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관리자가 되었을 때 들은 소문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신격을 얻음과 동시에 실종된 신이 몇몇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홀연히 자취를 감춘 자들은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들의 실종은 천계와 지옥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있었다.
아리마태아 요셉 또한 그런 신 중 하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전.
주변을 힐끔 살핀 요셉이 내게 다가오며 말을 건넸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눈치로군.”
“솔직히 놀랐습니다.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당신이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정말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맞을까?
어쩌면, 이것도 머르딘이 파놓은 함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혹시 모를 함정을 경계하며 질문을 건네자 그는 허허롭게 웃더니 대답했다.
“프로메테우스가 예언의 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는가? 나는 그의 예언을 듣고 이곳에서 그대를 기다렸지.”
“프로메테우스가 제가 오는 것을 예언했다는 말씀입니까?”
“정확하게 누가 올지는 얘기하지 않았네, 그 역시 그것까지는 볼 수 없기도 하고. 다만, 방패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자가 나타난다고 했지.”
방패의 주인을 찾기 위해 이곳에서 머물렀다는 소리인가?
아니, 고작 그런 이유로 이곳에 머무를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곳에서 천 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렸다는 말씀입니까?”
“설마! 자네도 느끼지 않았는가? 이 세상은 뭔가 비틀려 있다는 것을 말일세.”
“그건 저도 오자마자 느꼈습니다.”
“그래, 내가 이 세상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탓이지.”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뇨?”
“믿기 힘들겠지만, 누군가에 의해 성배가 타락했다네.”
“……!”
성배가 타락할 수도 있는 물건이었어?
신성한 피의 상징과도 같은 신물인 성배가 타락했다는 말에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면, 성배를 정화하기 위해 이곳에서 머물렀다는 뜻이 되는 건가?
다른 반신들은 왜 도와주지 않은 거지?
프로메테우스가 진짜 나를 예언한 것일까?
아니면, 헤라클레스를 예언했었는데 내가 얻어걸린 것일까?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바싸고, 머르딘, 프로메테우스, 아리마태아의 요셉 그리고 성배.
과거의 편린이라고 생각했던 장소는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거대한 각축장이었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는 이 모든 것을 봤으면서 왜 다른 신들에게 바싸고의 만행을 알리지 않은 것일까?
그의 예지에도 뭔가 결함이 있다는 뜻일까?
이곳에 나와 헤라클레스가 오는 것까지는 봤으나 그 결말까지는 알지 못한다는 소리일 수도 있으려나?
그때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어지러운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곧 저주받은 머르딘의 영혼이 이곳에 오겠군.”
“제 옆에 있던 자가 머르딘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다면, 그가 반신을 사냥하고 있다는 것도…….”
말을 채 마치기 전.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화가 치솟은 듯 이를 악물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알고 있다네, 저 간악한 놈에 의해 목숨을 잃은 반신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네. 그들을 구해주지 못한 내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겠는가?”
“이해할 수 없군요. 왜 도와주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이 나선다면 머르딘을 소멸시킬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 소멸시킬 수야 있지 머르딘을 소멸시킨다면 내 화도 조금은 풀릴 걸세 하지만, 성배는?”
“네?”
“생각의 폭을 넓히게 어린 반신이여. 이 세계는 성배를 정화하기 전에 없어지지 않는다네, 그 위치를 아는 자는 머르딘뿐이며 그를 소멸시켰을 때 타락한 성배가 폭주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예상이 가는가?”
“흠, 잘 모르겠군요.”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네. 모든 시간이 이어져 있는데 과거가 흩어진다면 현실은 어떻게 될지 예상이 가는가?”
“음…….”
그의 신랄한 비판에 그를 힐난하려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머르딘이 악의 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놔둘 수밖에 없었던 그의 심정도 이해가 갔기 때문.
입술을 꽉 깨문 그가 마저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예언한 자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시간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네. 내가 신이 될 자격을 얻은 장소가 타락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는가? 나를 실망시키지 말게 프로메테우스가 예언한 반신이여.”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찬란한 신의 자리에 위치할 수 있었던 요셉이 왜 이런 곳에 자신을 가뒀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이곳이 그의 창조 설화였기 때문.
신에게는 설화가 필요하다.
멸망, 창조, 부활 등 수많은 설화가 존재하지만 가장 근본이 되는 설화는 그가 남긴 업적에 관한 설화다.
수많은 업적과 설화를 남긴 아서와는 다르게 아리마태아의 요셉 같은 경우 성배를 이곳으로 운반하고 십자가의 방패를 남긴 설화가 전승되는 거의 유일한 설화였기 때문에 이곳에 자신을 가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곳이 무너진다면 뿌리가 흔들리는 것.
