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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54화 (54/298)

54화. 금발 태닝 양놈

내가 꺼낸 아이디어를 귀담아듣는 박연은 즐거워 보였다. 박연이 개발하고 있는 조총이 플린트락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었음을 깨닫고 나서 연달아 떠오른 지식이었다.

정말 실제로 만들어낼 수 있으려나.

총검을 다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나머지 한 가지, 조총의 정확도를 올려줄 발상은 조금 어려울 지도 몰랐다. 어려울 것 같은 아이디어 덕분에 박연이 심양에서 할 일을 하나 더 부탁하긴 했지만.

어쨌건 좋아하는 이야기를 꽃피운 것은 정말 오래간만이었는지, 박연의 얼굴은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도 구분이 갈 정도로 상기되어 있었다.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달이 밤하늘 한가운데에 떠올랐음에도 잠이 오지 않는다며 굳이 옛날이야기를 꺼낼 정도로 말이다.

“참, 이렇게 된 거 재미있는 얘기나 들어보시겠소?”

“무엇을 말이십니까?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이 땅에 온 지도 벌써 햇수로 열네 해째구만.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오.”

사실 이 금발벽안 아저씨가 사략선 선원이었다는 이야기 말고는 역사책에서 기억하고 있는 게 없었다. 덕분에 신경은 온 귀로 집중되고 있었다. 재밌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사실 처음 제주에 표류했을 때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오. 명국 상선을 나포해서 본부로 끌고 가던 중이었지. 그때 포로들이 일으킨 선상 반란으로 부하 둘과 함께 바다에 던져졌다오.”

그렇게 한참을 정신없이 떠내려온 곳이 제주였다나. 처음엔 목적지와 가까운 명 대륙으로 표류했다고 생각했으나, 자신을 발견한 사람이 입은 옷이 생판 본 적 없는 복식이라 어리둥절했다고 했다.

“그때 안사람은 참으로……. 아, 아닐세. 아무튼.”

“요안이 어머님을 그때 떠내려오자마자 만나셨군요. 하늘이 점지하신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크흠. 모른 척 좀 해주지 그랬소.”

“재밌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모른 척을 하겠습니까. 계속 말씀해주셔도 좋았을 텐데요.”

왠지 수염 덥수룩한 이 아저씨도 옆에 누워서 얼굴을 붉히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맺어진 이야기가 궁금했으나 박연은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리고 있었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절망할 수밖에 없었소. 겨우 명국말, 왜국말을 조금 아는 사람이 오고서야 손짓발짓을 동원해서 겨우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지. 고향 말로 코레라고 하던 나라였소.”

“코레? 아, 아직도 그곳에서는 이 땅을 고려라 부릅니까?”

“안 선생은 그 말에서 고려를 빨리도 연상해 내는구만? 뭐, 나도 나중에서야 그 말이 전조(前朝)의 국명이란 것을 알았지. 아무튼.”

그렇게 세 명이 제주 바닷가에서 관리와 군졸에게 포위된 채 조선 수군 소속의 배에서 밤을 지새웠다고 했다. 거기서 박연이 한 말이 걸작이었다.

“잡아먹힐 줄 알았다고요?”

“그래. 군사들이 횃불을 피우는 것을 보고 피터르 그놈이 코레 사람들이 우리를 구워 먹으려 한다고 난리를 쳤으니까.”

네덜란드에 있을 때 고려인들은 인육을 구워 먹는다는 뜬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단순히 저녁을 준비하고 빛을 밝히려 횃불을 준비한 군사들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옆에서 박연도 너털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때 내 생각이 요안이를 지금까지 괴롭혀온 그 망할 놈들 생각과 같았던 것 같소. 조선 사람들도 같은 사람일진대, 어찌 사람을 구워 먹겠소.”

“제가 괜히 죄송해집니다. 조선 사람들은 아직 그런 쪽으로는 꽉 막혀있으니까요.”

“아니오, 아니오. 선생이 죄송할 것이 어디 있소. 이제 나도 조선 사람인데.”

“누가 봐도 훌륭한 조선인이십니다. 초관 어른.”

“고맙소. 아무튼 머리색도, 얼굴색도, 눈동자색도 다르니 지레 겁을 먹고 같은 사람을 악귀 취급한 것은 그 당시의 나도 마찬가지였소.”

옆에 누운 박연, 아니 벨테브레이는 그 당시의 추억을 되새기는 듯했다.

아마 그 때의 업보를 자식이 대신 지는 것 같다는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 조선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다를 바가 없었지만 말이오. 그러나 안사람만은 그렇지 않았지.”

“그렇게 맺어지신 거군요. 그런데, 요운이와 요안이의 나이가 이제 열셋 아닙니까? 햇수로 십사 년이 됐다면….”

“크흠…… 크흠……! 그만 하시오.”

아아…… 속도위반을 하셨구만.

왜관까지 압송되던 길을 떠올리고 있는지, 박연의 목소리는 추억에 젖어 있었다. 마치 첫사랑을 떠올리는 십대 같은 목소리였다.

