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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47화 (47/298)

47화. 소현세자(昭顯世子)

세자에게 접견 허락을 받고 찾아간 날은 마침 꽃샘추위가 매섭던 날이었다. 솜을 두텁게 넣은 옷자락 사이로도 찬바람이 날카롭게 찔러왔다. 아마 이 사람을 따라가게 된다면 겪을 북방의 날씨는 이보다 춥겠지.

세자의 거처, 창덕궁 성정각으로 나를 안내한 낯선 내시는 늙고 힘없는 자였다. 그의 맥 빠진 목소리에서 동궁전의 전체 분위기가 짐작이 가고 있었다.

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돌봐주려면 빠릿한 내시 여럿을 붙여줘도 모자랄 판인데, 오히려 이 자와 몇몇 궁녀를 제외하면 인기척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마치 세자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들라 하여라.”

입실을 허락하는 세자의 목소리 역시 축 처져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런 일을 당했으니 힘이 없을 만도 했다.

문이 열리자 그제서야 세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십 대 후반, 아니면 서른.

아비와 닮은 듯, 닮지 않은 듯. 조선 왕실의 특징인 또렷한 콧날은 능양군에게서 빼다 박은 듯했다. 그러나 가느다란 눈썹을 지녀 냉혹한 인상을 가진 아비와 달리 짙은 눈썹에 눈과 눈 사이가 조금 먼 세자는 유약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인사 올리겠나이다. 소생은 성균관 유생으로 있는 양시 안한수라 하옵나이다.”

허리를 깊게 숙여 왕의 후계자에 대한 예의를 갖췄지만 대답이 없었다. 인사를 받아주어야 허리를 펼 수 있을 것인데, 화려한 서안에 팔꿈치를 괴고 있는 세자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익숙지 않은 자세에 놀란 허리 근육이 비명을 막 지르려 하는 찰나에야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날아왔을 뿐.

“……이 자리에 온 목적이 무엇이냐.”

“저하?”

“전하께서 시강원 자의(諮議)로 발탁한 자라고 들었다. 아무리 북변으로 보낼 것이라 하나 급제도 못한 자에게 정칠품 관직을 내리신 데는 이유가 있을 터. 아버님께 무슨 밀명을 받았느냐.”

만조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타박을 준 아비가 보낸 자이니 의심이 따라붙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예상할 만한 질문이었고, 그 답변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솔직한 답을 원하시나이까. 아니면 기분이 풀리는 답을 원하시나이까.”

“하아…… 한낱 성균관 유생에게도 이런 말장난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세자의 목소리에도 찬바람이 돌고 있었다. 능양군의 냉혹한 목소리와 닮아 있는 것이 느껴져 등줄기에 불쾌함이 스며들고 있었다. 역시 그 아비에 그 아들인가.

“지금 이 자리에서 쫓겨나기 싫으면 네 덩치처럼 강직하게 굴어야 할 것이다. 내 나를 구해준 대사간의 얼굴을 보아 한 번 참았느니.”

허리가 슬슬 쑤시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몸을 바로 하고 저런 말을 뱉는 세자의 면상을 쏘아보고 싶었으나, 세자와 나 사이에는 성 영감이 있을 터였다. 그의 얼굴에 똥칠을 할 수는 없었다.

“저하의 눈에는 주상께서 소생에게 내린 명만 보이시는 것이 아닙니까. 눈을 조금 틔워 보시옵소서.”

“뭐라?”

“소생이 대사간의 수제자이며 그의 집에서 식음을 같이한다는 사실 또한 아시지 않사옵니까. 소생을 저하께서 이렇게 대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사옵니다.”

세자는 나를 경계하는 것인가, 아니면 기를 죽이려는 것인가.

그러나 임금을 처음 봤을 때처럼 기가 죽어있을 생각이 없었다. 기싸움에서 지고 일방적인 관계가 되면 이용도 일방적으로 당하기 마련이었다. 기껏 열심히 일한 것이 윗사람의 말 한 마디에 뒤집어지는 것은 이제 사양이었다.

앞에 앉은 왕세자는 또다시 말이 없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으나 이를 악물고 버텼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기싸움에 지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온 차였다.

“……좋다. 고개를 들라. 네 지적에도 일리가 있다. 대사간의 사람을 너무 의심하는 것도 그에게 못할 짓이다.”

“주제넘은 언사였사온데, 도량 넓게 받아들여주신 저하의 은덕에 감읍할 따름이나이다.”

