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복수와 속풀이
내게 물건을 전해 받은 성 영감이 입궐 채비를 갖춘 것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며칠간 대사간 댁 노비들은 주인의 명을 전하느라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다.
임금이 확실한 물증을 들고 오라고 엄명을 내렸으니, 성 영감 역시 충신답게 그것에 충실히 따르려 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물증을 바치는 것으로 끝날 일은 절대 없을 테지만.
돈화문과 궐내각사를 지나 왕이 머무는 편전인 희정당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금군들이 지키는 수많은 문들을 거쳐 마지막 문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웬 붉은 관복을 입은 낯선 중년이 뒷짐을 진 채 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부리부리한 눈에 두툼한 귓불이 인상적이었다.
“이제 왔는가, 여습! 서찰은 잘 받았네. 나 몰래 재밌는 일을 꾸몄더구만.”
“자겸 대감, 오랜만에 뵙습니다. 평안하셨습니까?”
성 영감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중년은 익숙하다는 듯이 희정당으로 향하는 문을 통과해 앞서나갔다. 푸른 관복을 차려입은 대사간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 뒤를 따를 뿐이었다.
대감이라 부르는 것을 보니 높은 사람인 모양인데, 누구지?
“상선, 나만 들어갈 것이니 전하께 고해주시게.”
“그게……. 대감, 선객(先客)이 계십니다. 전하께서 내관들도 물리셨고요.”
“얼마나 높은 분이시기에 자네가 얼굴을 찌푸리는가? 고해주시게.”
난감한 표정을 짓는 상선 영감이었으나, 부원군이라 불린 남자의 지시를 거스르지는 못했다. 먼저 온 손님이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금을 알현하려는 태도가 남자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나리, 저분은……?”
“기억하는가? 저번에 동지들을 언급할 때, 사은사 임무를 받았다고 말한 분일세. 이번엔 건강이 악화되어 심양 땅을 밟지는 못했지만.”
그 말을 듣고서야 어떤 사실이 떠올랐다. 왕에게 처음 불려갔던 날, 성 영감이 충청감사 김육과 함께 언급했던 동지가 있었다. 사은사로 나가기 전엔 영의정이었다던가?
“주상 전하, 완성부원군 들었사옵니다.”
문 앞에 가까이 다가서고 나서야 편전 안에서 작지만 다급한 말소리들이 오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목소리들은 상선이 손님의 존재를 알리자 바로 뚝 끊겼다.
“다시 고하게.”
“주상 전하, 완성부원……,”
“들라하라.”
그렇게 활짝 열린 문 안에서 마주한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우리가 들이닥칠 것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방 안에서 당황한 시선들이 공중에서 서로 마주치고 있었다.
“부원군, 뒤에 서 있는 자들은 웬 자들인가? 다른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송구하옵나이다, 전하. 아시다시피 소신의 건강이 좋지 못하고 정신은 혼탁한지라, 동행을 미처 고하지 못하였나이다.”
능글맞게 안으로 발걸음을 옮겨놓는 중년을 따라 편전에 발을 들였다.
방 안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보료에 기대 있는 임금 앞에 꿇어앉아 있는 두 명은 그날 밤 내가 몽둥이찜질을 했던 부자(父子)였다.
“안 자의와 함께 내일 세자를 따라가려고 작별 인사라도 올리러 온 것이냐, 부원군?”
“조만간 다시 압록강을 넘을 일이 생길지도 모르나, 오늘은 그 이유로 온 것이 아니옵니다.”
자연스럽게 왕에게 앉을 허락을 받은 중년은 김자점 부자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와 성 영감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사령장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자시강원의 자의라는 칭호는 귀에 설었으나 익숙해져야 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슨 사유로 알현을 청한 것이냐. 국사를 논하는 자리를 방해하려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터.”
“송구하오나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 수 있겠나이까.”
“전 도원수 김자점이 방유(放宥)되었으니 마땅한 자리를 내려주려 부른 참이었다. 강화 유수 정도로 죄를 씻게 함이 어떨까 하였지.”
