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사이비 의원
봉황대기 대회를 준비하는 내내 여름볕은 우리를 쪼아댔었다. 땡볕에 쓰러진 친구를 부축해 그늘에 눕혀야 했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 지옥을 겪고도 나는 야구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고교 고학년으로 올라가기 전 야구를 그만뒀지만,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는 유혹을 참아낼 수 없었다. 덕분에 얻을 수 있던 지식이었다.
‘탈수로 쓰러진 사람한테 스포츠 음료를 먹였다고? 미친놈아, 그러다 사람 잡아! 그게 효과가 있었으면 식품이 아니라 의약외품으로 팔렸겠지!’
‘아무리 선출에 문돌이라도 우리 학교 레벨이면 삼투압은 알 거 아냐? 이온 음료 삼투압이 체액보다 높단 말이다. 나트륨은 필요한 것보다 부족하고. 아이고, 문송해라.’
‘그럼 어떡하냐고? 당연히 응급실 보냈어야지. 돈 아끼려다 사람 잡을래? 응급실이 없으면? 탈수로 죽기 전에 응급실 못 가는 동네가 대한민국에 어디 있어? 아, 군대?’
‘그 망할 놈, 온갖 갈굼을 다 먹였었지.’
의대 동아리와 시합 후 뒤풀이 장소에서 들었던 타박이었다. 이날 받은 치욕은 문과생으로서 평생을 가도 잊지 못할 수준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고. 그날 이후로 친구 하나를 얻었으니까.
내 기억에 경구수액이라는 낯선 물건이 들어있게 된 것도 그 미친놈 덕분이었다. 본과 들어가서 시험과 실습에 치여 학교를 좀비처럼 다니면서도 시합은 안 빼먹고 나오던 녀석.
지는 전공의 수련 끝나고 군의관으로 가니 먼 이야기라고 놀리던 놈이었다. 그놈이 입대 전날 약속했던 선물이라며 후진국에서 쓰이는 수제 경구수액 레시피를 보내줬었다.
덕분에 이걸 어디에 써먹냐며, 누가 이과 아니랄까 봐 낭만이 없다는 비꼼으로 굴욕을 갚아줬었는데 정말로 생명의 은인에게 써먹을 자리가 생길 줄이야. 문제는 내 기억력이 그 녀석의 배려심보다 모자라고 있다는 점이지만.
증류수 1리터 이상을 써야 한다는 것, 소금과 설탕의 비율이 1 : 12라는 것, 설탕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오히려 독이 되니 차라리 묽게 만들라는 추신, 이 세 가지가 기억나는 것의 전부였다.
아니지, 제일 중요한 것을 하나 더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맛대가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맛.
자대배치 후 첫 행군에서 마시려고 수통에 타 놓은 것을 고참이 한 입 빼앗아 먹어보더니 바로 뱉고 욕설을 날려댔던 그 밍밍한 맛.
입을 대자마자 마치 한국전쟁 당시 압록강 물맛을 연상케 해 나도 모르게 수통의 제조 연월을 확인하게 하던 맛.
이상했다. 결국 여느 때처럼 훈련병을 끌고 의무대에 방문한 어느 날, 친한 군의관에게 경구수액이 맛없는 이유를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헌데 내가 경구수액을 만들게 된 계기까지 찬찬히 들은 군의관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장이 심하게 탈나서 링거나 경구수액 쓰는 거면 몰라도 땀 흘린 탈수증상에 누가 경구수액을 쓰나?’
‘제 의대생 친구 말로는 그랬습니다.’
‘그놈 아직 예과나 본1이지? X도 모르고 뱉었거나, 군대 가는 놈 엿 먹이려고 알려준 거지. 짜샤.’
***
“염병에 걸린 인간은 몸에 난 모든 구멍을 통해 물을 내쏟는다는 사실은 진사 어른도 알고 계시지요?”
“그럼, 그럼.”
그렇게 음양오행 이론을 이용해 양 진사에게 약을 팔기 시작했다. 물의 기운이 몸에서 빠져나가 불의 기운을 억누르지 못해 열이 저렇게 펄펄 끓는 것이라고.
