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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관리하는 법-35화 (35/121)

35화

거친 모래폭풍을 일으키며 땅에 내려선 비다르의 표정을 살펴봤다.

평소의 어딘가 멍한 표정이 아닌 섬뜩할 정도로 스산한 표정을 지은 모습을 보니 녀석이 얼마나 메르나를 보고 싶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비, 비다르야! 내, 내가 설명할게!”

퍽-!

콰앙-!

문답무용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메르나가 말을 채 마치기 전 비다르의 주먹이 섬전과 같이 날아갔다.

주먹이 날아간 속도보다 빠르게 뒤로 날아간 메르나가 산에 처박히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나도 모르게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이건 별로 좋지 않다.

지금 사고를 친다면 비다르의 화는 조금 풀리겠지만 많은 신 앞에서 두들겨 팰 기회를 잃는 것이기 때문.

산에 처박힌 메르나가 몸을 일으켰을 때.

흥분한 비다르가 날아가며 주먹을 뻗었다.

턱-!

비다르의 주먹이 메르나에게 적중하기 전 재빠르게 날아가 녀석의 손을 속박했다.

워낙 힘이 강해서 내가 뒤로 쭉 밀려날 정도였지만 아슬아슬하게 메르나에게 닿기 전 막아낼 수 있었다.

놀란 비다르가 비키라며 손짓을 해왔다.

“……!!!”

“기다려! 여기서 이렇게 끝낼 거야?”

“……??”

“지금 여기서 난동 부리면 누가 올까?”

“……!”

“으이구, 이제야 생각 난 거야? 너랑 나랑 한 약속은 어디까지나 대전에 메르나를 출전시키는 거잖아.”

“미안. 흥분.”

진심을 담은 비다르가 난동을 부린다면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중간계의 사건, 사고를 담당하는 우리엘이 직접 내려올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악 성향의 반신들을 싫어하는 우리엘이 직접 내려온다면 그를 견제하기 위해 지옥의 대공인 아스타로트와 베리스까지 중간계에 올라온다.

이래저래 반신들은 정해진 곳이 아닌 이상 사고를 치면 안 되기에 싸움을 벌이더라도 지정된 곳에서 해야 한다.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비다르가 손을 내밀어 사과할 때 나와 비다르를 번갈아 바라본 메르나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대, 대전이라니!”

“응? 다음번 대전은 나 대신에 네가 참석할 거야.”

“난 그런 괴물들이나 나가는 곳에 관심 없다고!”

“얘는 관심 있는데?”

환한 미소를 지은 비다르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메르나에게 하얀 계약서를 들이밀며 말했다.

“너. 나랑. 계약.”

“꺄아악! 이 미친놈들아!”

한차례 소동이 지나가고 난 뒤.

바깥에 있던 테이블에 소소한 술 잔치가 벌어졌다.

검은 속내를 가지고 있을 헤라클레스 녀석까지 불렀다.

타닥-!

하늘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입에 쑤셔 넣고 있는 헤라클레스와 비다르를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어이가 없어져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술이 꽤 들어가서 그럴까?

헤라클레스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정신없이 하늘 돼지를 세 마리째 먹고 있던 비다르에게 말을 건넸다.

“야, 다음번에 제대로 붙어. 치사하게 궁니르를 빌려와? 나도 아버지한테 말해서 아스트라페 빌려올 거야.”

“……!!”

“얘가 뭐라고 하는 거냐?”

“얼마든지 빌려오래.”

“야.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냐? 이건 4지구 일하고는 별개로 물어보는 거다.”

“뭔데?”

“너 천부령은 어떻게 얻은 거냐? 마고 신의 동의는 또 어떻게 얻은 거고?”

어쩐지, 이걸 물어보고 싶어서 평소라면 초대를 거절했을 녀석이 여기까지 온 거였구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녀석에게 말했다.

“궁금해? 강태식이 지금 뭐 하는지 알려주면 말해줄게.”

“미친놈.”

“너도.”

“쯧!”

혀를 찬 헤라클레스가 커다란 맥주 통을 통째로 들고 한참을 마시더니 시원한 트림을 내뱉으며 말했다.

“크흐! 역시 와이프 몰래 술 마시는 게 제일 맛있다니까!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

비다르를 바라본 헤라클레스가 입을 열기 전 통역 해줬다.

“물어보지 마, 내가 통역해줄게. 그러게 왜 또 빨리 결혼했냐고 물어보는데? 너 지구에 있을 때도 결혼했었잖아.”

