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약속
다음 날, 성균관은 예상대로 난리가 났다.
아침 강의 도중에 자리를 비우는 유생들이 속출하더니 결국 표정을 다잡고 수업을 진행하던 교관까지도 꽁무니를 붙들고 명륜당 문을 박차고 나간 것이다.
“아주 속이 시원하구만? 성균관 입학 이래로 이렇게 속이 뻥 뚫리는 일은 처음이다! 이놈들아!”
속이 뚫린 것은 옆에 나란히 걸어가는 선진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해가 중천에 올라있는 시간에 오랜만에 성균관에서 풀려난 나 역시 다른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멀쩡하던 유생들이 전부 설사를 쏟아내니 전염병이 도는 것으로 의심받을 만했다. 소식을 듣고 내의원에서 급하게 파견 나온 의관이 성균관 문을 닫고 증상이 없는 유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참이었다.
“이렇게 선진님이 신난 모습은 처음 봅니다. 동장의 놈 바지가 누렇게 얼룩진 것을 보면서 저도 속이 시원하긴 했습니다만.”
“나를 매번 강가(家) 놈이라 부르며 무시하던 놈이다. 그러면서도 내 재력(財力)을 이용하려는 모양이었는지 아예 척지지는 않으려고 역겹게 굴던 놈인데, 내가 그런 놈이랑 어울릴 수 있겠냐? 핫핫.”
성균관 대다수 인원들이 지금 변소 앞에서 몸을 배배꼬고 있음이 분명했다. 우릴 엿먹이려 하던 동장의와 그 패거리 역시 평등한 죽창을 한 방 제대로 맞았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오는 길이었다.
성균관에 놓여있는 변소마다 줄을 서서 몸을 배배꼬고 있는 그놈들의 역겨운 상판 한둘씩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엉덩이가 누렇게 물들어있는 모습 역시.
집에 가서 괄약근을 풀자니 현대와 같은 이동수단도 없던 시대이니 답이 없었겠지. 그것을 다시 떠올리니 속이 퍼런색으로 편안하게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성근 자네도 요새 쉬지 못해서 얼굴이 누렇게 뜬 모양인데, 쉴 시간이 생겨서 다행이지 않은가. 이대로라면 며칠은 성균관 문을 닫게 생겼네.”
나보다 수업에 열심이던 좌명 역시 기뻐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 듣는 주역 강의 시간에 내 옆구리를 찌르지 않아도 되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일지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교관의 목소리가 묘하게 졸음을 쏟게 만드는 것을. 독학에 익숙해 누군가 가르쳐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 선비들과는 교육의 하한선이 다른 몸이었다.
“자네 말대로 조금 쉬어야 할까? 오늘은 박 초관 댁을 일찍 가볼까 했는데…….”
“그 댁 자제들을 가르치는 일 말인가? 자네도 참 열심이라니까.”
고작 쓰던 벼루와 먹을 구해다 줬다고 기쁨에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는 녀석인데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균관 담을 넘은 이야기를 해주면 그 파란색 눈동자를 빛내며 귀를 기울일 것이었다.
“그럼 저녁에는 할 일이 없겠구만? 좋다. 그럼 이렇게 하자.”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내 이름자를 알려주는 대신 이번 일에 끼라고 하지 않았냐. 역시 통성명은 술 한 잔 하면서 나눠야 제 맛 아니겠냐.”
어차피 날씨도 좋은 거, 제자 녀석들과 할 만한 일이 떠올라 골몰하고 있던 차였다. 뭐, 어차피 해 지기 전에 돌아와야 할 일이니 술 마시는 것은 문제가 없으려나.
“이 건방진 놈, 대답도 없어? 선진이 마시자고 하는데 무슨 일이 있더라도 뛰쳐나와야 하는 것 아니냐?”
“술이야 언제든지 마실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오늘 술을 안 마신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말은 잘한다니까. 됐다. 오늘 집에 못 들어갈 각오 하고 나와라.”
어제 나눈 이야기로도 노는 거 좋아하는 양반인 줄은 알고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이 사람을 더 알고 싶기도 했고, 내일도 쉬는 날일 테니까.
그러나 동의를 구하려 돌아본 좌명의 얼굴은 반대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아, 짚이는 것이 하나 있긴 하지.
“저…… 집에 못 들어간다는 것은 밤을 샌다는 것인지…….”
“당연한 거 아니냐? 한수야, 좌명이 이놈,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아냐?”
