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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50화 (50/298)

50화. 급습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좌명을 끌고 충신의 기루로 들이닥쳤다. 입구에서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영문을 몰라하는 충신마저 질질 끌다시피 하여 비어있는 기방 중 하나로 들어온 참이었다.

“이 미친놈아, 너 제정신이냐?”

“성근, 무슨 일인가? 진정부터 하게.”

밤새 계획한 이야기를 들은 벗들은 기겁을 하며 말리기에 바빴다.

나 같아도 그랬을 것이다. 쫙 벌린 범의 아가리에 창끝을 쑤셔 박자는 이야기였으니.

그래도 나를 도와줄 사람은 이 둘밖에 없었다.

“아무리 녹봉 빼돌린 일에 더는 손 쓸 수 없는 상황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너무 위험한 일이지 않은가?”

“미친 소리긴 한데 재밌어 보이지 않냐, 좌명아. 어차피 한수랑 나는 곧 한양을 뜰 테니까.”

어젯밤 박연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부터 떠올린 계획을 찬찬히 들은 충신이 먼저 태도를 바꿔준 것이 다행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아주 현실성 없는 계획은 아닌 모양이었다.

계속 반대하던 좌명도 어제 요안이가 변을 당한 이야기를 들려주니 입을 다물었다. 녀석도 알게 모르게 제자랍시고 요안이를 챙겨주던 참이었다.

“흠, 박 초관 말로는 그쪽 순라 담당이 정초군(精抄軍)이라고?”

“순라를 도는 길과 시간만 대략적으로 알아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혹시 짚이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안 그래도 어제 기루에 든 손님 중에 하번한 군사가 있다 들었는데……. 밖에 게 누구 있느냐?”

바로 나타난 심부름꾼 아이에게 충신이 불러오라 말한 기생의 이름은 낯이 익었다. 그날 이 인간과 함께 짜고 나를 골려먹은 그 기생이었다. 곧이어 방에 들어선 그녀의 뒷머리에는 그날처럼 매화 비녀가 꽂혀 있었다.

“어인 일로 이리도 이른 시각에 부르셨사옵니까? 저번에 듣지 못하셨던 소녀의 노랫가락이라도 들어주시려는 것입니까?”

“행수가 자리를 비운 상태니 믿음직한 녀석은 수향이 너뿐이 아니겠느냐. 무언가 물어볼 것이 있어 불렀다.”

“기대하던 일이 아니라 아쉽긴 하오나, 짐작이 가는 것이 있사옵니다.”

처음 보았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진지한 표정과 낮에 깔린 목소리에서는 기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날도 나와 좌명을 실컷 희롱하고는 나가는 자리에서야 그녀는 본모습을 보여줬었다.

“혹시 어제 기루에 들었던 금군들에 대해서 묻고 싶으신 것이옵니까?”

“그래. 눈치가 빠르구나. 혹시 특이한 이야기라도 들은 것이 있느냐?”

“밤을 새서 술잔을 기울이시고 간 손님들이시니 이야기도 많이 늘어놓으셨지요. 후후.”

그렇게 벌어진 수향의 붉은 입술에서 새어 나온 것은 기방에 든 손님들이 정초군이라는 이야기가 다가 아니었다. 정보는 끝도 없이 시냇물처럼 흘러나왔다. 각 초(哨)를 맡은 지휘관의 이름부터, 훈련 내용, 교대 시스템까지.

세상에, 무슨 기억력이 저래? 남자로 태어났으면, 아니 몇백 년 뒤에 태어났으면 큰일을 할 여자였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이 애석할 정도였다.

“키 큰 유생님, 그런 표정은 짓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술자리를 즐겁게 해 드리려면 손님이 말씀하신 이야기는 전부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기생의 기본 소양이지요.”

말을 마치고 가볍게 입을 가리면서 부드럽게 미소 짓는 수향이었다. 양반들을 접대하려면 그에 맞는 학식을 갖춰야 한다지만, 그녀는 그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안 놀라는 게 이상하지.

