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비밀을 털어놓다
그렇게 위기를 겨우 벗어났다. 할 일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지만.
쓰러진 왈패 놈들을 김 갑사의 등짐에 들어있던 밧줄과 덩굴로 포박한 후에야 겨우 흐르는 땀방울을 닦을 수 있었다. 사람을 부르러 가기 전, 기절한 좌명을 그늘로 옮기고 상태를 살핀 김 갑사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는 말을 남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이었다.
“사주한 자가 누구냐.”
“그걸 내 입으로 말하겠수?”
“저 꼴을 보고도 입을 다물겠다?”
아직도 아랫도리를 잡고 끙끙거리는 부하놈을 본 두목의 눈이 질끈 감겨졌다. 양물이 온전치 못한 모양인지 깨어난 이후로 새된 비명만 질러대 묶을 필요도 없던 놈이었다.
“말하면 목이 달아날 텐데, 나리 같으면 입을 여시겠수?”
“사내의 자존심을 잃더라도 목은 지키겠다? 그럼 목까지 한 번에 날려주랴?”
조용한 협박이었다. 그것을 들은 놈의 얼굴에 난 칼자국이 울룩불룩거렸다.
“네놈, 우리가 누군지는 알고 덤빈 것이겠지?”
“전해 듣기로는 어디 떨거지 양반들이라 했수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맞는 것 같은데.”
“이 새끼야. 세상에 권력 잡으면 백성 등골 빨아 번지르르한 비단 휘감고 다니는 양반만 있는 줄 아냐?”
떨거지라는 말을 듣고 화라도 난 것인지, 옆에서 한 대 더 걷어차 버리겠다며 길길이 날뛰는 충신을 겨우 말렸다. 콧김을 뿜는 소리가 길게도 들려왔다.
“우리는 성균관 유생들이다. 그리고 내가 누군지는 몰라도 관련한 소문은 들은 적이 있었을 텐데?”
“한양 땅에 사는 놈치고 저놈이 전하께 장원 백패 두 장 받은 이야기 못 들은 놈이 없을걸? 네놈도 이 바닥에서 굴러먹고 사는 놈이면 잘 알겠지.”
“아, 설마…….”
안 양시라는 호칭은 껄끄럽기 그지없었으나 지금은 꽤 도움이 되지 싶었다.
충신이 나를 대신해 방방례 날 과거 부정을 저지른 생진사들을 조진 이야기를 들려주자 두목의 얼굴은 삽시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아마도 대리시험을 돕던 선접꾼들과 이 자 사이에 끈이 있지 싶었다.
“그래. 내가 그 일로 주상 전하의 총애를 받아 성균관에 들어간 그 안 양시다.”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었수다.”
“당연하지, 이 새끼야. 너 같이 쓰고 쳐내버리기 쉬운 놈들에게 정보를 일일이 알려주는 친절하신 의뢰인이 어디 있겠냐?”
이제 분을 삭인 듯한 충신이었으나 남아있는 감정의 찌꺼기들은 여전히 묻어나고 있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비꼬는 것이 마치 혀로 상대를 찌르는 것 같았다.
“그런 나와 벗들을 건드렸으니……. 네놈, 강상의 도리를 훼손한 죄를 묻기에 충분할 것이다!”
“히…… 히익!”
뭐, 아무리 신분의 고하가 분명한 조선 시대였으나 이런 사태에까지 강상죄를 물어 벌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어쨌건 칼을 뽑아 든 놈들인데다가, 은근히 왕과의 인연까지 어필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를 협박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그거면 됐지.
“살려 주십쇼! 저는 그런 분인 줄도 모르고……!”
“애초에 우리가 양반이라는 걸 알고 한 짓거리가 아니냐? 그런데도 목숨을 살려 달라?”
“시킨 놈이 뒤처리를 다 해줄 테니 일이 끝나면 한양을 뜨라고 했습죠! 소인은 그저 그것만 믿고…….”
“그걸 또 그대로 믿어? 하, 멍청한 새끼. 나였으면 일 끝나고 니들이 한양 뜨러 성 밖으로 나오는 순간을 노려 입을 막았을 거다.”
하긴 저렇게 생각이 없으니 몇 푼 안 되는 적은 돈에 눈이 멀어 양반을 칠 생각을 했겠지.
아마 충신의 말대로 왈패 두목에게 이번 일을 사주한 놈도 이런 놈들의 명줄을 붙여둘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네놈에게 단 하나, 살 기회를 주마.”
“정말입죠? 무…… 무엇입니까요?”
“아는 걸 곧이곧대로 다 불어라. 나온 정보가 마음에 들면 몸 성히 풀어주마.”