“본국에 두고 온 처자식이 있었으나, 집안끼리의 약속으로 맺어진 사이에 처와도 사이가 안 좋아서 배를 탄 것이었소. 그런데 이 땅에서 발목을 잡힐 줄은. 허허.”

“그래서 돌아가시지 못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상황이 좋지 않았고 조정에서도 초관 어른을 놓아주지 않았다 들었습니다.”

“처음엔 돌아가려 했었소. 왜관에 머물던 몇 년 동안 몇 번이고 돌려보내달라고 간청을 했었지. 나중엔 한양으로 가 상감마마 앞에서까지 청해봤으나 날개가 있어 날아가지 못할 바에는 기대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다오.”

아마 명과 청, 그리고 일본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았으니 인조 입장에서도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악담을 퍼부은 건 능양군다웠으나 그 이후에 버터를 내려주며 박연을 달랜 것은 임금다운 처신이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안사람 배가 불러오질 않겠소. 요운이와 요안이가 그 안에 있었지. 그 때 진정으로 깨달았다오. 겉은 달라도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 땅에 뿌리를 박기로 맹세했소.”

“실은 요안이 어머님을 버리고 돌아갈 수 없었던 것 아닙니까?”

“그 이유도 있었소. 안사람은 관비(官婢)의 신분이었으니. 그래서 호송당하는 하란타인들의 수발을 들러 제주에서 왜관, 그리고 한양까지 따라온 것이었소.”

어떻게 제주 사람이 배가 부른 것을 왜관에서 확인했나 했더니 그런 곡절이 있었다.

“아…… 그래서…….”

“사실 안사람 말고는 아무도 우리 수발을 들려 하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소. 그럴 만한 일이었지.”

“요안이 어머님도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처음 본 사이에 그렇게…….”

“허허. 처음 본 낯선 사람을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대해주는 것이 보통 사람이 할 일은 아니긴 하오. 그래서 그 사람이 더 마음에 들어왔던 것이기도 하고.”

말을 들어보니 일방적으로 감정이 오간 것은 결코 아닌 것 같았다. 조선 시대에 다른 인종 사이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말 그대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참으로 천생연분이십니다.”

“그래서 조선 사람이 되어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내 말에 상감마마께서 무엇을 원하냐 물으셨을 때 떠오르는 답은 단 하나였지. 안사람을 면천(免賤)시켜달라고 청했소. 껄껄 웃으시고 승낙하시더니 말단이긴 하나 벼슬과 집도 내려주셨고.”

뭐야. 완전 로맨티스트 그 자체잖아? 갑자기 옆에 누운 털북숭이가 다르게 보였다.

“안 보여도 그런 뜨악한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안다오. 뭐, 먼바다를 다니는 선원이라는 직업 자체가 위험했고 조선 땅에서 대접도 좋았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겠소. 단순한 결정은 아니었단 얘기요.”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아무 혈육도 없는 먼 땅에 어머님 한 분 보고 그런 결정을 내리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래서 요운이와 요안이에게 더 정이 가는 걸지도 모르겠다오. 안 선생은 어떻소.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시겠소?”

나라면? 일단 안 건드렸겠지, 이 양반아.

그래도 일이 그렇게 되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어쩌겠는가.

“그래도 제가 한 짓인데 책임을 지고 초관 어른처럼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럴 줄 알았소. 내가 사람을 아주 잘 봤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커험,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갑자기 꾸며낸 헛기침을 하는 박연이었다. 갑자기 말을 바꾸는 것을 보면 꿍꿍이는 확실히 있는 것 같은데.

“그래, 얼마 머물진 않았지만 그동안 한양 생활은 어떠셨소? 심양으로 떠나는 것이 아쉽지는 않으시오?”

“힘들었지만 즐거웠습니다. 제자들도 만났고, 벗도 여럿 생겼고…… 평생 부를 별호도 생겼군요. 그들이 붙여주었습니다.”

이제 성근이라고 불리는 것도 어느새 익숙해져 있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꾸만 나를 굴려대서 익숙해지기라도 한 걸까.

“벗과 별호라…… 부럽소. 요안이의 심정이 이해는 간다오. 이 땅에 와서 상감마마의 녹을 먹고 살고 있지만 안 선생처럼 나를 격 없이 대해주는 사람은 없었으니 말이오.”

조금은 시무룩해진 것 같은 박연의 목소리에는 부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조선말이 유창한 것도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럼 제가 지어드려도 실례가 안 되겠습니까?”

“정말이오? 그러면 고마운 일이 아니겠소. 양반치고 이 나이까지 별호 하나 없는 양반이 드물던데, 언제까지 이름을 불려야 하나 걱정이 많았다오.”

아무도 별호를 붙여주지 않았다니. 이름을 불리는 것이 가벼운 모욕으로 불리는 땅에서 그것 또한 하나의 차별이었을 것이다.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헌데, 그런 마음과 달리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좌명은 그렇게도 뚝딱 별호 하나를 지어내더니 한참을 지나도 뾰족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별호를 짓기가 어렵긴 하군요.”