김자점의 유배를 풀어주고 지방관이지만 관직까지 다시 내려준다는 이야기였다. 그제서야 왜 이 타이밍에 낯선 중년과 성 영감이 편전까지 박차고 들어왔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전하, 그 건은 잠시 미뤄두시는 게 좋을 듯하나이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 부원군. 인재는 모자라고 지방관의 임무 역시 무겁지 않을 터이다. 어이하여 반대하는 것이냐?”
“전하께서는 도성에 떠도는 소문을 듣지 못하셨나이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임금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러고는 김자점에게 시선을 돌린 왕이었으나 고개를 처박은 간신에게는 아무 말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소문이라니, 무슨 소문을 가리키는 것이냐?”
“얼마 전 육조거리에 붙은 격문 이야기를 듣지 못하셨사옵니까. 이 자, 김자점과 승평부원군 김류가 녹봉을 빼돌리고 대과까지 좌지우지하려 했다는 소문이 저잣거리에 파다하옵나이다!”
그 말에 이맛살을 찌푸리는 임금이었다. 김자점의 일을 내가 처음 고해바쳤을 때 짓던 그 표정이었다.
“그 소문, 처음 들은 것도 아니다. 내가 확인해본 바로는 뜬소문이었을 뿐이었다. 부원군 정도 되는 자가 그런 뜬소문에 휘둘리느냐.”
“뜬소문이 아니옵나이다, 전하.”
붉은 관복을 입은 중년이 뒤에 앉아있던 대사간에게 눈짓을 했다. 신호를 전달받은 성 영감이 재빠르게 소매에서 서찰 몇 장을 꺼내 임금에게 바쳤다.
내가 타이거마스크를 쓰고 저기 엎드려있는 자의 손목에 빠따를 내리찍어가면서 빼앗아 온 물건이었다. 코끝에서 그날의 가죽 냄새가 다시 풍기는 듯했다.
“신의 집 담벼락에 ‘사간원 수장 궤하’라 적힌 종이와 함께 박혀 있던 것이나이다.”
대사간이 바친 서찰을 훑어보던 임금의 표정이 굳었다. 밤마실을 마치고 귀가하면서 성 영감과 짠 대로 대문 옆에 박아놓은 물건이었다.
“사헌부 대사헌과 홍문관 부제학의 자택에도 비슷한 물건이 전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사옵니다. 사헌부에서도 어제 야다시(夜茶時)를 가진 것으로 보아 이 일을 중대하게 논의하는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충신과 좌명이 그날 밤 임무를 잘 마친 모양이었다. 대사간 성 영감에게만 서찰을 전했다가는 ‘나 범인이오.’하는 꼴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 임금에게 간언을 올리는 것이 임무인 삼사의 수장들에게 밀고한 형식을 취한 것이다.
김류와 김자점 사이에 오갔던 그 편지에는 빼돌린 세곡의 분배와 처리 방안이 빼곡히 적혀있음을 빼앗은 자리에서 확인했던 터였다. 그중에 특히 혐의가 선명한 것만 골라 성 영감에게 건넸으니, 그걸 읽는 임금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는 것이 이해가 갔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성 영감의 표정은 어떨까 궁금했다. 포커페이스 유지를 잘하는 양반이니 앞에서는 별 변화가 없겠지만 속으로는 웃고 있으려나.
“필적 대조까지 할 것도 없었나이다. 승평부원군 김류의 글씨가 확실하옵나이다.”
“대감, 그것이 소인이 받은 서찰이라는 증좌도 없지 않습니까.”
엎드린 채 고개만 들어 반문하는 김자점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 정도로 빼도 박도 못할 물증이었으니까. 어떻게든 빈틈을 찾아보려고 애쓰는 것이 용했다.
그러나 그 앞에 앉은 붉은 관복의 중년은 그것조차 개의치 않고 다시 한번 간신을 몰아붙였다.
“자네의 저택이 털리고 대문이 불탄 것을 한양 백성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이 서찰은 그날 그곳에서 나온 물건일 터.”
다시 부복한 간신이 짧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더는 잡아뗄 명분이 없을 것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안 쓰던 무기까지 동원해가면서 화려한 연출을 할 보람이 있었다.
“전하, 이런 자에게 다시 벼슬을 내리는 것은 나라를 좀먹는 행위이옵나이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잠시 임금은 말이 없었다.