“쯧, 너희는 유부남의 고충을 모른다. 한 번도 결혼해보지 않은 놈들 주제 뭘 알겠냐? 아무튼, 성진아가 뭔 짓을 해도 이번에는 못 이긴다는 것만 알아둬라.”

“……??”

헤라클레스의 말을 들은 비다르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비다르가 기분 잡치니까 또 처맞기 싫으면 지금 일 얘기는 하지 말라네.”

“……???”

고개를 갸웃거리며 황당한 표정을 지은 비다르가 입을 열기 전 맥주 통을 건네줬다.

통역이라는 게 꼭 뜻을 제대로 전해줄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먼저 도발한 건 녀석이다.

나는 비다르를 이용해 내 뜻을 전했을 뿐.

그때 헤라클레스가 술을 마저 들이켜고 일어나더니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구라도 작작 쳐라. 나도 비다르 말은 어느 정도 알아듣거든? 몇 번을 싸웠는데 모르겠냐. 아무튼, 난 이만 가본다.”

서둘러 길을 떠나려 하는 헤라클레스를 바라보니 이맛살이 조금 찌푸려졌다.

이 자식이 나를 가지고 놀아?

서둘러 집을 향해 걸어가던 녀석에게 검은 상자를 던져줬다.

“야! 이거 가져가라!”

“이건 뭐냐?”

“평생 소장용이니까 잘 보관해! 그거 비싼 거다? 1,500포인트짜리라고!”

“너, 너! 이 새끼 설마?”

심리전으로 감히 날 이기려고 들어?

헤라클레스에게 평생의 굴욕으로 남을 영상을 선물로 건네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메르나와 맺은 계약서를 소중히 들고 슬레이프니르에 오르는 비다르를 배웅해줬다.

* * *

그 시각 7 아르카니아.

킬라스 왕국의 할파스 백작령.

파히르, 호아킨과 함께 백작의 고성에 초대를 받은 요한과 아르한은 은 접시와 은 술잔에 담긴 음식과 포도주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본 경비대장 파히르가 요한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사실 백작님께서 조금 궁금하시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요한 사제님.”

“죄송하실 필요 없습니다. 파히르 님. 제가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한 이후로 은 같은 경우에는 목걸이로 만들어서 다닐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표정이 왜……?”

은이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요한의 심정을 복잡하게 만들었을까?

그때 의문점을 제시한 파히르에게 요한이 포도주가 담겨있는 술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은 포도주가 아닙니다. 닭의 피죠. 냄새를 맡아보니 방금 잡은 녀석이군요.”

“네? 그, 그게 무슨.”

“감히! 은 식기도 모자라 요한님께 이런 피를 내놓다니!”

당황한 파히르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해머를 꺼내 들고 전투태세를 갖춘 아르한을 제지한 요한이 차분한 얼굴로 설명했다.

“저는 이해합니다. 뱀파이어 사제라고 하니 백작님께서 궁금하실 수도 있겠죠.”

“죄송합니다. 저도 은으로 만든 음식과 잔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파히르 님이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백작님이 그분의 식솔 중에 아프신 분을 치료해줄 기회를 주신 걸 더 기쁘게 생각합니다.”

요한의 표정이 너무 온화해서일까?

옆에서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호아킨이 감동한 목소리로 두 손을 모으며 말을 내뱉었다.

“과연! 피의 성직자님.”

“킁! 거, 피의 성직자라는 말을 빼면 좋겠구먼, 뭔가 좀 이상하지 않소?”

“수혈… 아니, 수호기사 아르한 님이 뭔가 모르시는 모양인데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명이 있고 없고는 차이가 큽니다요.”

아르한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파히르가 말을 이어받았다.

“피의 성직자는 조금 그렇긴 하지만, 이건 호아킨의 말이 맞습니다. 대륙의 유명한 인물들은 모두 이명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이명? 하긴, 나도 예전에 파괴의 폭군이라고 불렀던 적이 있었으니… 응? 표정들이 왜 그러시오?”

어색한 표정으로 아르한을 바라보는 파히르와 호아킨이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

“파괴의 폭군과 피의 성직자라고 하면 뭔가 조합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파괴의 폭군? 처음 듣는 이명인데…….”

아르한은 그들의 말을 듣고 나서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생각했다.

확실히 자신이 8 에르프네임에서 불렸던 파괴의 폭군이라는 이명은 지금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게다가 파괴의 폭군, 피의 성직자 이 둘이 붙어 다닌다면 뭐가 생각나겠는가?

당연히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무슨 거대한 악당들로 보일 터.

어느새 길게 자라난 턱수염을 손톱으로 긁은 아르한이 처음 말을 꺼낸 호아킨에게 말을 건넸다.

