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요한의 말을 들은 일행 모두가 마치 돌이라도 된 것처럼 얼어붙었다.
아무도 노인이 음식에 약을 탄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
프란시스의 충격은 특히나 더했다.
보통, 태양교의 성직자라는 것을 밝혔을 때 사람들이 보이던 반응은 존경과 친절이었기에 당연히 노인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했었기 때문.
차분하지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요한의 얼굴을 바라본 프란시스가 혹시 몰라 정화마법을 사용하려 신성력을 끌어모았다.
아니, 끌어모으려고 했다.
“끄윽-!”
갑작스레 심장 부근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어진 프란시스가 처음 겪는 일에 당황할 때.
똑같은 현상이 옆에 앉아있던 우로스에게서도 시작되었다.
프란시스보다 신성력이 강한 탓일까?
가슴을 부여잡고는 정신을 잃어가는 우로스의 입가에는 게거품이 피어올랐다.
짧게 경련하는 것을 보니 상황이 더욱 심각한 모양.
‘아, 안 되는데…….’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과는 반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차츰 퍼지는 약 기운 때문에 쓰러지는 프란시스의 마지막 눈에 비친 것은 검은 오오라를 뿜어내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단 심문관들과 멀쩡해 보이는 요한과 아르한을 번갈아 바라보던 노인은 신기한 눈초리로 요한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너는 왜 쓰러지지 않는 것이지?”
“글쎄요. 제게는 통하지 않는 약인가 봅니다.”
“끌, 이거 귀찮게 되었군. 이 몸으로는 네놈들을 이길 수 없을 텐데 말이야.”
“당신은 누구십니까? 악마의 냄새가 너무 짙게 나는군요. 아무리 봐도 평범한 네크로멘서는 아닌 것 같습니다.”
“호오? 그것까지 알아차렸다는 말이냐? 네놈은 참 놀랍구나,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할 재주가 있다니 말이야.”
자신의 정체가 들켰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너무나 차분하게 말을 내뱉는 노인을 바라본 요한이 처음으로 긴장감을 느꼈다.
자신이 꾸민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때 보이는 반응은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
오히려 자신만만한 척하며 허장성세를 부리고는 도망칠 기회를 엿보는 것과 들켜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자신감이 자연스레 배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 둘 중 더욱 위험한 건 당연히 후자였고 지금 요한에게 말을 건네는 노인의 표정은 분명히 후자로 보였다.
그때 노인이 요한과 아르한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끌, 이길 수 없는 싸움은 하는 게 아니지, 특히 네놈들 같은 회귀자들과는 말이야.”
“……!”
요한과 아르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노인이 어떻게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일까?
충격에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요한과 아르한을 슬쩍 바라본 노인이 재차 말을 건넸다.
“네놈의 몸에 뭔가 색다른 변화가 생겼나 보군. 원래라면 네놈도 쓰러졌어야 할 텐데 말이야. 저 오크야 원래 독이 통하지 않으니 예상했었지만…….”
그때 요한과 아르한의 귓가에 이르카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이르카: 아르카니아에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악마입니다. 걱정하지 말고 두들겨 패세요. 뒷일은 제가 책임집니다.]
[요한: 네? 두들겨 패라뇨? 악마라면 퇴마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르카: 아, 강림하거나 현신한 게 아닙니다. 지금 저 네크로멘서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상태니까 큰 충격을 가하면 알아서 빠져나갈 겁니다. 원래 미친개는 매가 약이죠.]
[아르한: 이거 좀 놀랐었는데 다행입니다. 그런데 악마들은 저희가 회귀자라는 걸 다 알고 있는 겁니까?]
[이르카: 하핫, 포인트를 후원해주는 분 중에 악마분들도 많습니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한 이르카의 말을 들은 아르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노인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스토커면 스토커답게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것이지 뭐 한다고 여기까지 기어온 거야?”
“……?”
“에휴, 모르는 척하기는! 그냥 맞자.”
말을 마친 아르한이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 * *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요한과 아르한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처럼 말했지만, 절대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었다.
저 기운은 분명히 사라진 바싸고의 기운이었다.
물론, 직접 강림하거나 현신한 것은 아니었지만 7 아르카니아에 모습을 드러낸 것 자체가 크나큰 일이었으니까.
