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성균관의 망나니들
“……이름을 알려 달라? 활 하나 제대로 못 쏘는 자를 어찌 선비라 여기고 교분을 나누겠는가?”
노을이 지는 북악산을 등지고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내며 과녁에 꽂힌 화살을 전부 정리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마지막 화살을 정리하며 농담처럼 건넨 말이었는데, 갑작스레 어울리지도 않는 고풍스러운 말투를 쏟아내는 선진이었다.
“열 발 중 아홉 발 맞추기 전에는 나한테 말도 걸지 말란 말이다, 인마. 활 못 쏘는 귀신 옮을라.”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그럼 일정에게는 알려주실 생각입니까?”
“그놈도 연좌해야 선진의 위엄을 보여줄 수 있겠지? 꼬우면 나보다 성균관 일찍 들어오던가.”
얼이 빠져 있던 나에게 다시 익숙한 말투가 들려왔다. 활 못 쏘는 게 죄인가. 본인은 처음부터 잘 쐈으려고. 끼어드는 좌명의 웃음소리가 부루퉁한 마음을 더 부채질했다.
웃긴 것은 말은 그렇게 해놓고 행동은 전혀 달랐다는 것이다.
이제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으나 선진은 귀찮아하는 말투와는 다르게 성균관 문을 나서기까지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야, 망나니 새끼들, 하나만 묻자. 니들 둘이 성균관에서 남색이라도 즐기는 것이냐? 왜 이리 매일 같이 붙어 다녀?”
“남색일리가요. 일정은 이미 처도 있을 터인데.”
“뭐? 그 얼굴을 하고 벌써? 아깝지도 않냐?”
말을 마치자마자 선비의 체통이고 뭐고 잊고 하품을 늘어지게 하는 선진이었다. 흐트러진 태도와 말투처럼 의관에 잘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심의에도 무엇인지 모를 얼룩이 잔뜩 있었는데, 몇 개는 흙 때문일까. 이렇게 활을 쏘고 다닌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이런 사람이 첫 대화부터 예의를 운운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남색이니 얼굴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좌명이 상큼하게 씹어버렸는데도 개의치 않는 것을 보니 얼굴도 어지간히 두꺼운 모양이었고.
“그러는 선진님께서도 항상 성균관을 혼자 다니시지 않으셨습니까. 벗이 없으신 처지라 저희 둘이 부러우신 것입니까?”
“야, 김좌명. 니가 뭘 아는데? 어울리던 놈이 등과해서 먼저 성균관을 나갔을 뿐이거든?”
“원하시면 끼워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어느새 으르렁거리기 시작한 좌명과 선진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좌명이 불편하다는 눈길을 이쪽으로 보냈으나 본인도 활쏘기 서툴다며 갈굼 먹는 나를 보며 웃지 않았던가.
“이놈이고 저놈이고 신참 주제에 입은 팔팔하게 살았구나, 나 참.”
“저는 선진님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같이 있어서 거북한 자와 즐거운 자가 있다면 선진님은 명백한 후자니까요.”
좌명을 향해 눈알을 굴리고 있던 선진의 눈이 내게 향했다. 마치 그 눈이 ‘요놈 봐라?’라고 반문하는 듯했다.
“활도 못 쏘는 놈이 선비의 즐거움을 논해? 건방지게.”
“곧 아홉 발 맞출 테니 미리 존함이나 알려주십시오. 건방지게 안 굴 테니.”
핫핫핫.
체구가 단단한 유생은 거리 한복판에서 크게 웃어 재끼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쏠렸으나 잠시뿐이었다.
“안한수. 너, 점점 마음에 든다. 좋아. 활도 못 쏘는 허우대지만 특별히 선진의 자비를 베풀어 주지.”
‘자비는 개뿔.’
입이 툭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막아냈다. 성균관 입학 이후로 감정을 컨트롤하는 데 점점 능숙해지고 있었다.
“야, 얼굴 안 펴? 어쨌건, 자비를 베풀어 네게 내 이름자를 알려주는 대신, 조건이 있다. 할 거냐?”
