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전사한 할파스가 명계에 없다는 답변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요한은 분명 파히르의 기억을 읽었고 그의 기억에서 할파스가 전사하는 모습을 봤다.
설마 기억 조작?
자연스레 고개가 좌우로 가로저어졌다.
그들이 파히르의 기억을 조작하려면 베아트리체를 비롯해 모든 경비대와 영주민의 기억을 조작해야 한다.
한 명의 기억만 조작한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때 염라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염라: 더는 할 말이 없는가? 그러면 이만…….]
[이르카: 자, 잠시만요!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대답이 늦었습니다.]
[염라: 흠, 나는 바쁜 몸이라네 되도록 빨리 물어보게나.]
[이르카: …넵.]
[염라: 그게 질문인가?]
[이르카: 아닙니다!]
뭘 물어봐야 할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또다시 빠른 답변을 재촉하는 염라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염라: 내게 무슨 거창한 질문을 하려고 하기에 이렇게 뜸을 들이나? 슬슬 내 인내심의 한계가 찾아오려고 한다네.]
성질도 급하시지…….
그냥 업무를 보시다가 메시지를 확인하면 될 텐데 말이야.
그렇게 망자가 많은가?
아?
그러고 보니까 할파스는 올림포스와 관련된 인물에게 사망한 것이나 다름없잖아?
염라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기 전 재빨리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시간을 오래 잡아먹어 죄송합니다! 혹, 망자 중에 명계를 거치지 않는 예도 있습니까?]
[염라: 재밌군, 명계를 거치지 않는 망자는 없다네. 자네도 잘 알지 않은가?]
[이르카: 아니, 제 질문은 그게 아닙니다. 염라 님께서 관장하는 명계가 아닌 다른 명계의 신들이 있잖습니까? 그런 쪽으로 갈 확률은 아예 없는 것입니까?]
[염라: 뭐? 자네 장난하나? 세상 모든 망자는 처음에는 무조건 내가 있는 곳으로 온다네. 그 뒤 이자를 회귀를 시켜야 할지 아니면 환생을 시켜야 할지 결정하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이렇게 바쁜 것이고.]
[이르카: 그건 알고 있습니다. 사실, 얼마 전 사망한 할파스라는 늑대인간이 있습니다. 7 아르카니아에서 전투 중 사망했는데, 제가 그를 회귀시키려고 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없다고 하셔서 놀라서 제가 실수를 했나 봅니다.]
[염라: 흠, 확실히 사망한 것이 맞는가?]
[이르카: 네, 사실 이건 영업 비밀인데… 그곳에 길가메시도 있습니다. 할파스는 그자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염라: 호오? 그래? 그런데 길가메시가 왜 그곳에 있는 것이지?]
됐다!
역시 네임드가 등장해야 관심을 가지는구나?
염라의 솔깃한 목소리를 들으니 확실히 관심을 끈 모양.
이제 슬슬 다시 약을 쳐야지.
[이르카: 사실… 제가 관리하는 회귀자들 중에 요한이라는 뱀파이어가 있습니다. 사정이 생겨서 그를 7 아르카니아로 이계 회귀를 시켰습니다.]
[염라: 쯧, 생이 끊어지지 않은 자를 이계 회귀시킨 것인가? 꽤 위험한 짓을 했군. 그것도 내 허락이 없이 말이야.]
어?
이게 아닌데…….
하긴, 회귀는 무조건 죽은 망자들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양반이지.
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핥으며 그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재차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성직자가 되고 싶어 하는 뱀파이어였으니까요.]
[염라: 뱀파이어가 성직자 행세를 하고 싶다고?]
[이르카: 행세가 아닙니다. 지금은 진짜 신성력을 쓸 수 있는 몸으로 변했죠. 그는 제가 본 그 누구보다 성스러워 보이는 뱀파이어입니다.]
[염라: 허어, 살다 보니 유다 이후로 그런 놈은 처음 보는군.]
[이르카: 그렇죠, 유다 이후로는 네? 유다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아십니까?]
[염라: 모든 망자는 나를 거쳐 간다는 말을 헛듣지 말게.]
[이르카: 넵.]
