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8화 (8/298)

8화. 꿈꾸는 용과 봄 향기

「몽룡은 심신이 상쾌하여 이리저리 경치를 바라볼 적에 오작교 저편 큰길 건너 늙은 수양버들 밑에서 녹의홍상으로 차린 처녀 삼사인이 그네를 뛰는 양을 보았다. 치맛자락이 펄렁 댕기 끝이 너훌 앞으로 굴러 뒷가지를 차고 뒤로 굴러 앞가지를 찰 때에 흐느적 흐느적 흔들리는 수양버들 잎사귀가 햇빛에 번뜻번뜻한다.

처녀들이 그네 뛰는 것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건마는 오늘 따라 몽룡은 심사가 산란함을 깨달았다. 더구나 그네 뛰는 처녀들 중에 분홍 치마 노랑 저고리 입은 한 처녀가 이상하게 몽룡의 맘을 끌었다. 동안이 뜨므로 그 얼굴까지는 볼 수가 없으나 그네 위에서 몸 가지는 태가 다른 처녀와는 유별하게 아름답다.

‘그네를 뛰는 것이 아니라 춤을 추는 것이로구나.’

몽룡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담배도 잊어버리고 몽룡은 그 처녀만 뚫어지게 바라보노라니 가슴은 두근거리고 눈은 아뜩아뜩하였다.

─ 일설 춘향전(一說 春香傳) 中」

‘광한향악(廣寒香渥)’

광한루에 나부끼는 향기. 피눈물을 흘리며 어사화판에 써내려갔던 글귀.

심장이 터져나올 것 같던 급제자 발표일이었다.

조선 팔도의 날고 기는 천재들 사이에서 병과(丙科)에 불과했으나 삼십삼인 안에 들어 용문(龍門)에 오른, 평생의 영광으로 삼아도 좋을 날이다.

전시(殿試) 합격자 삼십삼인의 증표인 홍패(紅牌)와 임금이 직접 내려준 어사화를 받아들고는 만인지상(萬人之上)이 사라진 뒤를 향해 절을 올린 후였다.

용안(龍顔)을 처음 본 풋내기들이 감격에 겨워 엎드려 몸을 떨고 있을 때, 냉정한 동방(同榜, 함께 합격한 사람) 몇몇은 품에서 작은 함과 지필묵을 꺼내고 있었다. 성은(聖恩)을 입은 것을 상징하는 홍패와 어사화를 한시 바삐 고이 보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몇몇이 그 상자의 겉에 ‘문과급제’ 따위의 평범한 문구를 떨리는 손으로 적어 넣고 있을 때, 이성은 일필휘지로 ‘광한향악’ 네 자를 적어 넣었다. 구경하던 동방 몇이 풍류를 아는 자라며 우스갯소리를 하고 지나갔다.

‘너는 참으로 봄 향기 같구나.’

‘도련님은 저를 꿈꾸게 해주는 용과 같은 분이세요.’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지그시 깨문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그것을 벅찬 감동의 징조로 해석한 동방들은 은영연(恩榮宴, 임금이 급제자들에게 베풀어주던 연회)에 늦지 말라며 엎드려 있는 이성을 지나쳐갈 뿐이었다.

‘그것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십여 년 만에 다시 터져 흐르는 입술에서 흐르는 피의 맛에, 이성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중건(重建)되어 달라진 광한루의 옛 모습은 간 데 없고, 옛 님 또한 간 데가 없었다.

***

“이리 오너라!”

“나리, 이곳은……?”

어사가 나를 이끈 곳은 웬 낯선 집 앞이었다.

양 진사의 친척인 별감의 집에 짐을 풀자마자 갈 곳이 있다며 따라오라는 명을 듣고 도착한 장소였다. 대문 앞에서 내 부축을 받아 겨우 지게에서 내려선 어사는 여전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어사에게 따로 임무를 받은 것이 있는 김 갑사는 걱정되는 눈을 하고는 그 자리에서 멀어져갔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사람을 부르는 어사의 목소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렁찼다.

