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39화 (39/298)

39화. 드러나는 꼬랑지

“국고가 비었다?”

“예, 나리. 혹시 들으신 것이 있으신지 해서 여쭤보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 또다시 야근을 하고 퇴청한 성 영감 앞에 앉아 이야기를 꺼내든 자리였다. 업무에 지친 대사간에게도 그 이야기는 뜬금없는 소리이지 싶었다.

“그럴 리가. 이번 감록은 곧 있을 세자 저하의 일시귀국 탓일 텐데?”

“감록이 있긴 했나 보군요.”

“쌀이 서 말이나 잘려 나갔지. 그래도 그 정도는 일상적인 일이라네.”

씁쓸하게 웃으며 이마에 얹은 낡은 망건을 쓰다듬는 성 영감이었다. 망건 하나가 쌀 한 말값이니 함부로 사지도 못한다는 말에 허둥지둥 갓을 끌어내려 이마를 가려봤지만 말총 사이로 내 새 망건이 가려질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허탈한 웃음을 짓던 대사간도 박연의 이야기를 자세히 꺼내자 표정이 일변했다.

“박 초관도 쌀 서 말이 잘려 나갔다고? 종구품 녹봉에는 큰 타격이 아닌가?”

“거의 삼 분의 일이 떼였다 했습니다. 때문에 수업료를 미루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그것이 이상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이 거짓을 말했을 리도 없을 것이고.”

흔들리는 호롱불 사이로 비춰지는 성 영감의 눈동자는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듯했다. 그 역시 이 건에서 무언가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아닙니다만 성균관 제관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리, 무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 같은 고관대작들에게 쌀 서 말 정도는 큰 타격은 아닐세. 나만 해도 정해진 녹과가 서른 말 정도는 되니까. 허나 말단들에게도 같은 양을 제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일세.”

머릿속으로 계산을 굴려봤다. 확실히 박연에게 감록된 양이 원래 녹봉에 비해 너무 많았다.

“박 초관의 경우라면 한 말을 제해도 과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무언가 이상하군요.”

“이상하고말고. 사간원의 서리들이나 창도들에게도 들은 바가 없는 일일세. 급료가 그만큼 삭감됐다면 내게 분명 하소연을 했을 터…….”

사간원 하급관리들의 녹봉은 멀쩡한 모양이었다. 이상하다. 무슨 차이가 있지.

궐내각사의 잡직들, 훈련도감의 무관, 성균관의 제관. 아.

“……권력과 먼 곳의 관리들이 납득 못 할 감록을 당했구만.”

“소생의 생각도 그것과 같습니다, 나리.”

앞에 앉은 자의 눈빛이 남원에서 보았던 어사의 그것으로 변해 있었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를 보니 비교적 자유분방했던 남원 생활에 대한 그리움이 뭉클 풍겼다.

“좋아. 이 건은 내게 맡기게. 자네는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은가.”

“성균관의 일 말씀이십니까? 그것과 연결되었을지도 모릅…….”

“아니, 그것 말고. 낡은 망건을 바꾸지 못한 이유를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아, 성 영감의 녹봉이 깎인 명분은 세자의 귀국이었다. 볼모로 가 있는 동안 몇 번 귀국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 시기가 지금일 줄은 몰랐다.

“세자 저하가 돌아오신다는 사실 말씀이십니까.”

“그래, 전하께서 자네와 마주한 이후로 건강이 안 좋으셔서 말이야. 그동안 귀국 요청을 계속 거절당하고 있었으나 이 정도 일이면 아무리 오랑캐라도 마다하지는 못하는 모양일세.”

“그렇습니까.”

“저하께서 돌아오시는 마당에 내가 낸 과제는 충실히 하고 있겠지.”

윽, 찔리는 것이 있어 눈동자가 나도 모르게 옆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제자리로 돌아온 시선에는 방금보다 훨씬 뚜렷하게 잡힌 성 영감의 눈썹 사이 주름살이 보이고 있었다.

“세자께서도 곧바로 돌아오시지는 못할 터이니 지금 타박하지는 않을 것이나, 기한 안에 수준을 맞추지 못하면 재미없을 줄 알게. 실망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야.”

성균관에서 월화수목금금금 보내는 학생에게 미션을 한 가지도 아니고 두 가지를 주어 놓고 이게 할 소린가. 나도 모르게 속으로 이를 갈았으나 할 말이 없었다. 반쯤은 내가 자초한 일이었으니까.

유 서리에게 중국어와 만주어를 배우는 것은 현대 공부의 잡기술을 동원해 어찌어찌 따라가고 있었으나 김 갑사와 무예를 단련하라는 지시는 따를 시간도 체력도 없었다. 가끔 활쏘기 지도를 받는 것이 최선이었으니.

