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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6화 (26/298)

26화. 동상이몽(同床異夢)

“주상 전하. 대사간과 유생 안한수 들었사옵나이다.”

“들라 하라.”

수염이 밋밋한 상선(尙膳) 영감이 문이 열자 불어온 바람에서 부용지의 물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 몇 겹이고 쳐진 궁궐의 담을 지나 도달한 곳이었다. 연못에 반사된 초승달이 호랑이의 아가리 한가운데에서 빛나는 송곳니처럼 보였다.

상아색 답호(褡穫)를 걸친 임금은 촛불에 비춰가며 책을 읽던 중인 듯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라는 다섯 글자가 임금이 기울여 든 책의 표지에서 선명하게 읽혔다.

그의 가슴팍에서 용 한 마리가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평소에 입는 붉은 곤룡포에 비하면 편한 옷차림이었다.

“왔느냐. 조금 늦었구나.”

조선 최악의 임금이 내 눈앞에 있었다.

그래도 한 번 본 사이라고 지난번처럼 위엄과 권위에 눌려 부들거리는 추태는 다시 보이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방방례 자리와는 분위기가 다르기도 했고.

“안 양시의 표정이 조금 좋지 않구나. 이곳까지 오면서 불만이라도 있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전하. 일찍 잠들어 있는 것을 제가 깨워왔는지라…….”

그 말을 들은 왕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성 영감이 없었으면 표정 관리를 못한 것을 커버해줄 사람도 없었을 테니 경을 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너희 둘은 일단 들어오라. 그리고 상선은 방금 지시한 것을 수행하라.”

지시하는 목소리에 무게감이 있었다. 그렇게 방으로 한 걸음 내딛자마자 문이 뒤에서 소리 없이 스르륵 닫혔다.

창호지 너머로 뒤돌아서서 금군에게 지시를 내리는 내시부 우두머리의 실루엣이 비치는 것이 보였다. 등을 돌린 상선은 접근하는 자를 차단할 것을 명하고 있었다.

고작 정삼품 대사간과 한낱 유생을 대하는데 이 정도의 보안이라니.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눈을 성 영감에게 돌려봤지만 그의 표정은 평온했다. 예상하던 일인 듯했다.

평소에도 이처럼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임금이니 이미 예상 범위 안이라는 것인가.

“앉거라. 언제까지 일어서서 있을 것이냐.”

옆에 서 있던 대사간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궁궐의 문을 지나기 전까지 피로와 짜증이 가득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원래 아랫사람들에게도 관대한 양반이었지만, 임금 앞에서는 이리 깍듯할 수가 없어보였다.

성 영감이 이토록 충성을 바치는 임금이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아무리 선비라지만 암군에게도 충성을 바치는 것이 덕목일까.

내가 아는 능양군은 이 사람의 충성을 받기에는 과분한 자일 텐데.

“호서 어사로 암행을 다녀오고 올린 서계와 풀어놓은 이야기를 보고 내 눈에 처음 들었던 것이 생각나는구나. 그런데 대사간, 이번에도 큰 사고를 쳤지 않느냐.”

그렇게 임금은 나란히 앉아있던 성 영감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던져왔다. 내용을 알 수 없었지만 임금과 중신 사이에 오가는 대화라 끼어들 수도 없었다.

“정축년에 한 일에 비해도 확실히 큰 사고이긴 하오나, 천신(賤臣)이 지은 큰 죄를 사해 주신 것만으로도 망극하옵니다.”

“사고를 치긴 했지. 그래도 결과가 좋으니 용서한 것이니 그리 알라. 허나…….”

묘하게 불길한 대화였다. 사이사이 나를 흘겨보는 눈길에도 낯선 감정이 묻어있었다.

“내가 용서한 이는 대사간, 너 혼자일 터.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내 쪽으로 갑자기 시선을 돌린 임금이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진 것은 그때였다.

날아올 때는 한 덩어리였던 물건이 두 개로 나누어져 나란히 앉아있던 대사간과 내 앞에 각각 떨어졌다.

익숙한 물건이었다. 가슴이 덜컥 떨어졌다.

“방방례 자리보다는 조금은 배포가 커진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구나. 안한수.”

허리가 잘린 말 다섯 마리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원에서 범이 쪼갠 마패 반쪽이었다.

뜻밖의 물건에 몸이 얼어붙어 있는 와중에 임금의 말투가 싸늘하게 식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이것이 어떻게…….”

