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궐에서 나온 손님
관포지교, 수어지교, 문경지교, 지란지교, 막역지우, 죽마고우, 백아절현…….
벗 사이의 교분을 가리키는 고사성어가 이토록 넘쳐나는 것을 보면 친구를 사귀는 즐거움은 옛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늘의 내 기분이 딱 그것이었다.
처음으로 보는 선비다운 선비였다. 아, 전 어사 나리도 분명 좋은 선비의 귀감이었지만 그분은 예외로 치고.
대화에서 묻어나는 깊은 학식과 기품 있는 행동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든 것은 양반답지 않은 소탈함이었다. 애초에 하굣길에서 농담을 섞을 때부터 느꼈던 것이었지만.
“여기가 괜찮겠군. 어떤가?”
그렇게 친교를 다지자며 끌려들어간 곳은 주막이었다. 풍겨오는 술 향기가 감미로우니 술도 분명 맛있을 것이라며 괜한 변명을 늘어놓는 좌명이었다.
이용하는 사람들의 수준을 보니 사실 체면 차리는 양반들이 들락거릴 장소는 아니지 싶었으나 좌명은 그것을 개의치 않는 듯했다.
“……성근,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사실 퇴관 처분을 받아도 별로 억울하지 않을 지경일세.”
술 한 모금을 입에서 굴려보더니 좌명이 꺼낸 말이었다. 입술만 적시듯이 마시고 있었는데도 잘생긴 얼굴이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떻게 들어온 성균관인데 벌써 퇴관을 입에 올리면 쓰나.”
“우리 관찰사 어르신도 성균관 재임(齋任, 학생회)로 있을 때 사고를 치고 낙향하신 분인데, 참된 선비라면 본인의 허물을 잊고 내 허물을 들추진 못하시겠지.”
그의 아버지는 성균관을 그만둔 후 숯을 구워 팔고, 약초를 캐고, 밭을 갈아 백성들처럼 몇 년을 먹고살았다고 했다. 역사에 남은 김육 부자의 개혁적인 행보는 거기서 유래했을지도.
“아무리 그래도 부친께서도 당신의 오점을 자식에게 대물림하고 싶으시진 않으시지 않겠나.”
“핫핫. 자네 말이 맞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장가를 늦게 드신 것이 서러우셨는지 나는 철이 들기 전부터 이미 지어미감을 짝지어 놓으셨더라고.”
누님인 줄 알았던 사람과 사모관대, 활옷을 나눠 입을 사이가 될 줄을 어찌 알았겠냐며 한탄하던 좌명이었다. 동장의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던 표정이 무너진 것은 조금 놀라웠다.
“나도 누이처럼 철이 일찍 들었으면 혼사를 치르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이었는데, 오히려 대를 잇지 않아도 된다는 핑계로 부친께서 녀석을 더 오냐오냐해 주는 것이 마음에 안 드네.”
“혼인 생활에 불만이 많은 모양이구만, 일정 자네.”
“그건 아니지만…….”
잠시 어두운 얼굴로 말을 잊었던 좌명은 결국 해보면 안다는 말로 대화를 얼버무리고 말았다.
왜 내 주위의 유부남들은 다 이 모양인지. 김 갑사의 텁석부리 얼굴이 문득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좌명과 술잔을 기울였다. 주막을 나선 것은 날이 꽤나 어둑어둑해져 있을 무렵이었다.
알콜에 약한 좌명의 페이스에 맞추느라 술잔을 천천히 비운 대신 속 깊은 대화가 물 흐르듯 오간 자리였다. 덕분에 얼마 마시지 않은 술 대신 이야기에 흠뻑 취했고.
다만 취한 것이 나만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둘이서 술 한 병을 비운 것이 고작이었는데 녀석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으니까.
“실례하겠습니다요. 저희 서방님이 술에 약하셔서…….”
주막 안에서 묘한 시선이 느껴지더라니, 좌명의 집에서 붙인 노비인 모양이었다. 성균관 간 첫날부터 술에 꼴아 왔으니 그러는 것도 당연한가.
“이거 놓거라. 삼돌아, 나는 멀쩡하대도.”
“멀쩡하지 않으신뎁쇼. 작은 마님께서 지시하신 일이니 얌전히 가십시다요, 서방님.”
“또 안사람이 붙여서 온 것이냐? 하…….”
말은 귀찮다는 듯 한숨을 몰아쉬는 좌명이었다. 그렇게 짧은 작별인사를 나누고는 미묘하게 흔들거리며 걸어가는 좌명을 배웅하고 성 영감 댁에 돌아온 것이 지금이었다.
