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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3화 (13/298)

13화. 역사적으로도 이게 약이었다

“술상에 불만을 가진 놈이 있다더니 네놈이더냐? 덩칫값을 하는구나!”

가까이에서 본 남원 부사는 멀리서 봤을 때보다 더 두꺼비를 닮아 있었다.

“멀리 진안 땅에서 친척을 만나러 이 고을까지 왔다가 자비로우신 부사 나리의 잔치에 초대를 받았는데, 아랫사람들이 고을의 으뜸이신 분의 체면을 깎고 있었으니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말은 청산유수구나. 그래서 소란을 일으켰단 말이냐?”

“상전을 모시는 도리를 잊은 놈들을 따끔하게 혼을 내주었을 뿐입니다.”

“그럼, 그래야지. 낯은 강직하게 생긴 놈이 사람의 도리 또한 잘 알고 있구나! 마음에 들었다. 이 자리에 술상을 봐줄 테니 오늘은 즐기고 가도록 해라!”

얼레? 이게 끝이라고?

원래 계획대로였으면 원 역사처럼 사또에게서도 푸대접을 받고 ‘상에 고기가 없잖아!’라며 핑계를 대고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읊었던 시를 멋들어지게 읊고는 암행어사 출두를 외칠 예정이었다.

‘뭔가 춘향전 표절 같지만, 어쩌겠어? 알 사람도 없고.’

그 이상으로 충격과 공포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은 머리를 아무리 굴려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무슨 선동의 달인도 아니고, ‘시작은 모방부터’라는 말도 있지 않겠는가.

사또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금세 지워졌다. 관상학적으로 저렇게 생긴 사람이 돈을 밝히는데 인격은 괜찮을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수렴했다.

그냥 생일날 체면을 깎이기 싫어서 내린 나름의 관대한 결정이었을 것이라 판단을 내리고 노비가 양 별감의 옆자리에 내려놓은 술상 앞에 도포 자락을 펼치며 엉덩이를 내렸을 때였다.

아드득, 까드득.

입에 먼저 한술 떠 넣은 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들었는지 양 별감의 고개도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부서지는 소리뿐만 아니라 입안이 온통 까끌까끌한 것을 보아하니 돌과 쌀겨를 걸러내지도 않고 지은 밥이 분명했다.

“어어…… 자네, 그거 뱉게!”

“놔둬라, 양 별감. 감히 이 자리에서 백성과 환곡 어쩌고를 운운한 자에게 맞는 자에게 맞는 잔칫상이 아니냐?”

‘저 씨X…… 어쩐지 관대하게 일이 진행되더라.’

동헌 위에 올라앉은 양반들의 시선이 온통 나를 향해 있었다.

일부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으며, 일부는 사또의 눈치를 보며 얼굴이 굳은 채로 시선을 내 쪽으로 꽂고 있었다.

웃음을 애써 참고 있는 놈의 상판이 방금 시비 붙었던 놈과 닮은 것을 보니 그놈의 애비인 모양이었다. 부전자전이라더니.

돌이 씹히고 있었지만 내 안의 타오르는 분노는 그것마저 씹어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천천히 돌이 섞인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싱긋 웃으며 지짐을 하나 베어 물었다.

‘우욱.’

어울리지 않는 역겨운 맛에 나도 모르게 입 안에 있는 것을 뱉을 뻔했다. 고기를 쓴 지짐처럼 생겼건만 맛은 영판 달랐다. 콩 맛이 희미하게 감도는 것이 대충 무엇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메주 맛이 어떤가? 백성, 백성거리는 잔반답게 개떡 같은 음식도 찰떡같이 잡숫는구만? 안 그런가?”

백성들 장독대는 깨고 다녔으면서, 고작 사람 하나 엿먹이려고 전에 고기 대신 메주를 넣어?

비꼼이 흘러넘치는 사또의 말에 앉아있던 양반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다. 아무래도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작정한 것이 분명했다.

투둑, 하고 이성의 끈이 끊겼다. 의외로 머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목구멍을 거꾸로 달리는 메주를 억지로 위로 넘기고 있는데 주먹이 혼자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손톱이 손바닥 가운데를 깊이 찌르고 있었다.

술상을 사또 놈의 얼굴로 엎어버리고 당장이라도 마패를 꺼내 들어 어사출두를 외치고 싶었으나 그것으로는 불붙은 이 분노를 해소하기엔 모자랐다.

지짐 하나를 입에 더 물었다. 이번에는 다진 고기가 분명한 것이 들어있었으나 꼬득꼬득한 것이 특이한 식감이었다.

“고기 한 조각에도 굶주려서 그것 또한 맛난가? 암, 우리도 먹어보지 못한 귀한 부위인데 맘껏 자시고 가시게. 돼지 X이니까!”

