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상경(上京)
어사가 운봉현 고개를 향해 떠났을 때, 나는 동헌에 홀로 남아 등에 바닥을 딱 붙이고 또 다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서류들로부터 해방된 것이었다.
‘일이 없는 건 좋은데, 머릿속이 더럽게 복잡하구만.’
어사는 굳어진 얼굴을 하고서도 끝까지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짓고 목적지로 떠났다. 늦게나마 깨달은 점이지만 지금까지 어사를 그렇게 흔들었던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 노친네가 과제인지 선물인지 모를 것을 전해줬다더니…… 그나저나 어사 양반도 눈이 꽤 높았네.’
내가 조선으로 떨어진 날 밤, 만났던 여인은 춘향이 분명했다. 어사는 그 고갯길에서 나처럼 춘향의 혼백이나마 만날 수 있을까.
모를 일이었다.
‘만났으면 좋겠네.’
약한 탄식이 새어나왔다. 나도 한 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돌아간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사뿐만이 아니었다.
“에이 씨…… 무슨 주책이야.”
소매로 눈가를 쓱쓱 훔쳐냈다. 쓸 데 없는 감정이었다. 이제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야 했다. 이전에 살던 곳에서 가졌던 생각과 감정들은 사치였다.
“그래서,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었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물어볼 수도, 답이 나올 수도 없는 질문이었다.
‘자네는 어찌 할 생각인고?’
노인의 질문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다.
이제 고민해볼 시간은 충분했고, 결정해야 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
1620년생 안한수.
이것이 이제 내가 살아가야 할 두 번째 인생이었다.
열아홉까지 자연을 벗삼아 글만 읽다 부모를 잃어 어디에 매인 곳도 없었다.
글은 열심히 읽었는지 사서오경에 대한 지식이나 시와 부를 짓는 능력은 뛰어났다. 스스로 언급하기 부끄럽지만 만나는 이마다 총기를 칭찬할 정도였다.
어사가 업무를 가르치기 전 지식을 시험해보겠다며 지정한 책의 구절을 외게 시켰을 때도 묻는 것에 하나 막힘이 없었다.
‘이정도면 대과 전례강(典禮講, 예비시험)까지는 걱정 안 해도 되겠구만.’
낸 문제를 전부 통과하자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어사가 중얼거린 말이었다.
뭘 하더라도 밥을 굶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주어진 대로 막 살아가는 건 싫었다. 그렇다면 가진 것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
유학만 공부한 선비의 몸으로 다른 일을 찾기에는 뾰족한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음서(蔭敍)로 관직에 나아가는 것은 택도 없는 소리고.’
고생을 좀 하겠지만 쌓여있는 지식과 전생에서 내가 나름대로 쌓아올린 공부법, 그리고 근성을 모조리 끌어 모아 과거급제에 도전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유일하게 걸어볼 만한 일이었다.
“붙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과거를 본다고 치고.”
그렇다면 최선의 선택은 노인과 유 서리의 말대로 어사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 하나 정도의 의식주 정도는 보장해 줄 테니.
거기다가 노인이 어사의 전 보직으로 삼사(三司)를 언급했고 애초에 어사로 나올 정도의 총신(寵臣)임을 생각하면 어사는 내가 잡을 수 있는 최고의 금동아줄임은 분명했다.
‘그런데 이 기분은 뭐냔 말이다.’
그래서 급제를 하면?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조선 시대라고 해서 다른 것은 없었다. 보통 사람들의 인식처럼 줄도 없고, 백도 없는 사람이 대과에 급제해서 전국 33등에 들었다고 벼슬이 막 나오는 세상이 아니었다.
임용이 보장되는 것은 갑과(甲科), 그러니까 최소 3등 이내에 들어야 조정의 말직이 보장되는 것이다. 거기서 인맥이 없거나 왕의 눈에 들지 못한다면 장원이라 해도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은 무리였다.
“하아. 헬조선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니까.”
거기서부터 상상은 턱 막혔다.
끝없이 인생을 갈아 넣어야 하는 루트였다. 과거 시험을 준비하느라 몸을 갈아 넣고, 그 후엔 더 좋은 관직을 위해 왕의 눈에 띄거나 당파에 끼어 정치질을 해가며 또 갈아 넣고, 그렇지 못하면 밀려나는 정글의 세계.
어찌어찌 역경을 극복해냈다 해도 그 앞에는 또 다른 역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질리는 일이었다. 동기부여가 전혀 되지 않았다.