저 미친 늙은이가 요한과 아르한 같은 내가 관리하는 회귀자들에게 직접 손을 쓰기 시작하면 엄청나게 골치가 아파지기 때문.
이번에는 정신만 지배해서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건 나한테 날리는 경고와 같은 의미와 같았다.
언제든지 나를 방해하겠다는 경고 말이다.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사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사탄 님! 급합니다!]
[사탄: 야! 나도 급하다. 성진아 왜 안 보내냐? 너 죽을래? 지금 애들이 성진아 언제 오느냐고 난리인데 이제야 연락해?]
[이르카: …….]
아, 아직 성진아 4지구에 남아있지?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계약 조건을 다 붙어야 하나?
아니, 그러면 내가 죽는다.
성진아가 이대로 헌터를 죽이지 않는다면 계약은 끝나지 않고, 그녀의 계약이 종료되지 않는다면 지옥에 끌려가지도 않는다.
성진아가 지옥에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사탄에게 이 사실을 그대로 말했다가는 내가 죽는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는 사탄에게 말을 건넸다.
[이르카: 정말 죄송합니다. 요즘 제가 바빠서 신경을 못 쓰고 있었네요. 안 그래도 바싸고가 지금 7 아르카니아라는 곳에 나타나서 정신이 없었거든요.]
[사탄: 흠, 바싸고 말이더냐?]
[이르카: 네, 사탄 님이 워낙에 바쁘시잖습니까? 그래서 제가 나름대로 추적을 하다가 7 아르카니아에서 발견했는데요. 제가 관리하는 회귀자들을 해코지하려고 하더라고요.]
[사탄: 크흠!]
[이르카: 아이고, 쓸데없는 말을 꺼냈네요. 죄송합니다! 사탄 님께서 얼마나 공사다망하십니까? 이렇게 신경 쓰시기 전에 성진아도 재깍재깍 지옥으로 보냈어야 했는데…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사탄: 7 아르카니아라고?]
걸려들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위한 포석을 깔아뒀으니 이제 슬슬 밑밥을 깔 차례.
[이르카: 네, 그곳에 있는 네크로멘서의 정신을 빼앗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조금 의심이 가는 게 있습니다.]
[사탄: 단도직입적으로.]
[이르카: 넵! 왜 바싸고가 7 아르카니아에 모습을 드러냈을지 생각해보니 떠오른 게 있었습니다. 바로, 태양교라는 종교인데요. 그게 올림포스의 아폴론이 신격을 박탈당했을 때 그곳에서 라헬이라는 이름을 쓰면서 세운 종교입니다.]
[사탄: 그래? 처음 듣는 얘긴데?]
[이르카: 저도 카르나 님한테 듣고 알았습니다. 아무튼, 바싸고는 7 아르카니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지 않습니까? 강림이나 현신은 몰라도 정신지배는 조금 다르잖습니까?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요?]
메시지를 보내고 난 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당연히, 태양교와 아폴론이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단 심문관들이 요한의 신성력을 확인했으니
요한에게 어떤 해코지는 못 하겠지만, 혹시 모를 방해는 미연에 차단해둬야 하지 않겠는가?
사탄이 올림포스를 들쑤시기 시작하면 그곳은 당분간 정신없어질 것이 분명했다.
[사탄: 그런데, 이르카야. 올림포스가 왜 바싸고를 도와주냐? 헤라클레스도 함정에 빠트렸었잖아.]
[이르카: 헤라클레스는 올림포스를 탈퇴했잖습니까? 헤라클레스 녀석이 올림포스로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어떤 모종의 거래를 했을 수도 있죠.]
[사탄: 너, 솔직하게 말해봐. 나 이용해서 올림포스 들쑤셔보려는 거지?]
[이르카: 호오? 확실히 자살하고 싶을 때 쓰기 좋은 방법이군요.]
[사탄: 쯧, 지금 올림포스 건드리는 건 벌집 쑤시는 꼴인데… 이번에는 속아 넘어가 준다.]
[이르카: 네? 속여 넘기다뇨? 절대 아닙니다!]
