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사건이 발생하기 두 시간 전.
달빛조차 앞으로 일어날 일에 몸을 숨긴 어둠이 가득한 모래와 돈으로 쌓아진 건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 있었다.
하릴없이 흘러가는 먹구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고하게 하늘에 닿기 위해 올라간 인간이 만든 가장 거대한 마천루(摩天樓)를 바라보던 성진아는 생각했다.
‘주변에서 매일 치고받고 싸우던 곳이라고 하면 틀림없이 이곳이겠지.’
러시아와 아랍국가 간의 석유 분쟁은 예전부터 유명했다.
아시아 시장을 주도하려는 러시아와 아랍 간의 정치적 다툼은 매번 있던 일이었으니까.
이슬이 내려앉아 뜨거운 열풍이 불어닥치던 낮과는 전혀 다른 서늘한 사막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그녀는 이내 어떻게 혼란스러운 상황을 만들어야 할까 고민했다.
‘수뇌부의 암살? 아냐, 그렇게 되면 편하긴 한데 가브리엘의 물병을 쓰지 못할 거야.’
가브리엘의 물병은 아직 한 번 정도는 더 쓸 곳이 남아있다.
성(聖)속성의 기술과 도구의 힘을 최대로 끌어올리지 못하는 암살자의 특성상 가브리엘의 물병은 유일하게 최대치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성속성 무기이자 방어구.
강태식과 싸움에서 나중에 찾아올 절호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때까지는 최대한 자중해야 한다는 관리자 이르카의 조언도 있었기에 어떤 방법을 이용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투둑-!
어둑어둑한 하늘에서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성진아는 볼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방법이 떠올랐는지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 * *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물인 부르즈 할리파(Burj Khalifa).
황금과 석유로 쌓아 올린 마천루의 1층 로비에서 경비를 서던 경비원 나씨르는 뻐근한 목을 좌우로 꺾으며 뒤에 서 있던 동료 카림에게 말을 건넸다.
“어이, 카림. 우리 교대가 몇 시지?”
“으휴, 벌써 네 번째 물어보는 거다. 아직 세 시간은 더 남았어.”
“그래? 진짜 시간 안 가네. 우리 근무 끝나고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러 갈까?”
“오늘은 힘들 것 같은데? 바깥에 봐봐.”
“응?”
쏴아-아!
꽈르릉-!
부슬비만 내리던 하늘에서는 어느덧 천둥 번개까지 치고 있었다.
사막에서 쉽게 보기 힘든 폭우에 나씨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는 저렇게 비가 오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지? 에휴, 바깥에 나가서 마시기에는 글렀네, 그냥 호텔 바에 갈까?”
“미쳤냐? 거기 가격을 생각해라.”
“반반씩 부담하면 그리 나쁘지 않잖아?”
“헛소리하네, 너는 혼자라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부담되는 가격이야.”
“쯧.”
카림의 뚱한 대답을 들은 나씨르는 혀를 끌차며 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흘러내리는 거센 빗줄기를 원망하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렇게 비가 내리는 걸 본 적이 언젠지 모르겠네? 그치?”
“…….”
카림에게 무시당했다고 느낀 나씨르는 인상을 쓰더니 고개를 홱 돌리며 소리쳤다.
“야! 사람이 말을 하면…….”
파지직-!
‘치, 침입자…….’
“끄르륵.”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은 나씨르는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소리쳤지만, 목에서는 거품 끓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곧이어 몸을 간질환자처럼 떨던 나씨르의 시야가 점차 암전했다.
정문을 경비하던 경비병을 순식간에 제압한 성진아는 손목에서 계속해서 전류를 방출하고 있는 천부령을 바라봤다.
나중에 쓸 생각으로 미리 사둔 소모품을 많이 소모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효율적인 신물이었다.
기후를 바꾸는 것은 물론 원할 때마다 전류를 손으로 방출하는 능력까지 있었으니까.
‘내가 이제까지 본 어떤 물건보다 대단해. 아마, 마고 신에게 힘들게 받아오신 거겠지. 그것도 오직 나를 위해서…….’
