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심양관의 말단 신료
「신사(辰司) 팔월 십오일 정사(丁巳) 맑음.」
가물거리는 호롱불 아래, 한문 문장들이 내 양모필(羊毛筆) 아래에 맺혀갔다. 정성스럽게 한 글자씩 적어 내려가는 작업에도 이제는 한껏 익숙해져 있었다.
심양관 예방(禮房)에 딸린 제일 작은 방, 이제 일 년 넘게 살았던 이 장소도 처음과 달리 익숙하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니…….
시간으로 따지면 이제 조선 땅보다 심양에 머문 시간이 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만 감으면 한양의 모습이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따지고 보면 나는 정말 조선 사람도 아닌데.
“냐아아.”
“뭐야. 들어올 때는 아는 척도 안 하더니, 일하고 있으니 방해하는 거냐?”
어느새 소리 없이 다가온 털 뭉치 하나가 내 소맷자락에 뺨을 비벼대고 있었다. 평소처럼 턱 아래를 가볍게 긁어주자 고로롱거리는 녀석은 오늘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산군, 조금 있다 놀아줄 테니 지금은 혼자 놀거라.”
“냥. 냥.”
얼마 전 내 방에 홀연히 나타났던 녀석이었다. 며칠을 굶주렸는지 뱃가죽이 홀쭉하게 올라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 몇 번 먹을 것을 챙겨주었더니 그대로 눌러앉아 버렸었지.
녀석은 털을 세우고 등을 활처럼 한번 구부려 기지개를 켜더니, 내 양반다리 사이로 쏙 들어오고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고양이는 영물이라더니 말귀라도 알아듣는 걸까. 가끔 산군의 황금빛 털을 쓰다듬으며 눈을 맞추다 보면 녀석의 눈매를 닮은 요안이가 떠오르고는 했다.
요안이 녀석은 얼마나 자랐으려나. 글솜씨는 늘었던데. 돌아오는 길에 청나라 과자를 사다 달라는 편지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참.”
내일부터는 먼 길을 떠나게 될 터였다. 지금 일을 황급히 끝마치지 않으면 내일 일에 지장이 오겠지. 종이 위에 오늘 있었던 일을 적어 내려가는 손놀림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진시(辰時)에 칸이 서행(西行)하는데, 동문을 통해 성황사로 가서 절하며 빌고 떠났다. 세자와 대군이 성 서쪽 10리 밖에서 전송하였다…….」
오늘따라 산군 녀석이 살갑게 반기는 것은 당분간 못 볼 것을 미리 알아서일까. 세자가 심양관으로 돌아오고 문안을 받았다는 문장을 끝으로 일지를 마무리하는데, 책상에 기대어놓은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침이 꿀꺽 넘어갔다.
‘아니면 그 녀석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지.’
창문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는 조총의 총구가 반짝 빛났다. 얼마 안 있으면 이 총구가 사람을 향해서 불을 뿜게 될지도 모른다. 붓을 내려놓고 산군 녀석을 어루만지던 손길도 딱딱하게 굳어갔다.
“야옹!”
“앗, 이 녀석!”
만져주는 손길이 달라진 것을 느꼈는지 산군 녀석이 품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그 바람에 펼쳐서 먹물을 말리던 페이지가 한참 앞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먹물이 번지지 않았는지 허둥지둥 살펴보던 내 눈에 마침 넘어간 페이지가 들어왔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 부분에서부터 필체가 달라져 있었다.
심양에 들어온 첫날, 정식으로 인계받은 기록이었다. 조신(朝臣) 중에 막내였으니 제일 귀찮은 일을 몰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경진(庚辰) 오월 초사일 갑신(甲申) 맑음.
…….
오목도 장군의 연회에 소집되었던 시강원 자의 안한수가 그 자리에서 예친왕과 접촉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일지를 처음 작성한 날부터 내 이야기를 적게 되다니.
그러나 반드시 적어야 할 내용이었다.
내 운명과 역사가 크게 비틀리기 시작한 것은 이날부터였기 때문이다.
***
심양에 이르는 한 달이나 되는 시간 동안 같이 고생했던 덕분에, 세자와 나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줄어들어 있었다. 그 사이 내 청국어 실력을 알아본 세자는 나를 외교를 담당하는 예방(禮房)에 배치했다. 달리 청국어를 배우려는 재신이 없었던 탓에 정해진 수순이기도 했다.
물론 세자를 가르치는 시강원의 임무도 겸직하는 상태였다. 이국에 볼모로 붙잡혀온 세자를 따르는 신하는 스무 명도 되지 않은 탓에 어디에서나 일손이 부족하다고 했다.