“음, 그러면 호아킨 그대가 멋들어진 이명을 지어줄 수 있겠소?”

“수혈… 흠… 아! 이거 어떻습니까?”

“거참!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보시오.”

“성혈기사! 성혈기사 아르한! 뭔가 듣기 좋지 않습니까?”

“호오? 확실히 성혈기사라고 하니 뭔가 있어 보이는구려. 그게 무슨 뜻이오?”

흡족한 미소를 지은 아르한을 바라본 호아킨이 이마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을 건넸다.

“성스러운 피를 타고난 신의 기사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가득한 온갖 마물들과 타락한 이교도를 처단하는 기사로 기억되시길 바라며 만들었습니다.”

“허, 뜻이 너무 좋구려. 성혈기사 아르한이라… 마음에 드는군, 고맙소! 호아킨 내 친구여.”

“하, 하하핫! 마음에 드셨으니 다행입니다!”

아르한의 눈치를 살핀 호아킨과 그런 호아킨에게 말하지 말라며 고개를 가로젓는 파히르를 바라본 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르한이 이곳에서 한 일이 뭐겠는가?

바로 호아킨을 치료하기 위해 혈 마법을 쓴 요한에게 피를 내준 것이다.

단순하게 성기사와 수혈기사의 앞글자를 따 합친 단어에 아기처럼 좋아하는 아르한을 바라본 파히르와 호아킨 그리고 요한이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할파스 백작님 드십니다!”

시종의 목소리와 함께 고심이 많은지 어딘가 초췌한 몰골의 할파스 백작이 응접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급하게 몸을 일으킨 파히르와 호아킨을 따라 요한과 아르한도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려 할 때 할파스 백작이 그들에게 앉으라 손짓하며 말했다.

“아, 늦어서 미안하네, 다들 편하게 앉아있게.”

“네.”

파히르와 호아킨이 대답한 뒤.

그들의 경례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할파스 백작이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요한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그래, 피의 성직자께서 음식은 입에 맞으셨는가?”

“백작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흠, 그런 것 치고 먼저 먹으라고 내놓은 음식에 거의 손도 대지 않았군.”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백작님의 식솔 중에 아프신 분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입니다. 병자가 있는데 제가 어찌 배부르게 음식을 먹겠습니까?”

“그 말이 진심인가?”

“그렇습니다. 신의 축복이… 쿨럭! 아, 이건 양해 부탁드립니다.”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다네. 아무튼, 방금 했던 말이 진심인가?”

“제가 모시는 신을 걸고 맹세를 하지요.”

“흠…….”

요한의 당당한 대답에 할파스 백작은 파히르와 호아킨 그리고 열심히 음식을 입에 쑤셔 넣고 있던 아르한에게 나지막하게 명령을 내렸다.

“식사 중에 미안하군, 요한 성직자를 제외한 모두 잠시 밖에서 차나 한잔해줄 수 있겠는가? 원한다면 음식을 더 내오도록 하지.”

“응? 나 성혈기사 아르한은 요한님을 지켜야 할 사명이 있어서 이 자리를 벗어나면 아니 되오”

아르한의 당당한 대답에 의문을 느낀 할파스 백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건넸다.

“성혈기사? 그쪽 오크 기사께서는 어느 왕국에서 기사서임을 받으셨소?”

“서임? 크하하핫! 그건 받는 게 아니라 해주는 거였소, 그리고 난 오크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트리오스…….”

아르한이 누군가?

비록 이제 돌아가지 못하는 곳이지만 8 에르프네임에서 당당한 한 종족의 왕이었던 사내다.

기사 서임 같은 문제는 당연히 그가 해주는 것이었고 그런 사소한 문제를 물어오는 할파스 백작에게 다시금 설명하려 할 때.

골치가 아픈지 한쪽 이마를 짚은 요한이 아르한의 말을 끊었다.

“아르한, 이곳은 아르카니아입니다. 아르카니아의 법도에 맞게 자중하시지요. 그리고 저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를 믿고 잠시 자리를 비워주시지요.”

“흠,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다면 바로 저를 호출하시길.”

“알겠습니다. 아르한 님.”

아르한이 나머지 둘과 함께 응접실을 뜨고 난 뒤.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안색의 할파스 백작을 바라본 요한이 조금 전까지 온화하던 표정을 굳혔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할파스 백작에게 나오는 기운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기운이었기 때문.

흑요석 같은 눈빛을 빛낸 요한이 할파스 백작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래, 차가운 보름달의 일족께서는 제게 어떤 부탁을 하시려는 겁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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