[사탄: 됐으니까 성진아나 빨리 보내. 그리고 걔 소원 강태식한테 복수하는 거 아니었지?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계약이 아직 안 끝난 거 보면 계약 조건이 다른 거 같은데… 그냥 넘어가 주마. 내가 어지간한 천사들보다 훨씬 착하잖니! 물론, 나를 자꾸 기다리게 하면 너부터 지옥에 끌고 온다?]
[이르카: 아쉽지만, 저는 관리자 일을 해야 하는지라… 중간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탄: 응, 반으로 찢어서 반은 중간계에 놓고 반은 지옥에 놓아줄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르카: 최대한 빨리 보내겠습니다!]
사탄과 메시지를 종료하고 난 뒤.
한숨을 내쉬며 오랜만에 성진아가 나오는 4 지구의 화면을 띄웠다.
다행스럽게 그녀는 홀로 호숫가를 거닐고 있었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니 메시지를 보내기에는 최적의 상태에 가까웠다.
그녀가 지옥에 가고 싶어 할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천국에 가고 싶어 한다.
군단장들을 소환할 때 지옥에 스스로 걸어가겠다고 선언했지만, 본심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사실 누가 지옥에 가고 싶어 하겠는가?
물론, 막상 가보면 엄청 나쁜 곳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청 좋은 곳도 아니다.
다른 신계보다 힘의 논리가 더 많이 통용되는 곳이라 조금 골치 아픈 일이 많이 벌어지는 곳이었으니까.
막상 지옥에 가겠다고 했던 그녀 역시 많은 고민이 되는 모양.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을 한 뒤.
조심히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저, 성진아 씨?]
[성진아: 관리자님 오랜만이네요.]
[이르카: 아, 그동안 제가 일이 좀 많아서 바빴네요. 신경 쓰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성진아: 후훗, 아니에요. 어차피 이곳의 일은 거의 다 끝난 거나 마찬가지니까 신경을 덜 쓰실 수밖에 없죠.]
순간 그녀의 말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분명 입으로는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진짜 바빴는데…….
[이르카: 정말 죄송합니다. 새로운 계약자도 생기고 예전부터 골머리를 썩이게 만든 악마가 갑자기 나타나고 진짜 난리가 났어요.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죄송해요.]
[성진아: 괜찮아요. 저도 반쯤 장난으로 한 말이랍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연락해주신 건, 빨리 계약을 완수하고 지옥으로 가라고 말하려고 하신 거죠?]
[이르카: 아, 그게… 사실은.]
[성진아: 지옥에 가는 건 당연한 거지만, 조건이 있어요.]
[이르카: 네? 조건이라뇨?]
[성진아: 저한테 원래 3:7이 정상 계약이라고 하시고는 5:5로 계약하셨잖아요? 그거 명백한 사기…….]
[이르카: 음… 대신에 제가 다른 계약자들보다 훨씬 신경을 써드렸거든요? 저번에 아론다이트를 구해온 것도 그렇고…….]
[성진아: 에이, 그래도 사기는 사기 아닌가요?]
[이르카: …….]
순간 이마에 힘줄이 솟아났다.
레이트라 녀석이 싸놓고 간 똥이 아주 푸짐했다.
이거 진짜 지옥에 한번 찾아가야겠는걸?
물론, 레이트라 놈만 죽도록 두들겨 패고 도망쳐 나올 거지만.
그때 성진아가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더니 메시지를 보내왔다.
[성진아: 그러니까 지구에 강림해주세요.]
[이르카: 네?]
[성진아: 제 소원이에요. 꼭 하고 싶은 중요한 얘기도 있고요.]
[이르카: 강림이라… 알겠습니다. 허락을 받아야 하는 문제지만 가능할 겁니다.]
[성진아: 후훗, 기다릴게요.]
무슨 얘기를 하려고 강림해달라고 하는 걸까?
어지간한 얘기는 메시지로 해도 충분할 텐데?
복잡한 기분에 머리를 긁적이고 있을 때.
뒤쪽에서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잠깐 외출한다고 나간 안젤라가 돌아온 모양.
“안젤라, 차 한 잔만 가져와 줄래?”
“…….”
“저기 안젤라?”
이상하다?
안젤라가 이렇게 내 말을 무시한 적은 없는데?
물론, 내 말에 토를 단 적은 있지만…….
내가 뭔가 실수한 게 있나 궁금해져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보는 존재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