좌명처럼 취하기에는 한참 모자란 알콜 섭취량이었으나 등짝에 느껴지는 온돌의 노곤노곤함이 의식을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성 영감 댁 대문을 누군가가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는 이미 한참 전에 진지 오래였고, 통행금지를 알리는 파루는 하숙방에 들어온 직후에 울린 마당이었다. 이 시간에 누가?
도포의 옷고름을 매고 문밖으로 나서자 당황한 얼굴을 한 노비가 나를 맞았다. 아마 나를 부르러 뛰어온 듯했다. 소란스러운 이유를 묻자 자신도 모르겠다며 영문을 몰라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으리! 이게 무슨 일입니까요!”
“큰일 아니니 소란 떨지 말게. 아, 왔구만.”
노비를 따라 별채와 대문을 연결하는 쪽문을 연 순간이었다. 마당쇠가 내금위장에게 무언가를 받아들고 읽고 있는 중년 사내에게 황망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환도를 차고 화려한 복장을 한 금군들이 대문으로 들이닥쳤을 때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사람은 조선에 없을 것이었으니.
“이 금군들은 대체…….”
“오랜만에 퇴청했는데 쉬지도 못하겠구만. 덕분에 말일세.”
“‘덕분에’라니요?”
“별일 아니네. 나와 함께 가주어야 하는 곳이 있음이야.”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는 집주인, 성이성이었다.
허나 얼굴에 짜증이 묻어있을 뿐, 당황하지 않는 모습을 보아하니 마당쇠에게 확답한 말이 사실이지 싶어 놀란 가슴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제가 말입니까? 어디를 가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금군들이 온 장소로. 평소 같으면 농담이라도 했겠으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닐세.”
무슨 일이지?
금군들이 데리러 온 대상은 나였지 싶었다. 피로가 묻어나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사랑방으로 들어간 성 영감은 금방 관복으로 환복하고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 등쌀에 얼굴은 피로로 한 겹 더 찌들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내 탓에 쉬지도 못하는 양반을 또 야근을 시켜버린 모양이었다. 죄책감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날이 샐 때까지 뭐라 하고 싶으나 낭비할 시간이 없네. 전하께서 자네를 부르셨으니.”
“예?”
왕이? 이 시간에 갑자기 왜?
눈이 퀭하게 내려앉은 성 영감은 그렇게 하품을 늘어지게 한 번 하더니 말을 이었다.
꼬장꼬장한 말투였다.
“속히 입궁해야 할 것이야.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눌 시간도 아깝네.”
“헌데 나리는 왜 관복을 차려입고 나오신 것입니까?”
“그럼 자네가 전하 앞에 서게 생겼는데 홀로 보내란 말인가? 저번에도 사고를 쳤는데 또 그런 일이 벌어지게 놔둘 수는 없지. 가세.”
저번이라 함은 방방의 자리에서 눈치 없었던 그 일을 가리키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성균관에도 끌려 들어 가 괜한 고생을 했으나 그 일로 곤란했던 것은 나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금군에게 둘러싸여 팔자도 없는 밤의 한양 거리를 구경하게 되었다. 왕이 있는 창덕궁까지 호위 아닌 호위를 받으며 걷는 동안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봤으나 생각나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다스릴 치(治)가 적혀있던 종이 한 조각.
하지만 아직 그 종이쪼가리를 받고나서 무언가 크게 한 일은 없을 터였다. 왕의 의도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단련된 금군의 발걸음은 빨랐다. 내 앞에서 한 걸음 앞서 걷는 성 영감의 빠르기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그것들을 따라가느라 헉헉거리고 있는 것은 나뿐.
“이 사람, 남원에서 볼 때는 튼튼한 줄 알았더니, 상경한 이후로 그새 나태해진 것인가?”
“아닙니다. 나리가 빠르신…… 헉헉…….”
“안 되겠네. 오늘 저녁부터라도 당장 단련을 시켜야지. 그 체력으로 어찌 출사해서 나랏일을 돌볼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니 대사간에 임명된 이후로는 집에 돌아온 날보다 입번(入番, 야근)한 날이 더 많은 성 영감이었다. 끝이 없는 체력은 남원에서나 한양에서나 다를 바가 없었다.
“말 안 해도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겠구만. 내가 강한 게 아니라 자네가 약한 것일세.”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닌가. 이번에도 잔뜩 단련해줄 테니 기대하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이 허공을 갈랐다.
한 달에 이틀을 빼면 월화수목금토일 오전 오후를 몽땅 성균관 공부에 쏟아붓고, 요안 남매를 과외하며 집에 돌아오면 참고서까지 따로 쓰고 있던 것이 최근의 하루였다.
‘그러다 저 진짜로 죽는다고요!’