“일단 그 조건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점점 건방져지는 놈일세. 뭐, 좋다. 너도 들으면 재밌어할 계획일 테니 문제는 없을 거다.”
***
“헉… 헉….”
의문의 밤 산책이었다. 다만 저번과 다른 것은 내 주위를 금군들이 호위하던 합법적 밤 산책과는 달리 오늘은 불법 그 자체라는 것.
덥지 않은 날이었으나 온몸은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언제 순라군을 어느 골목에서 마주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모험을 하는 이유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파루가 울린 후에 다시 성균관 앞에서 만나자고요?’
해가 거의 져 가고 있어 마음이 급했는데, 그것마저 잊게 할 정도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이었다. 통행금지 시간에 성균관으로 다시 오라니.
‘뭘 놀라. 너, 유생의 특권도 모르고 성균관 들어왔냐? 야, 김좌명. 설명해라.’
‘성근, 어떤 순라군도 성균관 유생은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네. 감히 잡아다 가뒀다가는 유생을 탄압한다며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기 때문이지. 삼사(三司) 영감들의 골칫거리기도 하고.’
아, 그래서 대사간 영감이 성균관 유생 얘기를 하면서 벌레 바라보듯 한 이유가 또 있었구나.
그제서야 이해가 갔다. 망나니들 집단 같으니라고.
‘유생이 입은 것이 분명한 심의만 마주쳐도 순라군 놈들은 꽁무니를 빼더라. 핫핫.’
‘경험이 많으신가 봅니다?’
‘그럼. 보름달 뜬 장안을 술병 하나 차고 나 홀로 노니는 기분을 너 같은 신진 놈이 알 리가 있나. 다음에 같이 한번 해 볼 테냐?’
‘아닙니다. 제가 그러겠다는 건 아니고.’
저번에 좌명이 성균관 유생들을 기방에서 반긴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이 탓이지 싶었다.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도 벗겨 먹을 수 있는 흑우. 과외나 사주단자 써주기 같은 부업만 해도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특 A등급 블랙카우.
아무튼 막무가내로 약속을 밀어붙이는 선진이었다. 처음에는 미뤄둔 외국어 공부나 과외 준비 이야기를 하면서 버텼으나, 한번 거절당할 것을 알았다는 듯이 적은 맛있어 보이는 미끼를 연달아 던지기 시작했다.
‘선진이라는 쓰레기들이 네놈 윗구멍으로 물을 뿜게 해줬으면 너도 똑같이 갚아줘야 성현님들께서 읊어대시는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냐? 안 그러냐?’
미리 생각해 놓았던 계획을 그동안 사람이 모자라 실행하지 못했다 했다. 장난기가 잔뜩 어린 눈동자를 빛내는 선진은 성균관 최고의 악동임이 분명했다. 다만 그동안 짝을 찾지 못했을 뿐.
‘자, 잘 생각해 봐라. 권신의 자제라는 놈들은 성균관도 편하게 다니려고 동서재(東西齋, 성균관의 두 기숙사)를 전부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새벽같이 일어나 등관해야 하는데 말이지.’
하긴, 지금 쌓인 피로의 가장 큰 원인이 그것이었다. 아침을 먹고 간단하게 씻은 후 성균관 수업시간에 맞추어 나가려면 거의 새벽별이 떠 있는 시간에 일어나야 했다. 0교시가 있던 고교생활을 할 때도 그 시간에 일어나진 않았었다.
‘그게 관련이 있습니까?’
‘우리는 집에서 밥을 먹지만 그놈들은 진사식당에서 준비된 밥을 먹는다는 얘기다. 아직도 감이 안 오냐?’
목소리는 높아졌으나 계획을 설명하는 선진의 얼굴은 신이 나 있었다. 마치 장난감을 앞에 둔 어린아이의 표정을 보는 듯했다.
아, 설마?
처음에 선진은 내가 윗구멍으로 물을 쏟은 일을 언급했다. 그것을 앙갚음해준다면 혹시?
