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월급도둑
“말도 안 되는 소리. 네가 어떻게 그 큰돈을 채워 주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방금 전까지 살짝 풀 죽어있던 모습과는 달리 충신의 목소리에는 조금 힘이 돌아와 있었다.
“발상에 불과한 것이니 받아들이는 것은 사형에게 달렸습니다. 믿기시지 않는다면 그냥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까?”
그 말에 숫제 콧김을 뿜을 것처럼 달려드는 충신이었다.
이렇게 단순한 양반이 왜 습관처럼 꼭 한 번씩은 뻗대는지. 그 꼴을 오래 겪어보니 성격이 그냥 이렇다 하고 받아들여야지 싶었다.
“제가 보아하니 세간에서 향유를 만들어 바르거나 향낭을 소지하는 식으로 향을 즐기던데, 맞습니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충신이었다.
남원에서 어사출두를 마친 후, 성 영감도 방 안에서 송진에 솔잎과 솔방울을 으깨 섞어 작은 목합에 넣는 것을 본 적이 있던 터였다.
처음 맡았을 때는 솔잎 향 음료수의 물파스 맛이 떠올라 진저리가 쳐졌지만, 익숙해지니 나름 선비에게 어울리는 향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어쨌거나 시원하고 상쾌한 향이었으니까.
아마 기생들에게서 나던 묘한 향은 향낭에 넣은 사향이 근원이었겠지. 정신을 못 차리게 하던 오묘한 향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날 기생들에게 심하게 혼쭐났기 때문일지도.
“바르는 향유는 씻어내기 곤란할 것이고, 향낭은 품은 향이 처음에는 진해도 나중에는 흩어져버리는 문제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기루의 기생들도 진한 향을 원하거나, 옷이 얼룩지지 않는 것을 원하거나, 둘 중 하나 때문에 고민하는 것을 많이 봤지. 여자도 모르는 놈치고는 제법인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여기서?”
책장의 먼지가 떨어져 나올 정도로 껄껄거리며 웃는 충신이었으나 눈매는 여전히 매서웠다. 돈 냄새를 맡은 듯했다.
결국 그걸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향수일 것이었다.
충신이 대접해 준 술에 솔잎향이 잘 녹아있던 것에서 떠올린 발상이었다. 조선시대에 향수를 썼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으니 알코올에 향료를 녹인다는 아이디어는 획기적이겠지.
“……독주와 기름은 서로의 냄새를 가려주니, 여러 번 증류해서 독하게 만든 술에 향유를 타서 그 비율을 알맞게 조정한다면 끈적이지 않고 더 진한 향을 얻을 물건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충신의 눈꺼풀이 치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 감을 잡은 것이 분명했다.
“그래, 여기서 그런 고급술에 옷자락을 제일 많이 적셔본 것은 나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발상을 떠올리지 못하다니…….”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모르는 단순한 발상입니다. 너무 무겁게 여기지 마십시오.”
예전에 기념일에 선물한답시고 셀프 메이드 향수를 만든 적이 있었다.
향을 오래 잡아두고 싶은 정도에 따라 에탄올과 정제수의 비율을 조정하고, 거기에 향유를 용해시키면 되는 비교적 간단한 작업이었다. 재료만 적절하면 조선 시대에도 충분히 재현될 수 있겠지.
나는 즉흥적으로 던진 말이었으나, 그걸 전해 들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혀 아닌 모양이었다. 턱을 긁적이며 눈동자를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는 충신은 이미 돈 벌 계획을 머릿속에서 짜 맞춰가는 듯했다.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해주시는 겁니까?”
“시끄럽다. 생각에 방해된다. 아.”
대답을 하면서도 이쪽으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는 충신이었다. 끊임없이 입술 아래를 긁어대던 그의 검지손가락이 멈춘 것은 그때였다.
“기생들에게 잘 팔릴 향은 몇 개고 잘만 떠오르는데, 다른 쪽은 영 젬병이구만. 머리를 좀 더 빌려야겠다.”
“머리를 빌리다니요?”
“거기 입 다물고 있는 놈, 네 아내에게 선물할 일이 있다면 무슨 향을 고를 거냐?”
갑작스레 말을 건 탓인지, 대화에 끼지 않고 서고의 책을 뒤적거리던 좌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귀는 열어두었던 듯, 충신의 말에 반문하는 일은 없었다.
“향 말씀이십니까? 안사람은 그런 걸 뿌리지 않아도 좋은 향이 납니다만.”
“이 공처가 놈, 그런 대답 할 줄 알았다. 그래도 생각해 봐라. 여기 유부남은 너뿐이라고.”
“굳이 선물하자면 안사람이 좋아하는 복사꽃 향을 잡아다 주고 싶군요. 계절이 바뀌어도 봄마다 혜화문 밖 성북동으로 꽃구경을 가던 추억이 떠올라 퍽 좋아하지 싶습니다.”