이런 꼴을 당하기 싫어서 별감이 형방에게 그 꼴을 당해도 참고 넘겼구나.

아마 이 상은 잔치에서 별감이 참다못해 폭발했을 때 내려고 준비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패악질이 도를 넘은 인간이었다. 이미 끊어져 버린 이성의 끈 탓인지 혀는 구역질도 안 내고 입안에 든 것을 기계적으로 씹어 넘기고 있었다.

아직도 들려오는 비웃음을 어금니를 꽉 물고 흘려내며 나머지 그릇을 비웠다. 다행히 술과 김치는 멀쩡했다.

꼴에 조선 놈들이랍시고 혈관에 김치 국물이 흐르는 것은 나와 같아 한민족의 성역인 김치에 손댈 생각은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술에는 그래도 장난을 안 쳤다네. 입가심은 해야 될 것 아닌가? 자네가 구경도 못 해볼 고급술이니 아껴 마시게!”

가느다란 백자 술병의 목으로 부들거리는 손이 뻗쳤다. 손아귀에 힘을 조금만 더 주면 병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질 것 같았다.

그대로 병을 입으로 끌어 들이부었다. 도수가 높은 증류주인지 병에 든 독한 액체가 목구멍을 불태우며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저…… 저놈…….”

“저거 소주 아닌가?”

비웃음 사이로 몇몇이 중얼거렸으나 금방 묻혀버리고 있었다. 사또는 껄껄 소리 높여 계속해서 웃고 있었는데, 내가 한 짓거리 중에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것이 분명했다.

시고 나발이고 읊을 생각이 싹 사라졌다. 금준미주 어쩌고 하던 시구는 머리에서 증발한 지 오래였다.

이 금수저 부르주아 놈들을 어떻게 조져야 속이 후련할 것인가. 고속으로 회전하는 뇌는 그것 하나만을 위해 열을 올리고 있었다.

“……잘 먹고 돌아갑니다. 사또.”

“다음부터는 예의란 걸 챙겨 넣고 다니길 바라네. 내 양 별감의 얼굴을 봐서 참은 것이야. 진안 산골짜기에서 부모가 뭘 가르쳤길래 예의가 그 모양인가, 이 말이야!”

결정했다. 짖어대고 있는 개새끼들에게 통하는 약은 따로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이게 약이었다.

***

싹 비운 술상을 뒤로하고 관아를 뛰쳐나오는데 양 별감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말을 맞췄던 것과 다르게 어사 대리란 놈이 마패를 올리기는커녕 관아를 나가버렸으니 그럴 만했다. 하지만 이제 고작 단순한 어사출두로는 내 분노를 식힐 수 없었다.

‘늘 중용을 지켜야 한다는 정신수양 잘 된 선비들한테는 그 정도로 충분했겠지!’

하지만 난 그런 선비가 아니었다.

현대였다면 나 대신 복수해 줄 법이라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다. 그러니 임금이 어사들을 파견했을 것이다.

카악, 퉤.

관아를 나서자마자 아직도 꺼끌꺼끌한 입안의 무언가들을 끌어모아 흙바닥에 뱉었다. 밥에서 씹히던 돌에 상처라도 났는지 침에 붉은 피가 섞여 있었다.

그 붉은 것을 보니 왠지 길고 날카로운 대나무 창을 그놈들의 배때지에 쑤셔 박고 싶은 충동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선비님! 무슨 일입니까요!”

그런 나를 보고 먼저 달려온 것은 김 갑사였다.

본래 어사에게서 열심히 배운 발성으로 ‘암행어사 출두야!’가 우렁차게 외쳐지면 관아를 박차고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그 외침 가운데 있었어야 할 내가 관아를 뛰쳐나온 탓에 김 갑사는 한껏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계획을 바꾸겠네. 부탁했던 물건은 가져왔는가.”

“예? 가져오긴 했습니다만…….”

멀리 역졸의 우두머리인 자임이 분명한 자와 급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유 서리가 보였다. 계획이 틀어진 것을 눈치 빠른 얌생이는 벌써 감지한 것이 분명했다.

그사이 김 갑사는 메고 있던 지게에서 몽둥이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익숙한 나무 배트였다.

“이 요상하게 생긴 몽둥이를 능숙하게 휘두르신다는 것도 알겠고, 그걸로 기분을 푸시는 것도 알겠는데, 지금은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요?”

“관아에서 큰 수모를 받았네. 받은 만큼 갚아 주는 것이 인간의 도리지.”

어린 시절부터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한적한 야밤에 배트를 들고 나가 스윙 연습을 하며 풀어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 감독에게 배운 방법이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떨어진 이후로는 그러기가 어려웠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스트레스는 쌓여 가는데, 배트는커녕 혼자 있을 시간조차 적었으니까.