“뭐? 살려준다고? 한수 너 미쳤냐?”
벌을 받게 하면 속이야 시원하겠지만 냉정하게 머리를 굴릴 필요가 있었다. 포도청으로 끌고 가 옥에 처넣는다고 해도 의뢰인이 이들을 입막음시킬지도 몰랐고.
차라리 이 자리에서 뽑아낼 것을 뽑아내는 것이 나은 선택이었다. 다시 날뛰려 들던 충신도 귓속말로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납득하는 모습이었다.
“빨리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인내심이 좋은 편이 아니거든.”
“전부……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요! 나리들을 따라다니다가 기회를 봐서 뜨거운 맛을 보여주라고…….”
그렇게 왈패 두목이 뱉어낸 정보 중에 쓸 만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쓰고 버릴 끄나풀에게 많은 정보를 알려줄 리가 없지. 그러나 그때, 평소라면 스쳐 갔을 법한 사소한 정보 하나가 귀에 꽂혔다.
“……사대문이 닫히기 전에 나가봐야 한다며 서둘렀다고?”
“예! 예! 그렇습죠! 먼 길을 가야하니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며 남긴 말을 소인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요!”
허공에서 충신과 눈이 마주쳤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동장의 김식의 애비는 문외출송 중인 자였으니까. 얼마 전 그것이 풀렸다고는 하나 지금은 낙향해 있을 터였다.
그때, 타이밍 좋게 멀리서 사람 한 무리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맨 앞에 선 자는 익숙한 텁석부리 덩치였다.
“좋아. 그 정보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럼…… 그럼 살려주시는 것입니까요?”
“그건 네놈이 칼을 뽑아들었던 분의 마음에 달렸지.”
턱짓으로 충신을 가리켰다. 기루를 운영하며 그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충신이 알아서 처리해줄 것이다. 입을 막든지, 약점을 잡든지. 아마 그의 성격으로 보건대 약점을 잡고 다른 일에 써먹을 것 같았지만.
“한수만 아니었어도 삼개나루 뻘밭에 산 채로 묻고 싶지만…… 처신 잘해야 할 거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리!”
“아직 살려준다는 말은 안 했다, 이 새끼야.”
충신의 표정을 보니 이미 이 자들을 어떻게 요리할지 계획이 다 서 있지 싶었다.
생각이 정리되어가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김 갑사가 이끄는 무리들은 내 앞까지 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선비님! 지시하신 대로 장정들을 끌고 왔습니다요!”
“잘했네, 김 갑사. 그런데 다들 상태가 왜 이 모양인가?”
“행수! 그 꼴은 무엇인가?”
김 갑사가 차마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서 있던 충신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그럴 만했다.
맨 앞에 선 김 갑사를 제외하면 전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니까. 개중에는 아예 무릎에 손을 댄 채 쓰러지기 직전인 것처럼 보이는 자도 있었다.
“단련이 부족한 모양입니다요.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는데.”
“도련님…… 저 자는 괴물입니다요…….”
걸어서 편도로 반 각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을 것이다. 그걸 단기간에 돌파했음에도 김 갑사의 호흡은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텁석부리와 자신의 수하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충신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녀석들도 몸 써서 먹고사는 자들인데? 어쩐지 빨리 다녀왔더라니…….”
이젠 유 서리에 이어 김 갑사까지 탐내고 있는 충신이었으나 일은 그쯤에서 마무리되었다.
꽁꽁 묶인 왈패 놈들을 끌고, 걷지 못하는 자들은 들쳐 맨 채로 충신의 수하들이 우리에게 예를 갖추고 멀어져갔다. 아마 오늘 마포나루 한 창고에서 돼지 멱 따는 소리가 진동할지도.
그렇게 충신의 마포나루 패거리에게 처리를 떠넘겼지만 피곤할 일들이 아직도 산더미였다. 그나마 기절했던 좌명이 깨어나면서 갈비뼈를 부여잡긴 했으나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뒷수습을 하는 동안 내 투석(投石) 실력에 대한 미스터리를 캐내려 용을 쓰는 충신은 그렇다 치고, 돌아가는 길 내내 공치사 아닌 공치사를 늘어놓는 김 갑사의 입 역시 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숭례문을 향해 걷는 내내 그 얘기였다. 충신의 수하들을 부르러 마포까지 뛰어갔다 온 사람이 지치지도 않는지. 하.
“그러게, 제가 권해드렸던 대로 무과 준비를 하셨으면 이런 일을 당해도 대처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요.”
“김 갑사, 구해준 것은 고마우나 이젠 귀에 딱지가 앉겠네.”