충신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음 공격 대상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한수 너는 어떠냐? 네 정인에게 어떤 향을 선물하고 싶냐?”
“예?”
“그날 술 취해서 그놈 집 노비 손에 수습되어 갔으면 이놈 누이동생과 분명 마주쳤을 게 아니냐. 내 말이 틀렸냐?”
귀신같은 짐작이었다. 돈 냄새만 잘 맡는 것이 아니라 남녀관계도 빠삭한가?
“안 그러면 좌명에게 따로 서찰을 줄 일이 없지 않냐. 너희 둘이 서찰 주고받을 은밀한 관계도 아닐 테고.”
“아, 그 이야기셨습니까?”
난 또, 뭐라고.
하연과의 만남이 내 마음을 흔든 것은 사실이었으나 어차피 피차 나이가 꽉 찬데다 나는 당분간 혼인이 어려우니 인연이 닿기 힘든 몸이었다. 때문에 마음은 잘 정리되어 흔들릴 틈이 없었다. 아마도.
“그저 얕은 학식이나마 서찰로 가르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시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뭐?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 걸 보니 정말이지 싶긴 한데.”
“굳이 선물하자면…….”
매력적인 사람이긴 했다. 내 처지가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인연이 닿았을지도. 그랬다면 지금 선물하고 싶은 향이 몇 가지고 생각났을 것이었다.
그런데 터무니없게도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다른 녀석이었다.
“……묵향, 먹 향기가 풍기는 향수가 좋겠습니다.”
“실망일세, 성근. 내 누이가 학문을 즐긴다고는 하나 풍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어려운 대답이 아닌가.”
“왜, 나름 멋진 대답이구만. 한양에서 먹 냄새를 제일 풀풀 풍기고 다니는 것은 성균관 유생들일 터, 네놈 향으로 정인까지 덮어버리겠다는 심보가 아니냐?”
“그게 그렇게 됩니까?”
전혀 아니었다. 마음대로 착각하고 떠들라지.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까.
그저 새 먹과 벼루를 받았다고 뛸 듯이 기뻐하는 녀석을 보고 흐뭇하던 마음이 갑자기 떠오른 것뿐이었다. 선물하면 그 뿌듯한 감정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을 것이었다. 연애감정과는 전혀 달랐다.
공부를 좋아하는 것은 하연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그녀 역시 먹 향수를 받으면 싫어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서늘한 미모의 그녀에게는 더 어울리는 향이 있을 것이었다. 눈 속에 피어나는 매화라든지.
그리고 나 말고 더 어울리는 남자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갑자기 속이 뒤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
“선생, 혼담이 오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오?”
수업이 끝난 후 갑작스러운 학부모 면담이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금발 태닝 초관은 다짜고짜 안부를 물어왔다.
“혼담이라니요. 무슨 혼담 말입니까?”
“요운이 녀석이 수업시간에 들었다고 하던데, 궁금해서 그러오.”
아, 짚이는 것이 있었다. 과외 시간마다 으레 하던 재미있는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술에서 깨어난 자리에서 아름다운 규수를 만나셨다 했습니까?’
‘그래. 그 정체는 벗의 누이였지만 말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그 순간은 헷갈리더구나.’
요운이 녀석은 내 말을 듣고 상상의 나래를 가득 펴는 듯했다. 뭐, 그놈도 몇 년 안 있으면 혼인할 나이가 될 터이니 자신의 배필을 그렇게 만나는 꿈이라도 꾸지 싶었다.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요안은 평소보다 반응이 조금 덜한 편이었으나 공감할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오라비와 앞다투어 외운 것을 자랑하는 것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귀여운 녀석.
그런데 그 얘기가 어떻게 혼담이 오가는 얘기로 탈바꿈하여 박연의 귀로 들어간 것인지.
“그저 벗의 누이를 어쩌다 만난 일에 불과합니다. 이야기가 이상하게 전달된 모양이군요.”
“아니, 아무리 집안마다 다르다고 하나 혼기가 찬 처녀를 함부로 외간 남자에게 보여주는 집안이 조선에 어디 있단 말이오?”
그런 오해가 생길 만도 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근데, 이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 집안 역시 청빈한 관리의 집안이라 일손도 적었고, 무엇보다 초관 어른도 요안이를 제게 거리낌 없이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어험! 그것은 이것과 다른 이야기지 않소. 어험!”
정곡을 제대로 찔렀다 싶었다. 내로남불, 이중잣대는 이쪽에서 사양이었다.
“그럼 초관 어른도 요안이와 저를 혼담 오가는 사이로 인식하고 계시다는 말씀이십니까?”
“어? 아니, 그렇다는 게 아니고…… 요안이는 아직 어리지 않소. 말을 들어보니 그쪽 규수는 혼기가 꽉 찬 듯한데…….”
“혼기 전에도 혼례를 올려두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라 얼마 전에 배웠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크흠. 크흠. 박연은 갑작스레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사례라도 들린 건가.