존재 자체가 소멸할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역사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당연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이었겠지.
그런데, 성배가 폭주를 해?
신물이 폭주하는 경우가 있던가?
신의 힘이 깃든 물건이라고 해도 엄연히 물건.
스스로 의지가 서린 물건이 아니라면 폭주할 일은 없다.
가끔가다가 에고소드 같은 물건이 폭주할 때는 있었지만, 세상에 알려지기로 성배는 의지가 깃든 물건이 아니다.
이거 말이 조금 이상한데?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아리마태아의 요셉에게 질문을 건넸다.
“성배는 물건이 맞습니까?”
“……!”
흠칫 놀란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골치 아프게 되었는걸?
“성배가 폭주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단어는 물건에 쓰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단어죠. 다시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성배는 물건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체입니까?”
“그대는 날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군.”
요셉의 말은 부정이 아닌 긍정.
머릿속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아니, 어쩌면 최악의 시나리오를 이용해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도 있겠는데?
“성배가 타락했다면, 저를 공격할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네.”
“객관적으로 보시면 어떻습니까? 제가 성배와 싸운다면 이길 수 있겠습니까?”
“아까 그대가 낸 힘이 전력을 다한 것인가?”
“그럴 리가요.”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다.
비장의 수는 남겨두었으니까.
이제 내 힘을 똑똑히 느꼈으려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그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을 때. 골똘히 고민하던 요셉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뜻밖의 부정적인 답변을 꺼내 들었다.
“아마도 힘들 걸세, 그대의 마력과 힘은 대단하지만… 지금 낸 힘에 거의 두 배 이상을 내지 않는다면 힘들다고 보네. 아니, 두 배 이상도 힘들겠지, 타락한 성배가 힘이 더 강해졌을 가능성까지 더한다면 그대는 확실히 성배에게 살해당할 걸세.”
이거 골치 아프네?
성배의 전투력이 생각보다 너무 높다.
숨겨둔 힘을 모조리 꺼내 들어도 쉽지 않은 전투가 벌어진다는 뜻인데…….
그때 요셉이 슬며시 다가오더니 하얀 동전과 함께 말을 건넸다.
“나를 부를 수 있는 물건이라네. 머르딘을 따라가 성배를 찾아냈을 때 나를 불러주게. 내 성배를 제압하는 것을 도와줌세.”
“도움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성배를 찾는다면 얼마든지.”
머르딘과 성배 대 요셉과 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머르딘의 진짜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지만,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지닌 힘이라면 호각 혹은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 터.
다만, 성배가 조금 걸렸다.
이건 헤라클레스를 조금 이용해야겠는걸?
“제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성배를 찾을 때 당신을 꼭 부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니?”
“제가 당신을 부를 때 밖에서 쓸데없는 힘자랑하고 있는 헤라클레스와 함께 와주시겠습니까? 녀석에게는 제가 말해두겠습니다.”
“허어… 저 친구가 헤라클레스였나? 어쩐지 괴물 같은 힘을 가졌더군. 하마터면 방패를 떨어트릴 뻔했으니 말이야.”
그때 뒤쪽에서 은밀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느새 머르딘이 접근한 것.
아리마태아의 요셉과 짧은 눈빛을 교환한 뒤.
재빠르게 그의 가슴을 발로 찼다.
퍽-!
우당탕!
뒤로 형편없이 밀려 나간 그가 몸을 일으키기 전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가슴을 발로 짓밟았다.
“뭐야? 고작 이따위 실력으로 나한테 덤빈 거야? 형편없구만! 이 방패는 내가 가져가마. 퉤!”
“크으윽! 이, 이런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연기 좋고.
퍽-!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그의 턱을 발로 찬 뒤.
쓰러진 그를 뒤로한 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던 머르딘에게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가며 말을 건넸다.
“저거 막상 붙어보니까 별거 아니던데?”
“키킷! 뭐야 뭐야!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하잖아!”
“사형, 아직 놀라기에는 이르다고.”
깜짝 놀랄 만한 이벤트를 준비 중이니까.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하지.
“키키킷! 이제 아론다이트만 남은 건가?”
“그렇지. 빨리 찾아서 엑스칼리버까지 끝장내 버리자고.”
“키킷! 사제 덕분에 내 필생의 숙원이 드디어 이뤄지는구나!”
“그러라고 스승님이 날 보낸 거 아니겠어?”
“크흐흐흣! 그렇지!”
잔뜩 흥분한 머르딘과 왁자지껄 떠들며 검은 연기와 붉은 불꽃이 치솟는 반쯤 폐허가 된 고성을 나섰다.
* * *
머르딘의 뒤를 쫓아 몇 날 며칠을 걸었을까?
흥에 겨운 듯 콧노래를 부르는 머르딘 몰래 성진아에게 남은 시간을 살펴봤다.
