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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3화 (23/298)

23화. 성균관 새내기와 혼밥

“사자소학. 부생아신이고, 모국오신이니라. 복의회아하고…….”

“요운아. 첫날부터 미안하지만 오늘은 과제부터 하다가 궁금한 것만 물으면 안 되겠느냐.”

“몸이라도 안 좋으십니까? 스승님?”

“그래. 성균관의 신방례가 조금 독하더구나.”

미성년자들 앞에서 숙취로 머리가 아프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소학의 첫 구절을 읽는 도령의 목소리에 머릿속이 꽝꽝 울렸다. 요운이 너는 대학가거든 이러지 마라. 제발. 술 주면 꼭 취한 척하고 빼고.

“선생님, 입에서 술 냄새나요!”

“요안이 너도 오빠처럼 논어 첫 장 펼쳐 들고 필사부터 하거라. 심혈을 다해 옮겨 쓴 후 스무 번쯤 읽어보고 뜻이 통하지 않으면 그때 질문을 하면 된다.”

“으……. 주정뱅이! 아버지가 늦게 오실 때랑 똑같은 냄새!”

이 말괄량이 같으니라고. 멀쩡했으면 한 대 쥐어박고 싶었으나, 혀를 한 번 내밀더니 금방 쥐어준 세필로 논어를 적어 내려가는 모습을 보니 그럴 생각도 사라졌다.

자왈,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눈을 빛내며 정성을 다해 한문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혼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런 녀석들만 있었으면 과외가 더 할 맛이 났을 텐데.’

아버지에게 장담했던 대로 해서체를 정갈하게 써 내려가는 요안의 붓끝은 야무졌다. 몰래 연습이라도 하고 있었던 건가. 글씨 하나만은 오빠보다 나아 보였다.

“선생님, 제 말이 맞죠? 제가 요운보다 글씨는 잘 쓴다니까요?”

“시끄러워. 공부에 방해되잖아.”

입으로는 핀잔을 주는 요운의 손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글씨에 묻어나는 힘은 동생보다 나아보이기도 했다.

‘성균관 유생 놈들, 그놈들보다 내 제자들이 낫네. 학문에 열중해야 하는 놈들이 잿밥에만 관심이 있으니…….’

신방례 다음날 눈을 뜬 곳은 향관청, 문묘에 제사를 올리는 제관들이 거처하던 장소였다. 얼빠진 신입생에 능숙하게 대처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다.

숙취에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들고 낯선 성균관에서의 하루를 보내야 했다. 다행히 호탕하게 술사발을 비우던 모습을 보고 감동한 수복 하나가 도와주어 수업에 늦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문제는 숙취가 아니었다.

‘그 망할 새끼들, 도대체 어디까지 썩은 뿌리가 뻗쳐있는 거야.’

대사간의 말이 맞았다. 신입을 테스트하는 교관의 질문을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겨우 넘기기도 힘들었는데, 구재(九齋)로 나누어져 듣는 오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한 무리의 유생들이 내 앞을 막았다.

‘어제 동장의님에게 큰 실례를 했다면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걸 때는 통성명부터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닙니까? 누구십니까?’

‘네놈에게 그걸 알려줄 필요가 있나? 이 새끼가. 어디 주젤 모르고 나대?’

동장의 놈은 척신 자제들로 이루어진 패거리의 우두머리라도 되는 듯했다. 그러나 유생답지 않게 험한 말을 뱉어내던 그놈들이 나를 둘러싼 이유는 동장의에게 수모를 안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디 시골 촌놈 주제에 전하 눈에 들었다고 까불어? 그 입, 가볍게 놀렸다가는 성균관에서 나가게 될 줄 알아!’

임금을 알현한 자리에서 내 고발 때문에 기껏 부정행위로 받은 백패를 몰수당하고 과거 응시까지 제한받은 자들의 원한일까? 그자들의 친인척임이 분명한 그놈들이 순식간에 나를 둘러싸고 갈겨댄 조인트에 정강이가 고통으로 달아올랐다.

‘이 새끼 봐라. 비명 하나 안 지르네. 퉤.’

그놈들이 자리를 뜨며 날아든 가래침이 심의 끝자락에 묻었다. 임금이 내려준 심의였다. 인조에게 그렇게 큰 충성심은 없었으나 조정의 현 상태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워져 왔다.

어명도 임금의 하사품도 척신의 자제들 앞에서는 큰 의미가 없었다.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기도 했지만 애비들의 권위로 이 정도는 무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뻔했다. 아니면 소문이 임금에게 새어나가기 전에 차단할 것이라 생각했든지.