그 말에 금발벽안 아저씨의 뜬금없는 소리가 끊겨 나간 것은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선생을 이렇게 부른 것은 그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 아니라 미안한 일이지만 부탁할 일이 하나 있어서요.”
“부탁이라니, 말씀만 하십시오. 여력이 된다면 힘껏 돕겠습니다.”
“말만이라도 고맙소. 헌데…….”
말꼬리를 한껏 흐린 박연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는 힘이 없었다. 한참 어린 과외선생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체면이 깎이는 일임이 분명하니까.
수업료를 조금 기다려달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겨우 꺼내는 박연의 얼굴은 미세하게 구겨져 있었다.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재물에 쪼들리는 처지도 아니고요.”
“고맙소.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때, 의문점 하나가 슬며시 머릿속에서 밀고 올라왔다. 내가 수업료를 비싸게 받는 것도 아닌데 박연이 갑작스레 수업료를 밀릴 이유가 없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 이유를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재물을 쓸 곳이 생기셨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게…….”
한참을 고민하며 손끝을 비비적거리던 초관은 조금 후에야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이번 달 녹봉이 또 감록(減祿)되었다고 했다. 그것도 꽤 큰 규모로.
그러면서도 안 선생 아니었으면 아이들 공부를 가르치기는커녕 자습시키기도 어려웠을 것이라며 공치사를 덧붙이는 박연이었다. 멋쩍어 뒤통수를 긁적이는데 문득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비슷한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기억이 있었다. 좌명과 자수원으로 활을 쏘러 간 날, 만났던 향관청 제관 역시 녹봉이 줄었다고 울상이었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제가 대사간 영감께 여쭤보겠습니다. 조정의 높으신 분이라면 이유를 아실지도 모르지요.”
“병조에서 녹과를 발급하며 하는 말로는 호란으로 국고가 빈 것이 이유라고 하였소.”
이상했다. 아침저녁으로 집주인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면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돈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집안 살림 이야기이니 성 영감이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나라 형편을 그토록 염려하는 사람이 국고가 비어 관원들의 녹봉이 깎였는데 그 이야기를 안 할 리가.
내 말을 들은 초관의 얼굴에는 그늘이 더 짙어지고 있었다. 그 역시 이상한 점을 느낀 듯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걸리는 것이 하나 더 있소. 훈련도감의 동료들도 이번처럼 큰 규모의 감록은 처음이라 했소.”
“갑자기 국고 사정이 확 나빠졌다는 소식은 저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만……. 정말로 이상하군요.”
지금 머릿속에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두 가지 사실이 둥둥 떠 있었다.
그 사이를 잇고 있는 것은 가늘디가는 심증에 불과했으나, 내 직감은 계속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것은 본래 내가 목표로 삼았던 자일 것이다.
※ 작가의 말
1. 녹봉과 녹패, 녹표.
조선시대 관원(한양 기준)의 보수 지급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조와 병조에서 녹과, 즉 월급명세를 정한 증서를 발급한다.
2. 그 녹과를 전해받은 호조에서 녹봉인수증인 녹표를 발급한다.
3. 관원은 그 녹표를 들고 광흥창으로 가 녹봉 실물을 인수하고 지급증을 받는다.
대개 관리들은 녹봉을 직접 수령하지 않고 관청의 사령이나 서리를 시켜 대신 받았고, 녹봉을 받으면 노비가 말을 끌고 와서 운반해 갔지만 사정이 좋지 않은 관원들은 직접 수령했다고 합니다.
2. 만만한 게 공무원 봉급
헌데, 녹과가 법과 규정으로 정해져 있다 해도 그것이 깎이는 것이 일상다반사였습니다.
법과 규정에 정해진 공식 녹과 역시 왜란, 호란 이후로 재정난을 이후로 점점 삭감이 되는 마당에 말이죠. 부패가 끓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선조 시기에 벼슬살이를 하던 유희춘이라는 양반이 기록을 남겼는데, 쌀 2섬, 현미 6섬, 좁쌀 1섬, 콩 7섬, 명주 1필, 규격베 3필, 종이돈 6장을 받아야 하나 실제로는 쌀 8섬, 콩 7섬, 명주 1필, 규격베 3필을 받아 규정보다 좁쌀 1섬, 종이돈 6장을 덜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가 한 번이 아니었죠.
이렇게 중국에서 칙사가 오거나, 나라에 흉년이 들거나, 왜란이나 호란 등으로 국고가 비면 만만한 것이 관료들의 봉급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급 관료 대다수는 수증(受贈)이라고 하여 지방관들이 올려보낸 뇌물에 의존해서 생활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관습으로 굳어질 정도로요.
위에 언급한 유희춘이라는 양반은 전라감사 재직기간(선조 4년 3월─10월)을 제외한 10년 동안에 2,796회에 걸쳐 물품을 받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