이 생활 덕에 몸을 둘로 쪼개도 모자랄 지경이었지만 그걸 봐줄 대사간 영감도 아니라는 사실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쪽으로는 자비가 없는 양반이었다.
성근이란 별호는 이 양반에게 더 어울리는 것일 텐데.
“지금 낯에 띤 빛은 후회의 빛이렷다?”
“……헉헉…… 그럴 리가요…….”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이미 자네에겐 내게 마패를 받아들었던 순간부터 선택권이 없었다네. 그것만 알아두게.”
“예?”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농담이 아니었는지 대사간 영감의 목소리는 한껏 낮아져 있었다. 갑자기 무언가에 코가 꿰인 기분이었다.
“혹시 저를 한양으로 데려오신 것에 어떤 목적이라도 있으셨던 것입니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자네, 나와 남원에서 서계를 정리할 때 내가 자네를 시험하는 중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나?”
처음으로 서류에 파묻혔던 기간을 어떻게 잊겠는가. 유 서리가 신출귀몰한 일솜씨를 먼지 자욱한 창고에서 발휘하지 않았다면 끔찍했을 시간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가혹한 일정이었고.
그걸 겪고도 조선의 신하로 갈려 나갈 것을 각오했기 때문에 지금의 생활이 가능한 것이었다. 살짝 후회가 든 적이 없진 않았지만 아무튼.
“예.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한양으로 데려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계셨던 것이로군요.”
“그래, 자네 같은 인재를 만나면 누구나 탐을 내겠지.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네. 허나…….”
탁. 타탁. 금군들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멀리 횃불을 밝히고 있는 궁궐의 대문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일단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겠구만. 자네가 원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굴레를 씌워버렸으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미 자네는 우리 당파의 일원으로 인식되는 모양일세. 전하께서 둘을 같이 부른 이유도 그 때문인 듯하이.”
대사간이 미안해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남원에서 상경을 결심했던 이유부터 이 사람에게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급제하고 조정에 들어가더라도 성 영감 라인을 탈 것은 이미 각오한 바였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나리가 어사이던 시절부터 그러리라고 마음먹은 바였습니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해주는 것은 고마우나, 단순히 끈 떨어진 시골 선비로 여겨졌던 지금까지 겪었던 고생보다 더 큰 고생을 하게 될지도 모르네. 그것이 미안한 것이야.”
더 힘들어져봐야 얼마나 더 힘들어질까 싶었다. 이미 동장의에게 뻗대고 찍힌 마당이 아닌가.
계속 빠른 걸음을 유지하느라 숨이 턱까지 차올랐으나 애써 성 영감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았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웃다니, 자네는 정말 그릇이 큰 모양이구만. 힘을 보태기로 각오가 서 있다고 해석해도 좋겠는가?”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부터 본격적인 당파싸움에 말려들게 된 것은 분명 부담되는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뭐 어쩔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그 싸가지 없는 금수저들 편을 들 마음은 절대 없었으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성 영감 역시 마음의 짐을 덜기라도 한 것일까. 그가 가볍게 웃음 짓는 것이 어스름한 밤공기 사이로 보였다.
“좋네. 자네가 속할 곳이 어떤 곳인지 들어보겠는가?”
설명을 듣고 나서야 조정의 구도를 알 것 같았다. 이미 조금은 알고 있던 사실이었긴 했다.
성이성은 주화파였다. 왕이 남한산성에 갇혔을 때, 화의하여 백성과 사직을 보존해야한다고 주장했던 당파. 호란을 겪고 피폐해진 민생을 어루만질 줄 모른다며 척화파 중신들을 비판하는 그의 말에 날이 서 있었다.
“대명에 대한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것도 맞는 말일세. 허나 그 은혜 때문에 도륙당한 백성들을 생각하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야.”
국가 존폐의 위기였던 임진왜란의 위기에서 건져준 만력제와 명에 대해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라면 청이 천혜의 요새 산해관을 넘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이 도리어 이상한 사람으로 몰릴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땠는가? 대륙의 패권은 그들이 오랑캐라고 여기는 청나라가 잡는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화파는 건재했다는 것이지.
결국 그렇게 청과 척을 지는 자들이 조정을 장악한 덕분에 경신대기근이 터졌을 때도 대륙으로부터 큰 지원을 받지 못했다. 대재앙을 맞은 백성들은 굶어 죽어 가는데 들어온 청나라 쌀이 역병과 기근의 원인이라는 이야기도 지어냈다.
그 이후 척화파는 교조적으로 변질되어 사사건건 개혁을 방해하는 존재가 되었다. 후대에는 왕권까지 눌러내고 세도정치로까지 변질되었지, 아마?