원래 몸주인이 착실하게 공부한 모양인지, 의구심에 가득 차 있던 양 진사의 눈빛이 신뢰 반 의심 반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수기(水氣)가 문제가 되니, 그것을 붙잡는데 효과가 있는 것을 비율을 맞춰 알맞게 먹이면 환자의 용태가 눈에 띄게 좋아진다고 의서에 적혀있었습니다.”
“의서라…… 수기를 붙잡는데 효과가 있다는 그 약이 꿀과 소금인가?”
의서는 개뿔.
읽은 적도 없는 의서를 핑계 삼아 거짓말을 즉석에서 지어내느라 뒤통수는 땀으로 척척했다.
‘이게 약장수들이 물건 팔아먹는 방식이구나. 사실은 장에서 수분을 흡수시키기 위해서 체내 전해질 농도를 맞춰주고 미량의 영양도 공급해주는 것인데. 그런 소리 해봐야 이빨도 안 들어갈 게 뻔하니 이런 헛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니.’
허탈한 속과는 다르게 내 혀는 모터가 달린 듯이 화려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런 사이비를 떠들면서도 강의 스위치가 들어가 버리다니.
“예. 꿀은 토기(土氣)를 타고난데다 벌이 씹은 나무로 된 집에 담겨 나무에 매달린 탓에 목기(木氣)를 잔뜩 머금었으니, 능히 화기(火氣)를 제어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호오…….”
“그 꿀을 물에 풀어 끓였다 식히면 이론적으로 화기를 제어하는 가장 이상적인 약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양 진사의 눈이 시간이 갈수록 더 반짝이고 있지 않았더라면 혀는 금방 멈췄을지도 모르겠다. 수업도 듣는 사람이 흥미를 가지는 모습을 보여야 가르치는 사람도 의욕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가슴 한구석에 뭉쳐있던 자괴감이 점점 흩어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꿀은 설탕을 대신할 물건이었다. 조청도 그것을 대신할 순 있겠으나, 꿀이 있는 이상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소금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꿀이 화기를 제어할 수 있는 물건이라고는 하나 환자가 잃어버린 수기(水氣)는 물만 마신다고 하여 쉬이 보충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오행의 균형이 이미 심각하게 무너졌기 때문이지요. 소금은 원래 수(水)에 속한 물건, 비율만 잘 맞춰주면 마실 때 신체로 들어가는 물의 기운을 보(保)해주고 꿀과 어우러지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소금과 꿀을 탄 물만 있으면 염병을 다스릴 수 있단 말이렷다?”
마치 과외수업 사이사이에 과장 조금 섞은 썰을 풀어댈 때 제자가 짓던 표정을 연상케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양 진사였다. 왠지 X가스터디에서 일하던 선배가 밑에서 조교로 일해보라고 농담 삼아 말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정도 능력이었다면 졸업하고 취직 실패했어도 굶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슬며시 뇌리를 스쳤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봤자 의미 없는 일이겠지.
“아닙니다. 제대로 된 비율을 맞추지 못하면 오히려 수기(水氣)를 보하는데 악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비율이 어떻게 된단 말인가?”
“……정확한 숫자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방금까지 환희에 가득 차 있던 양 진사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자신과 그 기반인 고을이 염병에서 안전해질 수 있는 비방이 날아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그렇게 신나게 궤변을 늘어놓고는 이제 와서 모르겠다?”
양 진사가 벌컥 화를 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경구수액 일 리터에 포도당과 나트륨이 몇 그램 들어가야 하는지 비율을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이라고.
아니, 경구수액이 뭔지 아는 사람이 많긴 할까? 게다가 이 자리에는 정제된 포도당도, 나트륨도, 그 양을 정확하게 잴 기구도 없다.
뭐, 그것도 상정 범위 안의 반응이었지만. 강의의 텐션이 계속 똑같으면 듣는 사람도 지루해하기 마련이었다. 깊은 인상을 줄 필요도 있었고.
예상했던 반응이라면, 계획했던 대응을 꺼내면 된다. 준비한 대로 혀를 쏙 내밀자 양 진사의 표정은 볼 만 했지만.
“……지금 혀를 내밀고 나를 희롱하는 겐가? 자네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건가?”