‘직접 겪어보니 관리의 업무 하나만으로도 과중한데, 정치질까지 해야 된다니. 난 못 해.’
그 때문에 조 노인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이유였다.
‘발상을 좀 바꿔 볼까?’
옆을 구르고 있는 정의봉이 눈에 들어왔다. 호피를 뒤집어쓰고 관아를 엎어버렸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속이 뻥 뚫렸다. 내 안의 무언가를 조선 시대에 와서야 처음 깨달았다. 아니면 어사의 관종끼가 조금 옮았든가.
‘즐거웠지. 그때는.’
어사와 김 갑사, 유 서리와 함께한 남원까지의 여정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과거로 떨어져 느꼈던 불편함까지 잊게 될 정도였다. 길바닥을 숨 가쁘게 뒹굴던 여행은 나를 완전히 한 명의 조선인으로 녹여버렸다.
어사와 같이 가길 거부한다면, 이제 조선 땅에서 그런 즐거움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누가 며칠 전에 처음 본 사람한테 마패를 쥐어줘. 그 양반 정도가 아니고서야.’
권력의 맛은 달콤했다. 대리로라도 권력을 휘둘렀을 때 느꼈던 원초적 쾌감은 만만치 않았다.
어사는 그것까지 계산하고 내게 마패를 쥐여줬던 것일까? 어사가 따로 품은 뜻이 있다며 노인이 질책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게 무엇이길래…….’
고민하던 사이 남원 부사의 일로 고통 받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 둘씩 떠올랐다. 전부 내가 어사행세를 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던 사람들이었다.
호피 복면을 뒤집어쓰고 어사 행세를 할 때, 양반들을 향해 휘둘러댄 정의봉은 그들을 대신해 휘두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또가 동헌마당에서 웃음거리가 될 때 그들 역시 같이 웃었다.
내가 어사가 됨으로써 내가 즐거운 것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도 웃음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그들이 웃는 것은 이 나라가 건강해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소시민으로 살아가던 현대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었을 깨달음이었다. 고시에 열중하던 선배들이 왜 그렇게 목을 맸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걸어볼 가치가 있긴 하네.’
결정은 내려졌다. 굉장히 이기적인 이유였다.
“어?”
그 순간, 익숙한 현대의 지식이 떠올랐다. 혜성과 부딪치기 전 한참 되새김질하고 있었던 소논문이었다.
1670년의 경신대기근을 앞둔 조선이 어떻게 몸부림쳐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의 고민을 거듭했던 결과가 아직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현대 지식은 권력을 탐하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 내 입신양명의 사유와 마치 원래 하나였다는 듯이 맞아떨어져 있었다.
물론, 그걸 구현해내려면 수많은 노력과 운과 근성이 따라야겠지만.
***
“후…….”
살 것 같았다. 정체를 가리려고 쓴 타이거 마스크, 아니 호피 복면이었다지만 바람이 전혀 통하지 않아 땀띠가 날 지경이었다.
그동안 동헌 밖으로 나설 때는 계속해서 복면을 착용해야 했으니. 남원부의 경계를 벗어나고서야 느낄 수 있었던 해방감은 상쾌 그 자체였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작별이구만.”
“스승님, 여기까지 배웅 나오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스승과 제자는 두 손을 마주잡고 있었다. 작별을 아쉬워하는 듯, 노인의 손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어사는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이곳은 남원부와 임실현을 잇는 북방가도였다. 이 길을 따라가면 한양이 나올 것이었다. 노인은 그곳까지 배웅 나와 있었다.
“몽룡아. 내 나이가 몇인 줄 아느냐. 내년이면 곧 공자께서 말씀하신 종심(從心, 70세)이니라. 아끼는 제자를 언제 다시 만날 지도 모르는데 이 정도는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하지만 스승님…….”
“그리고, 너희 둘은 아직 나에게 대답하지 않은 것이 있으렷다. 그 대답을 들어야겠다. 대답하지 않으면 네가 마패를 사사로이 사용했다는 것을 주상전하께 고할 것이다.”
부드럽게 제자를 염려하던 노인의 말투가 갑자기 딱딱하게 변했다.
“그러지 않으실 거 다 압니다. 결정은 내렸으니 그렇게 협박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냐? 이 늙은이가 갈 때가 되었나 보구나. 네 표정이 잘 읽히지가 않는다.”
어사는 따스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미소와 무언가가 달라 보였다.
