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금발벽안(金髮碧眼)
도령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배운 자의 예절이 몸에 배어있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은혜라 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지나가면서 소리 한 번 낸 것뿐인데.”
다시 나를 향해 똑바로 눈을 맞대고 있는 도령의 외모는 수려했다. 머리칼과 눈동자는 검은 색이었으나 얼굴 생김새가 흔한 조선인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 얼굴로 태어났으면 소원이 없었겠다.’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에 깃든 것을 생각하니 조금 억울했다. 이왕 다른 세계로 날려줬으면 외모라도 잘생기게 해 주지. 앞에 선 도령의 얼굴이 내 얼굴이었다면 지금까지 그렇게 굴러먹었더라도 신에게 원망 한 톨 없었을 것이다.
뭐, 그거까진 좋았다. 그래도 도령의 외모는 조선인의 흔적이 더 강하게 남아있었으니까. 현대의 서구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는 배우들도 한국인처럼 보이지 않는가.
다만 계속해서 신경이 쓰이는 건 도령의 누이임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스쳐 간 금발벽안은 튀어도 너무 튀었다.
“저, 혹시 괜찮으시다면 존함이라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는 박요운이라 합니다. 나중에 신세라도 꼭 갚고 싶습니다.”
“신세까지 운운할 일은 아닌 듯싶네. 그렇지만 내 이름 역시 그렇게 비싸지도 않지. 안한수일세.”
박요운…… 박요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었다. 도령과 그 누이의 낯선 외모와 어디선가 떠오르려는 이름 하나가 머릿속을 온통 흔들어 놓고 있었다. 무언가 떠오를 것 같았다.
생각에 잠겨있는데 뒤에 서 있던 도령의 누이가 손가락을 꼼지락대더니 도령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잠시 당황하던 도령은 체념했다는 표정을 짓고 말을 이었다.
“제 누이가 이름이 이상하다 생각하지 말아달라는군요. 사실 아버님이 태어나신 나라에서 쓰이는 이름을 한자로 음차(音借)한 것이라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니, 전혀 이상하지 않네. 발음해보아도 괜찮지 않은가.”
“그런 말씀을 해 주신 것은 선비님이 처음이십니다.”
생각났다. 요운이라는 이름은 현대에서 들었던 이름이었다. 생긴 거랑 어울리지 않게 막걸리를 좋아하던 교환학생이 있었다. 평소에는 본인을 제롬이라 부르라 했으나, 친해진 이후로는 그의 진짜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제롬이 진짜 이름이 아니라고?’
‘그거 잉글리시, 영국식이야. 우리말로 하면 Jeroen.’
‘여운? 요훙?’
‘아니 요운! J.e.r.o.e.n!’
‘그게 어떻게 요운이라고 읽히는 거야? 그리고 네 발음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고.’
내 귀에는 분명 요운이라 들리고 있었으나 요운이 아니라 미묘하게 발음이 다르다며 펄펄 뛰던 녀석이었다. 결국 그놈은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나에게 요운이라고 불렸다.
‘생각났다. 네덜란드 놈이었어.’
“혹시 아버님께서 함자를 외자로 연 자를 쓰시는가?”
“선비님도 저희 아버님을 아십니까?”
네덜란드라는 나라가 떠오르자 그것을 다리삼아 머릿속을 떠돌던 조각들이 맞춰졌다. 조선, 네덜란드, 요운을 듣고 떠오른 이름, 도령과 누이의 외모를 보니 금발벽안일 부친.
부친의 이름은 본명인 얀을 음차한 한자임이 확실했다.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 지금 시기에 조선에 있을 서양인은 이 사람뿐이었다.
“직접 뵈었던 사이는 아니고…… 그냥 소문만 들어본 분이라네.”
“그런데도 어떻게 저희를 대하시는데 한 치 망설임이 없으십니까?”
“내가 자네들을 마주하면서 망설여야 할 이유라도 있는가?”
“아니……아닙니다. 편견 없이 봐 주신 분은 선비님이 처음인지라…….”
도령은 조금 감동한 눈치였다. 별거 아닌 일에 그런 반응을 보여주니 낯이 조금 간지러워지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상황이 짐작이 가기 시작했고.
방금까지 이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던 놈들이 왜 그런 짓거리를 했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던 둘의 행동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 놈들 눈에는 이 아이들의 얼굴이 도깨비 얼굴로 보였을지도 몰랐다.
‘집단 안에서 정체성이 다른 개체를 따돌리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지만 지금도 그럴 줄이야.’
내가 살아가던 대한민국의 공교육에서도 다문화가정이 늘어나면서 아이들 생활지도에 많은 애로사항이 꽃피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헌데 지금보다 외국에 대한 인식이 바늘구멍이었을 조선 시대라면? 이 둘의 일생은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만 했다.
참으로 가엾고 딱한 처지였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조차 새어나가면 안 됐다. 동정은 약자를 더 비참하게 만든다. 눈빛에서도 그것을 느낄 수 있을까봐 애써 감정을 다잡았다.
