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220화 (220/221)

220

F구역.

한파와 설산의 대지.

수많은 산맥들이 굽이굽이 장벽을 이루며 그 사이사이로 눈과 혹독한 기후들이 몰아친다.

하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의 이야기다.

대부분 마력을 몸에 익히고 강한 육체를 지닌 생존자들에게 있어 이곳의 한파와 장벽은 조금 서늘하고 복잡한 지형에 불과하다.

어차피 이곳도 휴양지로 개발된 곳 중 하나일 뿐이니.

더불어 산맥들이라고는 하지만 그 사이사이로 도로도 잘 만들어져있다.

쿠르르릉...!

그 사이, 이제는 고철이 된 도로 위의 차들을 짓뭉개며 이동하던 요새 마몽드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강태석이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고민은 하나뿐이다.

벽을 뚫을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능할까?'

콰르르릉...

강태석은 자신이 향하는 방향, 그곳을 가로막은 위성 요새의 장벽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가까워질수록 느껴지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밀어내고 있는 그 기운과 그 위를 마치 강철 껍질처럼 뒤덮은 수많은 기계 병기들.

녀석들이 장벽을 공격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수십 개 위성 요새에 의해 끊임없이 에너지가 공급되고 유지되는 장벽에 유의미한 데미지를 주기는 힘들다.

차라리 방해물이 되었으면 되었지.

잠시 고민하던 강태석은 이내 결론에 도달했다.

"나 하나는 가능하겠다."

강태석이 입김을 푸 불었다.

정확히 말하면 장벽을 찢어내거나 부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틈을 어떻게든 비집고 자신하나 정도 통과하는 건 가능하다.

새로 얻은 화신의 육체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테니.

그렇지만 그 뒤에 남을 모든 이들은...

벅벅.

가부좌를 앉은 상태로 머리를 벅벅 긁은 강태석이 괜히 긴 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마음만 심란해졌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실 모르는 이들이다.

살려준다고 하여 자신에게 득이 될 것도 아니고, 그저 마음이 조금 불편한 정도?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수십만을 내버려 둔 채 홀로 빠져나가는 게 마음이 좋을 리가 없으니까.

반대로 그들을 어떻게 함께 살린다고 해도 자신이 얻는 것은 마음이 조금 편해지는 것뿐이다.

하지만...

"흐음."

앉은 상태로 고민하던 강태석은 일단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는 보기로 말이다.

아직 육신이 완전히 융합하고 적응하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전에 벽을 깨트려볼 방법을 찾는다.

정 방법이 없다면 자신 혼자서라도 넘어가겠지만, 그전까지는 최대한 노력해본다.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또 다른 방법이라도 생기기 마련이니.

"오랜만에 보겠네 다들."

쿠르르릉...

북쪽.

옹기종기 모여있을 이들을 떠올리며 강태석이 하품을 내뱉었다.

**

장벽 앞.

"다들 오랜만이네. 정말로."

"..."

"......."

상석에 떡하니 앉은 찬이 침묵에 잠긴 이들을 보며 흥얼거렸다.

오랜만에 보니 감회가 새로웠기 때문이다.

그런 찬을 향해 서 있던 이들 중 하나, 탈리만이 물었다.

"그때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살아계셨던 겁니까?"

"아아. 11층에서? 마지막 싸울 때? 그렇지. 살아있었지."

찬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들기 전 마지막 싸움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이 이 콜로니 안의 모든 이들을 이끌고 참여했던 대전쟁.

자신이 손에 넣고 싶었던 것은 이곳, 12층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있던 <테라포밍 시스템>.

내부의 콜로니들이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놓은 것이라면, 12층의 테라포밍 시스템은 주변의 불모지를 온전히 지구와 같은 환경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어딘가로 분리되어 행성, 혹은 다른 차원에 도착했을 때 콜로니가 발휘했을 진정한 기능이다.

콜로니 내부의 거주 구역은 테라포밍 시스템이 주변 환경을 뒤바꾸는 동안 사람과 물자들을 일시적으로 보관하는 역할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행성을 바꾸는 씨앗이다.

그게 있다면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걸 위해 그곳을 지키는 <수문장>들과 싸우던 중, 그리고 그들 중 하나를 죽여버린 와중 자신이 아주 중대한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레귤러가 필요하더라고."