“보십시오. 이 혀가 그 비율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살짝 짓궂게 메롱, 하고 혀를 내민 효과가 있는지 양 진사는 불같이 화를 냈다. 성질 급한 양반 같으니. 허나 답변은 이미 준비되어 있는 것을.
“맛본 적이 있었다는 얘기인가?”
“예, 선친께서도…… 염병에 화를 당하셨는데 그것을 상중에서야 발견한 것이 한스러워 귀한 꿀을 겨우 구해 한 번 올린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 염병의 희생자가 자네 선친이셨던가…… 그래서 상복을…….”
내가 생각해도 그럴듯한 변명이었다. 화기가 남아있던 양 진사의 표정이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장렬히 끓어오르던 약탕관에 담긴 물은 양 진사와 나누던 대화 때문인지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이제 남은 건 1 : 12의 비율로 소금과 꿀을 조금씩 섞어가며 혀에 아로새겨진 그 개똥 같았던 맛을 찾아가는 과정뿐이다. 조금 묽은 것이 차라리 낫다고 했으니 오히려 기억보다 밍밍한 편이 나으리라. 기억 속에 남은 들큰찝찔함의 근처에만 가면 혼합을 멈추면 그만일 것이다.
“맛은 기억하고 있으니, 그것을 재현하는 것은 손이 많이 갈 뿐,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진사 어른께서 도와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말하게! 내 뭐든 돕겠네!”
잠시 화를 내긴 했지만 이미 양 진사는 내 충실한 신도가 되어 있었다. 방금까지 떠들어댄 사이비 오행설이 효과가 있긴 한 모양이었다.
내가 부탁한 물건을 가져오라고 종에게 지시하자마자 본인 또한 지필묵을 가져오겠다며 사랑채로 내달리는 양 진사였다. 묵직한 체구와는 다른 재빠름에 놀란 눈이 꿈뻑거려졌다.
“후우…….”
이렇게까지 잘 먹혀들어 가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온몸으로 퍼지는 안도감에 달콤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학기간까지 합치면 꽤 오랜 시간 동안 과외 선생, 학원 강사 노릇을 한 보람이 있었다.
“선비님, 대체…….”
“나리를 위한 일이었네.”
“그렇다 하셔도 그렇게 설명하실 필요까지는 없었던 일 아닙니까요?”
끼어들지 않고 묵묵히 뒤에서 듣고만 있던 김 갑사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말게. 알량한 동정심에서만 나온 생각은 아니니까.”
“그래도…….”
적어도 신세 진 것은 갚아야 한다는 생각도 영향을 끼친 결과였다. 운봉현은 작은 고을이지만 그곳의 실력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놓는다면 나쁜 일도 아닐 것이었다.
그 정도 눈치와 계산으로 판단을 굴리는 것은 익숙했다. 다만 가슴 속에서 끓는 무언가가 그 모든 판단을 덮어버리고 있었다. 그뿐이었다.
“내가 아는 비방을 굳이 양 진사에게 알릴 필요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가?”
“선비님의 결정이니 제가 어찌 간섭하겠습니까요. 다만…….”
어사를 구하기 위한 경구수액을 조용히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호기심이 동한 집주인이 별채로 들이닥치지 않았더라면 더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아니, 양 진사를 앞에 두고도 별것 아닌 양 말로 뭉개고 지나가는 일은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 약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선비님에게 해가 될지도 몰라서 드리는 말씀입죠.”
“그렇다고 숨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괴질에 고통받는 사람이 나리 한 명에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네.”
김 갑사의 말대로 분명 리스크는 있었다. 사이비 학설을 펴다 무당이나 괴승으로 몰려 화를 당한 기록은 역사 속에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내심 뿌듯하게 도포 자락을 쓰다듬었다. 양반이기에 걸칠 수 있는 옷이었고, 뿌리 있는 가문의 일원이기에 상복 대신 입으라며 양 진사가 내준 옷이었다.
‘끈은 없다지만 그나마 양반의 몸에 깃들어서 다행이구만.’
