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8화 (28/298)

28화. 낯선 유생

피슝. 피슝.

뉘엿뉘엿 노을이 막 타오르는 시간대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고 있었다.

이곳은 성균관 자수원 앞마당. 진사시를 칠 때 와 본 장소였지만 오늘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수업을 마치고 마음이 답답하다며 뛰쳐나온 좌명에게 이끌려 온 장소였다. 이 널따란 장소를 평소에는 어떻게 쓰나 했더니 과녁을 세워놓고 활 쏘는 연습하는 용도로 쓰는 모양이었다.

“궁술도 선비의 육례 아닌가? 이렇게 서툴러서 쓰겠는가?”

“시끄러우이. 활을 잡아본 적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쩌란 말인가?”

현대를 살아가면서 국궁(國弓)을 쏴볼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몇몇 허무맹랑한 소설에서는 전생하면서 능력치라도 부여해준다지만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었다. 차라리 창이라도 쥐어주면 더 잘 맞추겠다 싶을 정도였으니.

그래도 김 갑사의 지도 덕인지 쏜 화살의 절반 정도는 과녁을 맞출 수 있게 되었었다.

속에 담긴 화를 과녁으로 쏘아 보낸다는 생각을 하고 시위를 당겼다 놓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능양군 놈이 준 스트레스가 꽤 쌓여있었던 모양인지 화살은 평소보다 잘도 과녁을 맞춰가고 있었다.

다만 옆에서 활을 쏘아대는 놈의 차원이 다른 솜씨 때문에 나도 모르게 비교하게 되었을 뿐.

“그렇게 쏘아서 화살 열 순을 언제 다 쏘겠는가? 날이 다 저물겠네!”

화살은 화살통에서 하나씩 빼 쓰는 것이 아니었나?

손가락 사이사이에 화살을 끼운 채 활에 재어둔 화살이 날아가기가 무섭게 다음 화살을 내쏘는 좌명의 속사 솜씨는 내 눈을 의심케 했다.

엄지손가락에 끼고 있는 물건 덕분임이 분명했다. 반지처럼 생긴 물건이 손가락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없이 저렇게 빠른 속도로 화살을 날려대면 아무리 굳은살이 박인 손이어도 배겨내기 힘들지 싶었다.

아무리 선비의 덕목 중 하나라지만 누가 봐도 평범한 솜씨는 아니지 않은가. ‘용이여, 적들을 삼켜라!’라는 대사가 떠올랐으나 겨우 참아냈다.

“일정, 속이 그리도 답답한가?”

좌명도 가상의 과녁에 김자점 아들의 얼굴이라도 그려 넣고 화살을 박아 넣고 있는 듯했다. 오늘도 그 패거리에게 시비가 붙은 마당이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온 자리에 있는 내 방석에는 웬 바늘 하나가 꽂혀있기도 했다.

“대역죄나 다름없는 짓을 하고 한양 출입 금지 처분까지 받은 자의 자제가 저렇게 권력을 휘두르고 다니는 것이 말이 되는가. 장차 이 조선이 어찌 될는지.”

“저번에 우릴 협박하던 동장의와 그 애비 얘기인가?”

“그것도 문제지만 또 다른 것 때문에 심중이 복잡하다네.”

다시 한번 힘차게 화살을 쏘아내는 좌명이었다. 손에 든 화살을 모조리 쏘아내고서야 말을 이은 녀석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그놈의 부친이 나중을 위해서 힘을 쓴 덕에 동장의가 성균관을 헤집고 다닌다고 하나, 그 패악은 미래에 올 일이 아닌가. 아까 만난 제관이 한 이야기 때문일세.”

“아. 또 녹봉이 줄었다고 울상이던 그 사람 말인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과녁으로 향하는 좌명이었다. 과녁에 꽂힌 화살을 하나씩 뽑아서 돌아오는 그의 손끝에서 화가 전해져왔다.

“처음 붓을 잡았을 때는 청운의 꿈을 품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머리가 굵어져 나라 꼴을 알면 알수록 심화(心火)만 끓지 않는가.”

“일정 자네의 말대로 하급 관리에게 생활을 유지할 녹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일 리 없지. 그 피해는 도로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될 걸세.”

녹봉을 받는 관리들도 별급이라 불리는 뇌물이 없으면 떵떵거리며 살기 불가능한 마당이었다. 그런 것을 일절 받지 않은 성이성이나 박연의 집이 북촌에서 유독 초라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규정된 녹봉이 없는 아전들이 백성들을 수탈해서 먹고살았듯이, 관리들의 녹봉이 팍팍해지면 이들도 아전처럼 백성들 등골을 빼먹지 말란 법이 없었다.