[계약 만료 일시: 17일 21시간 45초.]
이곳에 들어온 지 벌써 2개월 이상 흐른 것.
복잡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앞에서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던 머르딘에게 말을 건넸다.
“사형, 아론다이트가 정말, 이 숲에 있는 거 맞아?”
“키킷! 맞다니까? 사제는 이 위대한 사형의 말을 못 믿는 거야?”
“못 믿는 건 아닌데, 벌써 며칠째 이 주변을 빙빙 돌고 있으니까 그렇지.”
“키킷! 이곳은 특별한 곳이라 그래.”
기묘한 웃음소리를 낸 머르딘이 다시 걸어 다니면서 여기저기 놓여있는 돌과 나무를 긁어내는 작업을 지켜봤다.
얼마나 지났을까?
꾸르릉-!
무거운 돌이 땅을 긁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풍경이 기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름드리나무가 솟아올라 있던 숲은 신기루처럼 흩날렸고, 일그러진 틈 사이로 핏빛처럼 붉은 물이 가득한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급하게 손짓을 하는 머르딘을 따라 틈새를 파고들었다.
찌익-!
공간의 틈새를 찢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고 난 뒤 마기가 넘실거리는 호수의 한가운데 두둥실 떠 있는 붉은 마검 아론다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엑스칼리버의 형제 검.
같은 호수에서 태어나 같은 성검의 운명을 부여받았지만, 랜슬럿에 의해 철저하게 타락해버린 마검.
흥분된 마음으로 아론다이트를 얻으러 갈 때.
호수 밑에서 위험천만하고도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포악한 맹수가 어둠 속에서 먹잇감을 노리듯 잔뜩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호수 한가운데 있는 아론다이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머르딘이 크게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넸다.
“키키킷! 이 사형의 위대함을 좀 알겠어?”
“휘유~ 대단한걸?”
“키키킷! 뭐 해? 아론다이트를 손에 넣어야지? 그래야 엑스칼리버를 타락시킬 거 아냐!”
이것 봐라? 이놈이 어디서 알아차렸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나를 먹잇감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손목에 차고 있는 천부령에 마력을 집중시킨 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머르딘에게 말을 건넸다.
“이것 참 고맙긴 한데… 사형, 여기 뭐 하는 곳이야?”
“그야 아론다이트를 봉인한…….”
“아니, 아론다이트가 아니라 뭔가 다른 것도 있는 거 같은데?”
“넌 다른 놈들하고 다르게 눈치가 빠르네?”
“너 역시.”
콰앙-!
머르딘이 쏘아낸 죽음의 불꽃과 천부령에서 뻗어 나간 화염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마력 충돌을 버티지 못한 머르딘이 뒤로 형편없이 밀려 나가는 모습을 바라본 뒤.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녀석에게 말을 건넸다.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키킷! 내가 바보로 보여? 바싸고 님이 제자를 만들 리가 없잖아! 노예라면 몰라도! 너를 이 함정에 끌어들이기 위해 별로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이렇게 기어들어 오다니…….”
“노예라니… 불쌍한 놈이었네?”
“…….”
“아니, 제자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거든? 그런데 노예라고 하면 더 불쌍한 거 아니야? 와, 너 보수도 못 받고 천 년 넘게 무료봉사한 거 맞지?”
“이익! 닥쳐라!”
너무 팩트로 때렸구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녀석의 표정을 보니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정도 시간을 줬으면 슬슬 부를 때도 되지 않았나?
알 수 없는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는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키키킷! 내가 반신을 어떻게 사냥했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응. 네 힘은 아니었을 거 같아.”
“키킷! 맞아. 내 친구를 소개하지.”
퍼엉-!
녀석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호수에서 거대한 물보라가 일어나더니 검은 사람의 그림자가 튀어 올랐다.
쿠웅-!
녀석의 뒤에 자리를 잡은 거대한 검은 그림자를 바라봤다.
형언할 수 없는 그 기괴한 느낌과 생김새에 침음성을 삼키고는 시간을 끌기 위해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허, 저거 설마 성배야? 이거 참, 이 대 일은 내가 지겠는걸? 조금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키키킷! 네 놈도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구나? 하지만! 이제 와서 빌어봤자 소용없다! 모든 반신이 성배의 힘 앞에…….”
“그러니까 우리 공평하게 이 대 삼 하자.”
“……?”
“아! 참고로 말해주는 건데, 난 십칠 대 일이면 십칠에 속하는 걸 더 좋아해.”
“……?”
말뜻을 이해 못 한 머르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볼 때.
콰앙-! 쩌저적-!
어두운 하늘에 황금빛 균열이 일어나며 기다리던 지원군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