무서운 양반일세.
뭐, 유다의 경우를 알고 있으니 더 말하기 편하려나?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낼 차례.
염라가 진짜 모든 망자를 관리한다면 어떻게 반응을 할까?
[이르카: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저와 사이가 안 좋은 올림포스 측에서… 요한을 제거하기 위해 빙의부의 협조를 받아 길가메시를 보낸 것이지요.]
[염라: 그 과정에서 할파스라는 늑대인간이 사망했고 말인가?]
[이르카: 네. 그런데 그를 찾을 수 없다고 하시니… 혹여 하데스의 저승으로 가서 모진 고초를 겪을지 걱정이 되어 연락드린 겁니다.]
진짜 내 목표는 하데스.
올림포스의 12신에 들어가는 자는 아니지만,
제우스, 포세이돈과 동급의 신으로 취급받는 존재가 아니던가?
만약 할파스를 염라 몰래 그의 명계로 끌고 갔다면 꽤 큰 문제가 될 것이다.
무조건 끌고 갈 수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게 염라는 저승에서 막대한 권한을 가진 신이지만, 그의 명령을 따르는 차사들은 아니지 않은가?
얼마나 지났을까?
엄청난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서 천둥이 치듯 들려왔다.
[염라: 야! 명부 가져와 봐! 야! 오판관, 너 뒤질래? 이거 말고 다른 거 말이야! 하여튼……!]
하긴, 그가 직접 메시지를 받는 것은 오랜만일 것이다.
의외로 그에게 연락하는 신은 거의 없으니까.
그래도, 메시지를 끄는 건 의지로 하는 건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귀찮다 이건가?
“…재밌는 양반이네.”
심각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지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때 안젤라가 턱을 괴고는 질문을 건넸다.
“염라 님이 그렇게 재밌는 분은 아닐 텐데…….”
“아! 맞다 안젤라는 염라 님 뵙고 왔지?”
“…네. 누구 덕분에요.”
“…….”
얘가 또 할 말 없게 만드네…….
머쓱함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화제를 돌렸다.
“이제 곧 답이 올 거야. 지금 뭔가 열심히 찾고 계시거든.”
“흐음, 그래요? 그런데 뭘 물어보신 거예요?”
“혹시 하데스가 자신의 명계로 몰래 끌고 간 게 아닌가, 넌지시 물어봤지.”
“그게 가능해요?”
“염라 님은 몰라도 차사들은 무적이 아니잖아.”
“하긴, 그건 그렇죠. 그래도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보고가 갔을 텐데…….”
“할파스가 죽은 것 자체가 오래된 게 아니잖아. 얼마나 많은 망자가 거쳐 가는데 아직 보고가 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
“그건 그렇네요. 그런데 이거 이르카 님이 싸움 붙이는 건 아닌지 몰라?”
“에이, 설마 그 정도 위치에 계신 분들끼리 싸움이야 벌이겠어?”
“저, 예전에 바알 님하고 루시퍼 님하고 싸우는 거 봤어요.”
“…그 양반들은 예외로 하자.”
괜히 지옥의 대군주들이겠는가?
의외로 냉철한 사탄과는 다르게 수틀리면 주먹부터 나가는 성격을 가진 바알은 지옥의 트러블메이커라고 불릴 정도였으니까.
그때 장부를 뒤지며 호통을 치던 염라가 헛기침하며 재차 메시지를 보내왔다.
[염라: 흠, 이상하군. 그가 사망한 기록이 없다네. 몇 번을 뒤져 봐도 마찬가지… 확실히 사망한 것이 맞는가?]
[이르카: 혹여 하데스나…….]
[염라: 아니, 실종된 차사도 없다네.]
실종된 차사도 없다고?
이거 머리가 좀 뜨거워지는데…….
혹시, 차사가 뇌물을 먹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약간의 가능성이라고 해도 온전히 배제할 수 없다.
헤스티아가 말하길 지금, 제우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르카: 혹시 그날 7 아르카니아로 간 차사는….]
[염라: 없다네.]
[이르카: 네?]
[염라: 몇 번이고 확인했네, 또한 차사들이 내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네. 차사들의 혼에는 영혼의 계약이 걸려 있다네.]
