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이이제이(以夷制夷)
다시 성균관이 열린 날, 등굣길을 걷는 걸음은 조금 무거웠다.
하연의 문제는 아니었다. 만나고 잠시 머릿속이 복잡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다행히 정리할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편지 정도만 교환하고 얼굴만 마주치지 않으면 별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녀의 미색과 그날의 분위기에 홀렸던 것일 뿐.
그렇게 나름대로 결론을 낸 마음은 가라앉아 한 점 미동도 없었다. 소매에 하연에게 전할 서찰이 들어있었음에도 그랬다.
더 중요한 일 때문이었다.
보고서를 받은 임금의 답장이 완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이제이 계획을 처음 실행에 옮기는 날이었으니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찰을 전해주는 내 표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자 김좌명 녀석은 실망이 큰 눈치였다.
“자네도 참 냉혈한이구만. 겉봉에 쓴 글씨를 보고도 흔들림 하나 없다니.”
그럴 리가. 하지만 내가 흔들렸다는 사실을 이 동생 바보가 알아서 좋을 일이 없었다. 입을 꽉 다물고 별일 아닌 척하는 수밖에.
“이야기한대로 서찰 정도는 나눌 것일세.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자네 혹시 정말로 여색에 관심이 없는…… 아닐세, 선진이 저기 오는구만.”
다행히 타이밍 좋게 나타난 충신이 좌명의 추궁을 면하게 해주고 있었다.
성격답게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나온 그였지만 오늘만은 봐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시선을 끌어당긴 것은 평소와는 다른 충신의 모습이었다.
“아니, 이 차림새는 뭡니까?”
“왜, 문제라도 있냐?”
“그게 아니라…….”
***
“인기척도 내지 않다니, 웬 무례한 놈들이냐!”
서장의가 쓰는 서재 개인실의 장지문이 활짝 열렸다. 우리 앞길을 막는 장의사환(掌議使喚)을 밀어붙이고 가한 기습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아연실색하는 서장의를 앞에 두고 심의 자락을 펄럭여 앉았다. 소매에서 내 재빨리 펼친 접선(摺扇)이 내 표정을 가려주고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계절과 안 어울리게 날씨가 조금 덥지 않습니까?”
“그 무슨……!”
갑작스런 방문에 놀랐는지 서장의는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했다. 수업을 짼 보람이 있었다.
재회 업무 탓에 강의를 빠지고 홀로 있을 시간을 노렸는데,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장정 셋이 들이닥치는 상황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었다. 심지어 그중 둘은 무인이라 해도 믿을 체구를 가지고 있었으니.
“거두절미하고 묻겠습니다. 동장의와 싸워보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뭣이? 동장의와?”
앞에 앉은 자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성균관 아싸 세 명의 갑작스러운 방문만이 원인은 아닐 것이었다.
“이미 다 알고 왔습니다, 서장의님. 당신이 처한 상황도, 당신이 품은 생각도.”
“말도 안 되는 소리. 성균관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 망발을 지껄이느냐?”
애써 평온을 가장하는 서장의였으나 목소리에는 이미 힘이 잔뜩 빠져있었다.
기세가 올랐을 때 두들겨야 했다. 불이 번지듯이 맹렬하게.
“아직도 부정하시는 겁니까? 소생의 눈이 옹이구멍이어도 두 장의(掌議) 사이의 위계가 위아래로 나뉘어져 있다는 사실 정도야 이미 눈치를 챘습니다만.”
“신방례 자리에서 조금 보았다고 아는 척이냐? 그 자리에서는 사정이…….”
“대충은 알고 있지요. 판서까지 지내신 부친께서 호란 때 저지른 실책 때문에 풍양 조씨 가문이 맥을 못 추고 있다는 사실까지도요.”
뭐라 입을 열려고 하던 서장의의 표정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충신에게 유 서리를 붙여준 결과물이었다.
본디 충신의 소유인 기루는 온갖 소문이 모이기 쉬운 장소, 얌생이 수염을 한 유 서리가 기생 사이를 오가며 정보를 모으기엔 너무나 손쉬웠을지도.