천부령을 꼭 손에 쥔 성진아는 마음을 다잡은 뒤 재빨리 전력통제실로 움직였다.
전력통제실에 있던 직원들을 모두 제압한 뒤.
보조 동력까지 포함한 모든 전력을 차단했다.
팟-!
하늘을 향해 수많은 빛을 뿜어내던 부르즈 할리파가 검게 물든 초유의 사태에 내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성진아는 목소리를 변조해서 외치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 이곳을 폭격한다고 합니다! 고객 여러분께서는 빨리 대피해주시길 바랍니다!”
“뭐, 뭣! 포, 폭격! 아니, 러시아가 왜?”
“그 이유를 알면 제가 여기 있겠습니까! 모두 비상계단을 통해 대피해주시길 바랍니다!”
모두 성진아의 목소리였다.
비현실적인 충격에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자 성진아가 목소리를 계속 변조해서 외친 것.
그제야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비상계단을 통해 우르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비, 비켜!”
“꺄악! 차례를 지켜요!”
“내가 다시는 높은 건물에 오나 봐라!”
“씨발! 러시아는 대가리에 총 맞은 놈들만 있는 건가!”
“일, 일단 소리 지르지 말고 빨리 내려가요!”
아우성을 치며 내려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지켜본 성진아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그냥 죽이면 편한데, 가브리엘의 물병 때문에 고생이네.’
그래도 이 방법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 러시아의 소행이라는 말이 퍼질 것 아닌가?
의외로 두 번 할 일을 한 번에 처리했다 생각한 성진아는 피식 웃으며 준비해온 폭약을 지하에 설치하러 내려갔다.
* * *
[속보입니다.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에 있는 초고층 건물인 부르즈 할리파가 러시아의 테러로 완전히 무너졌다는 소식입니다. 알 수 없는 인물의 경고로 인해 다행히도 피해자는 없지만, 물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는 소식입니다. 러시아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테러를 강행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며… 아랍연방에서는 좀비 역병이 조금 잠잠해지고 나니 곧바로 야욕을 드러낸 러시아를 크게 질타하며 아랍연맹은 러시아와의 성전을 불사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뉴스 속보를 모두 보고 난 뒤.
성진아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했지만, 아직 보낼 수 없다는 메시지만 되돌아왔다.
아랍을 건드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물론, 러시아가 워낙 땅덩이가 넓어서 주변에 있는 나라도 맞고 매일 티격태격하는 곳도 맞지만,
나는 저곳을 말한 게 아니었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뉴스 속보를 바라보고 있을 때 안젤라가 말을 건네왔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잘된 거 아니에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효과는 확실하잖아요.”
“그건 그렇지, 유럽에 이어서 아랍까지 건드렸으니 러시아는 진짜 정신을 차리기 힘들 거야.”
“정신을 차리기 힘든 게 아니라 전쟁이 나면 러시아가 지지 않아요?”
“그건 아닐걸? 목숨 걸고 막는 애들이랑 우리는 건드리지 마라! 하고 위협하려는 애들하고 싸우는 거니까. 적당히 싸우고 타협을 보겠지.”
“흠, 그사이에 성진아는 러시아를 수색하고요?”
“그렇지. 생각보다 큰 상대를 건드려서 아마 수색하기는 훨씬 편할 거야. 러시아는 갑자기 아랍국가들까지 껴들어서 온통 서쪽으로 신경을 써야 하니까 동쪽이나 북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
“그런데, 진짜 이런 건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맨날 놀고먹는 줄 알았는데 관리자가 쉬운 게 아니구나.”
“왜? 안젤라도 나중에 관리자 해보게?”
“흐흫, 싫어요.”
“싱겁기는.”
싱겁게 웃는 안젤라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준 뒤.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할 때.
어딘가 모르게 자꾸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헤라클레스 녀석이 뭘 꾸미는지 몰라서?
천웅이 녀석이 철가장의 소가주를 제자로 받았는지 확인하지 않아서?
