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임금이 내린 밀지
“전하께서 성균관에 입학하라 하셨다고?”
“예.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어서 피곤하실 것을 알면서도 찾아왔습니다.”
늦은 밤, 호롱불이 어둠을 흩고 있는 성이성의 사랑채였다. 닷새 만에 겨우 퇴근한 대사간은 눈가가 푹 내려앉아 있었으나 말투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어찌하긴, 그렇다고 어명을 어길 셈도 아닐 것이고.”
“옳으신 말씀입니다만…….”
평소와 말투는 같았으니 눈가 한 구석이 조그맣게 찌그러져 있었다. 오래 같이 다니다보니 이제 이런 것도 보이나 싶었다.
“혹시 무언가 걸리시는 것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개인적으로 성균관에 대해서 안 좋은 기억이 많아서 말일세.”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분명 조선 최고의 엘리트들이 공부하는 공간일 텐데, 저 영감이 저리도 질색하는 표정을 지을 이유가 없었다. 영문을 모를 눈이 크게 떠졌다.
“그 천둥벌거숭이들을 내 입장에서 어찌 좋아하겠나?”
“예?”
“지난번에도 상감께 유소(儒疏)를 올리니 뭐하니 하면서 쓸 데 없는 일거리만 잔뜩 사간원으로 쌓아올리지 않았나. 아, 자네는 몰랐을 일이긴 하군.”
마치 성균관 유생이 눈앞에 있으면 파리채로 때려잡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성균관 유생이 곧 될 자가 앞에 앉아 있는 것은 하나도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정치에 참여하고 싶으면 그 시간에 학문을 닦아 등과나 할 것이지. 에잉. 쯧쯔. 요새 놈들은 말야…….”
순간 ‘꼰’이라는 한 글자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성이성이 계속해서 늘어놓는 불평들은 현직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불평이었으니까. 대사간씩이나 되는 사람 입에서 나올 수준의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 놈들, 세상을 책상머리에서 배운 주제에 고리타분한 말을 빌려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건지. 마음 같아서는 다들 암행어사 나가는 신하들 뒤에 시종원으로 하나씩 딸려 보내봐야 정신을 차리겠지 싶으이.”
“성균관 유생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리 말대로 진짜 세상을 모르는 자들이라면 그 방법도 좋겠지요.”
“그래서 자네처럼 현장을 아는 자들이 필요했던 것이네. 그래서 데리고 상경한 것이고. 그런데 그 신선한 물을 상감께서 썩은 물이 고인 구덩이에 처박으셨으니 머리가 어찌 안 아프겠는가. 가뜩이나 일은 많아 죽겠는데.”
이 양반이 잇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성균관에 대한 적의가 가득했다. 반쯤은 사간원에 쏟아지는 업무로 인한 과로가 원인인 것 같았지만 입을 열 순 없었다.
“그래도 제가 성균관에 들어간다고 해서 남원에서 나리께 배운 것들을 잊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네가 그럴 사람이었으면 한양으로 데리고 올라오지도 않았겠지. 다만 성균관에서의 생활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을 거라는 말일세.”
“예?”
아니다. 앞에 앉은 영감님은 본인에게 닥칠 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염려하고 있었다.
“혹자는 성균관에서 유생들이 세월아 네월아 놀고먹으며 글이나 읽는 줄 알고 있으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네.”
“그럼 어떻단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비혈(鼻血) 쏟아가며 학문에 매진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성균관에 들어간 자들은 권신의 자제들이 대부분이기에 그 안에서도 암투가 벌어지지.”
“나리께서도 겪으신 일입니까? 왜인지 모르게 생생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중간에 때려치운 것이 아닌가. 물론 ‘그 일’ 때문에 상심한 탓이 더 컸지만 말일세.”
과거를 떠올리는 대사간의 얼굴에 불쾌한 빛이 가득했다. 그래도 춘향 일을 떠올리며 더 이상 슬픈 얼굴을 하지는 않게 된 것은 다행이었지만.