“행수가 은퇴하면 이 기루를 맡길 녀석이다. 이 정도는 되어야 내 눈에 차지, 암.”

“과찬의 말씀이시옵니다.”

“겸손 떨기는. 그래, 혹시 북촌 순라군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느냐.”

있었다. 수향의 말로는 막 교대를 마친 군사들이어서 그런지, 추운 겨울밤 도성 순찰을 돌며 고생했던 이야기를 지겹게도 꺼내댔다고 했다. 그녀가 기억해낸 이야기를 짜맞춰보니 대강 순라군들의 순찰 시간표가 완성되고 있었다.

“북촌 순라는 일 경(更) 단위로 도는 모양이군요.”

“일을 벌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

나와 충신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좌명이 한숨을 쉬며 양 손을 들어 보였다.

***

어두운 밤하늘을 휘영청 뜬 달이 홀로 밝히고 있었다.

꽃샘추위가 아직도 날뛰는 모양인지 목덜미를 감싸는 밤공기가 서늘했다. 그래도 기온이 낮은 탓에 옷을 두 겹이나 껴입고도 덥지 않은 것이 다행인가.

눈앞에는 높은 대문이 솟아있었다. 방금 순라군이 이 골목을 지나간 것을 확인한 참이었다. 뒤집힌 모래시계에서 모래알이 스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내려 복장을 확인했다. 검은 옷으로 칭칭 싸맨 사이로 흰 심의 자락이라도 드러나 있으면 좋을 것이 없을 터였다. 내 것은 괜찮았는데, 다른 사람의 것이 문제였다.

“야!”

“쉿!”

검은 옷 아래로 삐죽 튀어나온 충신의 흰 옷자락을 황급히 안으로 쑤셔 넣었다. 감정이 반쯤 실려 거칠어진 손놀림 때문인지 충신은 소리를 낼 정도로 놀란 모양이었다.

그러나 할 말은 없을 터였다. 지금은 기도비닉 유지가 제일 중요했으니까.

「미세하게, 형체가 없이 다가가야 하고, 아군이 공격할 장소를 적이 모르게 하라.」

계획을 준비하는 내내 충신의 머릿속에 때려 박은 손자병법 구절이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는지, 내 입술 위로 올라간 손가락을 본 충신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표정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지만.

흑복(黑服)이 아닌 심의 차림인 좌명이 옆구리에 찬 술병 뚜껑을 열더니 내용물을 확인했다. 담을 같이 넘겠다고 끝까지 우긴 녀석이었지만, 한양에 남아있어야 할 녀석에게 더 위험부담을 줄 수는 없었다.

충신은 품을 뒤져 새처럼 생긴 호루라기 둘을 꺼내더니 하나를 좌명의 손에 쥐어주었다. 망을 보다가 신호를 보내라는 뜻이었다. 이미 술병 차고 밤거리를 노닐면서 순라군과 놀았던 경험이 있는 양반답게 야밤에 주의를 끄는 일에는 빠삭했다.

나 역시 메고 있던 등짐을 내려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늘진 자리였지만 밝아진 밤눈은 길고 짧은 막대 몇 개와 새끼로 꼰 끈 같은 물건을 구분하고 있었다.

빼먹은 것은 없어보였다.

아, 하나 있었네.

목 뒤에 걸려있던 물건을 푹 뒤집어썼다. 무두질한 가죽 냄새가 코끝을 진동했다.

***

“히…… 히익! 범!”

옆구리를 몇 번 쿡쿡 찔러대자 자고 있는 사람이 일어났다. 그러나 쭉 찢어진 눈을 반쯤 뜨고 성질을 부리려던 놈은 내 얼굴을 보자 기겁을 했다. 지린내가 나기 시작한 것이 오줌이라도 지렸을 성싶었다.

“더러운 새끼. 정신 안 차려?”