“양반님네는 누구신지라? 낯이 익으신디…….”

“쇠돌이 자네, 많이 늙었네그려. 스승님의 불초제자가 찾아왔다고 전하게.”

“야…… 혹시 성 부사 나으리 댁…….”

“그렇네.”

집 안에서 가느다란 대답이 들리더니 여든 살은 족히 먹은 듯한 노복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어사의 목소리는 대문 너머까지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그 때, 대문이 벌컥 열렸다. 말끝을 길게 끌며 어사의 도착을 알리는 노복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웬 노인 한 명이 섬돌 아래로 버선발로 달려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성이 네 이놈! 이게 몇 년 만이더냐?”

“그동안 별고(別故) 없으셨습니까, 스승님.”

“별고는 무슨, 서찰이나 보내오던 네 놈이 이 남원 땅에 나타난 것이 별고 아니겠느냐?”

스승이라고 불린 노인은 여전히 버선발인 채로 제자의 손을 맞잡고 집 안으로 이끌었다. 그에게서 힘이라도 나누어 받았는지, 떨리던 어사의 다리는 어느새 멀쩡하다는 듯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세상에, 저게 아픈 사람이 맞나.’

뒤를 따르며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탈수 증상만 회복되었다 뿐이지 장티푸스 균은 여전히 어사를 괴롭히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초인적인 인내력이었다.

노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대청마루였다. 방금까지 앉아 있던 자리였던 듯, 노인은 아무 말 없이 무언가 적힌 한지가 잔뜩 쌓인 서안(書案, 책상)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어사 역시 자연스럽게 그 앞에 자리를 찾아 앉으며 내게 눈짓을 보냈다. 하루 이틀 와 본 곳이 아닌 것 같았다.

“아직도 서당을 여십니까.”

“그만둔 지 좀 되었다. 이제 다 늙은 인생, 마지막 기록은 끝내고 가야지 싶어서 말이다.”

옻칠이 바랜 자리가 있길래 여기다 싶어서 앉았더니, 얼마 전까지 공부를 배우는 아이들이 있었던 흔적인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노인이 책 한 권을 들어올렸다. 난중잡록(亂中雜錄)이라고 적혀있었다.

“저번에 보내주신 서찰에서 편찬이 끝났다는 말씀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만.”

“내 생, 어찌나 기구한지 왜란에 이어 반란도 겪고 양 호란도 겪었으니 어찌나 쓸게 많았겠느냐. 그래서 그 속편을 쓰고 있지.”

“직접 전장에 나아가 칼을 맞대고 싸운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제가 드릴 말씀이 무어 있겠습니까.”

핫핫핫.

크게 소리 내 웃은 노인이었다.

“너는 여전하구나. 코흘리개 시절에는 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녀석이더니, 철 든 이후로는 내가 걱정할 여지조차 주지 않는단 말이지.”

“스승님, 남의 앞에서 말씀이 좀 심하십니다.”

말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으나 어사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걸 본 노인의 혀가 한 번 퉁겨졌다.

“에잉, 여전히 재미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그래, 같이 온 젊은이는 무엇 하는 사람인고?”

“아, 인사 올리게. 제 팔도 유람길에 어울려주는 인척입니다. 저도 이제 나이가 있다 보니 수행할 사람 하나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시선이 돌아가고 살쾡이를 닮은 눈빛이 내게 날아와 꽂혔다. 노인은 한참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영문 모를 말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상하구만…… 이상해.”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분명 귀하게 될 상이긴 한데…… 상을 보니 이미 절명(絶命)했을 나이가 지났는데 멀쩡히 살아 있어서 하는 소리일세.”

가슴이 뜨끔했다.