성균관 유생들이 기루와 기방마다 VIP 취급을 받는 이유가 있었다. 그날 만난 기생들에게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김식의 패거리들이 왕초에게 받은 재물들을 매일같이 풀고 다니니 반기지 않을 기방이 어디 있겠는가. 패거리들이 뭉쳐 유소(儒疏)로 협박하는 데다 순라를 담당하는 관청에도 뿌린 뇌물 덕에 통금 역시 무력화된 것이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동장의 김식의 입장에서는 이 자가 최적의 허수아비이지 싶었다.
번지르르한 가문의 일원이라 나름의 영향력도 있는 데다가, 가문의 가주가 호란 도중 도망한 죄를 지어 김자점에게 맞설 명분도, 여력도 없을 것이니.
다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고작 성균관 유생에 불과한 아들에게 김자점 가문이 쏟아붓는 재물의 양이 보통이 아니었다. 아무리 반정공신에 전 도원수였던 김자점도 지금은 벼슬이 떨어지고 한양 출입을 금지당한 자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다음에 파볼 목표는 그 재물의 출처가 될 것이었다. 일단 서장의를 굴복시키는 데는 이 정도면 충분했지만.
옆에 서 있던 충신의 정강이를 팔꿈치로 약하게 꾹 찔렀다. 신호를 받은 충신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허리춤에 찬 물건 하나를 서장의의 서안 위에 툭 던졌다.
무거운 물건임을 나타내듯이 나무에 부딪히는 묵직한 소리가 방을 울렸다.
“다시 묻겠습니다. 동장의와 싸워보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이 주머니는 무엇이냐?”
“군자금입니다. 본디 가지고 계시던 세력이 없으셨던 것도 아니니 재물로 굴러가는 동장의 세력을 견제하기에는 은자만 한 것이 없겠지요.”
두 장의 사이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것은 재물일 것이었다. 일단 서장의의 세력을 김식을 견제하는 데 이용하려면 사료를 먹여 키울 필요가 있었다.
헌데 떨리는 손으로 말없이 재빨리 그것을 소매로 넣는 서장의의 얼굴에는 경계심만 더 올라오고 있었다. 역시 동장의 상대로 이 정도는 부족한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받아 넣으신 것을 보니 저희의 성의를 받아주신다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내게 왜 이런 거금을 주는 것이냐? 왜?”
“거금이요? 후후……. 풍양 조씨 정도 되는 가문이면 그 정도로는 성에 안 찰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굳이 좋게 말씀 안 하셔도 알지요.”
충신이 옷자락을 뒤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리 약속한 상황이었다.
그가 오늘따라 펑퍼짐한 옷을 입고 온 이유가 있었다.
쿵…….
이번에 다시 서장의의 서안을 강타한 물건은 묵직함의 차원이 달랐다. 책상을 뒤덮을 것처럼 올라가 있는 물건은 커다란 자루 하나였으니까.
충신이 펑퍼짐한 옷자락 사이로 허리에 감고 온 물건이었다. 충격에 풀린 자루 입구에서 은자들이 모래가 흐르듯이 쏟아져 내렸다.
순간 앞에 앉은 자의 얼굴에서 경계심이 증발했다. 충격에 숫제 넋이 나간 듯했다.
“도대체…….”
“이 정도로도 부족하십니까? 은자를 더 준비하오리까?”
“은자가 부족하단 말이 아니다. 대체 왜 내게?”
하긴 갑작스레 얼굴만 알던 놈들이 찾아와서 다짜고짜 거금을 내밀면 그렇게 느껴져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 쐐기를 박을 때가 되었다.
쾅.
식은땀을 흘리는 서장의의 얼굴이 눈앞에 바싹 다가와 있었다. 내가 몸을 일으켜 책상을 세게 짚었기 때문이었다.
“대성전 뒤에서 장의 두 분이 나눈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꽤나 굴욕적인 상황이었다던데요.”
“아니, 그걸 어떻게……?”
“한양은 뒷골목에도 주상전하의 눈과 귀가 달려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균관 안에 귀 몇 짝 다는 것은 소생에게도 어렵지 않지요.”
실은 충신이 갑갑한 나머지 올라간 대성전 앞 은행나무에서 우연히 들은 것이지만, 그 내용이 유생 여럿의 목을 날려버릴지도 모르는 것인 이상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곧 알성시(謁聖試)가 치러질 예정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설마 시관(試官) 선정에 상피제(相避制)가 없다는 이유로 연줄과 재물을 동원해 급제하려는 유생은 없지 않겠습니까?”
서장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반응을 보니 충신이 들은 이야기의 신뢰도에는 문제가 없지 싶었다.