지옥 같은 고통에 시달리던 허리를 펴자 세자가 앉으라는 뜻을 손으로 전하는 것이 보였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어앉고서야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보통 일국의 세자라는 자리는 고생을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내 앞에 앉아있는 자의 얼굴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만주 땅부터 한양까지 먼 길을 왔기 때문일까.

얼핏 보기에도 튀어나온 광대뼈 아래로 푹 파인 볼, 눈 아래로 드리운 그늘, 그리고 부어있는 눈초리까지. 방금 전까지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을 흘렸을지도.

“그래, 네가 이겼다. 네 질문이 무엇이었느냐.”

“솔직한 대답과 기분이 풀리는 답, 둘 중 저하의 의도를 구하나이다.”

“내게 간신은 필요 없다. 솔직한 답을 원하느니라.”

방금까지는 힘을 겨우 끌어다 쓴 것이었을까, 세자의 목소리는 다시 축 처져 있었다. 이렇게 약한 자라 볼모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귀국하자마자 요절한 것인가.

처음으로 능양군이 한 짓에 대해서 공감이 가고 있었다. 후계자가 이렇게 연약한 모습을 보이면 밀어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더구나 청의 입김이 닿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면 더욱이.

그의 아우 봉림대군은 볼모생활 도중에도 강직함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임금의 눈에서 벗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늘 세자를 만난 결과에 따라 준비해둔 다른 계획으로 넘어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답이 없구나. 그렇게 오래 생각하여야 하는 답이란 말이냐?”

“저하.”

반쯤 숙였던 고개를 들어 세자에게 눈을 맞추었다. 무엄한 행동이었으나 내 의지를 보여주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소생, 주상 전하로부터 저하를 감시하라는 명을 받은 것은 사실이옵나이다.”

“과연…… 솔직하게 답한 것은 고마우나, 그렇다면 너를 내 주위에 둘 필요가 없겠구나. 아버님께 말씀드려 관작을 물리라 하겠다.”

“저하의 판단이 그러시다면 소생은 물러갈 뿐이나이다. 허나.”

세자의 눈썹 사이가 찌푸려졌다. 기대하던 답이 아닌 듯했다.

고작해야 정칠품 관직을 가지고 사람을 움직이려 하다니, 나를 단단히 잘못 봤다. 내 눈동자가 쏘아보고 있는 자리는 더 먼 훗날의 것이다.

“소생이 이 자리로 오며 파악한 바로는 동궁전에 사람이 부족하다고 사료되옵나이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동궁전 내시로라도 써 달란 말이냐. 네 외모와 몸뚱이가 아까우나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겠다.”

“양물을 떼어낼 생각은 추호도 없사옵니다. 소생이 말씀드린 동궁전은 심양의 동궁전을 이야기 하는 것이나이다.”

심양관. 세자가 청에서 머물던 관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세자를 따르는 신하가 스무 명 남짓인 것은 성 영감에게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일국의 세자와 대군이 볼모로 잡혀 있는데 고작 그 정도였다. 무관과 의관을 빼면 두 손도 못 채우는 인원이었다.

“심양관에? 내 너를 주위에 둘 생각이 없다 하지 않았느냐. 헛된 생각은 그쯤에서 접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오나 심양에서 저하를 호종하는 문신 중에 저하께서 믿고 쓸 자가 얼마나 되나이까. 역관들 중에도 청에 끈이 닿아있지 않은 자가 없을 것이나이다.”

세자가 크게 숨을 삼켰다.

이 시기, 청나라의 기세를 업은 정명수라는 이름의 역관이 날뛰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에서 유추해 찔러본 것이었는데, 이렇게 효과가 좋을 줄은 몰랐다.

“장계에나 겨우 올라갈 일을 네가 어찌 알고 있단 말이냐. 아버님이 말해 준 것이냐?”

“심양에서 겪으신 굴욕들도 알고 있나이다. 청조와 조정 사이에 끼어서 곤욕을 치르셨을뿐더러, 용골대란 자가 돌아가신 중전마마의 상을 지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은 것도, 조선 여인을 뽑아다 청에 바치라 한 것도 알고 있나이다.”

떨리는 세자의 눈동자가 내 얼굴을 훑는 것이 느껴졌다. 푸른 곤룡포 자락이 그의 손목에서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나에 대해 꼼꼼히도 공부했구나. 좋다. 그 정도 정성이면 생각을 조금 해 볼 가치는 있겠구나.”

“본국에서 세자 저하를 통해 홍시를 올렸다고 청장 용골대가 상국을 대하는 정성과 공경이 부족하다며 저하를 타박한 일도 알고 있습니다.”