원래는 나와 거의 접점이 없던 대악마 바싸고가 자꾸 내 채널을 살펴보는 것?
이것도 아니다.
바싸고가 아무리 계략을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지식의 대악마라고 해도 지금까지는 내게 도움을 줬으면 줬지 손해를 끼치진 않았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문제에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뭘 까먹은 거 같은데…….”
“움, 식사하시는 거?”
“아냐, 먹을 거는 안젤라가 항상 잘 차려주잖아.”
“우움, 월간 정산 확인하시는 거?”
“그건가?”
“그런데 그 문제라면 카르나 님한테 보내 달라고 하시면 되잖아요.”
“어? 카, 카르나 님?”
망했다.
갑자기 사고가 터져서 워낙 급하게 오느라 카르나 님이 시킨 심부름을 까먹은 것.
잔소리 폭탄이 떨어지는 고통을 생각하니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는 느낌을 받았다.
만두의 여신에게 만두가 떨어졌다면 한참을 들들 볶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심부름을 시켰는데 그걸 까먹었다면?
신선계에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안젤라가 총총걸음으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곧이어 들리는 구원자의 목소리에 기쁨에 겨워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오! 안젤라 아니더냐? 오랜만에 보니 예전보다 더 이뻐진 것 같구나.”
“앗! 광철 할아버지! 이게 얼마 만이에요! 어? 창표도 왔구나?”
“안젤라 누나 안녕하세요!”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여기까지 직접 오시다니?”
광철 할배는 신선계를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신선계에 허락 없이는 출입이 제한된 안젤라가 오랜만에 광철 할배를 보는 것도 그런 이유.
물론, 특별한 이유는 아니다.
그저 신선계에 반신들이 자꾸 들락날락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원시천존 님이 허락 없이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기에 그런 것뿐이었지만.
그때 광철 할배가 날 가리키며 말했다.
“껄껄! 저 아둔한 녀석이 꼭 가져가야 할 물건을 가져가지 않아서 내 직접 왔구나.”
“으이구! 진짜! 이르카 님이 조금 그래요. 할아버지가 이해해 주세요. 에구, 엄청 무거우시겠다. 저한테 주세요.”
“허허, 그래 주겠느냐?”
이내 창표와 함께 안젤라가 물건을 옮기러 가자 의자에 앉아있던 내게 광철 할배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리 바쁘더냐?”
“하, 할배! 진짜 할배 때문에 살았어! 진짜 고마워. 아니 감사합니다.”
“허허, 어울리지 않게 존댓말은 하지 말거라. 천 년 전부터 내게 말을 놓은 녀석이 무슨 어색하게 존댓말을 하는 것이냐.”
“그치? 아무튼, 진짜 할배 덕분에 살았어.”
“끌, 녀석.”
환한 미소를 지은 광철 할배가 날 물끄러미 바라볼 때.
안젤라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고는 쪼르르 달려왔다.
“허허, 엎을라, 조심하거라.”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아무리 신선계가 좋다고 해도 왜 이렇게 오지 않으셨어요.”
“껄껄! 그래, 내 안젤라를 봐서라도 앞으로는 자주 오도록 노력하마.”
“진짜요?”
“아무렴! 그리고 안젤라야 미안한데 이 녀석과 할 얘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줄 수 있겠느냐? 창표 녀석의 말벗도 좀 해주고.”
“흐흫, 알았어요. 두 분 말씀 잘 나누세요.”
안젤라가 창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간식을 꺼내주러 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광철 할배가 표정을 굳히며 말을 꺼냈다.
“이르카야.”
“응?”
“카르나 녀석한테도 말했지만, 네게 직접 말을 해야겠구나.”
광철 할배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무슨 심각한 일이 터졌음을 직감했다.
중간계까지 직접 온 것도 거의 몇백 년 만이니 확실히 무슨 일이 있다는 뜻.
그때 한숨을 내쉰 광철 할배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요한 녀석 말이다.”
“요한? 지금 잘 지내고 있는데?”
“네놈도 몰랐구나, 그 녀석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