“……알겠다. 부원군의 뜻대로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임금의 목소리에는 떨떠름함이 감돌고 있었다. 본심은 그게 아니었을 것이나 어쩔 수 없이 떠밀린다는 티가 뚝뚝 묻어났다.
“전하! 소신은 아무런 죄가 없사옵니다! 이것은 전부 저자들의 무고에 불과하옵니다!”
“이렇게 증좌가 확고한데 아직도 그런 망발을 지껄이는가? 상선! 대전별감을 들게 하게!”
“전하!”
김자점이 대전별감의 손에 의해 끌려 나가는 동안 앞에 앉은 지존의 입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아직도 한쪽 뺨이 퉁퉁 부어있는 김식이 울부짖으며 아비를 따라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부원군, 이제 되었느냐? 그쯤 했으면 물러가도록 하여라.”
“드릴 말씀이 아직 남았나이다. 신에게 시간을 더 허하여주시옵소서.”
“아직도 할 말이 남았단 말이냐?”
“총애하시는 공신들에 대해 이전에도 수차례 간언을 드렸지 않사옵니까. 전하께서 소신의 충언을 들어주셨다면 오늘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
그러나 능양군과 부원군, 둘 사이에 그 이후에 오간 대화를 계속해서 들을 순 없었다. 임금이 할 말이 있으면 단 둘이 있는 자리에서 하라며 나와 성 영감을 편전 밖으로 내보냈기 때문이었다.
등 뒤로 편전의 문이 닫히고 얼마 안 있어 임금의 고성이 울린 이유는 아마 부원군이라 불린 중년이 왕의 심기를 또다시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는 그런 일을 벌여서는 안 될 것이네! 자네도 이제 나라 녹을 먹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게 선비 된 자로서 할 짓이란 말인가?”
“송구합니다. 영감.”
편전에서 물러나고 한적한 곳을 찾은 성 영감에게서 불벼락이 떨어졌다.
혼날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허락을 받은 것도 아니고 나 혼자서 열이 받아 저지른 짓이었으니까.
“게다가 자네에게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으면 어쩌려고 하였는가? 시강원 자의쯤 되는 자가 밤중에 몰래 담을 넘은 것이 알려졌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은 해 보았냐는 말이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남원에서 몽둥이질로 일을 해결했던 것을 묵과해준 사람이 어사 나리였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입이 불룩 튀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허나, 자네가 이 일을 단칼에 풀어버린 것도 맞긴 하네. 그자가 몽둥이질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속이 조금 시원했던 것도 사실이고.”
“저도 다 생각이 있어서 한 일…….”
“어허! 뭘 잘했다고 입을 놀리는가! 당분간 대문 밖에 나갈 생각도 말아야 할 것이야!”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심양으로 출발할 때까지 집에 가둬놓고 정신수양을 시키겠다며, 성 영감의 으름장이 머리 위로 꽂혔다. 논어를 통째로 여러 번 베끼면 조금은 군자다워질 것이라는 말에 소름이 쫙 끼쳐왔다.
“영감, 그것만은!”
“농담일세. 하지만 다음번에 이런 일이 또 벌어졌다가는 농담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네! 얇은 논어가 아니라 춘추를 통째로 베끼게 될 것이야!”
“잘못했습니다…….”
이대로 템포를 조절하며 삼박사일 정도는 나를 갈굴 것으로 보였던 성 영감이었지만, 마침 늙수그레한 관원 한 명이 다가와 성 영감에게 아는 체를 하는 바람에 잠시 갈굼은 중단되었다.
아까 언급되었던 대사헌이 김자점의 일로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그와 김자점의 처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성 영감은 다소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 덕분에 겨우 갈굼에서 벗어나 궐 밖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물러나셔도 괜찮으십니까? 전하께 올릴 간언이 더 있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최 대감께서 알아서 해주실 것이니 걱정이 없네. 아마 자네가 발견한 새 서찰에 관해서도 확실히 말씀해 주실 것이네.”
그날 습격에서 생각지도 못한 대어를 낚은 참이었다. 성균관에서 치러질 예정이던 알성시가 연기된 이후로 부정과거는 포기한 모양인지 관련 서찰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물건이 튀어나온 것이다.