그러다 장시에서 방망이 깎는 노인을 만났을 때는 이거다 싶었다. 이제 그가 눈에 들어온 이유가 또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은 못 하겠다.

은편을 쥐여준 이유가 있었지. 노인장은 잠자코 방망이를 깎다 못해 내 애간장을 다 태울 정도로 뜸을 들였지만 그가 주문대로 깎아 손잡이에 송진까지 발라 건네준 물건은 사람의 솜씨가 아닌 듯했다.

말없이 배트 헤드 부분을 손에 툭툭 쳐 봤다.

밸런스가 기막힌 것이 현대의 물건에도 비길 만했다. 균형을 맞춰 깎아내지 않으면 스윙할 때 타자의 몸을 흔들리게 하고, 균형을 맞추다가 너무 깎아내 버리면 파괴력이 떨어진다. 기억에 남아있는 이상적인 빠따의 곡선이 눈부셨다.

정의봉(正義棒). 대리어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나서 헤드에 써 내려간 이름이었다. 같은 이름의 몽둥이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처음에는 그저 위협용이나 방어용으로 출두할 때 지니고 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는 썩어빠진 놈의 뚝배기를 정의구현할 몽둥이가 될 것이다.

“결국 계획대로 되지 않은 모양일세. 그렇지 않은가?”

덩치가 메고 있던 지게에 올라앉아 있던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어사였다. 약속대로 내가 관아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뒷수습을 대비할 겸 온 것이 분명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나리께서 직접 하시는 것이.”

“자네에게 맡긴다 하지 않았는가. 책임은 내가 지겠네. 하고 싶은 대로 해 보게.”

“그래도…….”

“생각해보게. 어사 출두를 외치는데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어사가 들어선다면 위신이 서겠는가? 자네가 하려는 방법도 분명 틀린 것은 아니네. 허락할 테니 해보게.”

심각한 나와는 다르게 어사의 표정은 빙글거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듯 눈은 반짝하고 빛났다. 그 모습에 마지막 남은 망설임은 사라지고 브레이크는 완전히 풀어졌다.

어울리지도 않는 시나 외면서 출두하는 것보다는 이쪽을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참, 혹시나 해서 이것도 가져왔네. 어사의 위엄을 드러내려 의자에 깔 물건이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자네가 걱정했던 얼굴을 이걸로 가려보는 건 어떤가?”

어사가 익숙한 물건을 등짐에서 꺼냈다. 조선에 날아오자마자 날 저승으로 보낼 뻔 했던, 노란 바탕에 난 검은 줄무늬였다.

***

“선비…… 아니 어사 나으리. 나으리 복장이 무엇과 닮았는지 아십니까요?”

“말 걸지 말게. 가죽 냄새 때문에 코가 터질 것 같네.”

“착호갑사 중에 사냥한 호피로 위장하는 자들이 있는데 딱 그 꼴입니다요.”

“시끄럽네.”

선봉을 맡긴 김 갑사는 신이 났는지 입에 단 모터를 돌려대고 있었다. 여전히 풍악이 울려대는 잔치 때문에 잘 들리지도 않았다. 진중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싸움이 예고되자마자 아예 딴사람이 된 것처럼 물이 올라 있었다.

나는 어떤가. 분노는 이글거리고, 머리는 차가웠다.

전 타석에 몸에 맞는 볼을 던진 투수를 상대할 때를 떠올리게 했다.

손에는 익숙한 배트가 들려있다. 나머지 한 손에는 어사를 상징하는 물건이 꽉 쥐어져 있다. 안에서 풍겨오는 냄새와 음악 소리를 접하니 배트를 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준비됐는가?”

뒤를 따라온 유 서리와 역졸대장에게 눈짓을 보냈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작게 끄덕여졌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목 뒤로 넘어가 있던 호랑이 머리가죽을 얼굴에 푹 덮어썼다. 노린내가 진동했다.

우지끈

닫혀있던 문이 김 갑사의 묵직한 발차기 한 방에 박살 나며 환히 열렸다.

어느새 음악소리와 웃음소리가 멎어있는 잔치판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이쪽을 보고 놀란 양반놈들의 시선이 내가 들어 올린 마패를 향해 있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어사에게 배운 대로 뱃속부터 젖 먹던 소리를 끌어모아 사또 놈이 뒹굴거리고 있을 동헌을 향해 내질렀다.

따르던 역졸들이 돌림노래를 부르듯 후창(後昌)하자 온 관아가 떠나갈 것 같았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피가 씽씽 돌기 시작한 것이 느껴졌다.

“암행어사 출두요!”

※ 작가의 말

경기대 박물관에서 소장중인 ‘당채호렵도’를 보면

실제로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쓴 사냥꾼들의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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