“뭣이? 그것은 장계에도 올리지 않았던 일이다. 네 어찌 그것을…….”

소논문 쓰면서 알게 된 세세한 에피소드를 여기에 써먹을 줄은 몰랐다.

그때도 일국의 세자가 저런 꼴까지 당해야 하는 조선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 읽었었는데, 그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했다.

세자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사이로 검게 물든 눈 밑의 그늘이 덜덜거리는 모습이 더 부각되는 것이 보였다.

“너는 무엇이냐. 그 사실을 어찌 알고 있단 말이냐?”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예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으나 세자를 더 흔들어 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소생이 이런 이야기를 저하께 드리는 이유를 무엇이라 생각하시옵니까?”

“모르겠다. 아버님께서 나를 겁박이라도 하라 시키시더냐?”

서안에 힘없이 팔을 기대고 있던 세자의 상체는 어느새 나에게서 멀리 달아나 있었다.

미지의 생물체를 보는 눈빛이 저럴까. 그의 경계심만 올린 꼴이라 조금 후회되긴 했으나, 이 정도는 해야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은 분명했다.

“한양으로 장계를 올리지 않았다고 하셨사온데 전하께서 어찌 아시겠나이까.”

“그렇다면…….”

“훗날 말씀드릴지도 모르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옵나이다.”

“어찌하여? 그럼 무엇이 중요하단 말이냐?”

지금까지 조선에서 반년간 살아오며 다양한 일들을 겪어왔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도, 마음먹게 된 것도 많았다. 그러나 결국 내가 바라봐야 하는 목표는 하나였다.

세자도 나와 같은 곳을 보고 있을까. 그것이 궁금해 찾아온 자리였다.

겨우내 준비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소현세자의 반응에 따라 어떻게 앞으로 행동할 것인지 플랜 A부터 D까지 짜 놓은 상태였다. 부디 플랜 A대로 가길 마음속으로 빌긴 했지만.

“말도 기수를 고른다는 말이 있지 않사옵니까. 소인의 처지가 그것과 같나이다.”

“네가 스스로 주인을 찾는 말이라……? 유학을 공부한 자의 발언치고 건방지지 않느냐?”

“소생을 저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소생이 어찌할 바가 아닌 것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다만 그 사실을 앎에도 이 자리까지 온 것은, 저하께 한 가지 대답을 구하고자 함이옵니다.”

“무엇이냐. 대답할 테니 묻거라.”

숨을 크게 들이켰다. 능양군이 조금만 더 멀쩡한 왕이었다면 던지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다. 어찌 보면, 남원을 떠날 때 성 영감이 던졌던 질문으로부터 배운 것이기도 했다.

“장차 저하께서 보위에 오르셨을 때, 꿈꾸시는 조선의 모습은 어떻사옵니까.”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세자였다. 이마에 땀이 송글거리는 것은 여전했지만 어느새 창백했던 그의 얼굴에는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조금 동안 천장을 향해 있던 세자의 눈동자가 다시 나를 향했다.

“나는 심양에서 많은 것들을 보았다.”

“…….”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심양으로 향했던 윤집, 오달제 두 충신을 청장이 내 눈앞에서 참하는 것을 보았다.”

호란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맛본 후, 강화하는 조건으로 심양으로 끌려간 세 척화신, 삼학사 중 둘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원손도 있고 대군도 있으니 스스로 산성을 나가 볼모로 죽으러 간 것이었는데, 구차한 목숨을 잇고 있다며 덧붙인 세자의 목소리는 묘하게 구슬펐다.

“함께 끌려간 백성들이 심양성문 밖에서 비싼 몸값을 치르지 못하여, 그 가족이 한데 모인 채로 울부짖는 모습도 보았다.”

“…….”

“해가 바뀌어 청주(淸主)가 내게 베푼 연회에서, 끌려왔던 우리나라 사람이 나를 위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하면서 눈물을 훔치는 것 역시 보았다.”

세자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방울져 내려와 볼을 굴렀다.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이런 치욕이 반복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조선의 모습이다.”

눈물로 젖은 눈가를 마르게 하겠다는 듯이, 세자의 눈에서 불길이 솟고 있었다.

남원, 어사의 눈에서 보았던 그 불길이었다.

※ 작가의 말

지난 화에 이어 세자가 심양에서 겪었던 수모들 역시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역시 조선왕조실록과 심양일기에서 발췌했습니다.

여백이 없어 전부 적지 못했지만 약소국의 볼모로 겪은 수모들은 저것들이 전부만은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볼모가 되길 선택했던 자가 겪어야 할 일 치고는 꽤나 가혹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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