그날 서연(書筵) 자리가 끝나갈 무렵. 세자는 나와 단둘만 남더니, 청국어를 배우겠다며 폭탄선언을 날렸다. 지금까지는 조정의 눈치가 보여 차마 배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했다.
“아바마마께 치욕을 준 나라의 말을 배운다는 사실이 조정으로 흘러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그래서 너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저로 하여금 은밀히 가르치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단어카드를 써서 공부하는 모습이라도 어디선가 본 모양이었다. 내게 이런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것은 나에 대한 세자의 신뢰가 꽤 쌓였다는 뜻이겠지.
그러면서 아랫사람들이 먼저 배우고 능숙해지면 청의 언어를 배우겠노라고 홍타이지와 약속했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세자였다. 본심은 그게 아닌 것 같았지만.
이 양반이 새로운 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있던 사건 때문에라도 청국어를 배우려는 다짐을 새로 가진 듯했다.
세자의 귀환을 축하하는 연회 자리에서 용골대란 놈이 대놓고 뇌물을 요구했었다.
명분은 자신이 잡아놓은 조선인을 속환(贖還)해 급한 집안일에 쓸 재물을 융통하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세자의 말을 들어보면 그렇게 재물을 뜯어간 것이 한두 번이 아닌 듯했다.
“이번에 받아온 세폐나 심양관으로 들어오는 물건들은 전부 백성들의 피와 땀 아닙니까. 그것을 청장(淸將) 한 놈의 입에 털어 넣을 수는 없습니다.”
“나도 안다. 그러나 그놈 손에 잡혀 있는 것이 하필이면 조선 백성인 것이 문제다.”
세자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은 돈 문제가 아니었다. 청이 친구비랍시고 뜯어가는 재물 치고 세폐의 양이 과다하긴 했으나, 그 정도는 아직 견딜 만할 것이다.
“……그날 일이 아직도 마음에 걸리시는 겁니까.”
세자는 말이 없었다. 심양에 입성하던 날, 노예로 보이던 조선 백성 몇몇이 세자의 행차를 향해 절하다가 주인에게 매 맞고 끌려가는 모습을 그 자리에 있던 자들 전원이 보았다.
그러나 조정에서 따로 보내는 재물은 심양관 생활을 유지하기에도 벅찼기에 방법이 없었다. 심양으로 잡혀온 수십만의 백성들 중 대다수는 고향땅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눈에 핏발을 세우는 세자였다. 중간에 역관 놈이 장난질을 쳐 요구 금액까지 부풀려놨으니 속은 더 갑갑할 것이었다. 그래서 청국어를 배우려는 것이겠지.
결국 한양으로 재물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려야겠다며 세자가 내쉰 한숨에 방바닥이 꺼지는 듯했다. 세자의 한숨만큼 내 마음도 무거웠다.
이곳은 물 설고 땅 설은 남의 땅, 남의 나라.
약소한 나라 사람의 설움이었다. 조선 백성들이 끌려와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데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니.
“시 사이유운! 어러 우추리 억셤뵤?”
그렇게 무거운 마음을 안은 채 세자의 처소를 물러나온 내 앞을 막은 자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다짜고짜 요즘 바쁘냐는 인사를 건넨 그의 머리에 청의 관료를 상징하는 검은 역사다리꼴 모자가 얹혀 있었다.
청나라 장수 오목도였다. 세자가 한양으로 귀환할 때, 동행했던 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임금을 만주어로 씹었던 일 때문에 첫인상은 좋지 않았으나, 한 달 동안 그를 겪고 나서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던 터였다. 세자를 대하는 태도도 극진했고, 무엇보다 이상할 정도로 내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성능 확실하구만. 너는 뭐 하는 놈이냐?’
오목도와 처음 대화를 튼 날은 세자의 행차가 압록강을 넘어 만주 땅에 진입한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 산비탈에서 내려온 노루 한 무리가 행차 앞을 가로질러, 덩달아 나도 투창기를 꺼내들고 사냥에 나섰던 일이 있었다.
운 좋게 첫 방에 사냥에 성공해, 노루 배때지에 깊숙이 박혀있던 투창을 뽑아내고 있는데 바람처럼 나타난 오목도가 내게 한 말이었다.
갑자기 뭐 하는 놈이냐니? 영문을 알 수 없어 시선만 맞춘 채 투창에 묻은 피를 떨어내기만 했다.
‘알아듣지 못하는 건가. 역관!’
‘부를 필요 없습니다. 청국어는 조금 하니까.’