“이제야 입을 여는구나. 대사간이 허수아비를 데려온 줄 알았다. 하기야 참형에도 처할 수 있는 중죄를 나에게 들켰으니 오죽하겠냐마는.”

미소를 띠고 나를 바라보는 왕이었다. 얼핏 보면 즐거운 일이라도 마주한 듯했다.

그러나 그의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영문 모를 반응에 흐르는 것은 식은땀뿐이었다.

“전하, 죄를 사하신 것이 신뿐이라니, 그것이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대사간, 내 분명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남원에서 저지른 ‘네’ 죄는 불문에 붙일 것이라고.”

“전하?!”

백패를 하사받던 자리에서 보이던 임금의 부드럽던 태도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지존은 대리 과거를 치른 죄인들을 향해 목에 핏대를 올리며 일갈하던 그 사람이었다.

대사간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으나 그것조차 나중에 알아챌 정도로 놀란 것은 나였다. 분명 참형에 처할 수도 있는 중죄를 관대하게 넘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앞서 약조하신 것과 다르지 않사옵니까? 분명 소신은 이 자의 죄까지 사해달라 청했을 것이옵니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대사간, 내가 저 자에게 주기로 다짐한 것은 시험받을 기회에 불과하다. 어차피 변변한 뒷배도 없는 서생 한 명에게 흘린 일이 내게 위협이 된다면 쳐내야지. 그렇지 않은가?”

“하오나 전하. 고작 스물도 안 된 데다 학식도 미래도 창창한 선비이옵니다. 먼 남도의 고향을 뜨게 한 것으로 모자라 신변까지…….”

“그 입 다물라! 네가 충성하는 대상은 나인가? 아니면 저 애송이인가?”

성 영감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왕이 갑작스레 내게 죄를 묻는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을 고민할 때가 아닌 듯했다.

“안한수, 네 담이 크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대리 어사질을 하고도 내게 대리 과거의 폐단을 고한다…… 여간한 배짱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

“…….”

“감히 국법을 어기고 내 면전에서까지 그것을 숨긴 죄는 죽음을 물어도 마땅하나, 네 학식과 배짱이 아까워 기회를 준 것이다. 대사간의 청도 있었고.”

입이 열리지 않았다. 생각 이상으로 일이 단단히 꼬였지 싶었다.

임금이 나를 부른 이유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궁궐에 들어서기 전까지 고민했던 것은 사치에 불과했다. 칼자루를 쥔 임금의 결정에 따라 조선 생활도 안녕을 고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 안한수, 성균관 생활은 어떠하였느냐. 그곳으로 보낸 나를 원망했느냐?”

“…….”

“왜 계속 말이 없는 것이냐. 이 자리에서 대전별감이 빼든 칼 앞에 세우고 죄를 물어야 대답을 하겠느냐?”

“……아니옵니다.”

빌어먹을. 외통수였다.

나를 바라보는 임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칼날은 대전별감의 허리춤이 아니라 임금의 얼굴 위에서 춤추고 있었다.

말년의 능양군 손에 죽어나간 사람들이 수도 없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떠오르고 있었다. 얼떨떨했던 첫인상 탓에 이 자를 너무 얕보고 있었다. 임금은 임금이었는데.

“대사간, 네 앞의 마패 조각들을 내게 들고 오라.”

“예, 전하.”

소리 없이 일어난 성 영감이 주섬주섬 마패 조각 둘을 수습해 임금에게 바쳤다. 그가 제자리로 돌아와 무릎을 꿇자 임금은 마패 조각 하나를 손에 들었다.

증거는 언제든 자신의 손에 있다는 뜻이려니 싶었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성균관에서 깨달은 바를 말하라.”

“현 조정의 상태와 같다고 느꼈사옵니다.”

“어떤 점에서.”

“본업에 정진해야 할 자들이 이권 다툼과 패거리 싸움에 눈이 멀어있었고, 만인지상의 권위를 하찮게 여길 정도였기 때문이옵니다.”

앞에 앉은 자의 입 꼬리가 비틀렸다. 피식하고 새어나온 소리는 덤이었다.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말하더니 입에 담는 말은 더 당돌하구나. 너는 내가 두렵지 않느냐?”

“어찌 두렵지 아니하겠사옵니까. 허나 전하께 도움이 되지 않으면 이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것을 알게 된 터,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옵니다.”

한 번 더 임금의 입에서 코웃음이 새어나왔다.