하지만 그런 리스크를 지고도, 어떤 나비효과를 뿌릴지 모르면서도 경구수액이라는 현대적 지식을 알리기로 결정한 것은 단순히 양 진사의 호의를 사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 병으로 고통받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내 앞에서 실제로 숨 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글로 남은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앞에 서 있는 김 갑사를 전해 내려오는 글자 몇 개처럼 대할 자신이 없었다. 호피를 보여 달라며 수줍게 웃음 짓던 여종도, 시키는 건 해야 한다며 나이에 안 맞게 당차던 꼬마종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전염병에 휘말리는 꼴을 지켜만 보기에는 마음속 무언가가 부글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아마 어사가 걸린 병이 짐작대로 장티푸스라면 이들도 휘말렸을 것이 뻔했다.
“……선비님은 크게 되실 분입니다요.”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이 일만 끝나면 조금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요. 선비님 몸도 챙기셔야 합니다요. 저희야 익숙하지만 상을 치르던 몸에는 고된 일정이었을 텐데…….”
김 갑사의 말투가 눈에 띄게 누그러져 있었다. 험악한 얼굴과 달리, 정이 담뿍 담긴 말이었다.
***
끓여 식힌 물 반 됫박.
자염(煮鹽) 반 돈쭝.
목청(木淸) 여섯 돈쭝.
옆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처방의 결과를 한지에 적어 내려간 양 진사였다. 방금 빌려준 은수저를 돌려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귀이개처럼 생긴, 아끼는 은수저라 했다. 저울과 추뿐만 아니라 주사(朱砂)처럼 귀한 안료를 다룰 때나 쓰던 도구를 내준 것은 그가 염병을 다스린다는 특효약에 큰 기대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그렇게 맛이 독한가?”
“드셔보시겠습니까?”
몇 번이고 꿀과 소금을 더해가며 섞은 혼합물이었다. 입에 머금자마자 진저리가 쳐지는 것을 보니 제대로 만들었다 싶었다. 직접 맛을 본 양 진사는 조금 짭짤하고 달기만 하다며 담담한 평만을 남겼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남은 꿀, 괜찮으시다면 한 술이라도 좋으니 제 심부름을 하던 꼬마에게 내리셨으면 합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시킨 일이라도 살갑게 한 모양이구만. 그런데, 저것이 정말로 약이 되는 것이 맞나?”
“백부님께 드려봐야 알겠지만 제 기억 속의 물건과 한 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몸종 하나를 붙여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또 왜?”
“이 약을 복용하는 방법이 조금 까다롭습니다. 그러니까…….”
팔에 꽂힌 수액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던 링거액을 떠올렸다. 소화기관으로 흡수하니 큰 문제는 없겠지만 적은 양을 꾸준히 먹일 필요는 있어 보였다.
“……일각(一刻)에 다섯 술을 같은 간격으로 꾸준히 먹이도록 몸종에게 지시하였으면 합니다.”
흔쾌히 수락하는 진사를 보면서도 내 속마음은 복잡했다. 과연 주먹구구와 기억에 의존해 만들어낸 경구수액이 효과가 있을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동안 보여준 어사의 인품에 대한 호감이 빚어낸, 반드시 약효가 있었으면 하는 기대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였다.
휘청, 하고 무릎이 꺾였다.
간신히 몸을 다잡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것이었다.
“괜찮은가? 아니…… 그러고 보니 눈도 붙이지 못하고 지금까지 씨름한 것이 아닌가.”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저것을 빨리 백부님께…….”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빨리 휴식을 취하게.”
양 진사가 내 너머로 눈짓을 날리자마자 어깨에 묵직한 악력이 느껴졌다. 뒤에서 나를 지켜보던 김 갑사였다. 쉬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눕히겠다는 의지가 전해져왔다.
“알겠습니다. 그럼 소생은 실례하겠습니다.”
“쉬고 나면 할 얘기가 있다네. 푹 쉬고 그때 보세.”
양 진사의 웃음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는지 맥이 풀린 모양인지 갑자기 시야가 새까매졌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듯, 점점 흩어져가고 있었다.
그 병으로 고통받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내 앞에서 실제로 숨 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글로 남은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 작가의 말
앞에 서 있는 김 갑사를 전해 내려오는 글자 몇 개처럼 대할 자신이 없었다. 호피를 보여 달라며 수줍게 웃음 짓던 여종도, 시키는 건 해야 한다며 나이에 안 맞게 당차던 꼬마종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전염병에 휘말리는 꼴을 지켜만 보기에는 마음속 무언가가 부글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아마 어사가 걸린 병이 짐작대로 장티푸스라면 이들도 휘말렸을 것이 뻔했다.
