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사태가 조금 진정되었길 바라며 채널의 메시지창을 열었다.
[저 정도면 상관없지 않겠냐는 일부 대천사들이 의문을 표합니다.]
[민간 시설의 파괴는 어떻게 책임질 거냐는 대천사들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일부 신들에게서 관리자 이르카가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겠냐는 의견이 쏟아집니다.]
[백합의 대천사 가브리엘이 저 정도라면 괜찮다며 애써 이해합니다.]
[전쟁의 신들이 내심 아쉬워합니다.]
[지옥의 군주 사탄이 보고 배울 점이 많다며 대악마들을 향해 보고 배우라고 합니다.]
[대악마들이 사탄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지옥으로 초청하길 원합니다.]
[천상의 과수원 주인 절대영도가 2만 포인트와 함께 <독을 마시는 배>를 선물합니다.]
[과수원의 첫 번째 은자 기나긴 우산의 주인이 1만 포인트를 후원합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금방이라도 채널이 터져나갈 것 같았던 아까와 같은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참아왔던 긴장이 한순간 탁 풀렸다.
속을 달래기 위해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으며 감로주와 신선 만두를 꺼내와 먹고 있을 때였다.
[메타트론: 관리자 이르카.]
[이르카: 커헉! 대, 대리자님!]
[메타트론: 이번에 그대가 관리하는 회귀자가 큰 사고를 쳤더군.]
[이르카: 죄송합니다!]
[메타트론: 그 문제를 추궁하자는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이르카: 가, 감사합니다! 대리자님.]
[메타트론: 그대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그대가 보고한 요한에 대한 문제일세.]
[이르카: 네? 요한 말입니까?]
[메타트론: 그렇다네, 내 긴히 할 말이 있어서 그러니 직접 천계로 올 수 있겠는가?]
[이르카: 넵! 알겠습니다.]
[메타트론: 오늘은 여러 가지 일이 많아 심력을 많이 썼을 테니 푹 쉬고 내일 찾아오게.]
[이르카: 배려에 감사합니다. 대리자님.]
[메타트론: 훗, 감로주와 만두가 참 맛있어 보이는군.]
툭-!
메타트론의 마지막 메시지에 들고 있던 술잔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왜 그가 그분의 대리자라고 불리는지 여실히 알 수 있었던 부분.
신 중에서도 최상위 신격인 카르나 님의 방어막을 뚫고 이곳을 엿볼 수 있다는 사실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도 모르게 다리를 꼬고 배를 긁고 있던 편한 자세에서 정자세로 바꿔 앉았다.
* * *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밤이 지나고 난 후.
천계로 가기 위한 짐을 바리바리 챙기기 시작했다.
메타트론에게 선물로 줄 감로주부터 신선 만두까지 챙기고 있을 때 안젤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괜찮겠어요?”
“응? 벌 받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걱정하지 마.”
“그래도… 거기서 좋은 기억은 없으시잖아요.”
“에이, 그것도 1,500년 전 일인데 뭐.”
“혹시 모르니까 이것도 챙겨가세요.”
“응? 자, 잠깐! 이거 엄청 비싼 건데?”
“비싼 게 문제예요? 가서 우리엘 님이라도 만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아… 뭐, 그분이 날 끔찍하게 싫어하는 건 사실이긴 해도 메타트론 님 뵈러 가는 건데 설마 뭐라고 하겠어?”
“혹시 모르니까. 만나면 얼른 이거 드리고 튀세요.”
안젤라가 건네준 알록달록한 사과를 받아들고는 이 비싼 걸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며 멀뚱히 서 있을 때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휴~ 차라리 지옥이면 안심하고 보내드릴 텐데.”
“나 그분들하고 그렇게까지 친한 건 아닌데?”
“성향이 비슷하잖아요.”
“…내가 그 정도였어?”
“모르셨어요?”
“아, 아냐.”
애써 대답을 회피하며 파괴의 대천사 우리엘에 대해 떠올렸다.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지만,
우리엘이 왜 날 싫어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던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지은 채 계속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안젤라에게 인사를 건넨 후 천계로 발걸음을 옮겼다.
눈이 부실 것 같은 찬란한 빛과 듣기만 해도 가슴이 거룩해지는 음악이 울려 퍼지는 천계에 도착하고 난 뒤.
주변을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우리엘이 지켜보는 남쪽을 피해서 들어왔으니 아마 마주치지는 않을 터.