인조가 내린 한 글자의 의미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어느새 요안이 얼굴을 눈앞에 빤히 들이밀고 있었다. 깜짝 놀라 턱을 괴고 있던 책상에서 몸이 뒤로 벌떡 젖혀졌다. 얼굴에 술기운이 다시 오르는 듯했다.

“무…… 무슨 일이냐?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고.”

“계속 말씀을 드려도 생각에 잠겨 있으시니 그랬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더니. 일반적인 조선 가정과 다른 분위기에서 자라서 그런가, 녀석은 남녀의 경계를 쉽게도 넘어 다녔다. 이게 다 딸내미라면 껌뻑 죽는 박연 탓일 것이다.

“그래. 시킨 것은 다 했느냐?”

“그럼요. 요운은 아예 연습지에 초서체도 연습하고 있던걸요.”

눈살을 약간 찌푸린 채 먹으로 거의 대부분이 검게 물들어 버린 연습지에 한자를 흘려 적는 도령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해서체는 요안이 낫더니, 초서체는 요운이 훨씬 나았다. 녀석 역시 말하지 않아도 그사이에 연습한 것이 분명했다.

“그럼 다음 문장도 필사가 끝난 모양이구나. 요운이 너도 그쯤하고 자리를 잡거라.”

“예. 말씀만 하십시오. 스승님.”

“유붕자원방래하면 불역락호아. 여기서 붕이라는 것은 단순한 동무가 아니다. 뜻을 같이하는 자로, 깊은 관계인 사람을 의미한다.”

과외를 받아들일 때 맹자가 한 말을 언급했었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사람의 세 가지 기쁨 중 하나라. 그 당시에는 박연의 부담을 줄여주려고 한 말이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그 문장이 몸으로 깨달아지고 있었다.

“그럼 깊은 관계인 친우가 찾아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라고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까?”

“정답이다. 공자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에게 고기 한 포만 가져와도 가르침을…….”

그 와중에 친우라는 단어를 연신 되뇌이는 요안의 작은 입술이 눈을 스쳐 갔다. 질문을 하고 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요운의 손은 여전히 한시도 쉬지 않고 있었다.

성균관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녀석들이 줄 기쁨이 있으면 왠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성균관에서 겪게 될 일을 버텨줄 버팀목은 하나가 아니었다. 논어 〈학이편〉의 두 번째 구절은 신비하게도 다음 날에 일어날 일을 암시해주고 있었다.

***

‘이걸 조선 시대에까지 와서 할 줄은 몰랐는데…….’

성균관에서 먹는 두 번째 점심은 처량했다.

밥이나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혼밥이라니.

독상을 받는 게 일반적인 시대였고 밥을 먹으면서 하하호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이 시절에도 흔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단체 식당에서도 내 주위에 아무도 앉지 않는 것까지 권장되진 않았을 테지.

동장의의 위세가 대단하다고는 하나 그래도 이 정도로 따돌림 당할 거리였나? 그 생각을 하며 고봉밥에 숟가락을 푹 꽂는데 뒤에서 이상한 대화가 들려왔다.

“저놈, 신방례에서 깽판 친 그놈 아닌가?”

“쉿, 피해 가세. 언제 또 입에서 무엇을 토할 줄 모르네.”

현대건 조선 시대건 술을 진탕 먹을 일이 없어 모르고 있었지만 내 술버릇은 좋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어사 출두 때 그렇게 날뛸 수 있었던 것도 술기운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아니, 그게 내 잘못이냐고. 새내기 환영식에서 기를 밟아놓겠다고 독한 술을 말 그대로 목구멍에 들이부은 놈들 잘못 아냐?

팍.

괜한 김치에 젓가락이 화풀이를 했다. 뒤에서 웅성거리는 놈들이 내 앞에 있었으면 이 허여멀건한 짠지를 찢어놓듯이 경을 치게 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혼밥충의 망상에 불과했다.

불붙은 속을 달래려 된장국을 크게 몇 술 떠 입으로 가져갔다. 갓 말려낸 무청이라도 넣었는지 시원한 국물 덕에 그나마 마음이 달래지고 있었다.

남원에서 받았던 밥상을 생각하면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정갈한 밥맛이 그나마 내 힘을 돋우는 중이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혼밥은 별거 아니긴 하지.’

혼자 밥 먹는 건 익숙했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이 당연시되던 새내기 때면 모를까. 군대에 다녀오고 각자도생이 당연시된 복학생 시절에는 내가 아니라도 다들 하루에 한 번씩은 하던 처량한 짓거리였다.

‘등신들……. 쓸데없는 데 힘이나 빼고. 그럴 힘으로 공부나 할 것이지. 쯧쯧.’

