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재 멸망 n% 진행중-221화 (221/221)

221

북쪽.

쿠르르릉...

"타이밍이 좋아. 타이밍이.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지?"

"..."

과학선, 판트로넬을 타고 온 칠인방과 73인은 눈앞 여인의 모습에 실로 어이없다는 감정을 감추기 힘들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죽은 거 아니었습니까, 찬?"

"다들 그렇게 생각하더라고. 아니야. 잠깐 잠들었던 거지. 그나저나 너희가 한 이야기. 엄청 흥미롭네."

"..."

칠인 중 하나는 찬의 옆, 병풍처럼 뻘쭘하니 선 탈리만을 노려보았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작자라 이곳에 오자마자 저 양반부터 찾았다.

이미 관측 결과 뇌종의 검공은 실각하고 그나마 그러모은 신세력의 중심이 탈리만, 저자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다른 세력에 비해 형편없이 작아졌지만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이동 요새, 탄트라를 보유하여 힘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자신들이 준비한 것과 탄트라의 동력원.

두 가지 궁합이라면 이것저것 시도를 많이 해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판트로넬에서 내리자마자 이곳으로 왔다.

한데 저 괴물이 아직도 살아있었다니.

그것도 자신보다 한발 먼저 도착해, 이곳의 모두를 이미 휘어잡은 채로.

'상정 외야. 상정 외.'

그러거나 말거나 찬은 흥겹게 자신의 세상에 빠져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레귤러가 새 육신을 손에 넣었다 이거지? 그리고 이쪽으로 천천히 북상하고 있고?"

"..."

"그리고 너희는 그에 대한 충분한 대비를 할 수 있다고 했고? 과학선 안에 있는 재료들로?"

"..."

찬의 말에 칠인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게 예전, 11층에서의 수문장보다는 <너> 같은 작자들을 상정하고 준비해둔 물건이라는 것을.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어쩌겠는가?

죽기 싫으면 통째로 넘길 수밖에.

"원하시면 준비해드리지요."

"아하하! 원하다마다겠어. 빨리 서두르자고! 시간이 없으니까. 시운전도 한번 해봐야지."

쿠르르릉!

쿠릉!

이미 바깥에서는 전력을 다한 공사들이 벌어지고 있다.

지하, 지상. 산맥.

가리지 않고 거창하게, 모든 인력과 장비들을 동원하여.

"다들 밑천 다 털어내고 있거든. 그간 모아둔 거. 너희도 한번 보여달라고."

"..."

흙먼지와 한파로 가득한 북쪽 산맥의 대지 속, 천막 밖으로 기운차게 나간 찬의 말에 뒤따르던 칠인이 힘 빠진 표정을 지었다.

***

이동, 3일 차.

쿠르르릉...

"흐음."

사뮤엘의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제안된 각종 사안들을 검토한 강태석이 머리를 긁적였다.

각자가 전문가는 아닌지라 아이디어 자체들은 다들 투박했다.

하지만 원래 힘을 쓰는데 기교는 필요 없는 법이다.

챠르륵...

여의를 뽑아내어 바닥에 이어 붙여본 강태석이 그 길쭉한 봉을 손잡이마냥 잡아보았다.

이런 식으로 운용해서 망치로 만들어도 된다.

이후 안쪽의 코어를 폭주시키고 자신의 힘과 화신체로서의 힘을 모조리 쏟아부어 폭발시킨다면?

"... 이 요새는 좀 작다. 좀 더 큰 게 필요해. 혹은 여러 개."

촤르륵.

방 안에 홀로 남아 이런저런 계산을 해보던 강태석이 결론을 내렸다.

30초.

4급 요새인 마몽드를 전력을 다해 터트렸을 경우 장벽을 30초 정도는 무너트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자신 혼자 지나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시간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까지 지나가려면 조금 모자라다.

적어도 10분.

10분 정도의 시간을 벌어야 모여있는 이들이 기계 병기의 방해 속에서도 어느 정도 얼추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4급 요새 하나로 모자라다.

2급 요새, 탄트라.

혹은 다른 세력들이 가지고 있을 무언가들이 필요했다.

그걸 모조리 터트려버린다면 장벽을 뚫어낼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이게 맞나 모르겠네."

털썩.

침대 위에 누운 강태석이 천장을 보며 긴 숨을 내뱉었다.

무엇이 올바른지 알 수가 없다.

사실 자기 한목숨 건지려거든 괜히 시간 쓰지 않고 냅다 장벽만 뚫은 뒤 지나가 버리는 게 더욱 좋으니.

뒤쪽 이들?

