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삼 교시 외국어 영역
“미안하게 되었네. 전하께서 저렇게 나오실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나리!”
다시 늦은 밤, 궐에서 물러 나온 뒤의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대문을 닫아걸라 지시한 성 영감은 나를 사랑채로 이끌었다. 익숙하게 호롱불을 붙이는 그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어찌 소생에게 고개를 숙이신단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들어 주십시오.”
“나는 그저 전하께 필요한 인재를 천거한다는 생각에 자네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는데…… 내 짧은 판단 탓에 자네에게 큰 누를 끼치고 말았네. 정말로 미안하네.”
돌아가는 길, 성 영감 댁으로 나를 호위해가는 금군들의 창칼이 더 서슬 퍼렇게 보인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었다. 그렇게 느낀 것이 나뿐만도 아닐 것이었고.
“방방의 직후까지만 해도 그러실 낌새가 전혀 없었는데, 얼마 전 심양에서 올라온 장계 하나가 전하의 심기를 많이 흐트러뜨린 모양일세. 아마 세자 저하와 관련된 것이겠지.”
백패를 내려준 이후로 나에 대해서 별말이 없던 왕이라 했다. 오늘 부른 자리에서 임금이 폭주할 것을 예상 못 한 것은 성 영감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결국 왕은 나를 수족으로 만들어 심양에 있는 세자를 제어하려고 그런 분위기를 만든 것이 분명했다. 세자에 대한 의심병에서 튄 불똥이 우리에게 날아온 것이다.
대사간이 한낱 서생에게 고개를 숙인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의 잘못은 없었다. 모실 임금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을 뿐.
“아닙니다. 어쨌거나 제 목은 아직 붙어있지 않습니까. 하하.”
“자네…….”
“미안하다는 말씀은 형장에 끌려가는 자리에서 들어도 될 것입니다. 그만 고개를 드시지요.”
반쯤은 의연한 척하려고 뱉은 말이었으나 튀어 나간 대사에는 비꼬는 뉘앙스가 꽤 묻어있었다. 그걸 깨닫고 입을 막았으나 이미 늦은 상태였고.
그러나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성 영감은 그 말을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의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은 오직 후회의 감정뿐이었다.
“심양으로 가게 된 건은 어떻게든 나중이라도 손을 써 보겠네. 갑작스레 먼 북녘, 남의 땅으로 가 살아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야.”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명이었지만 그곳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합니다. 아직 마지막 시험에 통과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표정을 보니 순순히 세작이 될 생각은 아닌 듯하고…… 자네, 혹시 세자 저하의 측근이 되는 것에 관심이 있는가? 심양 땅에서 생활하는 것은 말이 쉽지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네.”
“괜찮습니다. 이미 한 번 어사 나리께서 구해주신 목숨이 아닙니까. 두 번째 목숨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하하.”
사실은 진짜로 두 번째 목숨이지만.
하지만 그 말에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 성이성을 보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다. 열심히 굴리는 것만 빼면.
“전하께서도 원래 저런 분은 아니셨다네. 이게 다 병자년의 그 치욕을 겪은 후로 사람이 변하셔서 그런 게지.”
“알고 있습니다. 소생이 그 자리에서 낯빛이 변하지 않을 수 있었던 연유도 거기에 있지요.”
“자네, 충심이 모자란 것은 사실이 아닌가. 허허.”
그제서야 평소처럼 농담을 섞는 성 영감이었다. 인조의 성격이 개차반이 된 이유는 저게 다가 아니었던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조정에서 고생이 많으실 듯합니다. 나리.”
“전하께서 나를 저렇게 대하시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 아니네. 임금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이 조선을 흔들리게 하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 이 상황이 견디기 어려울 뿐일세.”
“나라꼴이 정상은 아닌 모양이군요.”
대사간의 얼굴이 굳어졌다. 방금 나에게 사과를 건넬 때보다 훨씬 어두운 표정이었다.
“조정이 저 모양인 것은 자네도 잘 알 것이고, 전하께서는 자리보전에나 관심을 가지시니 살판이 난 것은 국고와 백성의 고혈을 파먹는 쥐새끼들뿐이겠지. 그렇지 않은가.”
“맞습니다. 남원에서 본 것들은 일부에 불과했던 모양이군요.”
“청계천 변 움막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서계가 어제 사간원에 들어왔더군. 한양도 예외가 아닐세.”
하긴, 성균관으로 가는 길에 있던 거리에서 불탄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약탈의 흔적이겠지. 재건이 빠른 북촌도 이럴진대, 다른 곳은 안 봐도 뻔했다.