염병할 능양군 놈, 그 대답이 마음에 든 건가? 날아오는 눈빛 또한 조금 무뎌져 있었다. 저놈의 굴러가는 눈동자가 내 목숨을 쥐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하사받은 어필에 대해 말하라. 그것 역시도 생각을 정리해두었어야 할 것이다.”

“다스릴 치(治)가 적혀있던 종이 말씀이시옵니까?”

“앞으로 반문(反問)은 허락하지 않겠다. 그대로 말하라.”

하아. 한숨도 속으로 내쉬어야 하는 자리였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그저 대과에 빨리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라는 명인 줄 알았사옵니다.”

“그런 면도 없지는 않다.”

“하오나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어보까지 찍어가며 명을 내리시진 않았을 터. 몇 가지 고민을 해보았으나 이 자리에 와서야 결론을 내릴 수 있었나이다.”

왕은 내 말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눈빛은 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새삼 연못에서 나는 물비린내가 코끝에 스치기 시작했다.

“다스릴 치는 본래 물을 다스리는 치수(治水)에서 유래한 한자가 아니겠사옵니까. 본래 흘러야 할 자리를 벗어난 성균관의 혼탁한 물줄기를 다스리라고 명하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반궁의 패거리들 사이에서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느니라. 눈은 제대로 달려 있는 모양이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숨 쉴 틈도 없이 몰아붙이고 있는 임금이었다.

이 빌어먹을 면접관 놈. 그룹 회장이 압박면접 면접관으로 나와서 이렇게 갈궈대면 어느 지원자가 버티겠나. 면접 탈락이 곧 죽음이라면 더더욱.

“알고 있사옵니다. 전하께서 한낱 선비를 궐로 부르셨다는 것은 그 이상의 기대를 품으셨다는 것, 결국 소생이 성균관에 들어가게 된 것 또한 오늘 일처럼 하나의 시험일 것이옵니다.”

“맞다.”

“결국 성균관에서 겪게 될 일들을 거름 삼아 성균관의 폐단을 다스리고, 조정의 폐단을 다스리고, 마지막으로 이 나라 조선의 폐단을 다스리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나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답을 해야 할 임금이 말을 잊었기 때문이었다.

창살 사이로 새어 들어온 달빛이 흐르는 소리까지 들릴 듯했다.

“……좋다. 목을 붙여둘 가치는 있는 것 같도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살려주겠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격한 감사의 표현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눈 깜짝도 않고 내 목을 날리려던 사람한테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니, 조선 시대 양반으로 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 분명했다.

“허나 네 명줄을 끊지 않은 것은 네가 정답을 말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전하?”

“대사간! 이 자가 네 아들이라도 되는가? 분명 입을 다물라 하였을 텐데.”

어떻게든 나를 방어해주려는 성 영감이었으나 임금의 불호령에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래. 스물도 안 된 서생에게는 너무 어려운 문제를 냈다고 따지기라도 하려는 것이냐, 대사간?”

“아니옵니다. 신은 그저…….”

“그럼 네가 답해보아라. 이 자의 대답에 무엇이 부족했는지를.”

성이성의 얼굴이 숫제 흙빛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얼굴색과 달리 유려할 뿐이었다.

“모름지기 유학자라면 우선해야 할 가장 큰 가치가 빠져있었나이다. 전하. 하오나 그것은 이 자가 아직 어리기 때문…….”

“그만. 대신 변명하는 것도 그 정도면 족하다.”

손사래를 쳐 대사간의 입을 막는 임금이었다. 다시 예리한 눈빛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조정은 호랑이굴이다. 내 주위를 믿지 못할 자들이 온통 둘러싸고 있지. 대사간처럼 내 장기말이 되어줄 정도로 믿음을 보여주는 자는 많지 않느니.”

순간 날아오던 눈빛이 잠깐 흐트러진 것을 본 것 같았다.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것은 쓸쓸함이었다.

“다시 묻겠다. 네 말에, 그리고 네 심중에 빠져있던 그것의 정체가 무엇이냐.”

이런 상황에 놓인 권력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뿐일 것이었다. 성 영감이 어사를 두 번 나가면서까지 총애를 받은 이유도 있을 것이고.

“……충(忠)이옵니다.”

임금의 입꼬리가 찌그러졌다. 정답을 말한 듯했다. 허나 들끓고 있는 속마음은 달랐다.

내가 당신에게 충성심이란 걸 가질 리가.

나는 조선 사람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인데다, 첫인상도 안 좋은 사람이 목에 칼을 들이밀고 질문하는데?