철썩거리며 뺨을 몇 대 후려갈겨도 놈의 정신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성균관에서 허세부릴 때는 언제고 정신머리가 이 모양이라니. 이까짓 놈에게 고생했던 과거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하긴, 그래도 자다 일어났는데 눈앞에 호랑이가 제 면상을 들이밀고 있으면 호환에 찌들었던 조선 사람치고 제정신을 유지할 자는 별로 없을 것이었다. 문제는 그게 진짜 호랑이가 아니라는 것이지만.

“사…… 살려줘!”

“입 닥쳐. 이 자식아.”

뺨을 강하게 한 대 더 후리고는 일으켜 세워 입에 재갈을 물렸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충신이 놈의 몸뚱이를 새끼줄로 꽁꽁 묶었다. 그 모습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는데, 이미 이런 일을 해 본 경험이 있을지도.

김식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바닥에 고이기 시작한 액체 자국이 점점 넓어지는 것이 보였다.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그놈의 다리가 퍼져나가는 누런 액체에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더러운 새끼.

뭐, 조금 이해는 되었다. 묶인 놈을 마루로 걷어찬 충신도 얼굴에 낯선 것을 덮고 있었으니까.

‘아니, 복면을 가져오랬는데 가죽을 가져오면 어떡합니까?’

‘네놈도 똑같은 발상을 해 놓고 이러기냐?’

‘사형, 저는 이미 한 번 썼던 것입니다!’

‘웃기네, 그걸 어디서 쓴다고. 그런 눈에 띄는 복면을 가져와 놓고 나를 탓하다니.’

내 타이거 마스크가 눈에 좀 띄는 물건이긴 했다. 그렇다고 충신이 가져온 물건이 눈에 안 띄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충신의 발에 차여 소리 없이 마루를 굴러간 김식은 필사적으로 반대편을 향해 기고 있었다. 그걸 놔둘 리가 없지. 몸을 날려 등짝을 짓밟자 발아래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났다.

피식. 비웃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본 자리에는 그 소리에 어울리는 멧돼지 머리가 어느새 김식을 묶은 새끼줄 끄트머리를 들고 서 있었다.

‘범에 산저(山猪)라니. 완전 녹림산중 그 자체가 아닌가.’

맡은 임무를 수행하러 가며 좌명이 남긴 평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충신이 머리에 뒤집어쓴 물건은 사냥해서 잘 말려놨던 멧돼지 가죽의 대가리였으니까.

그것을 뒤집어쓴 모양은 굉장히 괴이했다. 김식이 계속해서 오줌보를 닫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사랑채는 어디냐. 네놈 아비가 있는 곳 말이다.”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내 입 밖으로 나갔다. 평소의 선비 말투와는 완전히 다르게 꾸며 낸 목소리였다.

“읍!! 읍읍!!”

필사적으로 눈알을 굴려보던 김식이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그렇다고 놈을 놔둘 생각은 없었다. 엎어져 있던 놈의 오른쪽 어깻죽지를 축구공을 차듯 강하게 걷어찼다.

“읍!!”

둥실 떠서 날아간 놈의 몸뚱이가 섬돌 아래를 굴렀다. 아차, 힘 조절하는 걸 잊었다. 저놈이 요안이만 건들지 않았더라도 흙바닥에 머리를 처박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김식은 기절하지 않았다. 마루에서 내려가 자빠진 몸을 뒤집어 상태를 확인하는데, 놈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려있는 것이 보였다.

“좋은 말로 할 때 부는 게 좋을 것이다. 어차피 양반 집 구조가 거기서 거기인데, 시간만 더 끌면 불벼락을 맞을 건 네놈이니까.”

놈의 얼굴 피부가 푸르르 소리를 낼 것처럼 경련하고 있었다. 그러나 꼴에 아비를 지키는 모양인지 김식은 눈꺼풀을 내리닫고 고개를 도리질 칠뿐이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만?”

메고 있는 등짐에서 능숙하게 몽둥이 하나를 끄집어냈다. 배트 헤드에 적힌 ‘정의봉’이라는 글자가 달빛을 받아 빛났다.