‘어쭈, 생긴 건 고려놈 신사(紳士) 같아 보이는데 우리말을 한다?’
‘고려놈 신사가 아니라 조선인 선비입니다. 부른 이유가 뭡니까?’
말버릇이 없다며 길길이 날뛴 오목도였으나 기분이 상한 것보다 내게 가진 호기심이 더 컸던 모양이었다. 하긴, 갓 쓰고 도포 입은 조선인이 이상한 도구로 투창을 던지는데 만주어까지 한다? 신기하게 보일 수밖에.
그날 제가 잡은 짐승과 내 사냥감을 바꿔가고는 계속해서 친밀하게 굴던 오목도였다. 사냥꾼들 사이에서는 사냥감을 나눠먹는 것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하던가?
“오목도 장군 아닙니까? 오늘 심양관에는 어쩐 일입니까? 조선에서 돌아와 휴가를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네가 필요하다. 오늘 저녁 우리 집으로 와라.”
“예?”
갑자기 날아온 어처구니없는 말에 눈만 끔벅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 인간은 늘 이랬다. 용건이 있으면 툭 던지는 스타일.
그것을 본 오목도는 내가 만주어를 잘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눈가를 찌푸리더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초대라뇨?”
“말은 전했다. 심양관 노비에게 집 위치는 일러둘 테니 제 시간에 오도록.”
고작 볼모의 따까리에 불과한 내가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날 업무를 마치자마자 최대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길을 나서야 했다. 오목도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는 말을 전해들은 세자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크게 해가 될 것은 없을 것이라며 어깨를 다독거려 준 참이었다.
심양관은 성벽에 가까운 외곽에 위치해 있어, 오목도가 거주하는 중심가까지 가려면 꽤 오랜 시간을 걸어야 했다. 오목도의 집까지 가는 길에 눈에 들어온 심양 거리는 꽤나 낯설었다.
북과 종이 매달린 붉은 색 문을 통과하니 그제서야 으리으리한 집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북촌처럼 청의 고관대작들이 사는 구역이 따로 있었다. 아마 관리들이나 팔기들이 이 구역에 거주하는 듯했다.
조선인의 낯선 옷차림인 탓에 문 앞에서 조금 기다려야 했으나,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추위를 막기 위해 ㅁ자로 세워진 집의 형태 때문인지 단단한 적의 성채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하인의 안내를 받아 긴 복도를 걸어 연회실임이 분명한 방으로 안내받았다. 이미 북방의 독주에서 나는 알콜 냄새와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닫혀있는 쌍문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방 안의 시선들이 나를 향해 꽂혔다. 내게 눈빛을 쏘는 자들의 덩치가 하나같이 크고 생김새는 억센 것을 보니 전부 무장인 듯했다. 여기서 오목도의 무사귀환을 기념하는 팔기군 모임이라도 하는 건가.
가볍게 예를 갖추고 정면의 상석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곳에 앉아있는 자는 생각했던 집주인이 아니었다.
“더 정중히 예를 갖춰라. 호쇼이 메르겐 친왕 앞이다!”
호쇼이 친왕이 뭔데? 날아드는 만주어 중에 몇 단어가 해석이 되지 않아 기억을 뒤지고 있는데, 다시 한 번 호령이 날아왔다. 그제서야 상석 오른쪽에 오목도가 앉아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건방진 고려놈! 칸의 아우께 합당한 예를 갖추지 못할까! 모자를 벗고 머리를 조아려라!”
황급히 갓을 벗어 가슴에 대고 머리를 숙였다. 미리 배워놓았던 만주식 예법이었다.
갓이 벗겨져 머리가 조금 식었기 때문일까, 생각이 그제서야 돌아가기 시작했다. 상석에 앉아 있는 자는 어제 연회 자리에 잠깐 들렀던 그 높으신 분이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조선국 세자시강원 자의 안한수라고 합니다. 귀하신 분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일 따름입니다.”
“조선이라니! 한조(漢朝, 명나라)에서 내린 이름을 감히 입에 담는 것인가!”
우락부락한 장수 하나가 내게 삿대질을 해댔다. 아까 나를 고려놈이라고 부른 자였다. 이 땅에서는 조선이라는 말도 쓰지 못하는 것인가.
“그쯤 해 둬라. 아직 젊은 자다. 정신이 없는 모양이지. 너무 몰아치지 마라.”
위엄 있는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세자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남자가 주위를 가라앉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깨에서 금실이 빛나는 검은색 용포가 그의 단단해 보이는 몸을 감싸고 있었다. 풍겨 나오는 압도적인 분위기에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