[이르카: 그렇군요.]
[염라: 이거,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그런데 할파스라는 자는 늑대인간이라고 하지 않았나? 자네는 그가 죽어 망자가 된 것을 확실히 확인했는가?]
잠깐?!
염라의 말을 듣자마자 하나의 가설이 떠올랐다.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자책의 말을 내뱉었다.
“아… 나 완전 바본가 보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응?”
“네?”
“아, 아냐.”
“흐흫, 네.”
실없이 웃는 안젤라를 힐끔 바라본 뒤 머리를 주먹으로 자해하듯 쥐어박으며 자책했다.
이런 멍청한 자식.
늑대인간의 상징이 뭔가?
바로 끈질긴 생명력 아니던가.
할파스가 사망했다는 것은 파히르의 말과 기억일 뿐.
그가 완전히 사망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파히르는 당연히 할파스가 당하는 장면을 보고는 그가 사망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살아남는 사람은 없으니까.
요한이 파히르의 기억을 살피더라도 파히르의 기억 속 할파스는 사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그는 인간이 아닌 늑대 인간.
그렇다면 일부러 치명적인 일격을 날린 척한 뒤 목숨을 완전히 끊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이건 함정이었다.
일부러 사소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내가 지켜볼 것까지 계산해서 이렇게 행동했다는 것인가?
요한과 대화를 나누는 헤스티아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만약, 헤스티아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제우스와 아폴론의 계획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
사실, 알았다고 해도 문제지만.
깊은 한숨을 내쉰 뒤 염라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르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염라: 도움이 되긴 뭐가 도움이 되었는가? 일이 잘 해결되었다니 다행이군.]
[이르카: 넵, 정말 감사합니다. 염라 님.]
염라에게 메시지를 보낸 뒤.
요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정확하게는 헤스티아에게 보내는 메시지였지만.
[이르카: 헤스티아 님께 그의 계획을 얼추 알아냈다고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이건 나중에 제가 요한에게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한: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메시지를 받은 요한이 이내 헤스티아에게 말을 건네자 헤스티아의 화신체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확실히 알아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말하니 확실히 알아낸 거겠지? 이르카, 너는 워낙에 난 녀석이라는 소리가 있으니까 믿을 수 있겠지?]
[관리자님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저도 없습니다. 믿을 만한 분입니다.]
[그래. 너를 봐서라도 믿을게. 그리고 이르카야. 마지막으로 말하는 건데. 우리 조카 좀 많이 도와주렴.]
말을 마친 헤스티아는 마치 나를 쳐다보듯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의 올림포스가 변했으면 좋겠단다. 그동안 형제들과 조카들의 만행을 오래 지켜보고도 침묵하기만 했지만, 최근의 도를 넘어선 만행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구나. 그러니 많이 도와주렴.]
말을 마친 그녀는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짓더니 까치발을 들어 요한의 칠흑 같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재차 말을 건넸다.
[네 혼 안에서 타오르는 불을 더욱 거세게 태우렴. 그리고 그 불로 모든 것을 정화해 주렴.]
[축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헤스티아 여신님.]
[헤헤, 난 그럼 간다.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제우스가 눈치챌 수도 있으니까.]
말을 마친 헤스티아는 손 인사를 건네고는 방긋 웃으며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보낸 요한을 지켜보고 있을 때.
안젤라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마리가 궁금함이 잔뜩 묻어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넸다.
“제우스의 계획이 뭐야? 진짜 알아낸 거 맞아?”
“응. 제우스는 아르카니아를 아예 쓸어버릴 생각이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태양 기사단의 실체는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합성 실험체거든. 아마 할파스는… 그들에게 끌려갔을 거야. 헤스티아가 아니었다면 모를 뻔했어.”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물론, 7 아르카니아에 남아 있는 뱀파이어와 늑대인간 중 할파스급 실력자가 많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자가 꽤 있지 않겠는가?
요한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라이오넬 같은 녀석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태양 기사단을 만들 재료인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을 요한이 먼저 구해낸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싸움이다.
길가메시의 약점은 충분히 공략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