사실 그들이 남아 발버둥 칠수록 좋다.

그들이 기계 병기들, 혹은 서로 싸우는 동안 자신은 더욱 수월하게 다음 대지로 지나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 마음이라도 편한 게 낫다."

강태석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그리 매몰찬 성격이 못되더라는걸 어느새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이 고독으로부터 그리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도.

게임이라면 모를까, 이런 세계에서는 같은 공간에 같은 사람들이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무엇보다 여력이 없다면 모를까, 뭔가 해볼 수 있는데 그냥 지나친다는 게 영 걸리기도 하고.

"거의 다 와 가는 것 같은데."

끼익.

침실 벽에 만들어진 창을 통해 바깥을 본 강태석이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맥, 점점 더 가까워지는 거대한 장벽을 바라보았다.

산맥의 높이 또한 상당했지만, 그 너머 폭포수처럼 은빛 벌레들이 쏟아져 내리고 기어오르기도 하는 장벽의 크기에 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가까워지는 장벽을 바라보던 강태석이 바깥으로 나가보려던 그때.

쿠릉...

쿠릉...

쿠르르릉...

이동 요새가 지나쳐가고 있던 산맥 근처, 사방에서 심상찮은 소음과 함께 진동이 터져 나왔다.

더불어 서서히 커지는 진동, 무언가 밀려드는 소리.

이에 인상을 찌푸린 강태석이 멈춰선 순간.

벌컥.

"큰일이에요! 눈사태! 눈사태가!"

콰르르르르르릉!

양쪽, 점점 더 커지는 소리 속에서 문을 열고 들어온 기리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

산 정상.

"터트려! 다다 터트려라! 우리 대장님께서 예전 우리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한번 보고 싶어 하시니까!"

“예!”

얼굴만 제외하고 전신이 기계화된 여인의 우렁찬 외침에 사방에 자리 잡고 있던 이들이 기운차게 구호를 외치며 손에 들린 스위치들을 꾸국 눌러대었다.

이어 터져 나오는 우렁찬 폭발음들.

쿠구구궁...

쿠궁...

쿠구구구궁!

잔뜩 쌓인 눈과 산턱을 파내고 상당히 깊숙이 묻었음에도 그 폭발음이 눈밭을 뚫고 나와 대기 중으로 울려 퍼질 정도로 쩌렁쩌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설치한 폭약의 양이 어마어마하니까.

자신들, 군벌 연합의 36개 파벌이 가진 설치형 장약의 대부분을 이곳에 쏟아부었다.

말 그대로 산을 무너트려 버릴 기세로!

그리고 이는 자신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서서히 커지는 진동, 무너져내려 가는 중턱.

총질량 수십만 톤? 수백만 톤?

쿠구구구구구!

그야말로 인간이 만든 단위로는 세기도 힘든 자연의 재앙이 그대로 산 아래, 강철 껍질로 둘러싸인 이동 요새를 향해 쏟아져 내린다!

이동 요새도 가까이서 보면 제법 위엄차고 거대했을 것이지만 이 재앙 속에서는 그저 불쌍한 거북이 신세일 뿐.

"다 했으면 빨리 출발해! 파묻히지 말고 빠져나가자 이 굼벵이들아!"

부우우우웅!

커다랗게 외친 여인이 사방, 구석구석에서 떠오르는 부유 바이크들을 보고 자신도 시동을 걸어 우렁차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최대출력을 전개하면 지상으로부터 떠오를 수 있는 높이 25m.

경로만 잘 잡는다면 눈사태 정도는 피해서 이리저리 빠져나가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다.

물론 재수 없는 놈들이야 그대로 죽겠지만... 아래 있는 녀석들만큼은 아니리.

“우악!”

“우아아아악!”

"어이구 저 등신들.“

부우우우웅!

여기저기, 재수 없이 눈더미에 파묻혀 쓸려가는 녀석들을 보며 혀를 찬 여인이 놀라운 실력으로 바이크를 몰아 북쪽, 자신의 본진으로 향하면서도 흘긋 아래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양쪽 산맥 한가운데, 협로를 지나가던 이동 요새가 있던 방향을.

이미 높이만 수십 미터에 달하던 깡통은 밀려든 눈과 산더미에 휘말려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냥 여기서 끝나는 거 아냐? 그러면 다 우리 공인데."

여인이 흥얼거렸다.

찬은 조금 정 없긴 했지만 그런 만큼 공과를 챙기는 건 확실했다.

여기서 적을 처리한다면 그 공은 제1진을 맡은 자신들, 군벌연합이 모조리 챙겨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희망찬 상상도 잠시.

쿠르르릉...