그렇게 되면 국고로 들어오는 세금은 더 줄어들 것이고, 그 때문에 또 관리의 월급을 깎고, 백성은 더 수탈당하고. 악순환이 반복되겠지. 좌명의 속이 부글거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네도 같은 생각이구만, 성근.”

“그걸 개선하려고 이렇게 공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관직에 나가서 바꿔나가야지.”

“맞는 말이지만 동장의 패거리 같은 놈들이 즐비할 조정에서 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가슴에 응어리진 것이 풀리지가 않아.”

동감이었다. 나 역시도 성균관에서 갑갑함만 더해지던 차였다.

과거만 붙으면 될 줄 알았는데 넘어야 할 장애물들은 앞으로도 산더미 같았다. 뭐라도 해보기에는 돈도, 시간도 없었다. 세자를 따라 심양으로 가면 적어도 더 자유롭게 일을 꾸밀 수 있을 테니 그 편이 더 나을지도.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자신의 심정에 공감하는 한숨으로 생각했는지 좌명이 가까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주고 있었다.

“성균관을 뒤흔든 신참 놈들답게 뒷담화도 수준이 다르구만?”

웬 낯선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것이 날아온 곳을 향해 돌아본 자리에는 웬 처음 보는 유생 한 명이 자수원 건물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남의 이름을 알고 싶으면 먼저 소개하는 게 예의가 아니냐? 하물며 내가 선진인데.”

말을 뱉자마자 몸을 일으켜 석단(石壇) 아래로 가볍게 몸을 날린 낯선 유생이었다. 토시를 올려 넓은 소매를 올려 묶은 그의 몸은 탄탄해 보였다. 드러난 팔뚝이 유난히 굵어서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안한수라 합니다. 본관은 죽산이고, 이 사람이 성근이라는 별호를 지어줬습니다.”

“소생은 김좌명입니다. 청풍 김가(家)로 일정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몸이 탄탄한 유생의 시선이 우리 둘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무언가 재고 있는 듯 했으나 본심은 알 수 없었다. 그 와중에 그의 손에 들려있는 활과 화살이 보였는데, 역시 활을 쏘러 온 참인가.

“오랜만에 망나니 새끼들이 들어왔다더니 그냥 샌님들이잖아? 니들 같은 샌님들 이름 받고 내 이름 알려주긴 좀 아까운데. 안 그러냐, 한수야?”

“예?”

망나니? 그건 내가 아니라 본인을 가리키는 말 같은데. 벌써부터 남의 이름을 막 부르고 있는 낯선 유생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그것이 별로 마음에 걸리지는 않았다.

“왜, 선진이 신진 이름 좀 부르는 게 떫냐?”

“아닙니다. 헌데 저희에게 말씀을 거신 것은 어인 일이신지…….”

“한 놈은 활 솜씨가 말을 걸어보고 싶을 정도로 훌륭하고, 한 놈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어서 말이지.”

짙게 그을린 유생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아무리 봐도 농담이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정말이냐고 되묻는 좌명의 말에 낯선 유생의 입가가 금방 굳어져 버렸으니까.

“정말이냐고? 네놈들, 정신이라도 나간 것이 아니냐? 스스로 무덤을 파?”

“예?”

갑작스레 날아온 타박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무덤을 파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영문을 모를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마주친 좌명의 눈에도 같은 감정이 떠 있었다.

“뭐 때문에 그렇게 얼이 빠져들 있냐? 요새 동장의랑 붙어먹느라 정신줄 붙잡을 힘도 없냐?”

“아닙니다. 하신 말씀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갑자기 뜻 모를 말을 던져대는데 이해하는 사람이 더 적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답이 거칠어지지 않았던 것은 선진의 무례한 말투 안에 한 가닥 따뜻한 감정이 전해져 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재회를 빙자한 그 무뢰배 집단이 유명무실해졌다 쳐도 말이지. 성균관에 재학 중인 유생이면 밉보이면 안 되는 존재임이 분명하잖냐?”

“그렇습니까?”

“니들 그러다가 재회에서 퇴관을 결정하면 그대로 성균관이랑 연 끊기는 거야, 이 망나니들아. 들어오기 전에 그런 것도 안 알아보고 온 거냐?”

“맞는 말씀이십니다.”

좌명이 말을 받아 대답했다. 낯선 유생의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도 기분 탓인지 조금 부드러워져 있는 듯했다.

“그런데 이놈은 첫날부터 재회 전체에 말 그대로 토악질을 하는 미친놈이고, 저놈은 동장의 놈한테 목숨 아까운지도 모르고 선전포고를 날리는 정신 나간 놈이니 선진으로서 무슨 생각이 들겠냐?”