사실 이 몸의 주인, 안한수는 그때 호랑이에 물려 죽었어야 하는 운명이 아니었을까? 혼이 바뀐 것을 읽는 기술이 관상학에 있을지도 모른다. 당황한 마음 때문에 표정을 관리하는 것도 잊을 지경이었다.

“장난이 심하십니다. 스승님.”

“늙어서 눈이 침침해졌나? 본인은 짚이는 것이 있는 모양 같은데 늙은이가 주책을 부린 것 같구만.”

“자신이 단명하는 상이라는데 저런 표정을 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눈 깜빡하는 사이 살쾡이처럼 빛나던 노인의 안광이 거둬들여졌다.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니었다 싶었지만 등허리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핫핫핫. 미안하게 됐네, 젊은이. 나는 조경남(趙慶男)이라 하네. 본관은 한양이고. 곧 죽을 늙은이의 자(字), 호(號)는 알 필요 없겠지?”

“스승님!”

쇠돌이라 불린 노복이 차를 가져온 탓에 대화는 거기서 멈췄다. 날씨는 꽤 따가웠지만 녹차가 품은 온기는 긴장에 비비꼬인 창자를 풀어주고 있었다.

향이 좋은 차를 꿀꺽 삼키면서도 아랫사람보다 소개를 먼저 하다니 어지간히도 자유분방한 노인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그렇게 내 소개까지 묵묵히 들은 노인이 남은 차를 후루룩 마시더니 어사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팔도를 유람한다고 자칭하는 것을 보니 드디어 네 녀석의 벼슬이 똑 하고 따인 것이냐?”

“그렇게 되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과거에 붙더니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관직만 줄창 돌 때부터 알아봤다. 남의 잘못을 간하고 단속하는 일은 필히 원한을 사게 마련이다.”

“원해서 한 일이니, 후회는 없습니다.”

여전히 감정 없이 망설이지도 않고 소감을 말하는 어사가 돋워낸 화를 삼키는 모양인지, 노인은 헛기침을 몇 번 게워내더니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다.

“……그럴 리가 없지. 네놈 성격이라면 춘향이를 묻은 땅에 파직당한 낯짝을 들고 뻔뻔히 내려올 수 있을 리가 없거든.”

어사의 표정이 굳었다. 부릅떠진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본 노인은 그제서야 기분이 풀린 듯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웃어젖히는 노인의 입가에 빠진 앞니 하나가 휑하게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춘향? 그걸 듣는 내 눈동자 역시 흔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상상도 못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춘향전은 소설이었다. 우연히 같은 남원 땅에 같은 기명(妓名)을 가진 기생이 있었을 뿐일 것이다. 딴생각을 흩어내려 고개를 흔드는데, 귀로 계속해서 낯선 이야기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거 봐라, 스승을 속여먹으려 하다니, 아직 한 갑자는 이르느니라. 정축년 그 일과 같은 사유가 맞지?”

춘향이라는 단어는 어사의 얼굴에 감정을 끄집어내고야 말았다. 당황이 가득한 얼굴로 어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없이 소매에 든 유척(鍮尺)을 슬쩍 비춰보였다. 노인의 웃음소리는 더 높아졌다.

“몽룡아, 오랜만에 네 예전 모습을 보니 이 스승은 기분 좋기가 한량이 없느니라!”

***

노인은 노복을 불러 술상을 준비해오라며 집밖으로 내보내고는 어사를 사랑채로 이끌었다. 방 안에 자리를 잡은 노인은 문을 꼭꼭 닫아걸자마자 목소리를 낮춘 채 캐묻기 시작했다.

“올 줄 알고 있었다. 올 사람이 네놈일 줄은 몰랐지만.”

“어떻게 남원 땅에 앉아서 한양 조정의 일을 내다보십니까? 스승님을 오래 뵈었지만 참으로 놀라울 뿐입니다.”

노인의 표정은 심각해져 있었다. 제자가 암행어사가 되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왔음에도 놀라는 기색 하나조차 없었다.