요안 남매를 괴롭히던 아이들도 팍팍해진 삶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을까. 생활이 어려워지면 그 원인을 외부자에게 돌리는 경우는 역사상에서 흔했다.
“그 때문에 대사간 직에 오른 것도 그다지 기쁘지가 않으이. 아무리 간언을 올려도 귀담아듣질 않으시니.”
“도대체 어떻기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자네도 방금 겪지 않았는가. 세자 저하를 멀리하면 안 된다고 그리 충언을 드린 결과가 그것일세.”
하긴 내가 한 생각을 조정의 중신인 성 영감이 못할 리가 없었다. 세자를 의심할 시간에 나라꼴 단속부터 해야 함이 분명할 텐데.
“차라리 경관직이 아닌 지방직으로 내려가면 그 고을만이라도 살릴 수 있을 터인데…….”
“그래도 나리마저 자리를 비우신다면 조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멀리 창틈으로 비치는 달을 바라보는 성 영감의 눈빛은 공허했다.
그럴 만도 했다.
성 영감 자신이 배운 유교적 가치관대로 살아갈 뿐인데 적이 너무 많았을 테니까. 그렇다고 모시는 주군이 훌륭하냐면 그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 양반을 원역사대로 존재감 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성 영감의 실망한 얼굴을 보고 미래에 대한 스포일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겨우 참아냈다.
청이 산해관을 넘어 북경에 입성할 날이 멀지 않을 것이었다. 조선에 대한 간섭이 줄어들어 능양군의 왕권이 강해지는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 즈음, 인조 말년에 숱하게 피가 흐른 사건들을 생각하니 임금 옆에는 이 사람이 있어야하지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성 영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영감님에게서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내려면 뭐라도 화제를 바꿔야했다.
“그건 그렇고, 부탁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가, 그건 또?”
“서책을 한 권 구해주셨으면 합니다.”
다행히 성 영감의 흥미는 내가 구해달라는 책으로 금방 옮겨갔고, 실망의 기운도 그의 얼굴에서 사라졌다. 구해달라고 한 책이 그만큼 뜬금없는 책이었으니까.
***
늘 그렇듯이 이른 등교였다. 성균관을 향하는 발걸음이 천 근 같았다.
갑작스러운 왕의 소환 이후로 며칠은 숨 돌릴 새도 없이 지냈기 때문이었다. 수면 부족은 둘째치고, 새로운 목표가 갑작스레 주어졌으니 준비할 것도 많았다.
성균관 놈들을 다스려보라는 이야기도 그랬지만, 임금이 나를 어디에 써먹으려 하는지 그날 이후로야 알게 되었으니까.
언제 심양으로 유배 아닌 유배를 가게 될지 모르는 처지였는데, 당장 준비를 시작하기에 도움을 받을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 다행이었지.’
내가 도움을 청한 두 사람은 김 갑사와 유 서리였다. 남원에서 그 둘이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기대를 걸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두 사람이 내 제안에 어떻게 대답할지 염려되어, 임금에게 밀명을 전해 받고 그들에게 전할 서찰을 적으면서도 계속 고민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리고 둘은 내 기대에 훌륭하게 응답해 주었다. 조금 도를 넘은 응답이었던 것만 빼면.
심양에서 쓸 언어를 가르칠 역관을 물색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유 서리가 홀몸으로 나타났을 때는 조금 실망했었다. 역시 역관을 사적으로 구하긴 어려웠던 모양이라고 좌절하고 있었는데 유 서리가 취한 행동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노걸대(老乞大)?’
‘부탁하신 명국어 교본이지라.’
‘그건 알고 있네. 역관을 못 구했으니 독학하라는 소리인가?’
그 말을 들은 유 서리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능력 있는 자인 것은 알고 있었으나 중국어도 할 줄 알다니. 하지만 놀랄 일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랑게요.’
‘무슨 뜻인가? 아, 설마…….’
‘어사 나으리께서 신신당부를 하셨지라. 내 몸이 바빠 직접 안 양시를 가르치진 못하지만, 자네가 그것을 대신해야 할 것이네, 라고 단단히 말씀을 내리셨당게요.’
그 스파르타 교육 중독 양반. 본인이 사간원에서 갈려 짬을 못 내니 이렇게 아랫사람을 써서 굴려? 어으…….
나보고 중국어와 만주어를 동시에 배우란 소리였다. 성 영감 역시 임금와의 자리에 동행했으니 따로 지시를 내린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더 놀랐던 것은 유 서리가 만주어 교본은 지참조차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할 때였다. 그가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역관들이 쓰는 교본이 영 모자라니 알고 있는 최신 어학을 가르치겠다는 말을 했을 때는 경외감마저 들었다.