“속에 품었던 한이 풀린 모양이로구나. 더 일찍 알려주었어야 했다. 나는 그저…….”
“아닙니다, 스승님. 지금 알려주셨기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잘 됐으니 그걸로 된 것입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그럼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알려주겠느냐.”
스승을 향해 애정 어린 눈빛을 보내던 어사가 이쪽을 돌아봤다. 그 눈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잔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저는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남은 건 안 선비의 뜻이겠지요.”
“데려가겠다는 뜻이구나. 자네의 뜻은 어떠한가?”
두 사람 모두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혔으나 입은 여느 때처럼 부드럽게 열렸다.
“저도 결정했습니다. 다만, 그 전에 어사 나리께 하나 여쭈어볼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침이 꿀꺽 넘어갔다. 사실 결정과는 별 상관없는 질문이었지만 지금 기회가 아니면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제가 어사 나리를 따라다니면서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물음이었습니다.”
“듣고 있네.”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십니까? 범과 마주쳐 위험에 처한 저를, 나리는 아무런 면식이 없음에도 몸을 던져 구해주셨습니다. 귀한 마패도 그 김에 박살이 났고요.”
“핫핫, 마패가 한낱 쇳덩이라 한 것은 자네가 아닌가?”
사실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어사가 공치사라도 한마디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어사는 염병에서 일어난 후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데리고 다니며 하나하나를 가르치고 마패까지 물려주었을 뿐이었다. 마치 원래 일행이었던 것처럼.
“그랬었지요. 아무튼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왜 그러셨는지.”
“그게 궁금한가?”
어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남원에서 겪었던 온갖 감회가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럼 그 전에 나도 묻겠네.”
“예?”
생각지도 못하게 질문을 역으로 던져온 것은 어사였다.
“자네는 왜 나에게 염병의 특효약인 보수탕을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먹였는가? 그 명약은 염병에 듣는 약이 있다는 소식을 환자의 가족이 들으면 집문서를 팔아와서라도 살 물건일세.”
“…….”
“단순히 내가 범에게서 자네를 구한 은인이어서 그랬는가? 아니면 권력을 가진 어사인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건…….”
그런 대가를 바라고 양 진사 앞에서 입을 털어가며 어사를 구한 게 아니었다.
“그런 귀한 약의 배합법을 남들에게 나눠줄 때는 무엇을 바라고 나눠준 것이었는가?”
어사의 표정은 진지했다. 입 안이 바짝 말라왔다.
“목숨을 걸고 어사 대리 노릇을 하며 남원 땅에서 탐관오리들에게 천벌을 내렸을 때도 자네는 무엇을 바라고 한 것이었는가?”
고개를 저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행동들이었다.
나 스스로를 이기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 앞에서 사람이 죽고 고통스러워하는 꼴을 보기는 싫었다. 그래서 몸이 먼저 움직였을 뿐이었다.
“내 대답 역시 그것과 같네. 자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야.”
“나리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쓸데없는 질문을…….”
“아닐세. 아주 좋은 질문이었네. 그 마음가짐이 자네를 한양으로 보내줄 테니.”
눈가에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얼굴을 찡그리며 겨우 참아냈다.
“그 마음가짐을 언제까지고 잘 간직해 놓아야 할 것이야. 그것이 위정자(爲政者)가 품고 있어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
“나리…….”
“사실 자네가 이렇게까지 잘해줄 줄은 몰랐다네. 처음엔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이 된 처지가 가련하여 한양 가기 전까지만 돌봐주자는 생각이었지.”
옆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노인이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네놈, 한 가지를 빼먹지 않았느냐. 안 선비가 네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며 내게 털어놓았을 텐데.”
“그런 망나니 시절과 닮았다는 말을 칭찬으로 여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동기만 주어지면 사람이 달라지는 모습이 닮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기는 남원에서 충분히 맛보여줬다 생각합니다.”
어사는 마치 어제 내가 고민했던 내용을 꿰뚫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무어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튼, 자네는 입을 꽉 다물고 있으나 그 침묵은 한양으로 가겠다는 동의로 받아들이겠네. 맞는가?”
“제가 이 상황에서 뭐라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뜻대로 하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가슴 속에서 묘한 감정이 들끓고 있었다. 기대감일까, 불안감일까.
“이 답답해 빠진 것들. 어차피 이럴 것이었으면서 어사 출두한 날은 왜 그리도 뜸을 들였느냐. 핫핫핫.”