그나마 가장 친한 라파엘 님이 관장하는 동쪽으로 들어왔으니 우리엘을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안심을 하고 구름 길을 따라 메타트론 님이 계시는 천상의 서고에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야, 너 왜 왔냐?”
“억!”
“억? 이게 돌았나.”
내 목을 금방이라도 따버릴 듯한 활활 타오르는 검을 들고는 불량스럽게 침을 찍 내뱉은 우리엘이 내 앞에 나타난 것.
이 미친놈이 여기까지 왜 온 거지?
연신 식은땀을 줄줄 흘러나왔지만,
애써 태연하게 우리엘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 하하! 우리엘 님 안녕하세요. 메타트론 님이 찾으셔서 왔습니다.”
“메타트론 아재가 널 찾았다고?”
“넵.”
“너 죽인다고 하디? 이번에는 내가 잘해줄 수 있는데?”
“커헙! 아, 아뇨.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르카야. 난 네가 참 싫어.”
“넵…….”
“어쭈? 눈깔에 힘 안 풀어? 불만 있냐?”
“아이고, 그럴 리가요. 제가 왜 우리엘 님께 불만을 품겠습니까?”
“그치? 네가 한 짓이 있잖아. 난 아직도 널 용서하지 않았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다른 관리자들에게 거부를 당한 회귀자만 계약하고 그들이 저와의 계약을 어겨도 우리엘 님이 관장하는 심판자들이 처벌을 내리지 않으시는 거 아닙니까.”
“흥! 말은 번드르르하네, 잘 알고 있겠지? 네가 저지른 죄는… 손에 그거 뭐냐?”
“존경하는 우리엘 님께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사과 중에서 가장 값비싼 천상의 선악과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천사나 악마에게 있어서 최상의 맛을 선사하는 기물 중의 기물.
놀란 눈빛으로 천상의 선악과를 바라본 우리엘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너 요즘 쓰읍! 포인트 좀 많이 번다더니, 쓰읍! 이걸 살 정도였냐?”
“그 정도로 벌지는 못합니다. 다만, 제가 우리엘 님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보여드리기 위한 제 작은 성의입니다.”
“커흠! 그, 그러면 이건 네 성의를 생각해서 잘 받으마. 쓰읍! 절대 먹고 싶어서 받는 게 아니야! 네 성의를 쓰읍! 생각해서 그런 거지.”
입에 침이라도 닦고 말을 하던가…….
연신 침을 줄줄 흘리며 천상의 선악과를 탐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우리엘에게 재빠르게 사과를 넘긴 뒤 넙죽 인사를 건네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한참을 걸어가고 있을 때 그가 했던 말이 가슴을 콕콕 찔러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양아치처럼 보이는 우리엘이 나를 막 대하는 이유를 알고 있기에 그를 미워할 수 없다.
나 역시 처지를 바꿨다면 그를 미워했을 가능성이 너무 크니까.
조금은 우울해진 기분이 들었지만, 고개를 좌우로 빠르게 털어내고는 메타트론이 기다리고 있는 서고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거라.”
“넵.”
끼익-
거인의 키보다 높이 솟아오른 커다란 서고에서 내리쬐는 성스러운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고 있던 메타트론이 환한 미소로 날 맞이했다.
“오느라 고생했다. 우리엘 녀석이 한 무례에 대해서는 내가 대신 사과하마. 네가 이해해줄 수 있겠느냐?”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리자님. 우리엘 님이 절 왜 싫어하시는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이해해준다니 미안하고 고맙구나.”
말을 마친 메타트론은 조용히 내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저, 죄송하지만 메타트론 님. 요한 씨가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그래. 그 성직자가 되고 싶어 하는 반선(半仙) 뱀파이어 말이다. 신성 마법을 전혀 쓸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느냐?”
“설마 기도할 때마다 피를 토하는 이유가?”
“그래, 나 역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구나. 그런 선한 마음을 가진 자가 종족의 한계 때문에 신성 마법을 쓸 수 없다니 말이다.”
“도저히 방법이 없는 겁니까?”
“흠, 그래서 내가 그분과 얘기를 나눠봤단다. 우화등선의 갈림길에서 회귀를 택하고 성직자의 길을 걷겠다는 뱀파이어에 대해서 말이다.”
“그분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이걸 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그분과의 대화를 떠올리는 듯 잠시 운을 뗀 메타트론이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며 말을 건넸다.