‘문제는 굴려지는 내가 불쌍하다는 거지.’
시간이 없으니 있는 시간을 쪼개 써야만 했다. 심양에서의 생활을 준비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 영감에게 부탁했던 다른 책도 마저 읽어야 했다.
이른 아침부터 눈은 감겨오고 발걸음은 무거운데, 손가락은 쉼 없이 무언가를 넘기며 거기 적힌 것들을 중얼거려야 하는 신세가 서러웠다.
“……비 거문 허쳔 이 바루 거넘비.”
“성근! 앞 좀 보고 걷게! 손에 든 것은 또 무언가?”
문 앞에서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좌명이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말없이 손에 든 것을 내밀었음에도 좌명의 얼굴에서 어리둥절함은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이 해괴한 물건은 무엇인가? 멀쩡한 종이는 또 왜 잘라 놓았고?”
“자네 상상력이 고작 그 정도인가? 거기 적힌 언문을 잘 읽어보게.”
“비 거문 허쳔…… 방금 자네가 발음한 것이로군. 그 아래 적혀있는 지렁이 같은 글씨는…….”
아랍어에 비하면 양반이었으나 이 시기의 선비인 좌명의 눈에는 충분히 지렁이로 보일 만한 문자였다.
“호어(胡語)라네. 이젠 그들이 부르는 대로 청국어라고 불러야 될 것일세.”
“청국어는 왜 갑자기?”
“나중에 이야기해 주겠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조금은 아쉬워하는 것 같은 좌명이었지만 그것보다 내 손에 든 물건에 관심이 가는 듯했다. 수업 도중에는 누가 옆구리를 찔러도 모를 것 같던 놈이니 공부법이 궁금도 하겠지.
「내 皇城으로 向ᄒᆞ여 가노라.」
종이를 뒤집어 청국어의 뜻이 적혀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좌명도 그것을 본 순간 납득한 듯싶었다.
“이렇게 여러 장을 실로 꿰어 만들다니, 들고 다니면서 공부하기 좋겠으이. 자네 발상은 언제 봐도 천재적이구만.”
“자네도 생각이 있으면 만들어 보게. 물론 기초적인 공부를 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만, 적용할 수 있는 곳이 또 있을지도 모르지.”
영단어를 외울 때 애용했던 단어 카드였다. 한지에 붓으로 적다 보니 조금 형태는 바뀌었지만, 공부법은 시대를 초월해도 먹히는 모양이었다. 좌명 역시 누이를 가르칠 때 쓸 수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몸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개인 서당을 차려서 유학 기초반과 생원시 족집게 특화반을 개설해서 돈을 쓸어 담을 수도 있었겠다만… 나랏일을 맡은 몸이라 그건 어려운 것이 아쉽네.’
아마 소과 쌍장원 타이틀로 공부방을 열면 임금이 내린 하사금 정도는 금방 벌지 싶었으나, 여기서 새로운 일을 또 벌이려면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판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박 초관 댁 남매에게도 이미 두꺼운 종이와 튼튼한 실을 사다 주고 단어 카드를 직접 꿰어 만들게 시킨 참이었다. 덕분에 경전 글귀를 외우는 녀석들의 속도는 한층 더 빨라졌고 진도는 쭉쭉 나가고 있었다.
‘와! 이거 정말 제 거 맞는 거죠? 고맙습니다!’
고작 종이 몇 장, 실 몇 오라기를 챙겨줬을 뿐인데, 그럴 때마다 얼굴까지 붉혀가며 좋아하던 녀석을 보면 괜히 내 얼굴까지 화끈거리곤 했다.
박연의 지갑 사정이 넉넉지 않아 먹물을 담는 벼루마저 제 오라비와 하나를 써야 하던 녀석이어서 더 기뻐했던 걸까. 나중에 쓸 만한 먹 몇 개를 구해다 줬을 때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던 녀석이었으니.
피붙이 하나 없는 곳에 떨어진 조선에서 겪고 있는 고난들은 이 녀석들이 주는 위안이 없었다면 이겨나가기 힘들었겠지. 요안이 녀석의 모습이 계속 떠오르는 이유는 그것일 것이었다.
“아, 성근. 이따 성균관 마치고 할 일이 있네. 같이 하겠는가?”
“할 일이라니. 또 술이라도 한잔 하잔 말인가?”
“술? 자네는 정말 술을 좋아하는구만? 아쉽게도 아니라네.”
소매에서 꺼낸 손으로 술잔 마시는 시늉을 하며 빙글거리며 웃는 좌명이었다. 녀석의 엄지에 끼워진 굵은 반지 같은 물건 때문에 뭘 하려는 것인지는 대강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