“아마 유부남의 한(恨)이겠지요. 자네, 남 미취한 것을 놀리더니 이럴 줄은 몰랐던 것 아닌가, 하하.”
처음에 가볍게 나눴던 술자리에서도 술기운이 오르자마자 감시하던 하인이 끌어가듯 모셔가던 좌명이었다. 그 명을 내린 자에게 꽉 잡혀 사는 것이 안 봐도 뻔했다.
자꾸 혼인하라고 옆구리를 찔러대는 녀석이었으나,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누가 혼인하고 싶어 하겠나. 남들이 결혼 적령기라고 여기는 나이에 솔로인 것이 아쉽긴 했지만.
아주 꿀맛 그 자체였다. 술자리가 시작되면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는 절대 보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사악한 웃음이 입꼬리에 올라앉은 선진 역시 같은 생각임이 분명했다.
“성근, 자네가 나한테 어찌 이럴 수 있는가?”
“불가(佛家)에서는 업을 쌓으며 살지 말라 하지 않았는가, 다 자네의 업보일세. 핫핫.”
“그렇다고 재밌을 게 분명한 자리에서 빠지기도 무엇한데…….”
생각이 복잡해 보이는 좌명이었다.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녀석은 잠시 후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어쩔 수 있나. 손톱자국 둘 정도는 각오해야지.”
“좋다. 좋…… 뭐? 하나가 아니라 둘? 너 첩실(妾室)도 벌써 들였냐?”
“첩실이 아닙니다, 선진님. 오라비의 권위 따위 신경도 안 쓰는 못된 녀석이 건넌방에 들어앉아 있는지라.”
여동생이라도 하나 있는 모양이었다. 왠지 티격태격하던 요안과 요운의 모습에 그대로 좌명과 이름 모를 누이의 모습이 겹쳐져 웃음이 새어나왔다.
“웃지 말게, 성근! 하아, 마음 같아서는 빨리 시집보내 치워버리고 싶은데…….”
“너희 집안도 별나구만. 혼처를 정하면 가야하는 것이 시집 아니냐?”
“부친께서 그 아이를 예뻐하시니 별 수 있습니까. 마음에 드는 사내가 아니면 차라리 홀로 늙겠다니. 그런 왈패 같은 녀석을 누가 받아주겠습니까.”
선진이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선진은 갑자기 입꼬리에 사악한 웃음을 올리더니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뭔가 불길했다.
“그래도 네놈 피어난 상판을 보니 누이도 사람같이 생겼을 텐데, 설마 시집을 못 가려고?”
“겨우 면추(免醜)한 정도입니다. 선진님이 받아주시겠습니까?”
선진이 보기에도 좌명은 잘생긴 모양이었다. 글만 읽어서 그런지 깨끗한 흰 피부에 붉은 입술, 선비처럼 선선하게 생긴 인상. 시대를 막론하고 먹힐 얼굴이었다.
허나 오라비가 잘생겼다고 누이까지 예쁘란 법은 없었다. 실제로 좌명의 얼굴에 댕기머리를 씌운 광경을 상상해보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나 같은 망나니한테 누이를 주려고? 그보다 옆에 괜찮은 놈이 하나 있지. 나는 네놈이 한수를 매제(妹弟)감으로 점찍고 접근했다 생각했는데.”
“예? 그런 이유는 성근을 벗으로 삼은 데 있어 정말로 한 톨도 작용하지 않았습니다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꽤나 좋은 처리 방안이군요.”
이제는 둘의 눈이 한꺼번에 내게로 향해오고 있었다.
처리 방안? 그런 왈가닥은 요안이 하나로 충분한데?
***
“와! 선생님! 저게 진짜 단풍이란 건가요? 산이 불타는 것 같아요!”
“쉿, 장옷을 쓴 아녀자가 할 목소리가 아니라 하지 않았느냐.”
“에이, 또 그러신다. 주위에 사람도 별로 없는데.”
그 왈가닥을 데리고 바깥나들이를 나온 참이었다. 그날, 성균관 담을 넘은 이야기의 효과는 확실했다. 그 이야기를 들고는 몇 번이고 배를 잡고 깔깔거린 요안이었다.
특히 두 명의 친구 이야기가 재밌다고 했다. 선진은 아직 이름도 모르는데 친구가 맞긴 한가 의문이 들었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고.
“또 아버님에게 외출 금지 당하고 싶으면 계속 스승님 말씀 듣지 말든가.”
“뭐? 아버님한테 이르기라도 할 거야?”