‘재밌는 계획이 아닌가, 성근. 자네도 쌓인 것이 많지 않은가?’
좌명의 얼굴에 그렇게 사악한 표정이 깃들 수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목소리와 기품에 어울리지 않게 이 녀석 역시 언제든지 타락할 수 있는 놈임이 분명했다.
그 와중에 선진이 소매에서 꺼낸 것은 작은 종이를 접어 만든 물건 여러 개였다.
‘투전판에서 딴 거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투전판이요? 그런 데도 다니십니까?’
‘아, 이놈의 입이 방정이라니까. 아무튼 낄 거냐? 말 거냐? 이 새끼들아.’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몸은 목적지로 정한 성균관 담장 아래까지 와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미리 온 것인지, 앞에서 두 명분의 심의 그림자가 달빛에 비췄다.
“야, 늦었잖아!”
“저희가 일찍 온 것입니다. 선진님.”
“너도 참 눈치가 없다. 김좌명. 벗을 대놓고 갈굴 수 있는 기회는 얼마 없단 말이다. 갈굴 수 있을 때 갈궈야지.”
낮은 목소리지만 이미 둘은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사이가 퍽 친해진 듯싶었다.
“이곳을 약속장소로 삼으신 이유는 담장 너머가 비복청이기 때문입니까?”
“그래. 그쪽으로 눈치는 빠르구만. 빠르게 치고 빠진다.”
선진은 아까 보여주었던 종이로 접은 물건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살짝 흔들어보니 차각차각 소리가 나는 것이 안에 작은 자갈이라도 든 듯했다.
손에 그것을 하나씩 쥐여준 선진은 담장을 두고 돌아섰다. 양팔이 동의를 구하듯 올라가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자, 안한수, 어쩔 거냐? 여기까지 왔는데. 빼진 않겠지?”
“까짓거, 한 번 해봅시다.”
어차피 담 넘는 거 걸려봐야 뭐 얼마나 벌을 받겠는가. 그놈들에게 엿을 먹일 수만 있다면 그걸로 좋을 것이었다.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 안한수.”
“그런데, 이 약……, 쓰는 방법은 제대로 아십니까?”
종이로 된 약첩을 펼쳐보니 나온 물건은 향수를 자극하는 물건이었다.
어린 시절, 시골에 놀러 갔을 때 무얼 잘못 먹어 속이 얹혔던 적이 있었다. 그때, 할머니가 벽장 속에서 꼬깃꼬깃한 종이를 펼쳐 약이랍시고 꺼낸 물건이 이것이었다.
‘뭐랬더라. 기억도 안 나네. 속을 비우는 한약재라고 했는데.’
흰 자갈처럼 생긴 약재였다.
기억 속의 설사약과 지금 손에 쥔 이것은 정확히 일치했다. 그 약을 녹인 물을 마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추지 않는 설사로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쓰는 방법을 아냐니? 그냥 잘게 부숴서 음식에 뿌리면 되는 거 아냐?”
“성근, 자네 염병을 다스리는 약을 만들어냈다더니 의술에 통달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놀라움이 담긴 시선 두 개가 내게 꽂혔다. 그럼 그렇지. 이 양반들, 밥이고 뭐고 부엌 가까이 가 본 적도 없을 분들이고, 한약재고 뭐고 써 봤을 리가.
밥은 여종들이 지어 제때 갖다 바치고, 배가 아프면 의원을 불렀을 사람들이었다. 민간에서 구급용으로 쓰는 비상 의학 따위를 알 리 없었다.
“그렇지 않네. 다만 몇 번 약재를 다뤄 보고 의서를 읽어 본 경험이 있을 뿐이지.”
“아, 시끄럽고. 그래서 어떡해야 한다는 건데? 언제까지 이 담장 아래에서 떠들고 있을 순 없다. 빨리 말해라.”
성질머리 하나 급하구만. 뭐, 시간이 넉넉한 것은 분명 아니었으니 장단 정도는 맞춰 줄 생각이었다.