“뱀파이어들이 쓰는 마법 중에 혈 마법 있지 않느냐?”
“네, 네? 혈 마법이라면 피를 이용해서 쓰는 마법이잖습니까?”
“그래, 뱀파이어들의 주특기지.”
머릿속에 비상등이 켜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거 위험하다.
요한이 비록 내 집무실에서 기도를 드리다 피칠을 자주 해서 피를 토해도 아무런 문제 없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물론 그 정도 피를 토하는 건 그냥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면 보충되는 양이었지만…….
뱀파이어들이 쓰는 혈 마법은 그저 피를 토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조금 찌푸리고 있을 때 메타트론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하아, 어둠의 종족들의 아버지인 그분과 대화를 나눴단다. 그분께서 한 가지 제안을 하시더구나. 혈 마법에는 어둠의 맹세 제약을 걸어놓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단다.”
“그러면 요한은 신성 마법을 쓰지 못하는 대신에 혈 마법에 신성력을 부여받는 것인가요?”
“그래.”
불행한 사람을 구원하고 싶어 하는 요한에게 사람의 피를 마시며 써야 하는 혈 마법에만 신성력의 제한을 푼다는 건 너무 잔인한 말이었다.
“요한은 사람의 피를 토하면 토했지. 마시지는 않습니다.”
“알고 있단다.”
“설마 그런 요한에게 자기 피를 써서 치료를 해주고 치료해준 사람의 피를 빨아라 이건 아니겠죠?”
“진정하거라.”
“진정하라뇨!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혈 마법은 신선한 사람의 피를 마셔야 쓸 수 있는 마법 아닙니까? 그 덕분에 뱀파이어들이 사람의 피를 마신다는 오해를 산 것이고요!”
뱀파이어들의 주식은 사람의 피가 아니다.
다만, 그들이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 쓰는 혈 마법의 사용 조건이 신선한 피를 잔뜩 마셔야 한다는 점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뿐.
사람의 피에 섞여 있는 성분 때문에 사람의 피를 탐닉하는 뱀파이어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대부분의 뱀파이어는 쓸데없이 사람의 피를 마시지 않는다.
단합된 인간들에게 역으로 사냥당하는 뱀파이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들이 바보도 아니고 왜 위험을 무릅쓰겠는가?
나도 모르게 한참 동안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였다.
쿠웅-!
거대한 힘의 폭풍이 온몸을 덮쳐와 쉴 새 없이 떠들던 입이 다물어졌다.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 앞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때 메타트론이 미간을 찌푸리며 호통을 쳤다.
“관리자 이르카시우스!”
“네 대리자님.”
“진정하거라. 나도 알고 있는 문제란다. 그래서 말인데, 요한과 짝지어줄 신체 건강한 회귀 대기자가 없느냐?”
“네?”
순간 어벙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신체 건강한 회귀 대기자라니?
설마 휴대용 수혈팩으로 쓸 회귀자를 뜻하는 것일까?
메타트론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중간계를 돌아다니며 다른 이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는 요한을 바라보고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힘없이 입을 열었다.
“허허, 내가 참 미안해서 뭐라 할 말이 없구나. 그분께서도 자신의 권속이 빛의 길을 따르겠다고 하니 반감이 심하신 것 같구나. 이런 황당한 제약까지 거신 걸 보니…….”
“일단… 한번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요한에게는 당분간 말하지 말거라. 혈 마법을 써야 한다고 들으면 충격이 클 테니.”
“네, 알겠습니다. 요한과 함께 움직일 다른 대기자를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요한을 위해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력한 도움이라도 되었다면 내가 더 고맙구나. 그리고 이르카야.”
“네.”
“우리엘이 널 미워하는 건 네 잘못이 아니란다. 그 아이를 용서해줄 수 있겠느냐?”
“전 괜찮습니다. 제가 지은 잘못이 있는걸요.”
“그 일은 네 잘못이 아니란다… 그러니 과거를 바라보며 자책하지 말길 바라마. 이건 전임 대천사장이자 그분의 대리자가 아닌, 한 명의 관리자였던 네 선배로서 해주는 조언이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따스한 미소를 지은 메타트론의 배웅을 받으며 안전하게 중간계로 넘어오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집무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카르나티우스 님의 집무실로 돌렸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요한과 짝지어줄 인물이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