북변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니 이것으로는 모자란다며 길길이 날뛰는 김 갑사에게 겨우 먹잇감을 물려주고 조용히 시킨 것이 얼마 전이었다. 과녁에 반을 맞추는 경지에서 성장이 지지부진한 궁술 덕분에 나온 발상이기도 했고.

“힘든 일인 것은 알고 있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한 나라의 신하로 살아가는 일은 그만큼 고된 일일세.”

다른 사람이었으면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쏟았을 말이었으나 누구보다 몸을 갈아 넣고 있는 성 영감이 하는 말이라 뭐라 할 말도 없었다.

애초에 이 사람에게서 존경심을 느끼지 않았다면 이 자리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 성이성은 내가 가졌던 첫 이미지에서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뼈에 새기겠습니다. 나리.”

대답은 그렇게 했으나 대사간의 말 중 한 가지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 감록 건에 대해서 성 영감에게 통째로 맡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그가 알지 못하는 정보와 이번 건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권력과 먼 곳의 하급 관리들만 과한 양의 감록을 받았다는 사실에서는 구린내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

며칠 후, 성 영감의 집 대문을 낯선 노비 하나가 두드렸다. 나를 찾는 자였다.

이야기를 듣고 대문으로 나가자마자 그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을 보고 어디서 온 자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노비의 손을 타고 엄중히 봉한 서찰이 올 곳은 그 사람밖에 없었다.

함부로 뜯지 못하도록 붉은 인장으로 봉해진 서찰을 뜯으니 내용물은 짐작한 대로였다.

서장의가 쓴 편지였다.

‘오호라?’

서찰에 낯선 관작 이름이 적혀 있었다.

승평부원군.

그의 손자가 성균관에 하재생으로 들어와 동장의 김식과 어울리고 있다고 했다. 소과에 통과하지 않고 문음(門蔭)을 통해 들어왔다는 이야기였다. 김식 옆에 더 어린 놈 하나가 붙어 다니더니 그놈이지 싶었다.

“승평부원군? 호란 때 영의정을 지낸 그 작자 말인가?”

서찰을 돌려본 좌명의 말에 날이 서 있었다. 김식을 처음 마주한 날의 그 말투였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밖에서 꺼낼 말투가 아니었지만 이유가 있었다.

“야, 좌명이 놈, 사람이 이렇게 바뀌냐?”

“여기면 엿들을 자가 아무도 없으니까요.”

충신의 기루. 가장 작고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겨냥도를 그려보면 창고로 쓰는 건물의 삼 분의 일 정도를 잘라내 만든 것 같은 장소일 터. 충신이 익숙하게 창고 벽에 있던 상자를 밀어내자 비밀의 방 입구가 나타났었다.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꺼낸 열쇠로 자물쇠를 푸는 소리는 마치 충신의 비밀까지 풀어내는 듯했다. 문을 열고 우리를 들여보낸 그는 다시 상자를 움직여 문을 가리고는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익숙한 일인 듯했다.

“도대체 무슨 삶을 살아오셨기에 이런 공간이 필요하셨던 겁니까?”

“별거 아니다. 기루를 운영해서 돈을 벌어 먹고살려면 당연히 그걸 노리는 무뢰배들 역시 감당해야하기 마련이니까. 가끔 난봉질의 뒷수습이 안 될 때 필요하기도 했고.”

하긴, 현대에서도 물장사는 조직폭력배와 주먹패들이 얽혀있는 사업이긴 했지. 충신의 무예와 다져진 몸이 그제서야 조금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뭐, 아버님의 수하들이 도와주니까 기루 운영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교토삼굴(狡免三窟)이라고, 늘 사람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니겠냐. 그래서 장만한 공간이다.”

“말씀을 들으니 선진은 이 공간을 오입질 후 도피처로만 사용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좌명이 너는 방금까지 조정 중신을 까대던 놈이 갑자기 이러기냐.”

충신이 이마를 짚었다. 바른 말을 참지 못 하는 건 좋은데, 눈치까지 놓아버리는 놈은 이제 충신도 감당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작은 공간이 잠시 적막에 휩싸였다.

“아무튼, 이 서찰에 적힌 사람이 제가 아는 작자가 맞다면, 선진이 들은 이야기는 꽤 신빙성이 높은 이야기일 것입니다.”

“서장의 놈 반응으로 계산 끝난 거 아니었냐? 갑자기?”

“문장재사성어사 이백년래시견지, 칠대문통종자원 자표상응귀신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문장과 재사가 지금처럼 흥성한 것은 이백 년 만에 처음 보는 일이고, 자신이 원하는 칠대문에 능통하니 자표를 서로 짠 것은 귀신이나 알 것이다.