“자네들이 마음에 품고 있는 심성이 중요한 것이지, 어찌 죽으면 썩어 없어질 껍데기가 중요하겠는가.”
“그 말씀이 옳습니다. 선비님.”
“성현들께 배운 대로 실천했을 뿐이네. 너무 그렇게 띄우지 말게.”
그 말을 듣자 뒤에 서 있던 누이가 도령을 콕콕 찌르더니 무어라 속삭였다. 도령은 잠깐 경멸하는 눈빛을 쏘아 보내더니 고개를 흔들어 거절의 의미를 표했다.
그 순간, 강속구에 단련된 내 동체시력은 보았다. 장옷 아래로 순식간에 펀치 하나가 왔다 간 것을.
“윽…… 읏…… 선비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감사도 드릴 겸 저희 집에 한 번 들러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버님도 반기실 것입니다.”
“기쁘게 받을 일이지만 지금은 급한 일이 있네. 혹시 날짜를 정해 다음을 기약해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혹시 급한 일이 무엇인지 여쭈어 봐도 될는지요?”
“별 거 아니네, 오늘 소과 진사시 중에 복시가 열렸던 날인 것은 아는가? 그 내용을 보고해야 될 분이 계시기에 발걸음을 조금 서둘러야 한다네.”
도령의 눈이 반짝였다. 무언가 바라는 말이라도 들은 듯 했으나 더 이상은 잡아끌지 않았다.
“복시에 응시하실 정도면 고명한 선비님이셨군요. 제가 괜한 시간을 끌었습니다. 혹시 댁을 알려주시면 정해주신 날짜에 모시러 찾아가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진 없네만…… 북촌 동편에서 성 사간(司諫) 댁을 찾으면 될 것일세.”
“알겠습니다. 악!”
장옷을 입은 누이가 다시 한번 도령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니 사이가 꽤나 친한 남매다 싶었다. 누이 쪽은 조금 왈가닥인 것 같긴 했지만.
“그…… 실례일지는 모르겠지만 제 누이가 요안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들리냐고 묻습니다.”
“역시 예쁜 이름 아닌가? 돌림자라도 쓴 건가? 부친께서 자네 누이를 끔찍이 생각하시는 것이 분명하네.”
요안나라는 이름은 익숙했으니 네덜란드어에도 거기서 파생된 이름은 있겠지. 별 생각 없이 말을 주워섬기는데 장옷 속에서 배시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 때문에 손에 힘이라도 풀린 것인지, 장옷 사이가 풀어져 옷 틈에 숨겼던 얼굴이 잠시 드러났다.
아비의 피를 짙게 받은 것은 누이 쪽인가. 슬쩍 엿보인 장옷 사이로 인형 같은 외모가 스쳐간 것 같았으나 순식간이었다.
“저희가 너무 시간을 잡아먹은 것 같습니다. 어서 댁으로 가 보시지요.”
“나도 즐거웠으니 그렇게 자책하지는 말게. 약조한 날을 기다리고 있겠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걸음을 돌려 낯설었던 남매와 이별을 고했다. 걸음 뒤로 티격태격하는 남매의 목소리가 천천히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그 상노무 시키들이 저 분들을 왜 괴롭혔는지 알 것 같습니다요.”
“김 갑사의 눈에도 저 남매의 모습이 괴이하게 보이는가?”
말없이 대화를 듣기만 하다 뒤를 따르던 김 갑사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 소리가 귀에 들릴 지경이었다.
“제가 남의 외모를 뭐라 지적할 처지는 아니지 말입죠.”
“자각은 하고 있는가.”
“선비님!”
“농담일세. 나도 나이 들어 보이기로는 자네와 별반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선비님은 그래도 애들이 울며 도망가지는 않는다며 잠깐 콧김을 내뿜던 김 갑사는 말을 이었다.
“북방에서 갑사 일을 하고 있었을 때, 백정들이 모여 사는 고을이나 귀부(歸附)한 야인들이 모여 사는 고을을 들를 일이 몇 번 있었습니다요.”
“저번에 곰 사냥법을 배웠다던 그때 일인가?”
“예. 그들 중에도 머리칼이 붉거나 갈색인 자들이 꽤 있었습니다요. 저 애기씨처럼 황금빛인 사람은 본 적이 없지만 말입죠. 검은 눈동자가 아닌 회색, 푸른색 눈동자도 본 적이 있습죠.”
남매가 소외되었던 이유는 단순히 외모 차별뿐만이 아니었다. 백정은 북방 유목민의 후예라 했던가? 그래서 후세에도 발현되는 이국적인 외모는 조선에서 백정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래서 양반 행색을 한 남매를 상놈들이 놀리고 있었던 게로군.”
“그런 것 같습죠. 이야기를 들어보니 훈련도감에 근무하고 계신 박연 나으리의 자녀분들 같은데, 속 좀 썩이시겠습니다요.”