어찌 보면 조선 멸망의 시발점은 이 시기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이후의 일을 알고 있는 현대인이었다. 계획대로 조선을 부강하게 하고 경신대기근을 넘기려면 어차피 척화파들과 나는 절대 공존할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성이성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을지도.
“나리 말씀이 맞습니다. 당장 전란에서 비껴간 남원도 백성의 삶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명분에 휩쓸려 민초들을 외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알아주는 것인가? 정말 다행이네!”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린 대사간 영감은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웬 관직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뜻을 함께하는 자들의 직책이었다. 그런데, 곧 사은사로 삼아져 심양으로 떠나게 된 전 영의정 다음에 나온 관직이 낯이 익었다.
“충청 감사라 하심은…… 혹시 조 어르신이 마중 나오셨을 때 언급하신 충청 감사께서도 동지(同志)이신 것입니까?”
대사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니 짐작이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남원 북방가도 초입에서 들었던 충청 감사, 좌명의 입으로 들은 부친의 관직인 충청 관찰사. 둘은 같은 관직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그럼 혹시 그분 함자가 김 육자 아니십니까?”
“자네가 그분 성함을 어찌 알았는가? 믿을 수 없구만.”
“성균관에서 단 하나 얻은 벗이 그분의 아들입니다. 권신 자제 패거리와 척을 지고서도 얻고 싶은 벗이었는데,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성 영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나를 마주보는 얼굴에서 잠시 시간이라도 멈춘 듯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사실입니다. 나리.”
“내가 자네와 산중에서 마주친 일은 하늘께서 인도하시기라도 한 것인가? 이렇게 우연이 맞아떨어질 리가……”
대사간이 말꼬리를 흐리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하긴, 나와 만나고 일이 계속해서 잘 풀리는 것도 모자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기대 이상의 일이 일어났으니 말문이 막힐 만도 했다.
한편, 나 역시 그제서야 동장의 패거리가 왜 나를 그렇게 대했는지 짐작이 가고 있었다.
눈치 없이 임금에게 과거 부정을 고해 친척들을 쓸어버린 놈이 알고 보니 적대하는 파벌이라? 게다가 유일하게 친해진 벗 좌명 역시 같은 당파였다.
그놈들 눈에는 선전포고로 비쳤을지도.
“그때 산중에서 만난 범은, 아니 산군(山君)은 산신령이 보낸 것일지도 모르겠구만. 허허.”
‘산신령이 보낸 것이었으면 그렇게 영감님의 갈비뼈를 박살냈겠습니까.’
호랑이 때문에 고생을 한 것이 말이 아니었는지라 괜히 심술이 꾹 돋았으나 악담을 입 안으로 굴려 본 정도였다.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 이후로 성 영감의 입에서 마저 흘러나온 관직은 몇 되지 않았다. 예상대로 주화파 세력은 적에 비하면 미미했다. 굴레를 씌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이제야 제대로 이해되고 있었다.
“게다가, 자네가 상감마마의 눈에 띄어버린 탓에 예상치 못한 사태로 굴러가게 될지도 모르겠네.”
“예상치 못한 사태라니요. 전하의 눈에 들어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 일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하사품에 끼어있던 어필과 관련된 일입니까?”
성 영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둘 말고는 예상치 못할 사태라고 부를 일이 없을 터였다.
“전하께서 이 야밤에 갑자기 자네에게 입궁을 명하실 이유가 없네. 마음에 드셨다면 성균관에 넣어놓고 지켜보다 알성시(謁聖試)를 열어 자네를 등용하면 그만일 뿐인데…….”
듣고 보니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성균관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김자점의 아들을 만나 대립각을 세운 게 전부였으니까.
“나리의 말씀이 맞습니다. 혹시 최근에 일어난 일 중에 짚이시는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짚이는 일이라…… 오늘 전하께서 얼마 전 심양에서 올라온 장계를 읽으시고는 격노하셨던 일이 있긴 했는데.”
심양에서 올라온 장계라. 청에서 무리한 요구라도 한 것인가? 아니면 청에 볼모로 잡혀가 있을 세자와 대군에 관한 이야기?
“그것과 지금 궁궐로 향하는 이유가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일세. 다만, 전하께서 전란을 겪고 나서 감정 기복이 심해지신 경우가 많으니 그것이 염려가 되는 것일세.”
그랬다. 생각해보면 지금 만나러 가는 임금은 조선 최악의 군주, 능양군이었다. 그가 재위 기간 동안 휘둘렀던 인성질은 기억에 생생했다. 오죽하면 친아들 머리에 벼루를 던져 죽였다는 야사가 돌았겠는가.
이거 완전 호랑이 굴에 죽으러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산중에서 호랑이를 마주쳤을 때만큼이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점점 어둠을 헤치고 드러나는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이 딱 벌어진 범의 아가리처럼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