"네?"

"12층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이레귤러가 필요해."

찬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죽여버리고 시스템만 차지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하필 수문장 녀석이 동력원이자 키 역할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12층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그런 이레귤러를 찾아 제대로 끼워 넣어야 한다.

그것도 어디 깔짝거리는 어설픈 녀석들이 아닌, 아주 제대로 잘 자라고 성숙한 녀석들을.

한데 그 당시에 콜로니에 그런 녀석들이 있을 리가.

그래서 만사 귀찮아진 찬은 그냥 죽어버린 척하고 잠에 든 것이다.

목표가 소실되자 만사가 귀찮아졌으니까.

아래, 자신의 목표를 위한 <도구>들의 사정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한데 다시 깨어난 이유는 하나, 느꼈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이 대지에 <이레귤러>가 나타난걸.

그것도 아주 튼실하고 쓸만하여 당장에 사로잡으면 시스템에 끼워 넣을 수 있는, 그런 녀석을.

"아마 너희들 중에도 몇 녀석은 알 거야. 그런 녀석이 나타났는데 완전히 모를 수는 없거든."

"..."

찬의 말에 탈리만을 비롯한 그라함, 이오스등이 침묵을 지켰다.

찬이 말하는 <이레귤러>가 누굴 가리키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북쪽, 자신이 남겨두고 왔던 칸헬.

아마 찬은 그자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 어둠의 속박을 뚫고 밖으로 빠져나온 게 시조 칸헬과 후대 칸헬, 둘 중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이들을 보며 싱글벙글 웃은 찬이 신난다는 듯 말했다.

"하여간 너희들이 해줄 일은 이번에도 똑같아. 내가 앞장서서 싸우는 동안 뒤에서 지원하는 거지."

<사냥>.

예전, 플래그의 모든 이들이 11층에서의 일을 <전쟁>이라고 부를 때 찬만은 이것을 <사냥>이라고 불렀다.

전쟁이 아닌, <괴물>을 때려잡는 일이라고.

그리고 자신은 사냥꾼.

그런 괴물들을 잡아 인간을 이롭게 하는 자.

여기까지 생각은 찬이 주변을 보며 호기롭게 책상을 탕탕 쳤다.

"느껴진다고. 그 녀석이 지금 북쪽으로 올라오는 게. 다들 준비해서 그 녀석만 잡자고. 그러면 너희들이 고민하는 모든 게 해결될 테니."

"고민이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의 고민이 한두 종류가 아니다.

그런 탈리만의 질문에 찬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긴. 살아남는 거지. 그리고 저 벽을 깨부수는 거랑. 너희들 지금 그걸 못해서 고민아냐? 하지만 그 녀석을 잡아서 위의 12층 안에 쑤셔 박는다면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테라포밍 시스템만 가동되면 저 장벽 정도 뚫는 건 일도 아니라니까? 설령 못 뚫어도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도 있는 일이고."

"...!"

찬의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뒤바뀌었다.

그게 된다고?

그렇다면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살아남을 수도 있다.

수십만 명이, 단 하나의 손실도 없이!

그리고 그 뒤에서 모든 것을 듣고 있던 고아드가 작게 한탄성을 토했다.

"염병. 이번에도 또 저 마녀 뜻대로 흘러가는군."

가장 가까이서 보았기에 고아드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저 망할 년은 인간을 벌레만도 못하게 생각하고 도구로 여긴다는 것을.

말하자면 자신의 목적을 위한 하등생물 취급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자신들을 어떻게든 써먹고 살려 데려가려고는 한다.

모이면 모일수록 유용하다는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

그리고 그게 지금 이런 절박한 상황의 모두에게는 희망의 등불이 되는 것이다.

다 죽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따라만 오면 어떻게든 살려주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실제로 그에 걸맞은 비전과 능력이 있으니까.

3년 전, 플래그 때도 그랬다.

비록 패배하긴 했지만, 그때가 콜로니 내부의 전성기 시절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가장 거대한 세력, 가장 넓은 영토, 가장 출중한 인재들과 넘쳐흐르는 희망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찬이 다시 등장함으로써 다시 그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고아드를 향한 한마디.