애초에 지금 고생하고 있는 것도 성균관에 밀어 넣은 능양군의 탓이 반은 넘어갈 것이었다.

그래도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내가 대답을 멋대로 했다가는 위험해질 목숨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충 그 이상의 충을 원하는 것이다. 왕권이라는 솥을 받쳐주는 몇 안 되는 발들마저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니.”

고사(古事)에서 무언가를 떠받치는 것의 예시를 들 때 솥과 발을 썼던가. 천하삼분지계와 문정경중(問鼎輕重)의 고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믿을 수 있는 자는 여기 있는 대사간을 비롯한 몇몇에 불과하다. 이제는 내 대신 오랑캐 땅에서 고초를 치르는 내 아들마저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지.”

“하오나 전하, 사직의 기둥이 될 세자 저하까지 그렇게…….”

“그럼 언제 오랑캐를 등에 업고 내 목에 칼을 들이댈지 모르는 녀석을 가만히 놔두란 말이냐? 선을 넘지 말라, 대사간!”

조금은 잦아들어 가던 임금의 감정이 다시 널을 뛰고 있었다.

스트레스로 인한 발작 정도려나. 조선 왕조 어떤 왕도 당하지 못한 치욕을 당하고, 청에게는 온갖 무리한 요구를 받았으니.

이렇게 된 것은 조금 이해가 가고 있었으나, 반대로 왕이 이 모양이기에 나라가 이 꼴이 난 것도 사실이었다.

“너는 결국 내 앞을 막아서는 자들을 다스려야 할 것이다. 다스릴 치 자를 네게 내린 의미는 그것에 있다.”

“성균관에서 학문을 닦으며 사람 다스리는 법 또한 함께 익히란 말씀이십니까.”

임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맞춰줄 생각이 있었다. 성균관에 사적으로 조지고 싶은 놈이 있기도 했고.

긍정의 뜻으로 넙죽 엎드리자 왕은 그제서야 만족한 듯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지시는 도를 넘은 것이었다.

“그리고, 네가 그것들을 훌륭하게 해낸다면 정말로 다스릴 대상을 내려주겠다.”

정말로 다스릴 대상이라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라 당장이라도 뜻을 묻고 싶었지만, 왕은 이미 반문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이 다물려졌다.

지방관 자리라도 내려주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알성시 같은 비정기 특별 시험이라도 치러서 날 등용하겠다는 것인지.

“언제든지 심양으로 갈 준비 역시 하고 있으라. 마지막 시험까지 통과하면 시강원(侍講院)의 자리를 준비할 것이다.”

“심양, 시강원이라면…… 세자 저하의 적을 다스리란 말씀이시옵니까?”

“네가 다스려야 할 대상은 세자의 적이 아니다.”

세자의 적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면, 설마.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이제야 왕이 나를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스릴 치(治)자가 가리키는 진짜 뜻이 이거였다니.

세자를 다스리라는 뜻이었다.

즉 세자를 가르치는 사람을 임명하는 자리에 나를 꽂아 넣어, 감시자로 써먹겠다는 말.

하지만 그런 허울뿐인 선생질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가르치는 자리를 그딴 식으로 써먹는 행위는 내게 절대 좋게 보이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왕이 세자를 견제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마이너스였다. 적어도 인조가 세자를 미래의 임금 감으로 봤다면 절대 하지 못할 일이었다. 어지간히 가르치는 것으로는 모자랄 테니 좋은 스승을 붙여줘도 모자랄 판에.

역사에서도 인조와 소현세자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마 청의 세력을 등에 업은 세자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졌겠지.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허탈감만 더해질 뿐이었다.

그에게는 나라보다 자기 권력의 우선순위가 훨씬 높았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 후계구도를 망쳐놓는 결과를 낳을 것이었다. 그걸 알았다면 스스로 세자를 쳐내버리는 행동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원 역사에서도 인조는 그러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느냐? 속히 답하지 못할까!”

생각이 길어진 탓에 내가 잠시 말을 잊었던 순간조차도 임금은 견디지 못했다.

아무리 조선을 위해 일한다 해도 이런 속 좁은 인간을 받들어 일하는 게 맞을까.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왕이 방금 내린 명령을 이용해 먹을 생각이.

“……분골쇄신하겠나이다. 전하.”

“이제야 각오가 섰는가. 얼굴빛이 달라졌구나.”

웃음기를 띠며 충성을 다하라는 말을 덧붙이는 인조였으나, 방금 내 입에서 나간 말이 그를 향하지 않았다는 것은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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