문과 초시에서 치러지는 강경 시험 이야기였다. 준비된 시험문제인 유교 경전의 각 단락이 칠대문(七大文)이고, 그것을 제비뽑기로 뽑아 응시자가 답하게 하기 위한 대나무쪽 도구가 자표(字標).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본 시험인 복시 자체를 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칠대문에 능통하고 자표를 서로 짰다는 말의 뜻은, 초시에 통과하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부분에서 시험문제가 나오도록 시관과 짜고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소리였다.

곰곰이 생각해본 끝에 답을 알아내 고개를 들자, 서늘하게 굳어있는 좌명의 눈초리가 내가 구한 답이 정답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작자의 아들이 폐주 시절에 이미 저지른 짓이지요. 곧 반정이 일어나 흐지부지된 것이 이 자의 천운이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패악질을 부리다 사사당한 자입니다.”

“누구인지 알겠다. 강화도에서 세자 저하와 대군 마마를 지키지 못하고 도망친 그자가 아니냐?”

“예. 맞습니다.”

“그럼 지금 성균관에 있는 손자도 똑같은 짓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리냐?”

충신의 말에 좌명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아는 것인지, 폐주 광해군 시절 이야기라면 녀석이 기억도 하지 못할 시절일 것이었다.

“일정, 내 소과를 치르며 과장에서 대리시험을 쳐 주는 경우는 봤어도 그런 식의 부정행위는 상상도 하지 못했네. 그걸 어떻게 아는 것인가?”

“아랫물이 썩는 이유는 윗물 역시 썩었기 때문일세.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자가 우리 가문과 사적인 원한이 있는 탓일 걸세.”

“뭐? 사적인 원한?”

좌명의 표정이 이토록 싸늘하게 굳은 것은 처음이었다. 역적 이야기를 꺼내던 충신의 표정을 방불케 했다.

“성근, 그리고 선진. 저번에 술잔을 나누며 제가 아버님에 대해서 했던 이야기를 기억합니까?”

“벼슬자리에 미련이 별로 없다고 하셨지 않았냐. 지금 지방관으로 가 계신 것도 그 때문이라 하셨고.”

“그 원인 중에 하나가 이 작자이니까요.”

김육이 인사권을 다루는 이조의 정랑으로 있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영의정으로 있던 작자가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자를 추천했다고 그를 문외출송으로 몰아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풀린 이후로도 사사건건 뒤끝을 보였다고.

그때 받은 수모가 보통이 아닐 것이었다. 특히 현 충청감사가 성 영감처럼 나랏일에 긍지를 가진 자라면 더더욱.

동장의 앞에서 문외출송을 언급하며 이를 갈던 좌명이 왜 그랬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끼리끼리가 아닌가, 승평부원군이나 전 도원수나 반정공신 명단에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은 제 아들내미까지 올리는 작자들이니. 같은 피를 받은 놈들끼리 뭉치는 것도 당연하지.”

“자네가 왜 성균관에 미련이 없었는지 이제 알 것 같네, 일정.”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성근 자네 같은 벗이 없었다면 진작에 그만두었을 것이네.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만, 지금은 오히려 잘 됐다 싶지 않은가.”

숨도 쉬지 않고 긴 대사를 뱉어내는 좌명의 속은 후련해 보였다.

아마 임금이 좌명을 나와 같이 성균관에 밀어 넣은 이유는 마지막 한 조각의 배려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런 곳에 단둘이라니, 너무한 처사인 것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런 자가 반정공신이랍시고 병조판서부터 영의정까지 요직을 전부 꿰차고 다녔다니. 나라꼴이 이 모양인 게 당연하지 않은가?”

가물가물하던 그 작자의 정체를 이제 알 것 같았다. 반정공신, 김자점과의 연결고리, 영의정, 강화도에서 도망친 후 사사된 아들.

서인의 영수, 김류(金瑬)였다.

그런데, 방금 좌명이 한 말에서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병조라, 냄새가 나는데? 안 그러냐, 한수야.”

“사형도 그렇습니까? 언제 근무했는지는 몰라도 끄나풀들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아니더라도 전 영의정 정도의 위세라면 이조, 병조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요.”

앞뒤가 슬슬 맞아가고 있었다.

지금 세운 가설은 끈이 떨어져 사대문 밖으로 추방된 자가 실행하기엔 약간 버거운 계획이었으니까. 하지만 조정에 든든한 한패가 남아있다면 이야기는 다를 것이었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둥글게 모여 앉은 세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 정도면 품을 쏟아 조사해 볼 가치가 있는 가설일 것이다.

※ 작가의 말

언급된 과거시험 부정행위는 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입니다.

1615년에 치러진 식년시에서 문제가 되어 다음번 식년시는 이 일로 말미암아 연기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거기에 연루된 자가 김류의 아들 김경징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