김자점이 몸부림쳐가며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던 서찰. 그 속에는 내가 생각도 못 했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청주를 오랑캐 추장이라 깔보며 척화를 주장하던 자들이 뒤로는 청과 내통하고 있었을 줄이야…… 전하께서도 이젠 생각이 바뀌시면 좋을 텐데.”
성균관에서 보기도 어려운 고급지에 적혀있던 서찰은 심양에서 온 것이었다.
발신인은 역관 정명수. 척화파 김류와 어울리던 자가 뒤로는 호박씨를 까고 있을 줄은 몰랐다. 희대의 간신다운 행각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저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부원군 대감 없이 저와 나리만 있었다면 전하께서 쉽게 뜻을 꺾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스스럼없이 전하께 간언을 올리시는 것도 그렇고요.”
“자네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하긴, 제대로 알려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구만.”
반정공신이자 호란 당시 주화파의 거두였던 분이라며, 출사해서도 본인과 어울릴 것이라면 꼭 기억해놓으라고 농을 반 섞어 서두를 뗀 성 영감이었다.
“함자로 명 자 길 자를 쓰시는 분이지. 앞으로 자주 마주칠지도 모르는 분이니 얼굴과 함자를 익혀 두게.”
부원군이라고 불린 남자의 정체는 최명길이었다.
반정공신 중에서 주화파의 거두, 병자호란 당시 동분서주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협상을 이끌어낸 인물,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청을 왕복하며 전후 복구에 힘쓴 사람.
하긴 그쯤 되는 사람이어야 임금 앞에서 할 말을 다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아마 우리를 내쫓은 편전 안에서는 그가 임금을 향해 간언을 가장해 잔소리를 쏟아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자네, 공부하는 것도 즐기지 않는가. 공자님 말씀을 주자의 해석이 아닌 새로운 해석으로 배우고 싶다면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일세. 부원군 대감은 그 분야의 권위자니까.”
“새로운 해석이라…… 언젠가 찾아갈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헌데 제가 공부하는 것을 즐긴다니, 그것은 어인 말씀이십니까?”
누가 공부하는 걸 좋아해? 유 서리가 내준 중국어와 만주어 숙제를 해내는 것도 힘에 벅차던 차였다.
“유 서리 이야기로는 자네가 희한한 물건까지 만들어내면서 공부에 열중이라던데?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즐거움이 아니라면 그런 수고까지 굳이 쏟겠는가?”
“아, 그건……!”
“아쉽구먼. 자네가 곧 한양을 뜰 몸이 아니었다면 부원군 대감과 함께 가르칠 것이 많았을 터인데. 최 대감도 자네가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고.”
뒤통수가 뜨끔했다. 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심양행을 택한 것이었는데, 피한 손아귀는 단순히 하나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을 천천히 걷는 성 영감은 말을 마무리 짓고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어쩌다 영감님 안에서 내가 이런 이미지가 된 건지, 앞으로는 조금 튕겨봐야 하나.
“그나저나, 정말 그대로 심양에 갈 셈인가?”
“나리께서 힘써주시려고 했던 것은 감사하오나, 한양에 남아있는 것보다는 심양에 가서 얻을 것이 많을 것 같습니다.”
“자네도 성균관이랑은 안 맞는 모양이구만. 그런 것까지 나와 닮을 필요는 없는데.”
사실 성균관 생활은 이미 편해졌고, 영감님의 스파르타 교육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커서 그런 것이었지만, 이 사람이 그런 내 속내까지 알 리는 없겠지.
그런 나를 바라보던 성 영감이 씩 웃었다. 남원에서 내 어사출두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그 얼굴이었다.
이제 이 얼굴도 당분간 보지 못하겠지. 무언가 눈가가 간질간질해지는 것 같아 재빨리 화제를 바꾸려던 찰나였다.
왕이 거처하는 공간과 궐내각사를 가르는 문 앞에 아까 본 사람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끌려가던 김자점을 울며 따라가던 김식이었다.
애비는 대전별감과 겸사복에게 끌려 의금부로 직행한 모양이었으나 혼자 궁궐 안에 남아있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아직 애비의 죄에 연좌되진 않은 건가. 멍하니 눈이 풀린 것을 보니 정신줄이라도 놓은 모양이었다.
“동장의 선진님,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네놈……!”