“이래서 주목을 받으면 곤란할 수도 있을 것이라 한 것이었는데. 본래는 집에서 학문을 닦게 하고 대과에 출사시킬 생각이었으나, 하필 주상전하의 눈에 들어버렸으니 어명을 무를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래도 기본적으로 학문을 가르치고 인재를 기르는 기관 아닙니까. 그렇게 심할 리가…….”
“자네, 내가 아직 조정이 돌아가는 판국에 대해 가르치지 않아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세.”
이야기만 들어보면 성균관은 그동안 상상하던 캠퍼스 라이프와는 아주 동떨어진 장소가 분명했다. 여유롭게 과거 공부하면서 꿈꾸던 선비 라이프를 즐길 일은 이미 글렀지 싶었다.
“호란 이후로 상감마마의 위엄은 바닥에 떨어졌고, 반정공신들의 기세는 하늘을 뚫을 지경이지.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주상 전하와 세자 저하를 지키려는 신하들은 그리 많지 않다네.”
아. 그래서 임금이 나를 그토록 반겼던 것이었나. 자신의 치세에 염병을 정복한 것은 정치적으로 큰 플러스로 작용할 것이었다. 더구나 그것을 발견해온 자가 자신의 총신인 성이성과 그의 제자라면.
그 이야기를 들으니 짚이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백패를 하사받은 당일에 은자가 가득 든 상자가 관노의 손에 들려 별채로 들어온 것 외에도 하사품이 또 있었다. 어명을 받든 금군이 궤짝 하나를 더 들고 성 영감 집 대문을 두드린 것이다.
‘상감마마께서 하사하신 물목이니 양시 안한수는 어명을 받들라!’
궤짝을 여니 성균관에서 입을 교복인 유건과 심의를 비롯한 의복 일체와 함께 공부에 필요한 물건 일체가 들어있었다. 마치 성균관 입학을 재촉하기라도 하는 것 같은 하사품이었다.
문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단 거지만.
“이것을 봐주시겠습니까?”
“어인 글씨란 말인가? 아…….”
궤짝 맨 위에 곱게 개어져 있던 심의 가슴팍에 꽂혀 있던 종잇장이었다.
매끄러운 종이 위에 적혀있는 것은 단 한 글자, 다스릴 치(治).
힘찬 필체였다.
“백패에 찍혀있던 인장과 같은 것이 찍혀 있으니 어느 분의 의향인지는 알겠습니다. 허나…….”
“자네도 남원에서 어필(御筆)을 몇 번 봤을 테니 눈치챌 만 했지. 그래, 상감마마의 친필이 맞네.”
도대체 무엇을 다스리란 말인가.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로도 모자라 옥새까지 찍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명령을 내려보내는 임금이었다.
“나라라도 다스리라는 뜻이란 말입니까?”
“이걸 보니 내가 입을 열면 안 되는 일이 되었지 싶은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뜻을 알아내는 것도 자네가 해야 할 일이겠지.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자네가 전하의 마음에 든 것은 사실일 것이라는 조언 정도일세.”
성 영감도 방방례 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여러 경로로 들었다고 했다. 그 중 한 경로가 왕일지도. 자신의 대리자 격인 어사로 두 번이나 내보낼 정도면 왕의 신뢰 역시 두터울 것이었다.
빨리 나라를 다스리는 자리로 올라오라는 이야기인가? 영감님이 말한 대로 조정에 임금의 편이 별로 없다면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역사에서 능양군이 실책을 저질렀던 것은 점점 쌓이는 스트레스로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그렇다고 본인의 역사적 실책을 나보고 다스리란 말은 아닐 것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붉은 인주가 선명하게 찍힌 임금의 명령은 계속해서 내게 고민을 더해주고 있었다.
정보를 무엇이라도 끌어내려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지만 대사간은 한사코 입을 열지 않았다. 입가는 딱딱하게 굳어있었으나 눈가에는 장난기가 살짝 서려있었다. 얄미웠다.
“어차피 지금 고민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네. 일단 다른 어명부터 따르는 것이 순서 아니겠는가.”
“성균관 이야기 말씀이십니까?”
“그래. 우선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하게.”