“천천히 지어줘도 좋소. 보통 사람이 품은 신조나 외모를 보고 많이 붙인다던데, 나 같은 사람을 보고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 있겠소.”

이 금발의 그을린 아저씨를 보고 떠오르는 것? 금발, 태닝, 양… 아니다, 이건 아니다.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한 번 떠오른 생각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세 글자로 된 그 단어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금발…… 태닝…… 양놈…… 금발…… 태닝…… 양키…… 아, 미쳐버리겠네. 금태양?’

나도 모르게 생각으로만 남았어야 할 단어가 입 밖으로 빠져나간 것을 알아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옆에 누운 사람이 움찔했다. 저 세 글자 단어를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마음에 들기라도 한 것 같았다. 큰일이었다.

“금태양? 그게 무슨 뜻이오?”

“어…… 그게…… 초관 어른을 보고 떠오르는 것 하면 역시 황금빛 머리칼 아니겠습니까. 마치 태양과 같이 빛나니 금태양(金太陽)이라는 단어가 생각나서…….”

“좋소! 아주 마음에 드오! 두 번째 조선이름 같기도 해서 아주 좋구려!”

예?

이제 더는 수습할 수 없었다. 나이 마흔 먹고 처음 받은 별호에 흥분한 금발벽안 조선인은 아무도 막지 못할 것이었다. 진짜 큰일 났다. 앞으로 이 아저씨를 보고 어떻게 웃음을 참지.

먼 훗날, 업무 때문에 찾아간 훈련도감에서 병졸들이 박연을 향해 금태양 나리라 부르고 경례를 올려붙이는 것을 처음 본 그날, 나는 정말로 웃음을 참느라 기절할 뻔 했다.

***

꽃샘추위가 그렇게 날뛰던 날씨는 이제 완연한 봄이 되어 있었다. 추운 북녘으로 돌아갈 세자를 고향 땅이 위로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소지품이 든 짐을 몇 개나 짊어진 내 말이 꼬랑지를 흔들어 파리를 쫓았다.

이른 아침이었다. 사시(巳時)로 정해져 있는 출발 시각 이전에 마지막으로 수행원들과 인사를 나누려면 지금밖에 시간이 없었다. 때문에 창덕궁 앞은 마중 나온 가족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문득 한양에 처음 올라왔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성균관에서 소과를 치르고 나왔을 때, 아무도 나를 마중 나올 사람이 없어 서러웠던 적이 있었다.

엿을 들고 나타난 김 갑사가 눈물 날 정도로 반가웠을 지경이었지.

그러나, 이젠 혼자가 아니었다.

내게 작별 인사를 하려 이른 시각부터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진짜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이라 불러도 상관없을 사람과, 평생을 두고 볼 벗들,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

코가 시큰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들과 당분간 헤어져야 하는 것도 바꾸지 못하는 현실이었다.

눈가가 찡해졌지만 그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눈에 담고 싶어 눈꺼풀을 내릴 수 없었다. 아쉬워하는 것은 저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까. 그들의 아쉬워하는 표정은 아마 내 얼굴에도 내려앉아 있을 것이다.

이들의 모습을 보니 심양에 가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 뿌리는 이제 한양에 단단히 박혀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렇게 입술을 열지 못하고 감정이 담긴 시선만을 교환하고 있던 것도 잠시, 한 사람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 작가의 말

1. 박연은 나~중에 만나게 되는 하멜 일행에게 “처음에 일본 땅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하소연한 일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러면서 박연은 “그 밖의 다른 점에서는 대접이 훌륭하며 필요한 모든 물품을 제공받는다”고 전하기도 하죠. 받는 대우가 괜찮았음은 확실합니다. 조선 조정을 대표해서 파견된 박연이 하멜 일행을 설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박연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명실상부한 조선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벨테브레이가 조선 표착 후 26년이 지났지만 모국어를 너무 잊어서 처음엔 의사소통에 매우 어려움이 많았다. 매우 놀랐다.”는 기록 역시 푸른 눈의 조선인이 된 박연의 일면을 짐작케 합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이 외국인이면 외국어는 상당히 빠르게 늘게 마련입니다.

2. 박연이 이야기한 식인 하는 고려인 이야기는 효종의 사위인 정재륜이 쓴 <공사견문록>에 실제로 기록되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박연은 본국에 있을 때 ‘고려인들은 인육을 구워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주도에 표류했을 때, 조선 군사들이 날이 어두워지자 횃불을 준비했다. 배안에 있던 (네덜란드)사람들이 모두 이 불을 보고 하늘이 사무치도록 통곡했다. ‘저 횃불로 자신들을 구워 먹으려고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조선인들 역시 처음 접하는 네덜란드 인들을 귀신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실학자 이덕무가 나가사키를 드나드는 하란타인들을 보고 남긴 기록을 보면, 발이 한 자 두 치(360mm)가 넘고 개처럼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눈다는 서술까지 있습니다.

4. 양키는 본래 뉴암스테르담, 지금의 뉴욕 근방에 거주하던 네덜란드 식민지 이민자들을 영국인들이 비하하는 말이었습니다. 안 선생의 뇌에서 양키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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