넋을 놓고 있던 김식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으르렁거렸다. 분노를 뱉어내는 그의 눈가는 평소처럼 날카롭게 치켜서 있었으나, 날아오는 시선에는 힘이 없어 보였다.
“예의를 갖추십시오. 대사간 어른께서 동석하신 자리 아닙니까.”
“네놈이지? 그날 담을 넘어 서찰을 훔쳐간 놈은 네놈 말고는 생각할 수가 없어!”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선진님.”
“그래, 내게 몽둥이질을 해댄 놈의 덩치도 네놈처럼 거대했다! 그런 놈은 조선 땅에 흔하지도 않으니까!”
김식의 직감은 훌륭한 모양이었다.
헌데, 그래서 어쩔 건데?
어차피 그동안 이 자에게 당한 것도 많았고 앞으로 볼 일도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럼 있는 대로 속을 긁어 주어야 내 속이 시원하겠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날 오줌까지 질질 지릴 정도로 혼이 나셨다더니 아예 혼이 나가시기라도 한 것입니까?”
“그…… 그것은! 그걸 아는 걸 보니 네놈이 범인이 맞구나!”
“범인이라니요. 제가 듣기로는 범과 멧돼지가 담벼락을 넘었다고 하던데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미움이라도 받으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치부를 살짝 긁어주었더니 곧 내게 달려들기라도 할 기세를 보이는 김식이었다. 아마 이 자리가 궁궐이 아니고 옆에 조정 중신이 없었다면 정말로 그랬을지도.
근데, 그래서 또 어쩔 건데? 콩알만 한 자식이.
“궐내입니다. 예의를 지키시지요. 선진님.”
“이놈! 잡아뗀다고 내가 모를 것 같으냐! 내 네놈의 면상을 끝까지 기억할 것이야! 기억해서…….”
“기억해서 뭐 어쩌시려는 것입니까, 진부하게 제 간이라도 내어 씹겠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싸움에 진 개는 다시 덤비지 못할 정도로 패놓으라는 말이 떠올랐다. 천천히 동장의의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 영감이 아무 말 없이 끼어들지 않는 것을 보니 이 양반도 지금 일을 재밌게 관전하고 있으리라.
“운이 좋은 줄 아십시오. 선진님이 일을 꾸몄던 알성시가 왜 미뤄졌는지는 아십니까?”
“그건 아버님께서…… 아니, 설마……?”
가까이 다가서고 보니 김식의 키는 내 턱에 겨우 닿을 수준이었다. 그에게 속삭이기 위해서는 허리를 굽혀야만 했다.
재밌네, 이 새끼 앞에서 결국 이런 식으로 허리를 굽히게 될 줄이야.
“일을 꾸미시려면 은밀하게 하셨어야지요. 동장의님. 증좌가 나오지 않았던 것을 다행으로 여기십시오.”
“뭣이? 역시, 네놈!”
“허어, 오히려 소생에게 감사하셔야 할 텐데요? 소생이 이쯤에서 선진님을 막지 않았더라면 계속 국법을 어기시다 나중에 거열형을 당하셨을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이놈! 말 다 했느냐!”
원 역사에서 권력을 내려놓게 된 김자점 부자는 결국 역모를 꾸미다가 사지가 찢겨지는 형에 처해졌다고 알고 있다. 내가 지금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렇게 흘러갔겠지.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본인의 귀에 내 이야기가 곱게 들어갈 리 없었다. 모욕을 당했다고 여긴 것인지 그 조그만 놈의 손이 내 멱살을 잡은 것은 잠시 후였다.
철썩.
멱살을 잡았던 손이 바닥으로 나뒹구는 것이 보였다. 온 힘을 다한 뺨치기 한 방이었다.
“으윽…….”
“이제 좀 정신이 드십니까? 갑자기 멱살을 잡다니, 마음이 혼탁해지시기라도 한 것이 아닙니까.”
나자빠져 있던 김식이 맞은 자리를 감싸고 표독스러운 눈빛을 쏘아 보냈다. 그가 자랑스레 입고 다니던 비싼 옷차림은 흙먼지가 온통 묻어 엉망이었다.
“양반의 신분인 자가 손까지 쓰느냐! 부끄러운 줄 알거라, 이놈!”
