들을 수도 없이 털어먹었다.
도저히 감당 불가능해 보이는 철상아탑의 방위시스템에 비해 바깥으로 나온 놈들은 상대적으로 만만했으니까.
한데 그런 놈들이 무사히 탑 밖으로 빠져나와, 그것도 챙길 것들은 다 챙긴 것처럼 보이는 상태로 북쪽을 향하고 있으니 마음 편할 리가 있겠는가?
이대로면 반드시 마주칠 텐데.
낭월의 리더, 고아드도 자신을 잡아 죽이려 하겠지만, 테크니컬스 녀석들도 만만하지 않다.
재수 없으면 싸우는 도중 정체불명의 포격이나 병기가 날아들어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가 싸그리 지워질 수도 있으니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아주 야비한 놈들입니다. 내버려 두면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데 이 기회에 붙잡아서 싹 정리해버리시면..."
그러며 주먹을 확 쥐는 시늉을 한 제프리가 강태석을 향해 살랑살랑거리며 말했다.
어울리지도 않는 짓이었지만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이 인간 같지도 않은 종자가 그것들을 밟아버리면 앓던 이가 쑥 빠진 것처럼 시원할 것 같았다.
제법 멀어졌다지만 아까 전 그 금속의 마신의 모습을 보자 하니 쫓아가면 순식간에 도달할 것 같기도 했고.
하지만 그런 제프리의 기대를 단번에 짓밟는 한마디.
"귀찮아. 할 것도 있고."
"아 음..."
"가라. 여기까지 따라오게."
"넵."
치익.
열리는 침실 문, 그 안으로 가며 손을 휘휘 내젓는 카트란의 모습에 바짝 얼어붙은 제프리가 그대로 경례하며 닫히는 문 안으로 사라져가는 카트란의 등을 바라보았다.
속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으면서.
'쓰벌... 진짜 이제 뭐 한마디도 못 하겠네. 무서워서.'
이전에도 신경 쓰였지만, 화구에서 마치 알을 깨고 나오듯 튀어나오던 거신을 떠올리자니 이제는 눈앞의 놈이 인간인지 혹은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인지가 헷갈릴 정도였다.
사실 아까 전과 지금 둘 중 뭐가 진짜 모습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치이이익...
철컹!
완전히 닫혀버린 문을 보며 터덜터덜 발을 돌린 제프리는 순간 가슴을 탕탕 치며 허리를 쭈욱 펴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하면서 말이다.
그래, 어찌 보면 저 작자도 아직 자신들을 내치거나 하지는 않고 있잖은가?
비렁뱅이에 가까운 쌍둥이들도 거둬 태우고 나름 지켜주는 걸 보니 자신들이 열심히 쓸모를 입증한다면 마냥 휴지 조각마냥 내팽개쳐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할 일은 간단하다.
전력을 다해 알랑거리고 따라붙으면 된다.
"... 그런데 저거 진짜 넘을 수 있는 건가. 살아서."
쿠르릉...
질주하는 요새 외부를 비추는 홀로그램, 그 장엄한 장벽의 형상을 보며 제프리가 다시 자신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