성 영감의 눈에서 금방 장난기가 사라졌다. 분명 그 눈길은 다시 한번 나를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 공신들의 자제들이 연줄을 타고 성균관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자네 같은 시골 출신의 선비가 특혜로 성균관에 입학했다고 하면 그들이 자네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겠는가?”
“아…… 아까 하신 이야기도 있으니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아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고될 것이네. 튀어나온 못은 망치로 때리려는 자가 줄을 잇는 법일세. 양시 쌍장원에 주상 전하의 성은을 입은 자네는 튀어나와도 너무 튀어나와 버렸어.”
일단 내 처지부터 다스려야 했다. 이거, 진짜 X된 상황 같았다.
현대에서 140학점을 꾸역꾸역 채웠는데 조선 시대까지 와서 또 대학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푸념할 때가 아니었다.
***
“핫핫핫…… 소과 양시에서 장원 두 자리 모두를 차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안 양시님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북촌에서도 외진 곳에 위치한 작은 집 사랑채였다. 임금이 던진 종이쪼가리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남매와 약속한 날은 다가왔고 도령은 시간에 맞춰 성 영감 댁 대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초대받은 집에 막 발을 들여놓은 차였다. 앉아있는 집주인이 걸걸한 목소리로 안부를 묻고 있었다. 그 발음은 조금 어눌했지만,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티 나지 않았다.
“죄송한데 양시라는 호칭, 너무 주제넘은 것 같아서 불편합니다. 조금 편하게 불러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습니까? 나름대로 신경을 쓴 것이었는데…… 그럼 성균관에 들어가신다니 유생님이라 부르겠습니다. 핫핫핫.”
“양시라고 불릴 때마다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을 지경입니다. 감사합니다.”
너무나 불편한 별명이었다. 양시라 부르며 나를 우러러보는 태도들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감이 관악구 아래 그 동네를 떠올리게 하기도 했고.
앞으로 수도 없이 이렇게 호칭을 고쳐가야 할 것이었지만, 일단은 마주앉은 사람이 흔쾌히 고쳐주어서 다행이었다. 선원 출신이었다던가? 거칠게 생긴 백인의 외모 값을 하는지 그의 성격은 호탕했다.
“그래서 전하의 명을 받아 성균관에 들어가시게 되었다. 이 말씀입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초관(哨官, 훈련도감 종9품) 어른, 이젠 말씀 낮추시지요. 저는 품계도 없는 일개 서생에 불과합니다.”
“아니지요. 아니지요. 그래도 제 아들딸의 은인이시지 않습니까? 천천히 낮추겠습니다. 핫핫.”
앞에 김이 오르는 큰 냄비 하나를 두고 대화를 나누는 자의 눈은 새파랗고 머리칼은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타기라도 한 모양인지 얼굴은 검게 그을리고 흉터도 몇 개인가 있었지만, 입에서 나오는 괄괄한 조선말과 그의 외모가 도저히 어울리지 않아 몇 번이고 고개를 흔들어야 했다.
‘사략선 선원 출신이랬나? 완전 이거 금발 태닝 양…… 아니다. 뭔 생각이야.’
눈만 감으면 조선인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그의 조선말은 유창했다. 아, 조선인 맞지? 참.
“유생 양반, 무슨 생각을 그리 합니까?”
“아닙니다. 앞에 놓인 솥에서 나는 냄새가 오랜만에, 아니 처음 맡아보는 듯하여…….”
말을 돌리기 위한 핑계였지만 냄비에서 풍겨 나오는 향이 계속해서 마음을 끌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조선에 떨어진 지도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이 땅에서 다시 맡을 수 있을 줄 몰랐던 냄새가 눈앞에서 풍기고 있었으니.
“아, 이것 말입니까? 일단 맛부터 보오. 내 고향의 요리라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박연이 직접 국자를 들어 나눠준 요리의 겉모습은 국물 있는 갈비찜과 비슷했다. 덕분에 안심하고 입으로 가져갈 수 있었으나 혀에 느껴지는 맛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가 방금 말을 낮추어 벽을 허물었듯이 기름진 맛이 고기를 스르르 허물고 있었다.
‘이거, 비프스튜잖아?’