"고아드. 이번에도 잘 도와달라고. 넌 유능하니까."

저 멀리, 모조리 듣고 있다 고아드를 보며 싱긋 웃은 찬이 주변을 향해 박수를 짝짝 쳤다.

"자자. 다들 나가서 준비해! 그 녀석이 넘어온 게 느껴지니까! 이곳에 오기 전까지 준비를 마쳐야 해!"

괴물의 사냥을 위한 기본은 준비다.

덫, 도구, 독약, 함정 등등.

가리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건 모조리 사용해야 한다.

아무리 자신 스스로에 대해 자신이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찬의 말에 회의실에서 지지부진하던 모두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

북쪽.

쿠르르릉...

"가서 벽을 뚫어보실 생각이라고요?"

"그래."

강태석의 말에 모여있던 제프리와 쌍둥이, 그리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사실 이동 요새 안에 모여있던 모두가 거체를 본 순간 든 생각은 하나였으니까.

<자신들을 버려두고 가면 어떻게 하지?>

솔직히 자신들이 필요할 것 같지가 않았다.

실제로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고.

그 위풍당당함을 보고 있자니 홀로라도 장벽을 넘을 수 있을 것마냥 강렬했지만, 또 벽을 깨부술 수 있을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들을 가로막는 장벽의 위용은 그 이상이었으니.

그렇기에 혹여 버려두고 가면 어쩌나 했는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찌 아니 기껍겠는가?

"맨몸으로 그게 가능한가요? 그 창이나 방패로?"

쌍둥이 중 기리스의 질문에 강태석이 고개를 저었다.

"무리지. 들어가서 버티고 있을 순 있어도 너희들은 못 지나가. 기계 병기들이 가만 있지 않을 테니까."

거신체로 들어가 벽을 찢고 닫히지 않게 가로막고 있을 수는 있지만 기계 병기들이 문제였다.

꼼짝달싹 못 하는 거체의 위로 녀석들이 미친 듯이 몰려들어 갉아먹고 빈틈을 파고들려 할 것이다.

당연히 그 아래, 해일과도 같은 녀석들의 공세를 헤치고 건너가는 건 말도 안 되고.

어떻게 해서든 단번에 벽을 박살 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매달려있는 녀석들 동안 우르르 무너져내려 정신을 못 차릴 것이다.

준비만 잘되어있다면 각종 수송 차량들을 이용해 단번에 피해를 최소화하며 벽 너머를 향할 수 있을 것이다.

"으음..."

강태석의 말에 기리스를 비롯한 주변 생존자들이 턱을 괴었다.

제프리, 이 망할 자식이 갑자기 착한 사람 코스프레를 하며 이렇게 인질 신세던 자신들을 참석시켜준 건 좋은데 때아닌 고민에 빠지게 되었으니.

그것도 자신들의 목숨이 걸린 일에!

그때.

"혹시 이런 거로 던져서 깨버리면 안 되나? 아니면 폭발시켜서?"

"이런 거? 뭘 말하는 거야?"

어딘가를 가리키는 사뮤엘의 말에 기리스가 되묻자 사뮤엘이 다시 발을 굴렀다.

텅텅.

"이거. 이 요새. 이거 정도면 터졌을 때 그래도 제법 위력이 안 나오려나?"

자신들을 실어 나르고 있는 거대한 이동 요새를 가리키는 사뮤엘의 말에 제프리를 비롯한 모두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눈치를 봤다.

그 생각을 자신들이라고 안 해본 게 아니다.

이 정도 질량에 이 정도 에너지를 품은 물건이라면 터졌을 때 상당한 위력이 나올 테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물건의 주인은 카트란, 저작자였다.

얹혀가는 주제에 그걸 냅다 집어던지자는 얘기를 어찌한단 말인가?

되려 자신들이 쫓겨나는 꼴이 될 수도.

"야야. 그건..."

<눈치 좀 챙겨라>라는 눈으로 성큼 걸어간 제프리가 사뮤엘의 입을 틀어막으려던 그때.

"좋은 생각 같은데? 계속해봐요."

"?"

뒤에서 덤덤히 흘러나오는 카트란의 음성에 제프리를 비롯한 모두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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