저 멀리, 끊임없이 눈과 흙들이 몰려들고 있는 아래쪽에서 뭔가 기괴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산사태와는 다른 이질적인 진동, 그와 동시에.

콰아아아아아아앙!

"으아... 망할. 그럼 그렇지. 한 방에 죽을 리가 없나."

3년 전, 수문장 같은 종류의 괴물들이라고 하지 않나.

쿠르르르릉!

부아아아아아앙!

저 아래, 이동 요새를 번쩍 치켜들고는 위로 서서히 솟구치는 손, 그리고 그 아래 일어서는 거대한 몸뚱이를 본 여인이 쌍욕을 내뱉으며 바이크를 몰아 저 멀리 본진으로 향했다.

재수 없으면 이대로 <휘말릴 수도> 있기에!

아니나 다를까.

쿠구구궁...

콰콰콰콰콰콰콰쾅!

"으아아아아악! 미친놈들아! 아직 우리 못 빠져나갔다고!"

무너진 산맥 저 너머, 그제야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기갑부대들의 맹렬한 포격에 기겁한 여인이 괴성을 내지르며 급히 고도를 낮췄다.

***

쿠구구구궁...

콰콰콰쾅!

"으아아아아아악!"

"에이 씨. 조용히 좀 해!"

콰득!

이동 요새 안에 타고 있던 제프리가 정신을 못 차리겠다는 듯 옆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두 쌍둥이를 어깨에 들쳐멘 채 전력을 다해 이동 요새의 벽면을 움켜쥐었다.

금속이라고는 해도 제프리 또한 벽에 도달한 최고위 무장.

콰득!

콰콰콰쾅!

정신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요새 속, 완력으로 강철에 손을 박아넣어 중심을 잡은 제프리가 마력으로 자신과 쌍둥이를 모두 보호하며 자세를 다잡았다.

바깥에서 전해오는 충격이 워낙에 강렬한 탓에 감싸지 않으면 그 진동만으로도 내장이 곤죽 되어 죽을 것 같았기에.

자신은 몰라도 이 쌍둥이 정도는 반드시 죽는다.

"제기랄. 내 부하들 놔두고 내가 왜 이런 꼬맹이들 보모 노릇을..."

콰콰콰콰쾅!

전력을 끌어올려 충격을 흩어내던 제프리의 위, 그제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기리스가 힘겹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된 거긴. 산사태에 파묻힌 거 그 작자가 통째로 들어 올려서 꺼내 올렸고 이제는 포격이 퍼부어지는 중이지. 그리고 그 작자가 다시 한번 방패로 막고 있고."

콰콰쾅!

<경고. 외부 극심한 타격과 고열이 지속적으로 가해지고 있습니다.>

<내부 탑승자들은 안전 구역으로 이동하십시오.>

사방의 광경을 보여주는 홀로그램이 강철 상자 안에 균형을 잡고 있는 셋을 향해 바깥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었다.

왼손으로 이동 요새를 마치 작은 상자마냥 껴들고 일어난 거신의 존재와 그런 거신을 향해 쏟아부어지고 있는 온갖 종류의 포격과 미사일들.

아주 그냥 작정했다는 듯 산맥 너머의 군대들은 가진바 모든 화력을 쏟아부어 버리고 있었다.

이유는 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런 모든 공격들을 막아내고 있는 방패!

쿠구구구궁...!

"왜 막고만 있는 거지? 달려가면 금방 도착할 텐데."

"왜겠냐. 우리 때문이지. 이 꼬맹아. 방패 내리는 순간 우린 다 죽는 거 몰라?"

오른손으로 방패를 내세운 채 자세를 다잡고 선 홀로그램 속, 거신의 모습에 사뮤엘이 묻자 제프리가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방패로 가로막힌 뒤 전해지는 충격과 열기만으로도 이 꼴이다.

저 공격들을 직격으로 두들겨 맞는다면 이동 요새는 물론, 안에 있는 자신들은 이 요새가 박살 나기도 전에 잘 구워지고 으깨져 형체를 찾아볼 수도 없이 되어버린다.

양손이 자유로우면 모를까, 한손밖에 못쓰니 이런꼴 아닌가.

순간.

"아씨. 설마...""?"

"야 꼬맹이들. 꽉 잡아라. 혹시 재수 없으면..."

그리고 그런 제프리의 얘기가 끝나기도 전.

후욱.

"우아아아악! 진짜! 이럴 줄 알았다!"

한 손을 풀어버린 카트란, 이에 자유낙하를 하기 시작한 이동 요새 속에서 제프리가 다급하게 자세를 다잡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