“핫핫. 조선에서 나는 채소가 하란타(阿蘭陀, 네덜란드)의 것과 다르고 향신료를 구하기 어려워 정확히 같지는 않다오. 그래도 내겐 향수를 느끼게 해 주는 요리지. 어떠하오?”
“아주 맛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들어간 것은…….”
“수유(酥油)라 하오. 본래는 주상 전하와 늙으신 대감들을 위한 약으로 만들어지는 것인데, 전하께서 망향의 한을 달래라고 가끔 내려주시니 성은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라고나 할까.”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냄새의 정체는 버터였다. 귀할 만도 했다.
고향의 음식을 앞에 둔 순간만큼은 박연이 아닌 벨테브레이로 돌아가 있는 남자였다. 고향 음식을 맛있어하는 나를 보고 신을 내는 모습을 보니 괜히 호감이 갔다.
“그나저나 잘 드시는 것을 보니 놀랍구만. 조선 사람, 아니지. 우리나라 사람 입맛에는 많이 기름질 텐데?”
“정말로 맛있어서 그렇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한 그릇 더 먹고 싶을 지경입니다.”
“더 드시오! 더! 유생 양반은 정말로 선입견이 없는 분 같소. 조선 땅에서 유생 양반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지.”
한때는 더 기름진 음식을 달고 살았었다. 버터 들어간 음식이 낯설지도 않았으니 맛있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했지만 앞에 앉아있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다르게 와 닿는 모양이었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는 것이 역력했던 박연의 표정은 완전히 풀어져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이 조선에 드물긴 한 모양이었다.
“아버지! 저도요! 저도!”
낯선 목소리가 등 뒤의 문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집주인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빼닮은 소녀가 금빛 댕기 머리를 휘날리며 서 있었다. 그때 본 장옷 속의 소녀였다.
“요안! 손님이 와 계시다고 하지 않았느냐. 평소에 집에서 하던 대로 하면 안 된다고 미리 일렀을 텐데?”
“하지만, 저 선비님은 그럴 분이 아니신걸요. 저랑 요운을 보고 이상한 눈빛을 띠지 않는 분은 처음이었어요.”
“요운이라고 하지 말고 오라비라고 부르라고 하지 않았느냐? 저 철딱서니…….”
그 괄괄한 박연이 이마를 짚었다. 왠지 처음 만난 그 날 장옷까지 입고 빨랫바구니를 들고 오빠를 마중나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 왈가닥이 집 안에 얌전히 있고 싶었을 리 없으니 오빠 핑계를 대고 바깥 구경을 한 것이 뻔했다.
“미안하외다.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켜서 못 볼 꼴을 보였구만.”
“거짓말! 어머니는 매번 저보고 아버님을 닮았다 하시는 걸요?”
“요안!”
“나리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 같아 보기가 좋습니다. 괜찮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보이오? 다행이군.”
다른 양반이 보았다면 상종 못할 상놈의 집안이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도 할 말이 없을 일이었을까. 양반치고는 험하게 생긴 박연의 얼굴에는 안도의 감정이 가득했다. 아마 그가 자랐던 네덜란드의 가정 분위기도 이랬으려나.
“요안이라 하였니. 먹고 싶으면 와서 먹으려무나.”
“잘 먹겠습니다!”
“이제 나이 열둘이면 안팎을 가릴 줄 알아야 할 텐데. 아직도 저리 천방지축이니…….”
“예?”
녀석은 어디서 꺼냈는지 제 숟가락을 들고 와 바람처럼 내 옆에 앉았다. 천천히 노란 수염을 쓰다듬는 박연의 입꼬리가 살짝 굳어 있었다.
‘열두 살? 키도 크고 풍기는 분위기를 보면 십대 중반은 족히 되어 보였는데?’
“내가 제주에 표착하고 얼마 안 있어 한날한시에 얻은 자식들이라오. 우리나라 사람 눈에는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것 같으나 틀림없는 사실이지.”
“괜찮습니다. 저도 열아홉이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퍽 늙어보인다 하였습니다. 주상 전하께서도 확인해주신 것이니 확실할 것입니다.”