“이젠 정말로 활쏘기뿐만 아니라 격투술도 배우셔야 합니다요. 북변으로 가는 길에 무슨 일을 당할…… 아차차.”
방금 왈패 놈의 무릎을 박살낸 기술을 알려주겠다던 김 갑사였다. 마치 오블리크 킥을 연상케 하는 자세로 상대방의 무릎 아래를 쓸어 밟아 관절을 꺾는 기술을 보여주던 김 갑사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성근이 북변으로 간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야, 한수. 너 어딜 내빼려고?”
새하얗게 질려 뒤늦게 입을 가린 김 갑사였으나 이미 늦었다. 그의 입이 다물린 것은 좋았으나 앞으로 열릴 입이 더 많을 것이 문제였다.
“아…… 아닙니다요! 소인이 말실수를…….”
“자네는 그게 문제라니까. 그저 무술 얘기만 나오면 신이 나서 그 모양이니.”
어차피 언젠가 말하려 마음은 먹고 있긴 했다. 이 김에 말하는 것이 좋을지도 몰랐다.
“김 갑사, 큰 실수를 한 것 같구만.”
“송구합니다요, 선비님.”
“알았으면 무술 얘기는 이쯤 하고, 북촌 대사간 영감 댁에 들러서 오늘은 귀가가 늦을 수도 있다고 전하게.”
뭐, 자꾸 재능이 아까우니 무술을 더 배우라고 타령해대던 김 갑사가 들러붙을 거리가 없어졌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좌명과 충신 역시 입을 딱 다물었다.
안 가겠다며 잠시 실랑이를 벌이던 김 갑사가 멀어져가고,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오히려 인적 드문 고개인 만리재여서 다행이었다. 험한 길이라 아까 맞은 정강이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길가에서 할 가벼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선진 사형, 그 공간을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빌려주고말고. 설마 사고치고 귀양이라도 가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그럼 이야기는 거기서 하시죠.”
***
그렇게 얼마 후, 우리 셋은 충신의 기루 비밀의 방에 모여앉아 있었다. 내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꽂혀있는 시선들이 따가웠다.
“말씀하셨던 대로 죄를 지어 유배형에 처해진 것은 아닙니다.”
“성근, 그럼 무엇 때문인가? 전하의 명으로 들어온 성균관인데, 갑자기 북변이라니?”
“전하의 명으로 들어온 성균관이니, 그걸 거둘 분도 누구시겠는가.”
두 명의 눈꺼풀이 치켜떠지는 것이 보였다. 상상도 못 한 이야기였겠지.
“도대체 왜? 상감마마도 김 갑사처럼 네 무예 재능을 높이 사서 무관으로 쓰겠다 하셨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한수 네가 북변으로 갈 일이 없지 않냐! 빨리 뜸 들이지 말고 말해라, 속이 터지겠다.”
답답했는지 가슴을 소리 내 쾅쾅 두드리는 충신이었다. 조그만 방 안이 그 소리로 울릴 지경이었다.
“왜 그리도 흥분하십니까. 어차피 떠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은 제가 아닙니까.”
“야, 인마. 벗이라 할 수 있는 놈이 겨우 생겼…… 아니, 너랑 다니면 재밌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 없어지는 게 아쉽지 않겠냐?”
그냥 속마음 그대로 말하면 좋을 텐데. 저런 마음 때문에 처음에는 말투가 험했을지라도 이 사람에게 끌렸을지도.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것은 좌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일세. 우리 셋의 중심은 자네일진대, 자네가 없어지면 어떡한단 말인가? 당장 동장의는 어쩌고?”
“갑자기 떠날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게. 사실 막연하게 나온 이야기일 뿐 결정된 것은 하나도 없으이.”
이런 말들을 듣고 있으니 이곳까지 걸어오는 내내 고민하던 것이 스르르 풀려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들이 나와 능양군의 일에 얽혀 들어갈까 봐 걱정하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방금 말을 끝낸 좌명이 갈비뼈를 다시 짚었다. 왈패 두목에게 얻어맞은 충신의 얼굴은 한구석이 부어있었다.
어디까지 알려주어야 할지 왜 고민했을까. 이들은 내 벗이고 이미 한배에 탄 마당인데.
“그럼 전부 말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날, 김 갑사에게 늦게 들어갈 것이라 전하라 했지만 결국 하숙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임금에게 끌려간 날 밤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놓고, 그에 대한 대응책을 논하고, 오늘 일과 앞으로의 일을 처리하려 같이 머리를 싸매고.
진지한 자리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거기에 충신이 들고 온 술병이 더해지자 어느새 통금시간은커녕 날짜가 넘어갈 때까지 그 자리에 앉은 누구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공처가 녀석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