“동장의와 패거리를 짓고 몰려다니는 놈들의 아비가 시관으로 선정될 확률이 높기라도 한 것일까요? 아비가 자식을 전폭적으로 밀어준다고 해도, 도를 넘은 일이 아닙니까?”
“이…… 이놈이!”
“설마 한 몫 끼시기라도 하려던 것입니까? 청금록에서 영삭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얼굴에서는 혈색을 찾아보기 어려웠으나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낸 서장의였다. 흐르는 식은땀으로 세수라도 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그…… 그렇지 않다! 그 건은 동장의가 나를 희롱하려 꺼낸 말에 불과하다!”
“소생 역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방금 꺼낸 말은 시험에 불과했지요.”
직접 들은 충신이 생각하기에도 김식은 서장의를 부정행위에 끼워줄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다고 했다. 그저 굴욕을 주기 위한 도구로 썼겠지.
“제가 성균관에 들어온 연유는 서장의님도 잘 알고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성균관에서 탄압을 받고 있는 연유 역시도요.”
어쩐지, 그저 임금의 총애를 받아 성균관에 들어온 시골 선비에 대한 따돌림치고는 정도가 지나치더라. 친척의 일이어서가 아니라 본인들도 찔리는 것이 있으니 그런 행동이 나온 것이었다.
“그것이 무슨 상관이…….”
“그럼 제가 누구와 연결되어있는지도 아시겠지요. 아직도 결단을 못 내리시는 겁니까?”
소매에서 서찰 한 장을 꺼내 팔랑거렸다. 임금에게 서계를 올리고 받은 답장이었다.
동장의 패거리가 알성시 급제를 위해 모략을 꾸미고 있다.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 내용이 그것이었다. 물론 서장의의 이름은 거기서 빠져 있었고.
임금의 반응이 증거가 없다며 뜨뜻미지근한 것이 짜증 나긴 했으나 예상 범위 안이었다. 능양군 놈이 그럼 그렇지. 다만 인조의 답장 내용을 모르는 서장의에게는 충분한 먹힐 만큼의 허장성세였을 것이다.
대리과거를 고발해 임금의 연줄로 성균관에 들어온 자가 부정과거에 대한 정보를 틀어쥐고 있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 내 앞에 앉은 자가 멘탈을 부여잡고 있는 것도 용했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시지요. 누가 보면 제가 서장의님을 겁박이라도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이?”
어차피 이 자는 내 장기말로 이용할 자였다. 마음을 꺾는 것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나를 한패로 끌어들이기라도 할 속셈이냐? 아니면 이걸 받고 동장의 대신 네놈 명을 따르라?”
“그럴 리가요.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저희가 원하는 것은…….”
서장의의 목울대가 꿀꺽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든, 내 입에서 나올 말에 대한 당황이든 그 속내는 이미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지 싶었다.
“정보입니다. 특히 동장의 김식에 관련된 정보. 그것만 충분히 전달해 주신다면 그 재물은 서장의님이 쓰고 싶은 곳에 쓰시면 될 것입니다.”
“고작 그것을 바라고……?”
“‘고작 그것’이라고 말씀하신 건을 판단하는 것은 소생입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을 텐데요.”
손에 든 접선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나비 한 마리가 만든 날갯짓만큼 미약한 바람이었으나 서장의는 움찔거리고 있었다.
“어차피 저희가 바라는 것과 서장의님이 바라시는 것은 같지 않습니까. 갑자기 늘어난 안동 김씨 집안 씀씀이의 출처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대신 동장의의 팔다리를 쳐내고 피를 흘려줄 사람이 필요하단 말이냐. 내가 너희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어쩌려고?”
이미 넘어온 주제에 꼬장꼬장하게 따지기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렇게 말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텐데. 자신의 위치를 자각시킬 필요가 조금 있어 보였다.
“이미 소생이 대성전에서 나눈 대화를 알게 된 이후로는 반항할 자격이 없으실 텐데요? 혹여라도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그 재물의 힘과 저희가 아는 정보가 어디로 향할지는 아시겠지요.”
“윽…….”
“그러니 혹여나 배신할 생각은 마십시오. 이 정보가 누구에게서 나왔겠습니까? 대성전 그 자리엔 두 분밖에 없지 않으셨습니까?”
“뭣이? 설마?”