물 반 됫박 = 대략 800밀리리터
“……선비님은 크게 되실 분입니다요.”
소금 반 돈쭝 = 대략 2그램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꿀 여섯 돈쭝 = 대략 24그램
“이 일만 끝나면 조금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요. 선비님 몸도 챙기셔야 합니다요. 저희야 익숙하지만 상을 치르던 몸에는 고된 일정이었을 텐데…….”
김 갑사의 말투가 눈에 띄게 누그러져 있었다. 험악한 얼굴과 달리, 정이 담뿍 담긴 말이었다.
경구수액 레시피는 빌 게이츠가 후원하는 Rehydration Project에서 공유하는 레시피를 참고했습니다. 후진국 어린이들을 설사와 탈수에서 구하기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
끓여 식힌 물 반 됫박.
자염(煮鹽) 반 돈쭝.
목청(木淸) 여섯 돈쭝.
옆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처방의 결과를 한지에 적어 내려간 양 진사였다. 방금 빌려준 은수저를 돌려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귀이개처럼 생긴, 아끼는 은수저라 했다. 저울과 추뿐만 아니라 주사(朱砂)처럼 귀한 안료를 다룰 때나 쓰던 도구를 내준 것은 그가 염병을 다스린다는 특효약에 큰 기대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그렇게 맛이 독한가?”
“드셔보시겠습니까?”
몇 번이고 꿀과 소금을 더해가며 섞은 혼합물이었다. 입에 머금자마자 진저리가 쳐지는 것을 보니 제대로 만들었다 싶었다. 직접 맛을 본 양 진사는 조금 짭짤하고 달기만 하다며 담담한 평만을 남겼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남은 꿀, 괜찮으시다면 한 술이라도 좋으니 제 심부름을 하던 꼬마에게 내리셨으면 합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시킨 일이라도 살갑게 한 모양이구만. 그런데, 저것이 정말로 약이 되는 것이 맞나?”
“백부님께 드려봐야 알겠지만 제 기억 속의 물건과 한 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몸종 하나를 붙여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또 왜?”
“이 약을 복용하는 방법이 조금 까다롭습니다. 그러니까…….”
팔에 꽂힌 수액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던 링거액을 떠올렸다. 소화기관으로 흡수하니 큰 문제는 없겠지만 적은 양을 꾸준히 먹일 필요는 있어 보였다.
“……일각(一刻)에 다섯 술을 같은 간격으로 꾸준히 먹이도록 몸종에게 지시하였으면 합니다.”
흔쾌히 수락하는 진사를 보면서도 내 속마음은 복잡했다. 과연 주먹구구와 기억에 의존해 만들어낸 경구수액이 효과가 있을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동안 보여준 어사의 인품에 대한 호감이 빚어낸, 반드시 약효가 있었으면 하는 기대 때문이기도 했다.
그때였다.
휘청, 하고 무릎이 꺾였다.
간신히 몸을 다잡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것이었다.
“괜찮은가? 아니…… 그러고 보니 눈도 붙이지 못하고 지금까지 씨름한 것이 아닌가.”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저것을 빨리 백부님께…….”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빨리 휴식을 취하게.”
양 진사가 내 너머로 눈짓을 날리자마자 어깨에 묵직한 악력이 느껴졌다. 뒤에서 나를 지켜보던 김 갑사였다. 쉬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눕히겠다는 의지가 전해져왔다.
“알겠습니다. 그럼 소생은 실례하겠습니다.”
“쉬고 나면 할 얘기가 있다네. 푹 쉬고 그때 보세.”
양 진사의 웃음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는지 맥이 풀린 모양인지 갑자기 시야가 새까매졌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듯, 점점 흩어져가고 있었다.
※ 작가의 말
물 반 됫박 = 대략 800밀리리터
소금 반 돈쭝 = 대략 2그램
꿀 여섯 돈쭝 = 대략 24그램
경구수액 레시피는 빌 게이츠가 후원하는 Rehydration Project에서 공유하는 레시피를 참고했습니다. 후진국 어린이들을 설사와 탈수에서 구하기 위한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