“네 부친께서 이 땅에 선정(善政)을 펼치시어 오 년으로 정해져 있는 임기를 채우고 한양으로 올라가신 이후, 성상이 한 번 바뀌는 동안 이 남원 땅에서 오 년 임기를 채운 부사는 없었다. 무슨 뜻인지 아느냐?”

“제대로 된 목민관이 없었다는 뜻이겠지요.”

“맞았다. 이 남원 부사 자리를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었거나, 무언가를 해보기도 전에 명이 다해 죽거나, 지금 사또 놈처럼 백성의 고혈을 빠는 수단으로 여기거나. 이 세 가지 종류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는 소리다.”

“그래서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상전하께서 현 남원부사 한 사람을 보고 소인을 보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방금 알았습니다만.”

아마도 어사의 포커페이스가 산산조각이 난 시점은 춘향과 몽룡이라는 단어가 나온 이후였다. 방금까지 표정에 감정이 새어 나올 뿐이던 어사의 얼굴은 이젠 숫제 꿈틀거리고 있었다.

노인은 그걸 보고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놀라운 역사의 뒤안길을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에 속마음은 온통 혼란스럽기만 했다.

“앞으로 네가 어사로서 할 일을 논하기 전에 정리해야 할 일이 있느니라. 들어보겠느냐.”

“예, 스승님.”

“몽룡아, 네가 두 해 전 호서의 암행어사 역할을 무사히 수행했다는 사실도, 그동안 조정에서 힘써 일했다는 사실도 네가 보낸 서찰을 통해 이 조경남이가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느냐.”

긴 침묵이 흘렀다. 어사의 입이 열리지 않자 노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네가 그 과정에서 겪은 고난과 역경은 서찰에 나와 있지 않았다. 내가 혼자 미루어 짐작할 뿐이지.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꿈틀거리던 어사의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가 그동안 받아와 알고 있는 서찰의 내용 또한 전부가 아니라는 소리다. 특히 내가 남원 땅에서 부친 서찰은 말이지. 내가 왜 춘향이 얘기를 굳이 꺼냈는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어사의 명민한 머리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장티푸스를 앓으면서도 맨정신에는 절대 흘러나오지 않던 신음이 이빨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인의 눈썹은 어느새 팔(八)자 모양으로 축 쳐져 있었다. 안타까움을 가득 담은 모양새였다.

“네놈, 나이 스물 하나에 사마시(司馬試, 소과의 일종) 양시(兩試)에 합격해 생진사(生進士, 생원과 진사)가 되고도 학문에 뜻을 잃어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벼슬길에 나간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다.”

“스승님……!”

“괴롭겠지만 들어라. 네 부친에게서 어사화판에 적힌 ‘광한향악’ 네 글자의 의미를 묻는 서찰을 받고도 내가 모른 척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느냐?”

“아닙니다.”

어사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은 숫제 한복 바지에 구멍을 낼 기세로 꽉 쥐여 부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워 눈을 꽉 감을 수밖에 없었지만 뚫려있는 귀로 노인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네가 진실을 알았더라면 아마 폐인이 되거나 관련된 자라도 직접 손보겠다며 인륜을 저버렸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숨길 수밖에 없었다. 사실을 숨겼음에도 오랫동안 망가져 있던 제자를 보고 계속해서 숨길 수밖에 없었다. 나를 용서하거라.”

※ 작가의 말

실제로 후손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성이성의 어사화판에는

실제로 남원 광한루(廣寒樓)를 연상케 하는 ‘廣寒香萼(광한향악: 광한루에 퍼지는 꽃향기)’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조경남은 ‘난중잡록’, ‘속잡록’ 등을 저술한 조선 중기의 의병장입니다.

성이성의 ‘계서일고’에 따르면 실제로 어린 시절 성이성의 스승이었고,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삼란 동안의 온갖 소문을 저술한 이 양반이 춘향전 원전의 저술자일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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