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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44화 (44/298)

44화. 유생들의 공부 비법

그렇게 한참을 떠들던 두 소녀가 방을 나선 것은 조금 뒤였다. 요안의 배에서 난 꼬르륵 소리를 들은 하연이 간식이라도 챙겨주겠다며 부엌으로 데려간 것이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마치 친자매를 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뭐, 그래도 서로 사이가 좋은 듯하니 그걸로 족하지 싶지마는…….”

“사실 제자들을 데려온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라네. 지난밤에 한 이야기 얘기 말일세.”

“아, 성근 자네는 정말로 쇠뿔을 단김에 빼는 것을 좋아하는군.”

내가 심양으로 가게 되면 남겨질 제자들이었다. 어차피 말이 나온 김에 미리 얼굴이라도 익혀두고 인사라도 나누는 것이 좋지 싶었다.

물론, 제자들에게 갑자기 먼 북변으로 떠난다는 얘기를 지금 할 수는 없었으니, 일단은 좌명의 집에서 그룹과외를 하자는 핑계를 댄 것이었지만 말이지. 일단 친해진 두 사람을 보니 요안의 경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 도령의 이름은 무엇인가? 예의 바른 것을 보니 부친께서도 훌륭한 분이 분명하구만.”

요운 역시 긴장하고 있는 것이 역력해 보였기에 우선 칭찬을 섞어 얼음벽을 깨는 좌명이었다. 그 덕분인지 통성명을 마친 둘 사이의 분위기는 아까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듯했다.

“정말이십니까? 선비님께서도 가르침을 주신다고요?”

“자네의 스승도 다른 일들을 맡고 있으니 늘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벗으로서 어울리다 보니 배움에 목마른 제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야.”

이야기를 들은 요운의 눈도 반짝 빛났다. 애초에 지나가던 선비에게 가르침을 구하던 녀석이었다. 이런 기회를 마다할 리가.

고개를 몇 번이나 숙이며 감사를 표하던 녀석 때문에 좌명이 손사래를 몇 번이나 치고 나서야 다음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다. 내게 배운 내용을 문답하며 점검하던 좌명이 눈썹 사이를 찡그리며 내게 눈빛을 쏘아댄 것은 그다음이었다.

“벌써 소학과 논어를 다 떼어간다고? 고작 몇 달 만에?”

“이것이 정상이 아닙니까? 스승님이 혹독하게 가르친다고 말씀하시긴 했으나 따라갈 만했습니다.”

그건 요운이 네가 모범생 중 모범생이어서 그런 거고. 예습 복습은 기본에 필사 역시 빼먹지 않는 데다가 개념 정리까지 알아서 해 오니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어려울 일이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 거의 하루 전부를 공부에 쏟는 것이 아니냐.’

‘좋은 스승님이 있고, 배우고 싶었던 것을 공부하고, 필사한 결과물을 팔면 가계에도 도움이 되는데 어찌 쉴 틈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의젓하게 대답하는 요운의 말에 대답할 말이 없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녀석에게 모자란 스승이 되기 싫어 나 역시 공부에 박차를 더 가하게 되었었지.

그 이야기를 들은 좌명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대견함이 반반 섞어 떠올라 있었다. 내가 처음 녀석을 가르치기로 결정한 날 느끼던 감정을 좌명 역시 그대로 느끼고 있지 싶었다.

“그래, 이렇게 학문을 닦아서 무엇을 하고 싶은가? 역시 등과해서 나라의 대들보가 되고 싶은가?”

“그것도 그것입니다만…… 실은 하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무엇인가?”

신이 잔뜩 난 요운의 얼굴이 내 쪽을 향했다. 그 잘생긴 얼굴에 하고 싶은 말이 대놓고 쓰여 있었다. 내 얼굴에도 피가 쏠리기 시작했다.

“스승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성근처럼?”

“예. 저도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자들에게 지식을 베풀고 싶습니다. 더 널리, 더 많이요.”

“더 멀리, 더 많이라…….”

턱을 긁적이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좌명과 달리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태였다. 저렇게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내 앞에서 하면 어쩌잔 말인가.

하지만 숫제 빛을 내고 있는 제자의 얼굴을 외면하는 건 선생으로도 할 짓이 아닐 것이었다. 스승의 위엄을 지켜야지.

그러나 신이 난 요운은 좌명에게 내가 정리하라고 시켰던 개념 노트까지 전부 꺼내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달아오른 내 얼굴은 쉬이 식지 않았다.

“……내용은 소학집주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풀이가 필요한 중요한 부분을 언문으로 적어놓은 부분이 인상적이네. 많이 쓰이거나 틀리기 쉬운 한문의 용례까지 망라하다니.”