“자세히 아는 분인가?”
“훈련도감 삼수군(三手軍)에서 근무할 때 항왜와 명국인으로 구성된 외인부대를 지휘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요.”
“눈에 띄는 외모일 테니 모를 수가 없었겠구만.”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걸으면서도 나누는 대화는 오로지 남매와 그 부친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이번 만남으로 끝일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밀려오고 있었다.
***
“……누전독세여성화, 삼월중순도발선? 자네, 글 짓는 재주는 어디서 배웠는가? 난 그걸 가르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걸 말로 설명하라 하시면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별안간 떠올랐다고 대답하는 수밖에요.”
한양으로 상경한 이후 내 하숙방이 된 성이성의 집 별채였다. 불편한 것은 많았으나 자취방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을 낼 수 있는 공간을 얻은 기쁨을 한껏 느낄 수 있는 공간이어서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집주인이 방문을 박차고 쳐들어왔다. 방으로 돌아와 등을 붙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서 빨리 진사시 결과를 보고하라던 전 어사 나리였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었던 것 같네. 고작 소과 진사시에서 그 시구보다 더한 것을 써낼 자가 또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을 못 하겠으니.”
조정에서 잠시 격리되어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터라 그는 어떤 소식에도 굶주려 있는 듯했다. 답안지를 읽어 내려가는 눈에서 불꽃이라도 튈 것 같았다.
집에서도 의관에 한 치 흐트러짐 없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상석에 앉아있던 어사였다. 재구성한 답안지를 또 읽어보면서 무릎을 계속해서 치는 모습은 조금 깨긴 했지만.
‘제가 지은 건 아니지만요. 정약용 선생님! 이젠 후배님인가? 어쨌든 감사합니다!’
어떻게든 지시된 분량을 채우고자 몸부림친 결과인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긴 했다.
경신대기근 전후 조선의 참상을 주제로 삼은 기말과제용 소논문을 죽 써놓고 맺음말 부분에 관리의 횡포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그린 한시를 인용해 넣었던 것이다. 기억이 아직까지 나는 게 용했다.
“여기서 더 주목을 받았다가는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 소과에 입격해서 백패(白牌)를 내려받는 자리가 어떤지 아는가?”
눈앞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조선 시대에 과거 제도라는 게 있었고 이러이러했다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었으나 과거에 합격한 자들이 어떤 의식을 치르는지는 알 리가 없었다.
“방방의(放榜儀)라고 들어본 적도 없는가? 허허, 하긴 그날 입을 앵삼(鶯衫)부터 장만하는 게 맞으려나.”
“소생, 나리께서 하시는 말씀의 반도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모를 만도 하지. 입격자가 아니면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니까. 중요한 건 그걸세, 자네는 그날 창덕궁 인정전 앞뜰에서 치러야 할 행사가 있다는 것이지. 어차피 가면 예조 관원들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될 테지만.”
“예?”
평소였으면 이런 말도 농을 섞어 할 것이 분명한 양반이었다. 허나 앞에 앉은 중년의 얼굴에는 옅은 긴장감까지 감돌고 있었다.
“내 지금까지 그분에 대해 자네에게 너무 가볍게 전하긴 하였으나, 방방의 자리에서 그 생각으로 그분을 대했다가는 잘못하다간 목이 날아갈 수도 있음이야.”
“그분이 정확히 어느 분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입격 증서인 백패를 내려주시는 분이 굉장히 높은 분인가 봅니다?”
어사가 순간 이쪽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진심이었다.
“자네는 총명한 건지, 우둔한 건지…… 이 땅에서 양반의 자격을 부여하실 분이 하늘 아래 또 있단 말인가?”
아. 깨달음에 살짝 입이 벌어졌다.
“곧, 주상 전하를 뵙게 될 것이야.”
※ 작가의 말
1. 안 선비가 표절, 참고한 정약용의 시는 탐진촌요 제 7수입니다.
2. 박연의 아들딸, 요운과 요안의 이름은 실존하는 네덜란드 인명입니다.
요운은 글에서 말씀드렸다시피 Jereon에서, 요안은 여자 이름인 Joan에서 따왔습니다.
3. 백정들의 특이한 외양에 대한 언급은 1899년 조선에 상륙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 ‘W.F.샌즈’가 남긴 기록을 참조했습니다.
「백정은 인상착의가 동양인과는 사뭇 달랐는데 눈동자가 회색이나 푸른색 혹은 갈색이었고, 머리칼은 붉고 안색이 좋았으며 키가 180cm를 넘었으며 그들 가운데에는 얇은 파란 눈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4. 혼혈이라도 금발벽안은 유전 가능합니다. 머리칼 색과 홍채 색은 다인자 유전이라서 단순 우열로 발현 미발현이 정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러시아 혼혈 다문화 장병이 금발벽안의 외모로 투표하는 사진이 화제가 된 적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