“너 허튼짓 못하게 감시하라고 스승님이랑 내가 고생 중인 거잖아. 이게?”
요운, 요안 남매는 또 투닥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는 입꼬리에 미소가 걸린 것이 느껴졌다. 귀여운 녀석들.
그사이에 한 번 또 몰래 장옷을 뒤집어쓰고 몰래 바깥나들이를 나간 모양이었다. 오라비의 태도를 보니 걸린 것이 분명한데도 요안의 툭 튀어나온 입술을 보니 그 짓거리를 그만둘 것 같지는 않았다.
“저 봉우리가 인왕산인가요? 너무 예뻐요!”
“그래, 장동팔경(壯洞八景)이라고 불리는 경치이니 마음껏 감상하거라.”
“와아…….”
현대로 치면 경복고등학교 근처쯤 되려나. 대강 북촌에서 서쪽으로 걸어온 거리에 경복궁터와의 거리까지 셈해보면 지금의 위치는 그쯤 될 것이었다.
장옷 사이로 비치는 요안의 투명한 피부와 살짝 벌어진 입술에는 단풍이 내려앉아 있었다. 괜히 머쓱해져서 요운을 돌아보니 녀석의 표정 역시 누이와 같았다. 요안에게 눈을 흘기던 녀석도 어느새 작은 탄성을 내뱉는 중이었다.
장동(壯洞)이라 불리는 동네였다. 가을을 맞아 단풍과 은행이 불타 내려앉은 경치와 인왕산의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모습은 온갖 풍경사진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눈에도 아름다웠다.
“열심히 구경하거라.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왜죠? 선생님?”
“인왕산이 무엇으로 유명한지 모르느냐. 저 산에 범이 드글거리기 때문이다.”
남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렇게 멀리 나와 본 적이 없어서 더 불안한 모양이었다.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왕산에서 내려온 호랑이가 한양을 활보하던 일이 드물지 않던 시기였다.
“그…… 그래도 스승님은 범을 잡아보시지 않았습니까. 스승님만 계시면 든든합니다.”
“운이 좋아 앞발을 다친 어린놈을 네 명의 장정이서 겨우 잡았을 뿐이다. 다친 사람도 있었다.”
김 갑사가 없었더라면 잡기는커녕 호랑이 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아이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다.
켁 소리가 요운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왔다. 작게 숨을 삼킨 소리를 낸 것은 어느새 내 옆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요안이었다.
그 소리들을 들은 탓인지, 요운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소리가 내 목에서도 튀어나왔다. 목이 칼칼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거의 말을 쉴 틈 없이 가이드를 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크흠. 요운아. 내 심부름 하나 해 줄 테냐.”
“예. 스승님. 무엇인지요?”
“목이 타는데 지닌 물이 다 떨어졌구나, 물병을 줄 테니 아까 본 우물에서 물을 좀 떠 오너라.”
요운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얼굴에 불안이 조금 남아있었다.
“아, 범이 이 시간에 나오진 않겠지요?”
“그래. 해가 지기 전에만 북촌으로 돌아가면 안전할 것이다. 천천히 떠와도 좋으니 길이나 잃지 말거라.”
사기로 된 물병을 받아 든 요운은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려 우물이 있는 자리로 향했다. 영특한 아이이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지만 괜히 덧붙이는 소리였다.
“으으…….”
범 얘기가 계속 나와서 그런지 옆에 서 있는 아이는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그렇게 범이 무섭느냐. 요안.”
“엄마가…… 아니 어머니가 매번 잘못한 일이 있으면 범이 잡아간다고 하고 깜짝 놀래키셔서…… 조금 무서워요…….”
조금만 더 하면 아예 고양이를 닮은 눈가가 금방이라도 그렁그렁해질 것 같았다.
‘에휴. 엄마도 애를 적당히 놀렸어야지.’
소매를 아이 쪽으로 내밀었다. 도포의 소매가 가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이것이라도 붙잡으면 요안이 마음을 가다듬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었다.
곧 옷자락을 꼭 잡는 녀석의 손길이 느껴졌다.
아이는 양손으로 꼭 내 소매를 잡고 있었으나 그것으로 범의 공포를 달래기엔 모자란 모양이었다. 소매를 타고 다가오던 떨림이 멎지 않고 있었으니.
※ 작가의 말
현종실록에 수록된 김좌명의 졸기에도 그의 외모가 아름다웠다 언급되어 있습니다. 귀공자의 버릇을 털어버리지 못했다는 단점까지 함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