“그게 끝이 아닐세, 뒷부분에는 소학과 다른 경전이 연계되는 글귀까지 적어 놓았을 것이네.”

“거기에 배운 내용에 대한 질문과 모범답안까지 있구만. 내가 학문을 처음 배우는 입장이었다면 이 책으로 배우고 싶었을 것일세.”

요운이 건넨 개념 노트에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묻는 좌명이었다. 현대로 치면 ‘소학 : 한 권으로 끝내는 유학입문’ 정도 제목을 달고 팔 수 있을까.

좌명의 판단이 궁금했다.

“허나 베끼는데 들어가는 품과 종이가 족히 두 배는 되겠구만.”

“맞는 말일세. 소학 정도면 비싸게 팔기도 무엇한 책이지 않은가.”

그 말을 듣더니 좌명은 다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상업에는 젬병인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궁금했다.

“이거, 아버님이 한양으로 올라오시면 보여드릴 필요가 있겠네.”

“관찰사 영감께? 그건 또 왜?”

“아버님이 활자 인쇄에 관심이 많으시거든. 당신께서 저술한 책과 의서를 찍어내려 하시던데, 이 정도 책이면 아버님의 구미를 당기게 할지도 모르지.”

김육이 인쇄업에도 관심을 가졌던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내용은 그렇다 치고 이렇게 정리된 형태가 참으로 마음에 드는 것이야. 성근 자네는 호어를 익힐 때도 그렇더니 기발한 발상을 잘도 해내는구만. 그리고…….”

좌명은 다시 한번 개념노트를 팔랑거리며 한 장씩 넘겨나갔다. 그러나 시선은 앞에 앉은 요운을 향하고 있었다.

“도령 역시 이쪽에 재능이 있어. 나 역시 키워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자네 제자를 계속 빌려도 되겠는가?”

“빌리다니,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녀석을 억지로 붙잡아 둘 생각은 없다네.”

***

요안과 하연이 과일이 담긴 접시를 들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야기가 대충 마무리되어 있었다. 좌명이 ‘유생의 공부 비법’을 줄인 말을 소학해설서의 제목에 넣자고 하길래 기겁을 하고 말리긴 했지만.

이제 내가 갑자기 심양으로 가더라도 요안 요운 두 남매에 관한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새로운 스승을 만난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요운이나, 새로 생긴 언니 옆에 찰싹 붙어 깎아준 단감을 입에 넣고 볼을 잔뜩 부풀리고 있는 요안은 좌명의 집에서 잘 맡아줄 것이었으니까.

그럼 좌명의 집까지 와서 할 일은 하나가 남았다. 각오를 단단히 다지는 동안 나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가고 있었다.

“저, 소저…….”

“예. 말씀하시지요.”

“지난번 일정에게 듣기로 소저께서 악기를 잘 다루신다 하던데, 오늘 좀 배울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요?”

하연의 고운 눈썹 끝에 의아함이 묻어났다. 그러나 좋은 규수답게 표정을 금방 다잡은 그녀는 늘 그랬듯이 차분하게 답변을 던져왔다.

“알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연주하기에는 시끄러울 터이니 건넌방으로 잠시 따라오시겠습니까? 저도 독학 중이던 부분에서 궁금한 것이 있던 참이니까요.”

사실 악기를 배우겠다는 것은 핑계였고 혼인 관련해서 의사를 전할 필요가 있었기에 꺼낸 말이었는데, 하연은 그 뜻마저 눈치챈 듯 조용히 나를 제 방으로 인도했다.

그렇게 단둘이 하연의 방으로 향했다. 나 같은 놈도 남자랍시고, 제 방으로 가는데 반걸음 뒤를 따르는 그녀였다. 방문을 나설 때 서러운 눈빛을 쏘아내던 요안의 모습이 조금 걸렸으나 그것은 언니를 빼앗아간 나에 대한 원망일 것이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셨으니 소녀를 부르셨겠지요. 아니면 오라비가 준비한 대금을 꺼내리까?”

“아닙니다. 소저께서 짐작하신 바가 맞습니다.”

“아쉽습니다. 제 손으로 손가락 짚는 법부터 하나하나 이끌어드릴 수 있었을 텐데요.”

그렇게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고 웃음 짓는 하연이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내 손을 잡고 악기 연주를 가르치는 상상을 하니 잠시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일단 사과부터 드려야겠습니다. 소생이 일정을 막지 못해 자꾸만 실례를 저지르게 되는군요.”

“오라비의 잘못이 어찌 유생님의 잘못이 되겠습니까. 굳이 따지자면 피를 나눈 제 잘못이겠지요.”