“지켜보고 계셨던 겁니까?”

“이 썩어빠진 성균관에 폭풍을 몰고 다니는 신진들인데 눈길을 안 줄 수가 있나. 그래서,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게냐? 그게 궁금해서 불렀다.”

이제 숫제 팔짱을 끼고 노려보고 있는 낯선 유생이었다. 이 사람, 무의식적으로 가시를 돋우고 다가오려는 상대방도 밀어내고 있었다.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마침 좌명 역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으나 느끼고 있는 것은 같은 듯했다.

“사형(師兄)께서 저희를 염려하신다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안 그런가, 성근?”

“염려했다는 건 누구냐?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그리고 누가 네 사형이야?”

“일정의 말이 맞습니다. 같은 성균관 교관 아래에서 배우면 사형 아니겠습니까. 차림새를 보아하니 활을 쏘러 오신 듯한데, 혹시 괜찮으시면 한 수 가르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 솜씨는 내 이름자만큼이나 비싼데? 니들 어린놈들 주머니로 감당할 수 있겠냐.”

말은 그렇게 해놓고 낯선 유생은 활을 쏠 자리로 먼저 발걸음을 향하고 있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성격이었는데 확실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야, 이 망나니들아. 그래서 내 질문에는 답을 안 해줄 거냐?”

“그렇게 난장판을 만들 때 무슨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그저 이 사제(師弟)의 술버릇이 나빴기 때문입니다. 일정은 말려들었을 뿐이고요.”

“말려든 적 없습니다. 어차피 성균관에서 퇴관당한다고 해봐야 대과 응시자격까지 잃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잃을 것이 없으니 어린 치기에 들떠 막 나가본 것뿐입니다.”

앞서 걷는 이의 등이 크게 흔들렸다. 한참을 소리 내어 크게 웃는 모습이 정겨웠다. 왠지 정말로 그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멀쩡한 놈들인 줄 알았는데 나만큼이나 막 나가는 망나니들이었구만? 안한수, 김좌명이라고 했냐? 성균관 들어온 이래로 내 마음에 드는 놈들을 만나기는 처음이다.”

지금 앞을 걷는 당신만큼 막 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뭐, 이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좌명도 그런 눈치였고.

“너희들, 간신질, 정치질하는 샌님들도 아닌데 성균관 들어올 생각은 어찌 한 것이냐? 성균관 다니는 망나니는 나 하나로 충분할 텐데.”

“그럼 선진께선 어째서 성균관에 들어오신 것인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확실히 그동안 마주쳐온 유생들과는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드는 호감은 그것 때문이었을지도.

“성리학이고 나부랭이고 전부 헛소리인 것 같았는데, 성균관 들어오면 진짜가 뭔지 알 수 있을까 해서 들어왔다. 니들이 그게 왜 궁금한데?”

“성균관까지 들어오신 분이 성리학을 의심하시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사연이 있어 문과 급제가 아버님의 평생소원이었다. 그래서 피를 토해가며 공부했지. 됐냐?”

지금 활을 쏘기 위해 소매를 걷으면서 드러난 팔뚝 근육의 두께나 선명함을 보니 피를 토하며 공부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김 갑사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흥분해 콧김을 잔뜩 내뿜으며 하악거릴 것이 분명했다.

해는 이제 뉘엿뉘엿 져가고 있었다. 여전히 내 화살은 반절이 과녁을 빗나갔으나, 좌명과 낯선 유생이 날린 화살들은 그것이 초라해질 정도로 잘도 과녁을 명중시키고 있었다.

특히 방금 만난 선진의 솜씨는 눈이 휘둥그레지게 할 정도였다. 동장의에 대한 화풀이임이 분명한 좌명의 속사(速射)도 평범한 활 솜씨는 아니었으나, 낯선 유생의 활 솜씨는 뭔가 기이하기까지 했다.

거친 말투와는 다르게 쏘는 속도는 도리어 좌명보다 느렸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활보다 훨씬 굵은 강궁을 힘이 모자라는 기색도 없이 편하게 당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좌명보다 두 배는 멀어 보이는 과녁을 바라보는 선진의 이마에는 땀 한 방울 비치지 않았다. 잘 훈련된 궁사도 저 정도는 쏘기 어려울 것이었다.

노을이 한창 자수원 마당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무렵에는 활쏘기도 대충 마무리가 되어가는 모양새였다. 화살을 잔뜩 맞은 과녁들은 마치 고슴도치를 보는 듯했다. 내 것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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