“그걸 잘 아시는 분이 그 아이에게 손을 대셨습니까? 역지사지를 하십시오!”
“그깟 아녀자에게 손을 대었다고 감히 내게 손찌검을 해?”
“아녀자에게는 마음대로 손을 대어도 된다는 말입니까?”
요안이에게 상처를 입혀놓고 저렇게 뻔뻔한 태도라니. 뺨 한 대 정도로 용서하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그날 밤, 얼굴에 먹물자국이 시꺼멓게 번져가며 울어대던 요안이 녀석의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처음엔 하도 울었는지 눈물조차 말라있던 녀석이었다.
뜨거운 분노가 정수리를 타고 올랐다. 하지만 내 혀끝과 주먹은 차갑게 식은 것이 느껴졌다.
“하늘께서 남녀에게 부여한 본성이 다르지 않을진대…… 게다가 그 아이는 제 소중한 제자입니다. 그런 귀한 사람에게 손을 댄 자를 소생은 뺨 한 대로 참아드렸는데, 선을 넘으시는군요.”
“뭐야? 그깟 계집애 하나 때문에 나를?”
이제 더 이상의 문답은 필요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왈패까지 고용해 나를 위협했던 놈이었다. 더 봐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나동그라져 있던 놈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내 손아귀에서 바둥거리는 놈은 정말로 보잘것없어 보였다. 이렇게 한 손으로도 멱살이 잡힐 정도로 보잘것없는 놈에게 그동안 고생했다니, 참.
“이놈! 놓아라! 놓지 못할까!”
퍽. 퍽. 콰직.
명치, 배,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자놀이. 그렇게 세 군데에 혼신의 힘을 다한 주먹질이 명중했다.
이 새끼가 고용한 왈자에게 당했던 부위였다. 그리고, 관자놀이는 그놈이 손톱으로 긁어 요안이에게 흉터를 남긴 그 부분. 그래서인지 마지막 주먹에 힘이 더 실렸던 모양이었다.
“악! 아악! 끄악!”
반항도 못 하고 급소에 주먹을 세 방이나 맞은 놈은 몇 번 비명을 지르더니 내 손아귀 안에서 축 늘어졌다.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놈의 몸뚱이가 궐의 돌바닥을 뒹굴었다.
그 위로 침이라도 칵 뱉어주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양반의 체면 정도는 따져야 했다. 아쉽지만 참을 수밖에.
짝짝. 손바닥을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그제서야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고 있던 대사간이 인기척을 낸 모양이었다.
“자네 정말 김 갑사 말대로 무과를 보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닦으라는 선비의 육례는 안 닦고 무예에만 열중한 것 같은데.”
성 영감의 말에 묘하게 가시가 돋쳐 있었다. 선비의 육례 중에서도 궁술과 글씨 정도를 빼면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라 입이 달려도 할 말이 없었다.
“농담도 심하십니다. 영감.”
“자네가 겸사복이나 별감이 되었다면 전하께서 평복으로 저잣거리를 암행하실 때에도 아무 걱정이 없으셨을 것일세. 핫핫.”
성 영감은 소리 내어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가는 미동도 없었다. 입에서 나오는 말만 부드러웠을 뿐, 날아오는 시선이나 분위기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아차, 궐내에서 또다시 선비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했으니 혼날 거리가 하나 추가 된 모양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아까 갈굼당했던 거리와 엮여 밤새 굴려질지도.
“무엇하는가? 대궐에 망부석이라도 세울 셈인가?”
“아, 그게……”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 가서 듣겠네. 따라오게.”
그렇게 나를 한참 동안 쏘아보던 성 영감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은 잠시 후였다. 그의 뒤를 따르면서 가볍지 않은 타박을 계속 듣던 도중, 성 영감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궐을 막 벗어났을 무렵이었다.
“그나저나 소중하고 귀한 사람이라니, 앞으로는 그런 말을 함부로 뱉지 말아야 할 것이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백후의 집에서 사주단자가 곧 도착할 테니까. 그쪽에선 자네를 진지하게 사윗감으로 보는 모양이야.”
백후라면 성 영감이 평소에 부르던 김육의 자였다.
거사 날, 나를 매제라고 부르던 좌명의 말은 역시 그저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