“보통 진사식당에서 아침식사를 시작하는 시간은 이른 편이니, 비복들은 그 준비를 새벽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유생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자들이니만큼, 그 청결함에는 더욱 신경을 쓰겠지요.”
“어중간한 곳에 뿌렸다가는 비복들의 손에 씻겨나가 효과가 없을 거라는 소리구만. 성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도 부엌일에 대해서는 까막눈일세.”
이런 데서 대학교 자취 경험이 빛을 발할 줄이야. 쌀도 싸구려만 먹어야 했던 흙수저 생활이 오히려 도움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뭐든지 경험해보는 것이 손해 볼 일은 안 된다더니 정말이었어.’
도정한 지 오래되어 바짝 말라버린 쌀을 그나마 맛있게 먹기 위해 찾아낸 방법이었다. 밥을 안치기 전에 오래 물에 불리면 그나마 부드러운 밥을 먹을 수 있었으니까.
지금은 가을, 남도에서는 수확이 시작되고 있을 것이나 그 햅쌀들이 탈곡되어 세곡선을 타고 한양까지 올라와 정미되기까지는 아직 멀었을 것이었다.
임금이 먹는 이천표 쌀밥이면 햅쌀일 가능성도 있겠지. 그러나 성균관까지 그런 배려가 이뤄지고 있을 가능성은 낮았다.
그 말을 들은 좌명과 선진의 얼굴에는 납득의 빛이 돌고 있었다.
어찌하여 양반이 이런 것을 알고 있냐는 마지막 의문 한 조각도 위정자라면 모름지기 백성의 삶을 알아야 한다는 좌명의 말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아마 제 경험으로 이 약은 물에 풀었을 때 짜고 시원한 느낌이 날 것이나, 밥맛을 방해할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적당량만 타면 알아채지 못할 것 같습니다.”
“네놈 없었으면 약은 약대로, 공은 공대로 쏟고 아무 일도 없을 뻔했다. 일단 감사를 표하지.”
“감사는 일이 제대로 마무리된 뒤에 하십시오. 선진님. 그리고 임무를 분장해야 합니다. 세 명이 모조리 약을 타고 다닐 필요도 없고,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려면 망을 볼 사람도 필요합니다.”
앞에 선 선진의 얼굴이 굳었다. 망보는 일만큼은 절대 싫다는 말이 얼굴에 그대로 쓰여 있었다. 그럼 뭐하나. 난 그럴 생각인데.
딱 봐도 섬세해 보이지 않으면서 몸은 날랜 사람이면 써야 할 자리가 따로 있기 마련이었다.
“선진님이 망을 봐주십시오. 저와 좌명이 이것을 물에 풀어 약을 타겠습니다.”
“뭐? 투전판에서 약 구해온 것도 나고, 이 계획을 짠 것도 난데, 제일 재밌는 일에서 빠지라고? 이게 말이야 똥이야?”
“적재적소(適材適所)입니다. 선진님.”
그러나 불만이 가득한 얼굴과는 달리 선진의 말꼬리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설득에 무게가 있으면 뜻도 굽힐 줄 아는, 꼬장꼬장한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성리학이고 나부랭이고 헛소리라 하셨지만 논어는 통달하셨지 않습니까. 공자께서 군자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인부지불온하면 불역군자호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논어 첫 장에 나오는 구절을 누가 모를 줄 아냐! 알았다! 알았다고!”
“쉿, 목소리가 큽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
내 제자들도 알고 있는 부분이니 선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말투는 여전히 거칠었으나 이제 더 이상의 반박은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럼, 좌명. 자네도 명심하게. 이만큼의 분량을 한 됫박씩의 물에 각각 타 흔적이 없어질 때까지 저은 후, 다시 그 물을 불리고 있는 쌀에 붓고 잘 뒤섞어 주어야 할 것이야.”
“알았네. 비복청에 들어가서 다시 지시를 해주게.”
그때, 어깨로 손 하나가 와 닿았다. 선진이었다.