불그스름한 눈꼬리를 부드럽게 만들며 미소를 흩뿌리는 그녀의 모습에 순간 정신이 나갈 뻔했으나 겨우 붙잡았다. 지금은 매몰찬 말을 해야 하는 자리라는 사실을 다시 되새겼다.

“소저는 참으로 제게 과분한 분이십니다.”

“갑자기요? 하지만 그런 칭찬, 싫지는 않습니다.”

“하오나…… 그렇기 때문에 소생은 소저와 맺어질 수 없는 몸입니다.”

한번 심양으로 떠나면 돌아올 날은 기약하기엔 너무 멀었다. 소현세자가 영구 귀국하는 일은 적어도 청이 산해관을 넘어 북경을 점령한 이후에나 일어날 것이다.

능양군 놈한테 잘못 걸리지만 않았어도 그녀와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이였을 것이다. 좌명이 저렇게 밀어붙이는데 백년가약을 맺었을지도.

답답한 마음에 입술을 꽉 깨무는데, 내게 건너오는 하연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소녀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선녀라도 뵌 듯했습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저희 오라비가 절교할 일이라도 벌인 것인가요?”

그녀의 짙은 속눈썹이 부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그렇게도 충격이었던가. 전해져오는 감정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것 또한 아닙니다. 소생…… 이대로 가면 소저를 고생시킬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어쩌면 몇 년 동안 얼굴도 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 무슨…….”

“자세한 것은 일정에게 들으십시오. 소저를 속일 생각은 없습니다.”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무너져가는 하연의 표정을 보기가 너무나 괴로웠다.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기다려달라는 말씀을 드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저희는 곧 스물이 되지 않습니까. 혼인이 늦어 신세를 망치는 것은 저 하나로 족합니다.”

“혼인이 늦어 신세를 망치다니요. 고작 그것을 가지고…….”

흔들리며 전해지던 목소리가 단단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것에 놀라 눈을 떠 보니 하연이 고운 입술을 앙다문 채 짙은 눈길을 내 쪽으로 보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유생님, 한 가지 묻겠습니다.”

“무엇입니까.”

“원하지 않는 사내와 맺어지는 것과, 원하는 사내와 늦게나마 맺어지는 것. 어느 쪽이 여인네에게 있어 더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의 눈빛이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허나 소저의 마음에 드는 사내가 저뿐일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없었던 일입니다. 앞으로 또 나타난다는 보장 또한 없지요.”

“그것은…….”

“아버님께서도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혼인하셨습니다. 저희 가문은 혼인이 늦는 것이 신세를 망친다고 여기는 가문은 아닙니다. 그리고…….”

하연의 말투는 단호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나를 찌르는 듯했다.

“소녀를 밀어내시려거든 진작에 그러셨어야 했습니다. 서찰도 신경 써서 교환하시고, 그날 새벽에는 그렇게까지 하셔놓으시고는…….”

살면서 처음 받는 고백이었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헌데, 그렇게 머릿속까지 달아올라 정신이 없는 사이에 의문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날 새벽’에 ‘그렇게’라니?

“소저, 그것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날 새벽이라니요?”

“앗…… 그…… 그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옷을 갈아입혀 드렸던 그 일 이야기입니다!”

발끈하는 것을 보니 무슨 일이 더 있었나? 하지만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이 사람을 말려야 했다.

“어쨌건, 이번에 맡게 된 일은 기약이 없는 일입니다. 일 년이 될지, 오 년이 될지, 십 년이 될지 모릅니다.”

“어차피 마음에 드는 사내가 없으면 홀로 늙을 것도 각오했던 몸입니다. 어려울 것도 없지요.”

숨소리를 가다듬고는 아직 불그스레한 얼굴을 풀며 미소 짓는 하연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가슴에서 무언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희가 옷깃을 겹치게 되면 양쪽 가문은 얻을 것이 많아지겠지요. 소녀 역시 지아비를 내조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하시던 인쇄 일도 도울 수 있을 것이고요.”

“고작 그런 것들을 위해 금 같은 청춘을 허비하시면 안 됩니다.”

“고작이라니요. 조금 늦더라도 당신 같은 분과 함께 늙어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인데.”

코로 그녀의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 그 향기의 자욱들이 내 주위를 온통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는 인내해야 나중에 열녀 소리라도 들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생각이 바뀌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요.”

왜 하연을 떠올렸을 때 눈 속의 매화가 떠올랐는지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하연은 고고한 설중매(雪中梅) 그 자체를 닮아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퍼져 나오는 향 역시.

충신에게 매화 향기가 나는 향수를 만들 수 있냐고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작가의 말

김육은 실제로 인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청풍 김씨 가문의 가업으로 후대까지 이어져 내려갈 정도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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