“스승님이 아직 모르시는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 때문이었지요.”
“이 우라질 놈, 또 무엇을 숨긴 것이냐?”
다시 큰 소리로 웃던 노인은 생각지도 못한 어사의 말에 웃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말만 그렇지 여전히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한양에서 뜻을 같이하는 이를 모으고 있습니다. 남원부 관아에서 일을 가르쳐보며 마지막으로 지켜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네놈 성격상 설마 역모는 아닐 테고, 저번에 말한 우부승지 영감이 얘기한 일 말이냐?”
“예. 지금은 잠시 충청 감사로 내려와 대동법을 호서에 시험해 보느라 정신이 없지만 곧 다시 한양으로 올라올 분입니다. 전하와 심양에 계신 저하 사이가 심상치 않아 그것을 수습하려 합니다.”
노인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해 전에 호서로 암행을 나갔다 왔을 때 뜻이 맞은 모양이구나. 그래, 어디 한번 잘해 보거라.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이 나라는 전란을 너무 많이 겪었다. 국본이 흔들리면 나라가 흔들리는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어사는 이제 가봐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듯 스승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래. 가는 길 조심하고. 안 선비는 마지막으로 잠깐 나 좀 보지.”
“예?”
“쇠돌아. 그 물건 가지고 나오너라.”
노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에 대기하고 있던 노복이 상자 하나를 열어 내밀었다. 흑립(黑笠)이었다. 윤기 나는 말총으로 된 갓이 그 안에 들어있었다.
“자네가 상중(喪中)인 것은 알고 있으나, 선물일세. 낡은 삿갓을 쓰고 선친께 속죄하지 말고 그 힘으로 내 제자를 도와주게. 약속해주겠는가.”
“소생에게 어찌 이리 큰 선물을…….”
“앞으로 이 사람을 잘 도와주게. 늙은이 마지막 부탁이라 생각하고.”
노인의 눈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제자를 부탁하는 것이 분명했다. 얼마 전 염병으로 잃을 뻔한 제자였다.
“알겠습니다. 삼가 말씀 받들겠습니다.”
대답을 듣자마자 노인은 직접 그 갓을 내 머리에 씌워주었다. 마치 맞춘 것처럼 꼭 들어맞았다. 갓끈을 묶어주는 노인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노인이 손을 휘휘 저어 사양하더니 뒤를 돌아 남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티 내지 말라는 분부가 분명했다.
“우리도 이제 출발하지.”
“아, 저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자네도 선물을 준비했는가? 금시초문인데.”
선물이 아니었다. 마땅히 주인에게 돌아가야 할 물건이었다.
“아니, ‘고작 쇳덩이’ 아닌가? 이걸 선물이라고 주는 건가?”
‘이 양반이…….’
타박하는 어사의 입가에는 웃음만이 가득했다. 소매에서 꺼내 양손으로 받쳐 든 마패에 어사는 손을 뻗었다. 그런데, 어사가 마패를 가져가고도 내 손에는 마패가 남아있었다.
“왜 한 조각만 가져가십니까?”
“자네가 중간에 마음을 바꿔 도망가면 어사의 마패를 도적질한 죄로 쫓으려 하네. 문제라도 있는가?”
“예…… 어사 나리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니 잘 따라오게. 나머지 마패 반절은 한양에서 받을 것이니.”
어사가 거리를 두고 떨어져 대기하던 김 갑사와 유 서리를 불렀다.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어사의 옆으로 다가왔다.
“선비님도 같이 가시는 것 맞지라?”
“그렇게 됐네. 앞으로 자주 볼 사이가 됐으니 이번에 정식으로 인사들 하게.”
김 갑사와 유 서리가 고개를 깊이 숙여 예를 표했다. 소개라고 특별할 것도 없었다. 이미 웬만한 것은 아는 사이었으니까.
“그럴 줄 알았습니다요. 선비님, 내년에 식년시(式年試, 정기 과거 시험)가 있으니 힘써 준비하시지요. 제가 돕겠습니다요.”
“무엇을 말인가? 나는 아직 소과의 초시도 치르지 않았거늘.”
“무과에는 소과가 없…… 아니, 무과를 치르시는 게 아니었습니까요?”
“어허! 또!”
“선비님의 용맹은 나라를 위해 쓰여야 합니다요!”
이미 앞서 걷기 시작한 어사가 껄껄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맑아 아무 걱정도 없는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