놈의 눈동자에 맺힌 공포가 더 커지는 것이 보였지만 봐줄 생각은 없었다.

남의 눈에 눈물 맺게 한 자, 똑같이 눈물 흘릴지니.

꾸엑.

작은 비명이 마당을 울렸다. 감히 내 제자를 건드려? 나도 모르게 한 방을 더 내리꽂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놈은 이미 눈물과 흙먼지가 온통 뒤섞여 얼굴에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윽고 천천히, 김식의 고개가 방 한 칸을 향해 돌아갔다. 희미한 불빛이 켜진 방이 딱 하나 있었다.

“웬 놈……!”

촛불이 켜진 책상 앞에서 종이를 뒤적거리던 중년의 일갈은 금방 멈췄다. 검은 그늘로 둘러싸인 쭉 찢어진 눈이 이쪽을 향하더니, 꽁꽁 묶인 채 바지를 누렇게 적시고 있는 아들에게 가 닿았다.

“아들의 목숨을 살리고 싶으면 조용히 하는 것이 좋을 거외다.”

“……!”

방망이 끝을 간신에게 들이밀었다. 옆에 선 충신은 간신의 아들에게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고 있었다. 미리 품고 온 단도였다.

김식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려 칼날을 스치고 지나갔다.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다. 조선 땅에서 살고 싶다면 말이지.”

“어쩌오, 전 도원수 나리. 그럴 생각이 별로 없는 것을.”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충신이 김식의 목에 단도를 더 바짝 들이댔다.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놈들! 당장 놓지 못할까!”

김자점이 책상을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방바닥에 김식의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어서였다. 묶어놓은 자식이 몸부림을 쳐대다 긁힌 모양이었다.

“쉿. 한 번만 소리를 더 질렀다가는 정말로 자식 놈의 멱을 딸 것이오. 노비들이라도 깨면 곤란하거든.”

“으으…….”

목구멍에서 괴상한 소리를 낸 김자점이 털썩 주저앉았다. 슬슬 그의 눈에도 공포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재물을 원하는 것이냐? 원하는 대로 주겠다. 자식만은 건드리지 말아다오.”

김자점의 품에서 묵직한 주머니가 내던져졌다. 울룩불룩한 것을 보니 내용물을 알만했다.

“하, 내가 국고를 훔친 도적놈의 재물을 도적질하러 온 것이겠소?”

“뭐…… 뭣이?”

방망이 끝으로 찍어 공중으로 띄운 주머니를 다시 강하게 후려갈겼다. 그렇게 김자점의 얼굴을 스치고 날아간 주머니는 뒤에 세워져 있던 화려한 병풍에 명중했다.

내용물이 흩어져 공중을 날았다. 쏟아지는 은자와 은편들이 촛불에 반사되어 마치 폭죽을 보는 듯했다.

“다 알고 왔소. 더 중요한 것을 내놓으시지.”

다시 한번 정의봉을 간신에게 들이밀었다. 흔들리는 촛불이 길쭉한 빠따 그림자를 김자점의 얼굴에 비추고 있었다.

※ 작가의 말

순라군은 도성의 도둑과 화재를 경계하기 위해 순찰을 하던 군인입니다.

안 선생 덕분에 신나게 구르게 된 정초군(精抄軍)은 요즘으로 치면 수도방위사령부 역할을 한 금위영의 전신으로, 인조 치세에 기병 중 정병을 선발해 둔 부대였죠.

오위가 오군영으로 개편되면서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포도청의 군인들이 구역과 시간을 정해 순시를 돌았다 합니다.

금위영이 설치되기 전에는 그 전신인 정초군이 야간 순찰을 돌았을 것이고요.

금위영은 영조 치세에 정식으로 오군영에 편입되지만 정초군으로 있던 시절이라고 해도 남은 병력을 편히 쉬게 놔뒀을 리가 없죠. 조선시대에도 군대는 군대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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