“김식에게 감사하십시오. 이제 와서 소생을 포섭하겠다고 더러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당신의 목을 붙여 둘 일도 없었겠지요.”
거짓을 반쯤 섞은 이야기였으나 효과는 뛰어났다. 쐐기가 깊숙이 박혀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일으켰다. 보지 않았지만 앞에 앉아있던 자의 표정이 어떨지는 미루어 짐작이 가능했다.
“저…… 저기!”
“김식에 관한 정보라면 약점에 관한 것이든 무엇이든 좋습니다. 서장의님이 잘해주신다면 은자는 이것으로 끝이 아닐 것이니, 그 재물로 깨끗한 세력을 다시 세우면 될 것입니다.”
“그래도…….”
“곧 전달받을 서찰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본인에게 이득이 될지.”
홱 하고 몸을 돌렸다. 흩날리는 도포 자락에서 불어온 바람을 얼굴에 그대로 맞는 서장의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문지방을 넘자마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했다.
이제 갑(甲)은 나였다. 서장의의 고삐는 내 손에 틀어쥔 상태였고, 그런 자의 생각대로 움직여 얕보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서장의의 코를 눌러버리고 향한 곳은 존경각이었다. 명륜당에서 치러질 오후 일강까지 시간을 죽일 곳도 필요했고, 마음 놓고 대화를 나눌 곳도 필요했으니까.
오래된 종이 냄새와 쌓인 먼지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도서관에서는 떠들지 말라고 했으나 지금 시간에 존경각에 있을 유생은 우리뿐이었다. 다만 오가는 목소리는 둘 뿐이었는데, 방금 일에 질려버렸는지 좌명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보라, 하긴 좋든 싫든 동장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놈 아니냐. 곧 보내올 서찰이 기대되는구만.”
“머리가 굴러가는 자라면 알겠지요. 어디에 붙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숫제 재물로 때린 격이 아니냐. 한수 이 미친놈. 그런 연출을 할 발상은 도대체 어떻게 한 건지.”
“그만큼의 은자를 들고 온 것은 사형이 아닙니까. 기대에 부응했을 뿐입니다.”
그 정도 인물을 매수하는데 은자 한 주머니로는 모자랄 것이라며 자루 가득 은자를 들고 온 충신이었다. 헌데 그걸 진짜로 다 써버릴 줄은 몰랐겠지.
“손이 작다고 한 말 때문에 저지른 짓은 아니겠지? 이렇게 무식하게 은자로 뺨을 때리는 상황은 처음 겪어본다. 네놈은 대체…….”
“액수가 크면 클수록 효과 역시 비례하지 않겠습니까. 단순한 이치지요.”
서장의 앞에 던져놓은 금액이 크면 클수록 우리에게 거스르려는 생각이 더 꾹 눌러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왕 돈을 쓸 거, 리스크는 줄일수록 좋았으니까.
어차피 두 장의 사이에서 오간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한 협박거리가 되지 싶었으나, 그걸 들은 임금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한 것을 보아 효과가 오래 가지 않으리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말은 잘한다. 내 피 같은 재물을 그렇게 써 놓고는.”
“피 같다니, 자존심 때문에 그만한 은자를 무리해서 준비하신 겁니까?”
“아무리 내가 가진 재물이 많다 해도 그 정도면 큰 타격이지. 아버님께 손을 벌리기까지 했어야 할 정도였다고. 네놈은 남의 돈이니 함부로 썼겠지만…….”
하긴, 좀 큰돈이 나가긴 했나. 그 자루에 든 은자의 규모는 내가 평생 벌어도 벌 수 있을지 모를 수준이었으니. 계속해서 혼자 꿍얼거리는 충신에게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남의 돈이라니요. 말이 심합니다. 사형, 그나저나 부친께 손을 벌렸다니 저 때문에 너무 무리하신 것 아닙니까?”
“나도 그렇게 아버님이 흔쾌히 그 정도의 재물을 내어주실 줄은 몰랐다. 벗이 생겼다고 말씀드리니 앞뒤를 안 가리시더라.”
그동안 오죽 속을 썩였으면 고작 성균관에서 벗이 생겼다는 말에 충신의 부친이 그렇게 큰돈을 내줬을까. 그래도 그 덕분에 제대로 일을 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 발상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충신의 지갑을 내가 비웠으면 조금이라도 채워줄 방도를 마련해 줘야 양심이 편하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