공부하라고 들어왔을 성균관에서 웬 패거리 정치질이란 말인가. 그러니 나라 꼴이 이 모양 이 꼴이지. 내가 동경하던 선비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인 놈들이었다. 끌끌. 나도 모르게 혀가 퉁겨졌다.

‘그래도 토악질을 그렇게 해댄 건 좀 심하긴 했나?’

하긴, 어딘가에는 멀쩡한 선비도 있겠지. 정치질에 질린 그런 선비 하나쯤은 내게 접근할 만했는데 토사물을 흩뿌리고 다녔던 일이 내 첫인상을 망가뜨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괜한 반성으로 점심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있었을 때였다.

“혹시 안 양시 아닙니까?”

기품있는 낮은 목소리가 뒤통수를 울렸다. 신방례 자리에서 딱 한 번 들었지만 너무나 훌륭한 동굴 목소리라 잊을 수가 없는 자였다.

그날 사발 반을 비워내고 장작개비에 몸을 던졌던 내 동기였다. 그가 비복 한 명을 대동하고 옆에 서 있었다. 비복이 밥보자기와 소반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이 근처에 앉기라도 할 작정이었다.

“누구셨더라……. 저희 통성명을 하였던가요?”

“그 난리 통에 할 수 있었을 리가요. 다만 안 양시의 명성은 이미 온 한양에 날리고 있으니, 통성명을 하지 않았다 하여도 제가 안 양시를 아는 것은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목소리와 어울리게 입에 담는 말에도 기품이 있었다. 동기는 주위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다는 듯 심의 자락을 펼치더니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옆을 따르던 비복이 급히 소반과 밥보자기를 펼치고 사기그릇의 뚜껑을 열어주었다.

“김좌명입니다. 본관은 청풍이고, 편히 부르시려면 일정(一正)이라 부르시면 되겠습니다.”

“안한수입니다. 본관은 죽산이고…… 아직 자(字)나 호(號)는 없습니다. 이름을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선비 된 자로서 어찌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겠습니까. 당분간 안 양시로 부르겠습니다. 아직 제 자를 부르기 애매하다면 김 생원이라 부르십시오.”

경기도의 그 지명은 당분간 피할 수 없을 모양이었다. 유생 천지인 여기서 유생이라 부르게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옆에 앉은 동기처럼 빨리 별호라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저 같은 자와 어울리면 김 생원도 해를 입을지 모릅니다.”

“애초에 그런 까마귀 무리와는 어울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날 신방례 자리에서 안 양시가 보여준 기개에 저는 감동했습니다.”

“예?”

“선비라면 무릇 윗자리의 압박에도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인데, 그 자리에서의 안 양시는 훌륭한 선비 그 자체였으니까요.”

갑작스러운 칭찬에 멋쩍어 뺨을 살짝 긁었으나 김좌명은 그것에 동의한다는 듯이 슬쩍 웃음기를 띠었을 뿐이었다.

“그냥 남들보다 조금 지기 싫어하고 근성이 있을 뿐입니다.”

“근성? 중이나 천민들에게 쓰일만한 안 좋은 표현을 왜 스스로에게 쓰십니까?”

“아…… 제 말버릇입니다. 나무가 땅에 뿌리를 단단히 박고 버티듯 끈기와 의지가 필요할 때 저도 모르게 쓰곤 하는 개인적인 표현이지요.”

근성…… 근성…… 몇 번이고 그 단어를 되뇌이는 김좌명을 보니 그 단어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드는 듯했다.

“정했습니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양시라는 호칭을 들을 때마다 움찔거리는 낯빛을 보아하니 퍽 겸손하신 선비인 것 같은데, 호칭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게지요? 제가 별호를 하나 올려도 되겠습니까?”

“감히 저 따위에게 그런 수고를 들여 주시면 감사할 일입니다만……. 그걸 벌써 생각하신 겁니까?”

역시 소과에 통과해 성균관에 들어온 인재는 이쪽 발상도 빠른가. 전혀 뜻밖의 선물에 감동해 있었을 때였다.

“안 양시가 말한 근성이라는 표현, 저도 마음에 드는데, 그것을 조금 변형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예? 무엇을 말씀이신지…….”

“그대로 쓰면 원래 단어와 부딪쳐 어감이 좋지 않으니, 성근이라 부르면 좋을 듯합니다.”

푸웁!

입으로 들어가던 밥숟가락에서 밥알이 온통 튀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얼이 빠져 있는데 앞에 앉은 이는 그저 슬며시 입가에 웃음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굉장히 탐탁지 않은 선물이었으나 그걸 전해준 자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왠지 좋은 예감이 들고 있었다.

※ 작가의 말

작중에 언급된 논어 학이편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不慍, 不亦君子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불온, 불역군자호.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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