“야, 이제 시간 없다. 밑에서 받쳐 올려줄 테니 그대로 담장 넘어가라.”
“그렇게 담장 위로 올라가서 끌어올려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유격 훈련에 끼어있던 2인 장애물 극복 코스를 떠올리게 하는 방법이었으나 선진의 대답은 달랐다.
“이 새끼야. 나 혼자면 이 담장 정도는 발 한번 디디면 넘어.”
“정말입니까?”
“그러니까 괜히 기왓장 깨 먹어서 사람들 깨우지 말고 좌명이 놈이랑 바로 넘어가. 알겠냐?”
날이 서 있는 말과 다르게 선진은 바로 담장에 등을 대고 자신의 양손을 맞잡은 채 기마자세를 취했다. 손을 발판으로 대줄 테니 밟고 넘어가라는 뜻이 분명했다.
조금 불안했으나 여전히 소매로 드러나 있는 선진의 팔뚝은 굵었고, 기마자세로 힘이 들어간 허벅지 역시 튼실해 보였다.
조금 거리를 두고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믿고 몸을 날린 만큼 몸을 공중으로 띄워주는 힘 역시 충분히 강했다.
‘어? 어어?’
이 감각, 느낀 적이 있다. 병살 타구를 처리하다가 방해하려 달려드는 주자에게 발목이 채였을 때의 느낌.
몸이 공중에서 돌고 있었다. 선진이 넘겨주는 손에 너무 강하게 힘을 준 것이 분명했다. 공중에서 겨우 중심을 잡고 한 바퀴를 돌아 비복청 뒷마당에 겨우 발을 붙이는데 눈앞은 어질어질.
나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던 것을 겨우 견뎌냈다. 운동 안 해본 사람이었으면 백발백중 고약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
“자네, 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가?”
‘이…… 이 망나니 인간이……? 쌓인 걸 바로 엿을 먹여?’
나와 달리 담장을 사뿐히 넘어 내 옆에 편안하게 착지한 좌명이었다. 그 정도로 힘 조절을 잘 해준 양반이 나를 튕겨줄 때만 실수할 리가 없지.
잠시 후 정말로 담장을 한 번 걷어차는 소리가 한 번 나더니 선진도 내 눈앞에 내려앉았다. 혼자서도 담을 넘는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으나 이마에 돋은 핏줄은 가라앉지 않았다.
“짜식, 활은 못 쏘길래 운동 신경이 없는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니었구만? 그럼 지시하신 대로 명을 받들러 이 불초한 선진은 사라집지요. 핫핫핫.”
정말로 걸음 한 번에 담장을 넘은 솜씨에 걸맞게 몸을 숨기는 속도도 바람처럼 빨랐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망을 보는데 최적의 인재임은 분명했다.
“저 선진님, 자네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일세. 성근.”
“마음에 들고 자시고 그럼 저렇게 천방지축으로 안 대해줬으면 좋겠다네.”
이제 잡담할 시간이 없었다. 좌명의 손을 이끌어 비복청 뒷문을 헤치고 임무를 수행하러 갈 시간이었다.
※ 작가의 말
작중에 등장하는 하얀색 덩어리는 망초(芒硝)라는 물건입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황산나트륨, 아니지 요새는 황산소듐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그것이 육지의 염수호, 즉 짠 물이 고인 호수 위에 떠오르는데 그것을 따로 정제해 약재로 썼습니다.
동의보감 탕액편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보편적으로 쓰이던 약재이며, 속을 비우는데 쓰이고, 부작용이 적어 현대의학에서도 쓰입니다.
아마 대장내시경 해보신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관장을 해야 했던 경험이 있으실 텐데, 그때 쓰이는 녀석이 이 녀석이거든요. 마시면 몇 시간 만에 물을 좍좍 내쏟게 됩니다.
종기의 열기를 빼는 데도 쓰이고, 구충 후 설사를 시키는 데도 쓰였다 하니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선진이 투전판에서 딴 돈 대신 받을 정도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