불만이 가득해 보였던 박연의 얼굴에 웃음이 차올랐다. 예의를 차리지 않았더라면 박장대소라도 할 것 같았다.
내 한 몸 희생해 분위기를 풀고 나니 기분이 머쓱했다. 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냠냠거리며 비프스튜를 맛나게 먹고 있는 요안의 얼굴을 보니 얼핏 어린 기운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맞아요. 맞아. 저는 선비님, 덩치까지 크시기에 나이가 더 드신 줄 알았어요.”
“요안! 어허!”
“어린 마음에 하는 말입니다. 순수한 눈으로 본 것이니 그것이 맞겠지요.”
이미 얼굴이 겉늙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수차례 들은 얘기라 내 멘탈은 멀쩡했다. 옆에 앉아 냠냠거리고 있는 꼬맹이가 조금 얄밉긴 했지만. 어느새 작지 않은 스튜 그릇은 바닥을 드러내가고 있었다.
“요안, 너도 나이에 비해선 몸은 큰 편이 아니냐? 몸이 그만큼 컸으면 마음도 같이 커야지. 옆방에서 네 오라비나 불러 오거라.”
“네에.”
금방 비워낸 스튜 그릇과 다른 설거지거리를 모아들더니 요안은 금방 방을 튀어나갔다. 오빠의 이름을 길게 부르며 용건을 말하는 것이 사랑방까지 다 들렸다. 박연은 다시 이마를 짚었다.
“정말로 괜찮으니 그렇게 마음 안 쓰셔도 됩니다.”
“저런 말괄량이를 누가 데려갈지…… 안 그래도 혼처를 구하기 어려울 텐데 걱정이 태산같다오.”
“벌써요? 이제 열두 살 아닙니까?”
“그런 반응을 보니 유생 양반도 아직 혼인을 못 한 모양이오? 여자 나이 열다섯이 넘어가면 혼기 아니오. 내 조선 땅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그것은 안다오. 몇 년 안 있으면 요안도 남 일이 아니게 될 텐데. 핫핫.”
조금 이해가 갔다. 여인의 미덕은 오로지 지아비에 대한 순종(順從)이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외모까지 남들과 크게 달랐으니 조선 시대를 기준으로 판단해보면 박연의 걱정도 근거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 시대의 미적 기준이 현대와 그렇게 차이가 있었나? 방금 나이를 셈해보며 구석구석 뜯어봤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장옷으로 늘 가리고 다녀서 그런지 희다 못해 투명한 피부, 고양이처럼 갸름하고 푸른 눈, 오똑한 콧날, 도톰한 분홍색 입술. 지금은 아이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으나 자라나면 미인이 될 것 같았다.
‘상대를 구하기가 그렇게 힘드려나? 곧 노총각 취급 받을 처지에 남 걱정할 때는 아니지만.’
뭐, 그래도 아들 쪽은 외모건 예의건 조선 사람에 가까우니 이쪽은 혼사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
“아버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안 그래도 네가 얘기했던 일에 대해서 유생님과 의논해보려고 불렀다.”
잠시 후, 요운이 의관을 차려입고 사랑방 문지방을 넘어왔다. 편한 옷차림이 아니었다.
머뭇거리던 아이는 박연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잔뜩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던 푸른 눈의 사내는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사실, 염치불구하고 부탁드릴 일이 하나 있어서 저희 집에 초대했다오. 유생 양반,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소?”
※ 작가의 말
1. 조선시대에 수유라고 불린 버터는 실제로 계속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보통 약용이나 보신용으로 쓰긴 했지만 왕실로 꾸준히 상납해왔죠. 허나 우유 자체가 흔한 동네가 아니었으니 민간에서 구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2. 네덜란드 요리에 문외한인 안 선생 입에는 박연이 대접한 요리가 비프 스튜로 느껴졌겠지만, 플랑드르식 국물요리인 stoofvlees을 박연이 조선식으로 어레인지한 요리였을 겁니다. 버터, 쇠고기, 술, 식초가 들어가는 요리인데 조선에서 만들 수 있는 고향요리는 이 정도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